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자발라른

[케발라] 브레이크 타임

* 케이드 x 자발라

* IF 루트

* 약 3800여자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망토는 살랑이며, 늘 재잘대던 입은 조용하게. 아이코라는 방정맞아 보인다 할 때도 있었지만, 조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는 발랄한 걸음으로. 케이드에겐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고 자발라의 사무실에 방문할 합당한 이유까지 있었다. 그동안 미뤄왔던 케이드 몫의 보고서는 물론 헌터들 중 화성에 다녀와서 유독 늑장 부리던 몇의 보고서까지 전부 다 수거했다. 데이터로 전송 가능한 내용이지만, 처벌의 의미로 전부 수기로 작성하게 시켰다. 헌터 선봉대장의 품에 가득한 게 보고서와 서류라니! 소리죽여 웃으면서 사무실의 열린 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자발라는 문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선 일만 하고 있으니 그냥 문을 열어두어도 괜찮다고 했다. 누가 지나가건, 들여다보건 상관하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으면 바로 뛰어들 수 있도록 열린 문은 자발라가 안에 없을 때나 중차대한 일이 있을 때만 닫히곤 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다른 때는 뿔만 스쳐도 고개를 들어 케이드를 확인했을 사령관은 고개를 살짝 숙여 패드와 서류를 응시하는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

 

자발라의 이름을 부르려던 케이드의 시도는 시작도 전 조용히 나타난 타르지에 의해 막혔다. 자발라의 어깨 옆에 뜬 타르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푸른 빛을 깜빡이지도, 의체를 찰칵 소리가 나게 돌리지도, 조용히 하라는 음성조차 없었다. 케이드는 그 고요한 모습에 오히려 더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대치 끝에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비밀로-케이드는 살짝 자발라를 훔쳐보았다. 그제야 낮게 깔려 눈을 덮은 눈꺼풀 끝의 고요한 속눈썹과 아주 조용하게 이어지는 작은 숨소리가 와 닿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일하던 모습대로 앉아서 잠든 이의 몸엔 갑주마저 그대로다.

 

케이드의 반응은 빨랐다. 케이드는 자발라에게 장난치는 걸 좋아했지만 피곤한 연인의 쪽잠까지 방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보라는 듯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뭉치 중 하나라도 떨어뜨릴까 꼭 끌어안고 그 어떤 헌터들보다 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천천히, 천천히. 망토가 몸에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고 느린 걸음으로. 열린 문은 케이드의 신중한 도주를 수월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긴장하여 옮긴 걸음은 단 두 걸음이었다. 이제 몸을 돌리기만 하면 자발라를 깨우지 않고 수월하게-

 

“케이드”

“웅 나야♡”

 

한 끝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속도는 더 빨랐다. 달려들 듯 들어간 케이드는 자신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자발라를 향해 히죽 웃었다. 의체를 두어 번 돌린 타르지가 모습을 감추었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데 봐봐? 내가 뭘 가져왔는지 알아?”

“모래 냄새.”

“응?”

 

모래? 고개를 기울인 케이드를 향해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자발라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케이드, 모래 냄새가 나는 걸 정말 모르나?”

“내가 뒹구는 것도 아니고,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떨어지는 모래가 부품에 들어갈 만큼 허술한 헌터도 아니라고.”

“애초에 그런 건물에 들어가지를 말게.”

“그런데 모래 냄새가 나? 진짜로?”

 

얼굴을 바싹 내밀었다. 눈에 남아있던 잠기운이 가신 자발라가 손을 뻗어 부딪힐 듯 다가오는 얼굴을 막았다. 크고 단단한 손에 아예 뺨을 폭 기대고 비벼대자 갑작스러운 애교에도 자발라는 그저 조금 느릿하게 쓰다듬는다. 굴곡과 요철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던 손길이 떨어진 뒤에야 케이드는 열린 뺨 속에서 열기가 새어 나올 듯 한껏 들뜬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굽힌 허리를 세웠다.

 

“음. 버석버석하고, 공기에서 희미하게 떠돌지.”

“조금만 더 설명해봐. 잘 모르겠어.”

“햇볕 아래에서 모래를 만졌을 때 나던 냄새인데, 나도 더 이상은 설명을 못 하겠군.”

“그러니까아, 자발라가 모래 장난을 한 적이 있다고?”

“지도를 그리기에 좋았지. 언젠가 살라딘이 구해와서 넓고 얇은 판에 담아두곤 요긴하게 썼었네.”

 

모래와 작은 장난감 깃발들. 육도, 삼략, 손자병법. 병법과 효과적인 전략, 황금기보다도 이전 시대의 인간이 지형과 인간과 하늘을 활용해 치른 수많은 전투. 케이드는 자신에게서 난다는 모래 냄새는 못 맡았지만, 자발라가 어렵고 재미없는 이야기와 함께 과거를 그리워하며 흐뭇해할 낌새는 바로 눈치챘다. 자발라에겐 그리운 시기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케이드는 없던 시간. 내가 그 영감탱이 이야기 들으려고 이거 챙겨온 줄 알아, 엉? 시로가 들었으면 뿔부터 붙잡혔을 이야기를 속으로만 투덜대며 툭 소리가 나게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보고서!”

 

자발라가 묻기도 전 대답한 케이드는 조금 전 제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빠르게 보고서를 넘기고 확인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화성에서 온 보고서를 확인하곤 패드를 몇 번 건드려 무언가 메모를 덧붙인다. 확인을 마친 보고서는 잘 갈무리해 놓고는 이제 케이드의 것을 잡는다. 꽤 두꺼운 양에 자발라의 손이 멎는다. 케이드는 자발라의 손이 자신의 보고서를 더듬는 것을 보는 대신 가볍게 걸어가 커다란 창문 앞에 섰다. 바깥의 정경이 한 번에 내다보이며 여행자의 시선이 가득했던 곳. 이젠 여행자 대신 자리 잡은 어둠의 흔적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애초에 이건 케이드가 관여할 몫이 아니다. 자발라가 어디에 앉아서 일을 하건, 여전히 고집스레 여행자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건. 사무실이 아니면 늘 여행자 앞에 서 있던 자발라 아닌가.

 

“고생 많았네. 덕분에 몇 가지는 좀 해결이 되겠군.”

“말만 해, 왕좌 세계고 어디고 경멸자들 뒤집는 건 자신 있거든.”

“어디든 아니겠나.”

“그럼 좀 보내주면 안 돼?”

“전면에 나서는 건 아직이라 말하지 않았나? 그것도 내가 아니라, 아이코라의.”

 

사령관보다 아이코라의 말을 더 듣는 거냐는 뼈아픈 말에 케이드는 가슴을 움켜쥐는 척을 했다. 그는 뼈가 없는 엑소니까. 단단하고 큰 몸이 조금 움직인다. 케이드는 몸을 조금 느슨하게 푸는 자발라의 뒤에 바싹 붙어 책상 위 양 팔을 더듬어 잡았다. 쭉 당기자 의도를 알아차린 자발라도 순순히 팔을 조금 편다. 갑주 때문에 제대로 기지개를 펴진 않아도 얕은 잠에 굳어졌을 허리는 조금 풀렸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쿼터에 데려가서 로션이건 뭐건 듬뿍 발라가며 주물러주고 싶지만 이 성실한 공익의 상징이 이 시각에 그럴 리가 없다.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대신하듯 기지개를 한껏 켰다.

 

“자꾸 그러면 사무실에서 자는 사령관이라고 소문낼 거야.”

“누가 믿어주겠나. 차라리 스스로가 잔다고 하게.”

“내가 사무실에서 사령관이랑 잔다고? 어머 세상에, 그 무슨 망측한 소리야?”

 

꺄아, 하면서 얼굴을 감싼 채 두어 번 발을 구르자 헛웃음 소리가 난다.

 

“애초에 소문은 믿으라고 내는 게 아니야. 혼란스럽게 만드는 데에 훨씬 더 효과적이라구.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얌전히 있는 거지.”

 

얼굴을 들었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자신이 전투 불능 상태라는 소문을 내라는 건 케이드의 의견이었다. 수용한 건 자발라였다. 그 때 둘은 선봉대였다. 친구도, 연인도, 같은 화력팀원도 아닌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동료의 입장으로. 자발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을 마주했을 땐 서로의 시선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케이드는 자발라가 무슨 말을 아낄지 그 눈에서 알았다. 그래서 그 말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대신 먼저 손을 내밀어 자발라의 손을 쥐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라멘 잔뜩 사줘. 그래서, 오늘 일 언제 끝난다고?”

“기약 없다 하면 화낼 건가?”

“내가 보고서까지 써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대령 데려와서 다 뒤집는다?”

 

이마에 깊게 패였던 주름이 조금은 누그러든다. 케이드는 쪽 소리 나게 댈 수 있는 입술을 아쉬워하는 대신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뭐 그럼, 열심히 해. 난 좀 놀다가 올게. 늘 하던 마무리를 주섬주섬 되새기는 케이드를 바라보던 자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려는 푸른 눈을 바라보던 케이드는 결국 잠깐 더 머물러 기어이 자발라의 뺨에 제 뿔을 찍은 뒤에야 쫓겨나듯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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