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어느 한적한 날 나는 화분을 돌보고 있었다. 책상 위를 기어다니는 음표들에 기가 차 케모마일 차를 들고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본대도 상관없다.

낙옆에 파묻혀 큰 소리로 깔깔 웃던 나를 안다면 아. 미친년이지 하고 거리를 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따금 내뱉는 숨으로 눈앞이 새하얘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들이 난간 위에 찍힌다. 굴뚝 그을림이 완전히 뒤덮은 옥상 끄트머리에는 언제부터인가 버려져 있던 고무오리가 간결하게 꽥꽥거린다.

나는 눈이 쌓인 철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얇은 시폰 잠옷 드레스에 눈이 녹아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발끝부터 느껴지는 한기에 이대로라면 얼음 동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라며 조소한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 앉았다.

골수를 뒤흔드는 바늘 천개의 싸늘함이 팔뚝을 붉게 달군다. 바로 앞의 지붕기는 이끼와 눈이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군중들이 각자 일터로 향한다. 저 멀리 거인의 파이프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팔다리가 밀랍 인형처럼 굳는다. 굴뚝에서 해가 그을음을 비집고 제 빛을 힘겹게 꺼낸다. 레몬색으로 물드는 눈과 지붕과 구름, 노르스름한 빛이 인형의 것처럼 뻣뻣한 금발에 가득 드리운다.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다. 캐모마일 차는 식었고 눈이 녹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간다. 손에 입김을 부며 순진한 눈으로 창문에 바짝 붙은 아이들. 손톱에 살얼음이 낀다. 이제 스스로의 의지로도 움직일 수 없다.

하얀 속눈썹이 태양을 향해 떨린다. 시폰 드레스가버석거린다. 아무도 발을 수 없던 굴뚝의 눈을 무참히 녹이고 없애버린다. 태양, 오직 태양만이 내게 사랑을 가르쳤다. 그에게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음표는 사랑을 노래했다. 창문에 달린 고드름이 햇빛을 받아 보라색, 노란색, 주황색으로 빛난다. [잘 지내?] 그가 물었다.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흐른다. 그녀는 눈 밟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태양을 닮아있다.

그는 손에 커피잔을 들고 있다. 단정한 손이 눈을 만지작거린다.

눈 결정이 최후의 반짝임을 내며 녹는다.맨발로 떨어진 눈을 밟는다. 나는 미동도 없이 있다.

그가 나의 컵을 집는다. 비릿한 냄새가 난다. 하얀 컵 조각을 타고 선홍빛 피가 흐른다. [잘 지내.] 그녀가 읊조린다. 피부에 붙은 살얼음이 움직임에 따라 부서진다. 시폰 드레스 조각이 철제 의자에 붙어 틑어진다.

발끝에 붙은 고드름 조각이 발에 박혀 미지근한 피를 흘려보낸다. 눈이 붉게 물든다. 일어선 그녀를 그가 안아들었다. [들어가자.] 나는 무언가 뻣뻣한 시체처럼 붉게 빛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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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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