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삼키고, 현재를 채워낸다

4. 식은 홍차

글러 49제 by 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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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드 소대륙 방면에 위치한 골모어 대밀림을 지키는 것, 그것이 ‘그들’ 의 사명이자 존재 의의라고 어릴 때부터 높게 달린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부모라고 부를 이들은 없었다.

어머니라 부를 이는 커다란 숲을 보느라 새롭고 이질적인 존재를 볼 틈이 없기에 일찌감치 타자에게 양육을 맡기고, 아버지라 부를 이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경계를 지키기 위해 마을에 존재하지 않은 게 오래다.

‘그들'과 ’나'는 같은 종족으로 묶여있되, 다른 지성체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들과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텐데, 기준에 맞지 않노라고 의심할 가치도 없는 안타까움의 시선을 주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 너 진짜 이상해. ”

일상적인 말이 또래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늘상 따라다니면서 이상하다는 말이나 하는 부류들. 그런 부류가 다가오면, 나는 일상적으로 한 발짝 다가온 그들에게 두 발짝 다가간다.

“ 이상함의 기준이 뭔지부터 알려줄래? 단지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너희 놀이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걸 이상하다고 한다면, 난 너희들이 더 이상해.”

감정조차 실을 가치 없는 말에 잔잔히 대답하고선 두 발짝 도망가는 부류에 세 발짝 가서는 경고할 뿐이다. 그저 그런 일상.

종족이 나를 끼워주기 힘들다면, 나도 그들과 멀어지면 되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형식적인 가족을 이룬 집으로 돌아가면, 형식뿐인 자식이 준비하는 입가심 거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말라버린 과일, 기름이 묻어나온 견과류, 퍼석하게 날린 빵, 그리고 식어버린 홍차. 하하, 보여주기식 소꿉놀이는 이제 필요 없어 보였다. 어차피 볼 이들조차 없는 것을.

자연이 수분을 마모시킨 과일을 한 입 먹고, 기름으로 덮인 견과류는 비료로 돌려보내고, 빵은 그 옆에 놔두어 개미들의 양식이, 남은 홍차는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사실 홍차에는 진부하게도 독을 탔었다. 왜 그랬느냐면, 그래야지 어머니라는 이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는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내장은 살짝 녹은 기분이 들었고, 그로 인해 산은 역류하며, 그대로 긁어 외부에 혈흔으로 나오게 된다. 눈을 뜰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것이고, 뜰 수 없다면 난 여기까지인 존재라고 인정할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반나절 정도 지나니 속은 가라앉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살아남아서는 무얼 할까. 형식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벗어나려면 우선 이상하지 않은 척을 해야 하겠지. 그렇기에 2차 성장 이후, 기억해두었던 아버지라는 작자를 나를 가르칠 마스터로 집었다.

“ 마스터, 절 보내주시죠.”

그렇게 인지하고, 이내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위협하고선, 뻔뻔하게 다시 이상한 존재로 돌아간다. 본디 근방에서 경계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겠다며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승복은 빨랐다. 마스터이자 아버지라는 이는 훈련을 모두 견뎌내었으니 알아서 살라고 동쪽 나라의 수도로 방향을 가리켰다. 솔직히 마지막에서야 그런 노릇이라니 싶더라.

나는 그렇게 씨족을 반 즈음 등졌다. 이내 붉은 달과 유성우들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고, 어느새인가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었다. 씨족을 등졌음에도 위협으로부터 지킨 것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등지고 나선 여정 길에 만난 이들의 삶과 죽음, 이어 내 존재의 인지를 할 수 있던 가치만을 따져냈다.

이질적인 존재라도 어딘가에서는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이들이 많았고, 그것을 앞장서서 시대를 초월하면서까지 내게 보여준 이가 있었으며, 지금 시오카제 정에서 형식적인 약과와 홍차를 시키고선 그를 기다리고 있었뿐이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 누군가를 부르기 전에 들이키는 숨소리, 살랑거리는 인영이 곧 시야에 들어오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려줄지도 모를 식어버린 홍차를 속에 털어 넣는다.

“ 루! 많이 기다렸을까? 오는 길에 뱃길이 조금 엉켜서 늦어버렸네…”

“괜찮아, 얼마 되지도 않았어.”

“홍차라도 시켜올게. 조금 급하게 뛰어오느라 목이 타네.”

“응, 같이 가자. 라하.”

텅 비어버린 찻잔은 과거처럼 쓸쓸하게 식어갔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너와 다시금 마실 현재를 새로운 찻잔에 가득 채워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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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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