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의 과거
비가 오면 전선은 한층 고요하고, 치열해진다. 빗소리 뒤로 감춘 비밀스러운 발소리가 몇이요, 웅덩이에 섞여 흐려진 핏방울이 몇 개인지 셀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전황을 살피던 새 한 마리조차 모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이었다.
온 깃털이 척척히 젖어 볼품없이 말라 보이는 새는 그 빛깔만큼은 가시지 않아 온통 화려했다. 붉은 깃털로 뒤덮여 가장 긴 깃과 꽁지가 푸르고 노랗게 물들었으니, 먹구름에 어두워진 하늘의 색을 모조리 빨아 마신 듯했다. 더욱이 말라빠진 나무 위에 서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방법이 있을 리 없었고, 그것은 악마 측 진영의 동태를 살피던 천사의 짜증을 돋우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그냥 쏘아 떨어뜨리면 안돼? 거슬려 죽겠는데."
천리안의 천사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먼 거리에서 서로 눈을 마주칠 일이 없건만, 저 빌어먹게 화려한 새는 다 안다는 듯이 보란 듯이 비웃기까지 했다. 천사는 앵무새의 커다란 부리로 비웃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물론 평범한 앵무새가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천사 옆에서 검을 손질하던 동료는 쯧쯧 혀를 찼다.
"어차피 맞기도 힘든 거리인데다가, 그거 아마 걔일걸. 페인풀(painful)."
"그건 또 뭐야."
"아- 지금은 다른 이름 쓴다던가. 알게 뭐람. 어쨌든 그 커다란 미치광이 있잖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어느 진영이고 다 때려 부순다는."
천리안의 천사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멀찍이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온몸을 부드러운 꽃으로 두른 주제에 가시덩굴을 채찍처럼 휘두르던 어떤 악마. 그 체구 탓인지 자꾸만 최전선에 나타나 기세를 올렸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으. 분노야?"
"소문으로는 나태래."
"말세다, 진짜."
새는 어느샌가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안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감시하고 있었겠지.`
옛날에는 어땠든 간에 지금은 레드베리 페이즈필이라는 이름을 가진 탐욕의 악마는 태연하게 생각하며 하늘을 날았다. 며칠간 지속되는 폭우에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장이었지만 서로 긴장을 늦췄을 리가 없다. 가능하다면 질척한 땅을 밟고서라도 달려들었을 이들이 아닌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천사에게 비웃음을 날려준 레드베리는 만족스레 껙껙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흥미를 잃고는 천천히 고도를 낮춘다. 어느새 막사에 도착했다. 거의 바닥이 눈앞에 보일쯤, 레드베리의 몸이 순식간에 자라나며 깃털은 온데간데없이 굵고 흉흉한 줄기가 온몸을 덮으며 화려한 꽃을 피웠다. 분주하게 지나가던 악마들도 비죽 솟아난 거대한 머리와 흩날리는 꽃잎을 보면 그가 왔음을 알았다.
"아직 전면으로는 나, 나설 생각이 없는 거... 같던데에..."
"뒤로는?"
"시-끄럽지이... 뭐어- 늘 그랬잖아?"
레드베리는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악마 하나를 내려다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상대는 익숙하게 레드베리의 보고를 휘갈겨 적고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레드베리는 턱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쿵쿵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한 천막 앞에서 다시금 몸을 변화시켰다. 깃털로도, 덩굴로도 뒤덮이지 않은 민둥한 살결이 모습을 드러내자 레드베리는 입구의 천을 들쳐 안에 들어섰다.
"나왔어-."
레드베리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들떠있다.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를 한 차례 쭉 짜낸 레드베리는 침상에 걸터앉아 머리를 쥐어 싸맨 남자를 향해 헤실거리며 웃었다.
"......"
남자의 머리카락은 얼마나 쥐어뜯고 헝클였는지 결 좋은 머리가 죄다 꼬여있다. 레드베리의 인사에도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 에반이 팔 틈새로 레드베리를 흘겼다. 날카로운 시선이었으나 레드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침에 기껏 정리해두고 나간 보급품들이 전부 찢어발겨져 흩어져 있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않은 그에게 그런 것이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또, 또 기분 나빠진 거야~?"
레드베리는 구석에 내던져진 모포를 몸에 휘어 감곤,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에반에게 익숙한 듯 다가갔다. 한껏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다디단 푸른 눈을 마주한 에반은 자신에게로 뻗어오는 하얀 손을 짜증스레 내쳤다. 하지만 레드베리는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르는 강한 거부에도 다시금 손을 뻗었고, 이내 그를 품에 안는 것에 성공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에반은 종종 전투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면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악마였다. 본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휘둘리고 마는 악마. 그렇기에 전쟁은 그를 환영했고, 에반은 전장 위에 부는 피 보라를 사랑했다. 그래,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한 조각 내어주지 않는 그 감정을.
그러나 레드베리는 그러한 매정함까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다.
"곧 비가 그치며언- 나갈 수 있을 거야... 알잖아-. 으응?"
레드베리는 한동안 비가 더 계속될 거라는 전망과 요새에서 몸을 사리는 천사들의 동태를 모조리 숨겨버리며 그의 신경을 홀렸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 후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쯤이면 정말로 다시 전쟁에 불이 붙었을 테니까. 레드베리는 자신이 둘렀던 모포 안으로 그를 들이며 등을 토닥였다.
"같이 나가자. 그리고 주, 죽여버리는 거야. 흐흐... 얼른 나가고 싶다아-."
천사를 더 많이 죽이면 에반이 웃겠지. 레드베리는 그런 단순한 상상을 하며 히죽 웃었다. 레드베리도 전쟁을 좋아했다. 그것은 에반으로부터 애정을 받는 수단 중 가장 좋은 것이니까.
에반이 변덕을 부려 버려진 레드베리를 주웠을 때부터, 레드베리는 그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에반의 본능이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레드베리의 본능은 마치 각인된 것처럼 에반을 가지고자 했다. 그러니 그 귀찮은 정찰까지 마다하지 않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노래를 불렀다. 내 것이니까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내 것이니까.
내 소유물이니까.
그냥 내가 해주는 것만 받으면 되는...
"그러니까... 나중에 꼬옥 칭찬해 줘야 해-?"
레드베리는 자신이 얼마만큼 떠들든 대답 하나 없는 에반을 안고 간절하게 속삭였다. 어쩌면, 굵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래서 못 들은 거겠지. 괜찮아. 그런 당신도 좋아.
나의 사랑.
나의 차가운 연인.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면 나를 사랑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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