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경계선에 피어난 봄꽃은 지난 겨울, 어떤 꿈을 꾸었을까
시노페의 온실: 하윤 사이드챕터 로그
윤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흩어져 극장의 어둠과 적막 속에 녹아들었다.
잠시간의 암전. 이쪽도, 저쪽도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시간 동안 윤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마치 살을 에는 차가움 속에 들어가던 그 날처럼.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 들어갈 곳은 따뜻하고 화려한 빛 아래였다.
공포가 아닌 설렘으로 손끝이 저릿했다. 두려움과는 격을 달리 하는 적당한 긴장감이 피부를 얇게 감쌌다가 녹아들었다. 그것들이 주는 감각을 즐거이 만끽하며 기분 좋게 두근대는 심장을 다독이곤 터질 듯이 가두어 둔 숨의 자락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무대를 가리던 휘장이 걷히고, 거두어졌던 빛이 잔잔히 무대 위로 쏟아져 내려오며 영역을 넓혀 갔다. 공연을 시작하기 직전, 아주 잠깐 동안 가질 수 있는 여유 시간 동안 윤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의 시선을 가볍게 훑었다. 누군가는 설렘으로, 누군가는 즐거움으로, 누군가는 기대로. 그 시선이 바라는 만족을 채우고 싶은 열망이 온 몸을 구석구석 데웠고, 그것에 답하기 위해 윤은 손을 들어올렸다.
가벼운 음색의 경쾌한 음악이 깔리고 윤의 손끝이 움직였다. 허공을 향함에도 마치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마냥 망설임 없이, 화려한 선을 그리며 움직이던 손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무대 위의 불빛을 받으며 가볍게 핑거 스냅을 튕겼다. 그 어느 소리에도, 공간에도 묻히지 않은 소리와 함께.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서 다른 손이 그가 늘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꺼내듦과 동시에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지팡이의 끝이 바닥을 한 번 내려찍자 그가 서 있던 단단한 바닥이 순식간에 푸른 풀밭이 되었다. 그 위에 태연자약한 모양새로 선 윤은 열두 살 무렵 자주 지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제 키의 절반만한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붙든 채 가로로 들어 올려 왼손으로 한 차례 가벼이 훑었다. 검고 매끈한 표면을 한 차례 훑어 보인 하얀 손가락이 끝자락에서 떨어져나가자 반대쪽을 쥐고 있던 손이 커다란 선을 그리며 마법을 부리는 작은 마법사처럼 지팡이를 휘둘러보였다. 휘둘린 지팡이의 끝에서는 잘게 잘린 색종이가 흩날림과 함께 싱그러운 꽃다발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뽑아내는 윤의 모습에 익숙함을 느낄 새도 없이 꽃다발은 불길에 휩싸였고, 불타오르는 꽃에 놀람을 표하려 들 무렵 불꽃은 찬란한 폭죽으로 바뀌며 천장을 향했다가 반짝이는 빛이 되어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나에 시선을 계속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윤의 행동은 어느 한 군데에 멈추어 있는 법이 없었다. 꽃과 폭죽, 사탕과 비둘기. 어렸을 적 마술 하면 곧바로 떠올릴 만한 것들이 아낌없이 쏟아지며 저도 모르게 천진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게 했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헛디딤도 없이. 마치 보이지 않는 서랍을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젖히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꺼내고, 보이고, 뻔한 소품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펼쳐내어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것에 시선을 오래 둘 틈을 주지 않은 채 또다시 새로운 것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트럼프 카드. 이제는 눈을 감고도 만질 수 있는 카드를 꺼내들며 윤은 다시 한 번 관중석을 훑었다. 만족하고 있는가? 즐거워하고 있는가? 손으로는 준비해왔던 것을 펼치고, 얼굴로는 상황에 맞는 표정을 띠면서도 윤은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듯 계속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예상하고 바라던 바와 비슷했다. 이것은 이쯤이면 되었다. 윤은 손에 든 카드를 뒤집었다.
여러 번의 손짓 끝에 트럼프 카드는 꽃이 되었다가, 동화 속 한 장면을 그려 넣은 카드가 되었다가, 결국은 모자를 쓴 토끼 인형이 되었다. 윤은 까만 모자를 쓴 토끼 인형을 관중석 쪽으로 던져 올렸다. 토끼 인형이 관중석에 도달할 무렵,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윤의 앞에 갑작스레 불에 휩싸인 칼이 내리꽂혔다. 앞에, 양 옆에, 뒤에. 그를 내리꽂을 듯 위협적인 자태로, 칼이 요란히 내리꽂혔지만 윤은 담담히 앞을 바라보았다.
푸른 풀밭을 연상하던 무대 위가 불길에 휩싸여갔다. 누군가는 짧게 걱정스런 비명을 질렀던가. 서슬 퍼렇게 떨어지는 붉은 빗살 사이에서 윤은 괜찮다는 듯 관중석을 향해 태연히 웃어보이곤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제 두 손목에 채웠다. 수갑을 풀 열쇠는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 마지막으로 저를 향해 떨어져 내리꽂히는 상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무대 위에서 더 이상 번지지 않은 채 타오르는 불과 후끈 치솟는 열기. 겨우 두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출입구가 없는 작은 상자는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다. 투명하지 않은 나무 상자는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의 안위도, 생존도 비추어주지 않았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그저 불타오를 뿐. 어느새 벽에 켜진 1분 30초 정도 남은 카운트다운 숫자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 수를 줄여 갔다.
90초, 60초, 40초. 숫자는 줄어들어갔지만 상자는 아무 변화 없이 천천히 불에 잠식될 뿐이었다.
40초, 35초, 30초. 숫자가 점차 촉박하게 줄어들고, 멈춘 줄 알았던 칼날이 다시 하나둘씩 무대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푹, 푹, 하며 바닥이 패이며 칼날이 박혀 들어가는 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현실감이 넘쳤다.
30초, 25초, 20초. 카운트다운은 점점 붉은 색으로 변해가며 위급 상황임을 알리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점차 상자가 본격적으로 불길에 휘감겨갔다. 무대에 무작위로 꽂히던 칼날이 점차 한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마술사가 들어 있는 상자 쪽이었다.
20초, 15초, 10초. 카운트다운이 완연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칼날 중 하나가 상자 근처를 스쳤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소리와 함께 상자의 표면이 길게 긁혀나갔다. 그 다음 칼날은 상자의 모서리에 박히며 요란한 소음을 토해내었다.
10초, 9초, 8초, 7초. 상자 위로 칼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개는 모서리에, 몇 개는 상자에. 과연 그 안에 들어 있을 사람은 안전할까,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그 사이로 틈새가 약간 벌어지며,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 그림자가 언뜻 비추였다.
7초, 6초, 5초, 4초. 칼날이 상자 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불타던 상자는 날붙이를 만나 점점 부서져갔다. 저 안은 더 이상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4초, 3초, 2초, 1초. 칼날은 무자비하게 상자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가 살던 나라의 여름철에 내린다는 폭우처럼. 뜨거움을 품은 날붙이는 상자를 부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잔혹하게 짓이겨갔다. 상자는 더 이상 붉은 비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졌고, 남은 잔해마저 까맣게 타올랐다.
0초. 붉게 변했던 카운트다운 숫자가 다시 검게 변했다. 모든 것을 연소시키고 남은 검고 흰 재 마냥. 하얗게 굳어 가는 숫자의 색상과 함께 천장에 달려 있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스산하고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숫자와 함께 불길이 자취를 감추어갔다. 불을 가라앉히느라 피어오른 자욱한 흰 연기가 무대 위를 뒤덮어갔다.
이윽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불길이 스러지는 소리가 멎고, 극장 안은 침묵에 잠겼다. 어느 샌가 무대를 비추던 조명마저도 대부분 사라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뿌연 조명만이 남아 희미하게 주위를 밝혔지만 무대 위를 뒤덮은 안개는 쉽사리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습하고 텁텁한 안개 사이로 점차 소란이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공연은 실패한 것인지, 마술사의 안위는 어떻게 되었는지. 불안감이 점점 전염되며 호흡을, 움직임을, 심장을 잠식시켜갔다.
작은 움직임이 큰 움직임으로, 속삭임이 목소리로, 불안감을 품었던 표정이 다급함으로 변해갈 무렵. 무대 위에 다시 환히 불이 들어왔다. 갑작스레 광원이 나타난 탓에 부신 눈을 찌푸리고 있자니, 무대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눈앞을 가리던 안개를 모조리 지워냈다. 텁텁하고 습한 안개를 밀어내는 바람은 따뜻했고, 싱그러운 향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드러난 무대는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풀밭을 연상시키는 초록빛의 바닥이 깔려 있었다. 바닥을 꿰뚫고 있던 무수한 날붙이도, 무대를 모두 삼킬 듯이 넘실거리던 불꽃도, 관중석까지 후끈 치솟던 열기도. 그 무엇도 없이 온전한 모양새를 되찾은 채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직 치워지지 않은 부서진 상자의 잔해 옆에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은 윤이 서 있었다. 바닥에 지팡이를 짚고, 그것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다른 손에는 그의 손목을 묶고 있던 수갑을 불량한 자세로 빙빙 돌리고 있던 그는 저를 바라보는 관중들을 힐끗 보곤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느새 극장 안에는 다시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관중과 눈이 마주친 윤은 지팡이에 기대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윤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상자의 잔해를 톡 건드리자 잔해는 흰 재가 되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자취를 감추는 흰 재 가루에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윤은 발을 내디뎠다. 한없이 가볍고 당장이라도 통통 튀어오를 것만 같은 걸음으로. 불량스레 돌리던 수갑은 어딘가로 날아가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 어딘가에서 꺼내 들었는지 모를 흰 모자를 쓴 검은 토끼 인형을 손에 쥐곤, 또다시 관중석을 향해 던져 올렸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인형을 잠시 눈에 담던 윤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곤 제 왼손 손목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시작할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간직한 제 손목을 확인한 그는 가벼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역시 이것으로도 봄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이것도 이쯤이면 되었다.
다시 텅 비게 된 왼손은 머리 위로 뻗어 올라갔다. 천장을 향해 곧게 뻗어나간 팔은 공연을 시작할 때처럼 환한 조명을 한 몸에 받았다. 잠시 빛을 만끽하듯 자유로이 펼쳐져 있던 손가락이 오므려지며 서로 만나고, 제 자리를 찾아가 가볍게 스냅을 튕겼다. 이번에는 날붙이가 아닌, 오색으로 물든 알록달록한 풍선이 천장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싱그러운 공기와 연한 초록빛의 바닥. 어느새 주변에 놓인 아기자기한 오브젝트와 포근하고도 경쾌한 배경 음악, 구름처럼 자리 잡은 파스텔 톤의 풍선들. 티끌 하나 묻지도, 어느 한 군데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 위를 걷는 복숭아 빛 머리칼의 마술사까지. 열두 살 무렵 머물렀던 동화를 닮은 마을 마냥 포근하고 따스하며, 가슴이 설레 오는 풍경이 단상 위에 그려져 갔다.
천장을 향해 곧게 뻗어 있던 손이 내려오면서 환한 공간을 훑었다. 윤의 유려한 손짓에 따라 알록달록한 색을 머금은 나비 몇 마리가 날아와 그의 손 주변을 돌곤 찬연한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나비 다음으로는 비눗방울이, 비눗방울 다음으로는 종이비행기가. 그에게 장난을 거는 듯, 놀이를 청하는 듯. 윤에게 다가와 그의 주위를 돌곤, 만족스럽다는 듯 빛줄기만을 남기곤 녹아내렸다. 종이비행기 중 하나를 잡아들고 펼쳐 그 안에 쓰인 글자를 읽던 윤은 그 아래에 답장 삼아 몇 자 적는 척을 하곤 다시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려 보냈다. 윤의 손을 떠난 종이비행기는 무대 위와 관중석을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윤의 앞으로 돌아와 그 이전의 것들이 그러했듯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 끝자락을 보며 웃음 짓던 윤은 눈을 감고 허공에 발을 디뎠다.
풀밭을 밟듯 사박이는 소리를 내던 발걸음 소리가 무언가 딱딱한 것을 밟아가는 소리로 바뀌었다. 타박, 타박. 구두 밑창은 단단한 바닥과 만나는 소리를 내며 뚜렷한 걸음 소리를 퍼트렸다. 윤은 제가 딛는 걸음 앞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인 양 떠다니는 풍선을 지나쳐가며 태연히 걸어 올라갔다. 그가 내딛은 걸음의 뒤로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 조각이 흩뿌려지며, 걸어온 길의 자취를 남겼다.
요정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가 눈을 감은 채 허공을 걸어가는 윤의 주변을 맴돌고 장난을 치며, 마치 무대 위만큼은 다른 세상인 양 현실 감각을 지워내었다. 윤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제게 다가오는 요정 안드로이드의 손을 정확히 잡아내어 빙글 돌며 춤을 추고, 동작을 함께 하고, 손장난을 치다가 작별하듯 손을 흔든 뒤 또 다른 요정을 맞이했다.
춤을 추듯, 외줄타기를 하듯. 잠시 허공을 노닐던 윤은 가장 높은 곳에 이른 뒤 눈을 떴다.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던 가장 큰 풍선. 무지갯빛을 띠고 있는 풍선 위에 선 채 제가 만들어낸 흔적을 놀랍다는 듯이 보던 윤은 또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서 있는 풍선을 한 번, 저 아래를 한 번 가리키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챈 친구들이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 히죽 웃어 보인 그는 곧바로 풍선 위에서 발을 한 번 굴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풍선이 터지며 오색 찬연한 꽃잎과 색종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커다란 풍선이 사라지자 윤은 받쳐주는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추락했다.
그가 남겼던 반짝이던 흔적은 그와 함께 일제히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푸르고 흰 빛으로 반짝이던 가루와 함께 추락하는 마술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싱그러운 초록빛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중력이 그를 땅으로 끌어당기고, 곧 뭉갤 것처럼 찍어 누르던 때. 마치 바람이 불어오듯,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빛을 머금은 풀이 한차례 흔들렸다. 그리고 그를 당장에라도 으깰 듯이 끌어 내리던 속도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그를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전히 바닥에 착지한 윤은 저보다 느린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푸르고 흰, 반짝이는 입자들을 둘러보았다. 한숨 돌릴 틈 없이 계속 움직인 탓에 잠시 차오른 숨을 보이지 않게 정돈하며, 풍경을 만들어낸 본인조차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을 모았다. 두 손바닥을 마주한 채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가볍게 맞부딪쳐 소리를 내었다.
박수 소리를 신호로 무대 위를 떠다니던 파스텔 톤의 풍선이 한 번에 폭죽 터지듯 터져나갔다. 이전에 가끔 보여주던, 꽃잎 모양 색종이를 일제히 태워내듯. 풍선 안에서 쏟아져 나온 파스텔 톤의 색종이와 솜뭉치 사이에서 어린아이 주먹 크기만 한 유리구슬을 닮은 동그란 것들이 하얀 낙하산을 탄 채 천천히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것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이 부스러지며 풀밭 위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그 사이에 무대 가운데까지 걸어간 윤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쳐 관중의 시선을 모았다. 그 소리에 제게로 모든 시선이 집중되자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대며 쉿, 하는 행동을 취했다. 관중석에서의 소리도, 무대에서 흘러나오던 음량도 점점 줄어들며 새벽녘에 낀 안개처럼 잔잔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조용한 공기가 극장 안을 감싸 안을 무렵. 지팡이가 땅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구슬이 녹아든 자리에 연녹색 싹이 고개를 들며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작고 여린 싹이 묘목으로, 묘목이 어린 나무로, 어린 나무가 작은 나무로, 작은 나무가 큰 나무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난 나무 사이에 홀로 선 마술사는 나무에 움트지 않은 잎의 색을 눈동자 안에 품은 채 포근히 웃음 지었다.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이 줄곧 보아온 웃음을 머금은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비어 있는 손을 그들을 향해 내밀었을 때.
잎 없이 앙상하던 나무의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가 봄을 맞아 새 단장을 하듯. 가느다랗고 황량한 가지에 희고 붉은 꽃이 일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불어오는 옅은 바람에 꽃향기가 실리며, 관중들 앞에 작은 봄을 선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무에서, 무대에서, 천장에서 꽃잎이 머리 위로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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