캐릭터 로그

Chapter 1.25. 예쁜 꽃을 피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예쁜 말? 사랑? 충분한 물과 양분?

시노페의 온실: 하윤 사이드챕터 로그

⚠️ 수중, 유혈, 익사에 관한 내용 및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호흡을 멈추자마자 추위와 먹먹함이 닥쳐왔다. 주위를 가득 채우던 소란은 대부분 물에 먹혀 가라앉고, 수조 밖에 있던 모든 것은 일렁이는 물결에 덧씌워 가려졌다. 검은 손은 윤을 수조의 밑바닥까지 밀어 넣곤 그의 발을 결박한 사슬을 수조의 바닥에 고정시킨 뒤 멀어져갔다. 검은 손이 수조의 덮개까지 완전히 덮어버리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소리마저도 울림을 잃고 숨을 죽였다.

 외부와 단절된 고요한 공간에 들어서자 아까 들었던 염소 선생님의 말이 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선생님의 말은 잔혹하며 강압적인 구석이 있었고, 그에 자신은 두려움을 표하며 반발했다. 그러나 윤은 곧 제가 선생님의 말에 이미 반쯤 넘어갔음을 인정했다.

 3년 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세피라를 획득하게 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겁을 먹어 무리한 시도를 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맞았다. 한 번 큰 실패를 겪은 이후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더 나아가지 못했다. 고통 그 자체보다는 신체가 훼손되어 세피라 획득이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무서운 일을 겪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이전 장소의 안전장치가 불안하다는 핑계로 위험한 것은 의도적으로 멀리 했다. 이것이 제 발목을 잡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어쩌면 염소 선생님의 이 보충 수업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고, 지금껏 상급 온실의 위치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해왔던 자신이 이 공간의 이물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머릿속에 담았다.

 온 몸을 쥐어짤 듯 다가오는 수압에 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학습하지 않았고 대비하지 않았던 압력이 그를 짓눌러대어 가지고 있던 숨결마저도 이 수조에 빼앗길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공포가 성큼 다가와 목을 쥐었다. 위기 상황을 인식한 머리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 생각의 끈을 펼쳐내었다. 살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했다.

'일단 이건 마술이야. 내가 구상한 것도 아니고, 내가 연습한 것도 아니지만. 마술이라 부를 수 없는, 살해에 가까운 폭력이나 다름없지만 염소 선생님은 이것을 마술이라고 했어.'

 마술은 마법이 아니다. 자연 현상을 초월하는 미지의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트릭이다. 염소 선생님이 이것을 수중 탈출 마술이라 칭했다. 선생님의 말이 맞다면, 적어도 이것이 탈출 마술이라면 어딘가에는 탈출할 구석을 만들어두었다는 뜻이었다. 비록 그것을 시행할 하윤이 배치하지 않고, 그 실마리를 어디에 두었을지 모른다고 해도. 이건 마술이 아니라 그냥 문제 풀이잖아, 라는 반발심리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윤은 그것을 억지로 밟아 없앴다. 그런 생각 따위에 스스로를 맡길 여유는 없었다. 살아남는 것, 이 곳에서 탈출하는 것만을 생각하기에도 바빴다.

 뒤로 묶인 손목을 비틀고 움직여 저를 결박한 사슬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시야가 닿지 않아 손목에 묶인 것을 풀어내는 것은 오롯이 손 끝 감각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공간 내에 든 손목을 무리해서 비튼 탓에 사슬이 아프도록 뼈와 살을 죄어왔다. 이 다음에 확인하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겠다 싶었지만 슬슬 막혀오는 숨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사슬이 바르작대는 소리가 귓가에 어렴풋이 새어 들어왔다. 몇 번 애쓰다 보니 간신히 새끼손가락 끝이 사슬에 닿았다. 새끼손가락 다음엔 약지가. 중지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손끝 감각을 극도로 살리는 것은 3년 간 줄곧 해오던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관절 하나하나가 아파오도록 손가락을 쭉 펴서 사슬을 훑다가 겨우 손목을 묶어 놓은 사슬의 이음매를 잡아냈다. 약지 끝에서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어렴풋이 만져졌다. 마침 소맷자락에서도 딱딱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배겨졌다. 손목을 비틀 때 조금 튀어나온 열쇠의 끝부분을 만져보자 아까 만져냈던 열쇠구멍의 크기와 대충 맞아떨어질 듯 했다. 다행히 정말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난이도가 극악한 수준은 아님에 윤은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소매에 든 열쇠를 꺼내, 열쇠를 쥐고 있지 않은 손가락으로 열쇠 구멍이 있던 부위의 사슬을 끄집어 붙든 뒤 열쇠를 밀어넣었다. 구멍과 열쇠가 맞아떨어지는 감각이 손 끝에 전해져왔고, 곧이어 손목을 아프게 묶고 있던 사슬이 힘을 잃고 떨어져나감을 느꼈다. 그간 묶여 있던 손목이 뻐근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윤은 손목을 한 번 돌려 풀어줄 여유도 없이 곧장 아래를 보았다. 손이 자유로워졌으니 발을 묶고 있는 나머지 사슬을 떨쳐낼 일만 남았다. 그것이 풀리면 사람의 몸은 원래 물에 뜨게 되어 있으니 올라가는 것은 일도 아닐 테고.

'다행이야, 이 정도면 할 만해.'

 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다시 한 번 입을 앙다물었다. 손목을 묶은 사슬을 풀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숨을 쉬지 못한 윤에게는 일 분 일 초가 다급했다. 슬슬 타들어갈 듯 죄어 오는 폐의 통증을 애써 억누른 채 무릎을 당겨 몸을 끄집어내렸다. 수심이 조금씩 낮아지는 만큼 올라오는 수압에 통증이 더욱 거세졌지만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먼저 오른쪽 발을 붙들곤 발목을 묶은 사슬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번에는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없었다. 곧이어 만져본 왼쪽 발목에도, 심지어는 사슬을 바닥에 고정해둔 이음쇠에도 열쇠 구멍은 없었다. 발목을 묶은 사슬은 열쇠로 풀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자마자 윤은 미련없이 열쇠를 버렸다.

'이건 조작해서 푸는 거였는데, 어떻게 풀더라.....'

 생각이 느리게 기어갔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손 끝의 감각이 멀어져갔다. 이대로 가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도 점점 제 효력을 다해갔다. 점점 몽롱해지는 감각 속에 얼핏, 손 끝에 거칠한 감촉이 스쳤다. 실마리가 잡히자 두서없이 사슬을 훑던 손에 겨우 힘이 들어갔다.

'맞아, 아마 이 부분을 비틀어 조작하면.....'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사슬의 조작 위치를 찾아 손가락을 움직이던 윤의 귓가에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 길진 않았으나 체감 상 거의 몇 시간은 족히 지난 듯이 길었던 시간 속. 그 동안 고요히 움직였던 윤에게는 벼락이 꽂히는 것 마냥 크게만 느껴졌다.

"생각보다 진행이 부진하네요, 윤. 그러다가 정말로 죽을 지도 몰라요."

 익숙한 목소리에 점점 감겨 오던 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를 이 안에 밀어 넣은 선생님의 목소리인데 어떻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호흡이 바닥나다 못해 목숨을 갉아먹어오는 동안 깜빡 잊었던 공포가 다시 올라와 천천히 죽어 가던 감각에 기적적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던 손아귀에 다시 힘이 실렸다.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발을 묶고 있던 사슬이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윤은 잠시 감각이 날카로워진 것에도, 한 쪽 발이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는 것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자극을 높여볼까요. 탈출 마술에는 어느 정도의 스릴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관객에게도, 마술사에게도."

 '여기서 뭘 더?', 라는 의문을 토할 새도 없이. 윤은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계음과 함께 수조의 바닥 일부가 열리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온 것과 마주하곤 표정을 무섭게 일그러트린 채, 지금까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다급히 움직였다. 물고기의 모양새를 한 기계 모형 두어 개가 열린 바닥을 통해 제게로 달려드는 것을 본 탓이었다.

 그저 고요하고 푸르렀던 수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급히 사슬을 당겨대는 소리가 두어 번 울리다 멎고, 푸르스름한 빛을 띠던 수조에 붉은 색이 스며들어갔다. 잔잔하던 수면은 거칠게 일렁였으며, 수조 표면에 흰 손바닥이 몇 차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요함 속에 비명보다 더한 움직임이 여과 없이 비추어졌다. 조용히 숨결을 빼앗던 공간은 이제 소리만 없을 뿐, 그 무엇보다도 격렬하며 자극적인 방법으로 안에 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곳으로 돌변했다.

 지금까지 어렵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던 것이 허무하리만치, 결국 윤은 물속에서 입을 열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은 붉은 기를 머금은 기포가 되어 수면을 허무하게 두들기며 덮개와 물 사이의 공간을 넓혔다. 코와 입을 통해 비릿한 물이 수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자위가 잠시 붉게 달아올랐지만 찬 물에 식고 녹아 결국 아무 것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잃을 수가 없었기에 다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왼쪽 발을 묶은 사슬을 더듬었다. 고통과 산소 부족으로 덜덜 떨리는 손은 아까처럼 조작 위치를 바로 잡아내지 못한 채 헛손질을 반복했다. 정신을 놓는다면, 이 손을 멈춘다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그 다음 호흡은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이것이 윤이 붙들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통증의 근원이 어디인지조차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윤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한 번, 다시 한 번. 고통 속에서도 끝내 미련처럼 놓지 않던 발목에서 드디어 기다리던 감각이 느껴졌다. 거의 다 됐어, 속으로 읊조린 윤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마지막 사슬을 벗겨냈다. 저를 쥐고 있던 마지막 손아귀가 드디어 작별을 고하며 느릿이 풀려나갔다. 통증 탓인지, 정말로 끝인 마냥 멀어져가는 의식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물속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제 다리를 물어뜯는 기계 물고기 탓인지. 아까와 같은 달그락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슬이 풀리자 몸은 자연스레 떠올랐다. 다리의 통증은 여전했으나 그것을 떨쳐낼 힘도, 시간도 없었다. 다행히 기계 물고기는 그저 살점을 물어뜯으려 할 뿐,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느릿하게 떠올라 수조 끝에 도달한 윤은 덮개와 수면 사이에 아주 조금 차 있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미 몸 안에 차오른 물의 양이 상당한데다, 입 한 번 벌릴 틈조차 없어 입 안에 들어온 것은 물이 대다수였으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번. 덮개와 수조 사이의 공간에 손톱을 박아 넣고, 그것을 지지대 삼아 덮개를 밀어젖힌 하윤은 드디어 찬 공기를 맞이했다. 물 한 방울 존재하지 않아 지독하게 달게만 느껴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곤, 물과 함께 내뱉은 뒤 바깥으로 제 몸을 굴리듯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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