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지속
5. 저주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을 인지할 수 있던 시기가 되었을 때,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모든 것이 완벽한 이상적인 세상이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는 이데아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고 싶을 때도 이데아를 통해 창조할 수 있었으며,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존재하는 환상적인 세상.
대부분의 이들은 이곳에 안주했고, 많은 이들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적은 이들은 관찰이라는 명목하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안주하지 않는 ‘돌연변이’였다. 지나치게 완벽하기에 너무나도 지루한 세상이어서… 삼삼오오 같은 로브를 입고 모여있는 회의실에서 좌석을 박차고 멀리 나가 등록되지 않은 채로 곳곳의 이변으로 생겨난 불이익하다고 정의한 존재와 힘을 겨루러 나갔으며, 그럴 때마다 ‘나’라는 존재를 쉬이 인지할 수 있었다. 지루하기만 한 이상의 세상에서 느낀 적 없는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뺨에 묻어나는 혈흔을 닦을 때면 쾌락이 나를 뒤덮었다. 아, 화려하군.
그렇게 피범벅으로 돌아오면, 혹자는 심각하고 끔찍하다는 광경을 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 혹자는 고생했다며 피가 손에 묻더라도 로브로 친히 닦으러 다가와 주며 - 혹자는 좀 과했다면서도 고생했다며 어깨를 슬 두드리고 갔다. 묻었던 피가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얌전히 느끼며, 잔잔하게 얌전한 ‘척’으로 변하고 있을 때 즈음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아젬, 오늘은 뭐가 이렇게 화려해져서 온 거야?”
“그놈들이.. (어허, 예쁜 말.) …이성도 없는 존재들이 내가 아끼던 사과나무들을 부수고 있었다니까.”
“지난번에는 포도더니, 이제는 사과야? 후후훗- 진짜 아젬은, 항상 예상외의 결과를 몰고 다닌다니까?”
“내가 뭘. 이야기 나온 김에… 너 닮은 포도도 따온 건 어떻게 알고 그걸 이야기했어?”
“내 눈을 물로 보지 말라구? 포도도 이데아라서 미약한 에테르 정도는 가지고 있단 말이지-”
시답지 않은 말을 주고받아가며, 저 멀리서 이러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는 이에게도 손짓하며 포도 가져가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이는 별 같잖지도 않다는 맥 빠지는 웃음을 지어내고서는 한 송이 받아간다. 그리고선 더럽혀졌던 전투 로브를 한 손짓만으로 깨끗하게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렇게 지냈고, 우리는 이것이 한없이 지속될 것 같았다.
영원한 낙원을 비웃는 종말의 날갯짓은 명목하에 비롯한 이상적인 세상을 뒤덮어 빛을 차단했고, 날개 아래 생성된 그늘 아래에서는 불안걱정동요공황공포절망을 포함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안주했던 이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질적인 감정에 몸을 맡겨 또 다르게 안주했고,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은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으며, 관찰이랍시고 빠져있던 자들은 낙원을 되찾기 위해 그릇된 소환을 실행하려고 했다.
아모로트의 풍경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어내고서는 쉬이 들던 창을 내려두었다. 그렇게도 희열을 느끼며 전투를 해왔음에도 공격할 수 없던 이유는, 인간이었던 모습에서 괴물로 변한 이들이 내는 단말마는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형을 알기에 창을 내려두었고, 저 멀리서는 친구였던 이들이 말다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종말을 막기 위해 소환술에 희생을 하고, 하나는 무력으로써 별의 재생을 바랐다. 위에서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낮게 미련한 놈들이라며 중얼거리고서는 종말이 다가올 때까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친구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그들을 찌르고, 찢고, 베어내며, 웃음 지었다. 아니, 울었던가? 아니면 미쳤던가. 적어도 동족의 손으로 쉬이 보내주는 것에서 별바다로 그들의 존재가 편히 돌아가길 바랐다. 종말이 내린 저주는, 내 손으로나마 일부가 해주 되길 바라며.
아, 친구들아. 별바다에 녹아들어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저주를 나 또한 남기고 간다.
이질적인 감각이 든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존재가 나를 뒤덮는 것이 느껴진다. 템페스트에서도 만난 존재가 나 이외의 ‘나’를 알아차린 것처럼, 나 또한 이질적인 빛이 스며드는 것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겠지. 저 앞에선 이의 감정의 동요를 보아라.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아아, 손을 뻗어낸다. 템페스트에서 만난 존재에게도 똑같이 손을 건넨 것과 똑같이.
저주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연은 저주보다 끈질기게 묶일 운명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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