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 샘플] 빗속의 일탈은 롤케이크의 맛

23년 4월 작업물

1차 논커플링 : R & H / 3000자

#소꿉친구 #변해버린_관계 #하지만_여전히_소중해

여동생이 사라진 이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등생이었던 H는 학교를 자주 빠지게 되었다. H가 학교를 빠진 핑계는 각양각색이었으나 그 변명들 속에 깔린 본심은 하나뿐이었다. 여동생이 사라진 데에서 오는 우울감과 H가 그 일에 대해 혼자서 느끼고 있는 죄책감. 모두가 H를 동정했고 H의 입장이 되어 그를 위로해주었으나 그 어떤 말도 H에게는 와닿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H를 오래도록 봐왔으니까. 비록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한 때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니까...

H가 오늘도 조퇴를 했다는 말에 분노해 학교를 뛰쳐나온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더 이상 H의 일에 관여할 생각 따위는 없었는데. 여동생이 실종된 사건 이후로 이전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를 붙잡고 화를 내고, 그를 향해 물건을 던지며, 내가 바라는 대로 H를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H를 찾아 이 비오는 거리를 헤매고 있는 건, 단순한 히스테릭의 일환이었다.


한 시간 동안 학교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H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우산은 쓰고 있었으나 하도 뛰어다니느라 땀과 비에 젖어 온몸이 온통 축축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찝찝한 기분을 선사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둘까, 찾아봤자 할 말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학교를 지나, 상가를 지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그러자 나무로 만들어진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 H와 자주 놀던 곳이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 놀이터는 오래전에 지어져 어딘가 허름한 분위기를 풍겼다. 색이 알록달록하지도 않고, 놀이기구도 다른 놀이터에 비하면 적었다. 그래서일까, 이 놀이터에서는 노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어릴 적에도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법을 몰랐던 나는, 사람이 없는 이 놀이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H가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우리는 자주 이 놀이터에서 놀곤 했었다. 보통은 내가 H를 끌고 다닐 뿐이었지만, H는 언제나 나에게 어울려주었다. 얌전한 아이였던 내가 혼자서는 시도하기 어려울 법한 놀이를 생각해내면,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나를 따라와 주는 H가 좋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네. 과거에 잠겨있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자, 놀이터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2층짜리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요새라고 해도 고등학생의 눈높이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목제 건물일 뿐이지만. 어린 시절의 H와 나에게는 거대한 비밀기지와도 다름없었다. 여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잔뜩 쌓아두었다가 잃어버려서 둘 다 하루 종일 울었던 일도 있었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요즘에도 이런 곳에 만화책을 쌓아두는 애들, 있으려나? 자그마한 궁금증이 생겨, 요새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설마. 신고 있던 구두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쓰고 있던 우산은 어느새 저 멀리 던져버린 채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몸을 꾸깃꾸깃하게 접은 채 혼자서 울고 있는 H가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R?"

나의 목소리에 H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둑한 공간 속에서도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금 H를 향한 분노가 자라났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서, 하지만 말하는 순간 그를 향해 건넨 모든 말들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로 돌아오는 게 싫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H를 째릿하게 바라보자 H는 시선을 돌렸다. H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손을 뻗어 H를 붙잡았다.

"일단 내려와. 감기 걸리니까."

"..."

H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의 의견에 아무 말없이 따라주었다.


"...R. 이게 뭐야?"

"보면 몰라? 편의점 롤케이크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정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R은 편의점에서 사 온 롤케이크를 들이밀었다. 초코칩이 박힌 롤케이크는 작은 몸집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거 함부로 먹으면 어머니께 혼날텐데... 하지만 지금 당장은 R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우선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롤케이크를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 포크를 찾으니. 안에 들어있던 포크는 하나뿐이었다.

"...R. 혹시 포크 하나 더 안 받아왔어?"

"왜?"

"이거, 포크가 하나밖에 없어."

"...네가 다 먹으면 되겠네."

"...R가 사다 준 건데, 어떻게 그래!"

하나뿐인 포크로 롤케이크 한 조각을 푹 찍어 R에게 건넸다. R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매서운 눈빛에 내가 몸을 움찔거리자, R은 한숨을 쉬며 포크에 입을 대지 않은 채 롤케이크를 받아먹었다. R이 먹는 걸 확인한 뒤, 나도 롤케이크 하나를 입에 넣었다. 폭신한 빵과 부드러운 크림, 바삭한 초코칩이 한데 섞여 달콤한 행복을 선사했다. ...맛있다. 이런 값싼 롤케이크를 마지막으로 먹은 건 언제더라.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마지막으로 먹은 순간 역시 R이 함께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 내 일탈의 대부분은 R과 함께였으니까. 곁눈질로 R을 확인하자, R의 입이 멈춰있었다. 내가 다시 R에게 롤케이크 조각을 건네자 R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또다시 받아먹었다. 롤케이크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던 R가 한 마디 내뱉었다.

"...자기 먹으라고 사줬더니 나를 주고 앉았네."

"...어, 이거 나 먹으라고 사준 거야?"

갑작스러운 R의 말에 내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자, R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마주했다.

"그럼 내가 먹으려고 사 왔겠니? 우느라 당 떨어진 사람 앞에서?"

"그, 렇구나..."

R이 더 화내기 전에 롤케이크를 입에 쑤셔넣었다. ...나를 위해 사다 준 거구나. 달콤한 단맛과 함께 어쩐지 이상하고 따뜻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최근의 R은 많이 난폭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옛날처럼 따뜻한 면도 아직 남아있구나. 잃어버린 것 같았던 옛 친구의 모습을 되찾은 기분이 들어서,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R을 바라보며 상냥히 이야기했다.

"고마워, R."

비에 찰싹 젖은 제 앞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R가 나를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마우면 나중에 롤케이크값이나 갚던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R의 진심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솔직하지 못한 소꿉친구와 함께하는 간만의 티타임은, 묘하게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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