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오이] 장마
2016.09.06 업로드
카게야마 단편 시리즈 1 / 카게야마 가족 날조 주의. 캐해석 주의
"헤어져."
오이카와의 말에 한참동안 침묵하던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네."
우리는 약속도 하기 전에 지키는 법을 먼저 배우며 기다림을 끌어왔고,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고.
-조혜은, 장마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는 습하고 갑갑했다. 차라리 쏟아지면 이 후덥지근한 공기라도 가시련만 뉴스에서는 장마가 온다고 매일같이 말하는데 비는 오질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언제나처럼 체육관에 가 배구화로 갈아 신던 카게야마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카게야마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우는 걸 누군가가 본다 해도 별로 부끄럽지도 않았다. 오늘 수업 듣다가도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 카게야마는 모든것이 후회됐다.
"이익 카게야마, 벌써 온거야?"
"어."
카게야마보다 늦었다고 분해하는 히나타의 말에 대꾸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목소리가 이상해. 감기 걸렸어?"
"아니."
"진짜 이상한데……. 엑, 너 울어?"
"어."
"대체 무슨 일이야?"
히나타가 묻자 카게야마는 욱, 우욱,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났다. 조금 그쳐가던 눈물이 다시 펑펑 쏟아졌다. 히나타는 말을 잘못했다고 뒤늦게 후회하며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카게야마를 위로하려 했고, 카게야마는 몇번이고 눈물을 닦아냈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눈물이 그친 카게야마는 눈물을 계속 닦아내느라 손으로 문질러서 붓고 붉어진 눈으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히나타는 차마 이유를 또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카게야마의 옆에서 같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원래도 배구에 관한 것 이외엔 말을 걸지 않으면 딱히 말하지 않아 말수가 없는 카게야마였지만 오늘 연습은 더 말수가 없었고, 컨디션 난조라는 게 훤히 보였다. 히나타가 아니라 카게야마가 울었다는 걸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카게야마에게 컨디션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말을 했다.
뭔가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와중에도 연습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카게야마도 카게야마지만. 히나타는 힐끔힐끔 카게야마를 보다가 얼굴에 배구공을 맞고 감독님께 한눈 팔지 말라며 혼이났다.
*
"오늘 컨디션 안 좋네. 무슨 일 있었냐."
이와이즈미의 말에 부실 테이블에 엎드린채 집에 갈 생각이 없는 양 가만히 있는 오이카와는 얼굴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토비오쨩이랑 헤어졌어……."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이와이즈미는 가장 먼저 든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갓 실연당한 애한테 이런 말을 하기는 미안한 일이니까.
"붙잡을 줄 알았는데."
"……뭐?"
카게야마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왜 너를 붙잡아?
"헤어지자고 말하면, 잡을 줄 알았어."
"헤어지자고 한게 너라고?"
"알아 나도 이상한 짓 한 거. 그렇지만, 그러면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단 말이야. 붙잡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냥 네, 라니. 지금까지 나한테 그랬던 것도 그냥 나랑 헤어지고 싶어서 그랬던건가봐. 그래서 내가 헤어지자고 하니 옳타꾸나 하고."
"아니 아니, 아니.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지. 헤어지고 싶다면 너한테 안 그랬지. 네 변덕 다 맞춰주고 그런 애, 이 세상에 걔 말고는 없으니까."
"하지만, 늘 먼저 연락하는 것도 나고. 만나자고 하는 것도 나고. 걔 나한테 먼저 손잡은 적도 없어. 그리고 토비오쨩 별로 나한테 안 맞춰줬다 뭐."
"카게야마한테 하듯이 나한테 하면 넌 벌써 수십번 맞았어."
"안 그래도 때리면서! 폭력쟁이!"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아 그래."
"?"
"이와쨩이 때릴 짓을 하는데도 토비오쨩 나한테 화낸 적이 없어. 약속 시간 10분 전에 갑자기 못나간다고 하거나 장소를 바꾸거나 해도. 그때도 이유도 안 물어보고 알았다고 하고."
"그런 짓까지 했냐."
"……걘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없나?"
이유를 물어본다면 할 말은 많았다. 갑자기 조카를 보게 됐어.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났는데 여기서 가까운곳에서 만나면 더 빨리 만날수 있으니까. 하지만 카게야마는 이유를 물어본적이 없다. 늘 오이카와가 그 후에 변명하듯 말을 했을 뿐이다.
만날 때면 가끔씩 우유빵을 사올 때가 있었다. 똑같은 우유빵이 아니라 다채로운 빵집에서 사왔다. 그러다 오이카와가 맛있었다고 하면 그곳에서 또 사다 주곤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도통 먼저 문자 한통 보내는 일이 없었다. 오이카와가 문자를 하면 대답은 꼬박꼬박 잘하지만. 차마 그걸 가지고 섭섭하다고 내색할 수는 없어서 아침에 몇시에 일어나냐고, 문자로 아침인사라도 하자고 한 이후로는 꼬박꼬박 매일같이 카게야마가 아침에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 거기서 더 나아간다거나 하는 게 없었다. 딱 오이카와가 말하는 것만 지켰다. 왜? 뭔가 더 하면 내가 화낼 것 같아서? 그런 것 치고 눈치 없게 내 화 돋구는 건 잘하잖아. 내가 화낸다고 겁먹지도 않잖아.
"카게야마 생각이야 나도 모르는 거니 네가 가서 물어봐야지. 가서 무릎꿇고 사과부터 해."
"내가 왜?!"
"그럼. 헤어진 채로 있으려고? 너 안 그래도 오늘 연슴 중에 집중 못하고 성가셨거든? 내일도 그럴거지? 가서 사과해."
"……."
"그리고 그런 걸 말하고 싶으면 그냥 말해. 혼자 삽질하다 헤어지니 뭐니 헛소리 하지 말고. 걔가 언제 네 말 안 들은 적 있어?"
"……없지."
그와중에도 오이카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미적미적 일어났다.
*
카게야마는 컨디션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늦게까지 체육관에 남아 히나타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카게야마를 집에 보내기 위해, 연습 상대가 없으면 집에 갈거라 생각하고 히나타가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카게야마는 혼자 남아 연습하겠다고 해서 차마 혼자 둘 수 없어 히나타도 같이 연습 중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카게야마의 상태가 엉망인데 연습이 잘 될리가 없었다. 결국 둘다 몸보다 정신적으로 지쳐 정리하고 학교를 나오는 길에 히나타는 오이카와를 발견했다.
"엇, 대왕님."
"안녕, 치비쨩."
"여긴 무슨 일이세요?"
"토비오쨩 좀 빌려가려고. 치비쨩 혼자서도 갈 수 있지?"
"앗, 네. 네. 카게야마, 나 그럼 먼저 가볼게!"
대왕님이 이유였나보다, 순식간에 눈치챈 히나타는 후다닥 뛰어 두사람에게서 멀어졌다.
카게야마와 오이카와는 나란히 걸었다. 둘 중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토비오는."
"……."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요."
"그럼 왜 안 물어봤어? 그러니까, 우리 사귈 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우뚝 섰다. 오이카와는 부끄러워졌다. 자니, 하고 문자 보내는 두시 구남친고 아니고 직접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거라니.
하지만 오이카와의 수치심에는 상관없이 카게야마는 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울고 있었다.
왜, 왜 우는 거야?
"귀찮다고 싫어할까봐요."
카게야마는 울면서도 착실하게 오이카와의 말에 대답했다.
"먼저 연락을 잘 안 하는 것도?"
"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야, 늘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내가 그랬다고?"
"아뇨. 부모님이……."
"……."
"바쁘셔서. 용건있는 게 아니면 연락하지 않아요."
"부모님한테 그렇다고 나한테도 그런거야?"
"……."
"너는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네."
"왜 내가 궁금할 거란 생각은 안 해?"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오이카와씨가, 저를요?"
설마.
"토비오, 날 좋아해?"
"……좋아해요."
"얼마나 나를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 난 순위가 어느정도 돼?"
"오이카와씨를 가장 좋아해요……."
오이카와는 깨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사랑받는 걸 몰랐다. 그러니 그동안 그래온 것이다.
사랑을 받는 것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받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에 받을 줄 몰랐다. 아니 누군가 자신에게 그만큼의 관심을 쏟을 거란 상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오이카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귀찮아할까봐 어찌할바를 모르고, 오이카와가 좋아한다고 한 것만 학습하여 매번 우유빵을 사오고,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사랑을 받은 적 없기에 사랑하는 것도 서툴다. 사랑받는다는 건 꿈꾸지도 않는다. 부모님이 귀찮게 굴지 말라는 일방적인 약속을 지키며 그걸 오이카와에게도 적용한다.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사랑 비슷한 걸 한 것은 오이카와 이전엔 부모님뿐이었을테니까.
"어제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해."
"……."
"나도 토비오를 좋아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처음 봤던 중학생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어른스러워진 얼굴. 겉만 그럴 뿐 그때와 다름 없이 어리고 미숙하다. 정말인지, 내가 보모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이카와는 토비오를 끌어안았다.
"우리 다시 사귀자."
"……네."
사랑을 알려줄게.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받는지.
빗방울이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비를 피하기 위해 뛰었다.
오지 않던 장마가 왔다.
*후일담
"정말인지, 내가 우유빵을 좋아하긴 하지만 우유빵만 먹는 건 아니거든?"
카게야마가 또 우유빵을 사왔다. 카게야마가 사오는 우유빵이 사실은 꽤 먼 빵집에서 사온다는 걸 알게된 오이카와는 무리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다가 문득,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그동안 말하는 건 늘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듣기만 했다.
"넌 뭘 좋아해?"
"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구."
"반숙 계란을 얹은 카레요."
"카레? 무난하네."
"무난한가요? 집에서 제대로 먹으려면 사람이 많고, 오랫동안 다같이 먹어야 하잖아요. 많이 만들어야 맛있으니까. 혼자 인스턴트로 먹을 때는 반숙계란 만들기도 힘들고."
"……그렇지."
"그래서 집에서는 좀처럼 먹기 힘든데, 좋아해요."
순간 충동이 들었다.
"……같이 살까?"
"네?"
"나 졸업하고, 너도 졸업하고. 같이 살면 카레 해먹자. 반숙계란도."
사실 어찌 될지 모른다. 둘 다 여전히 미야기로 남아있을지 아닐지도 모르고, 같은 지역으로 갈지 안 갈지도 모르고.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였다. 카게야마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fin
부제목의 '카게야마 단편 시리즈'는 사실 '애정결핍 카게야마 단편 시리즈'였습니다. 스토리의 중요 네타라고 생각해서 애정결핍은 뺐습니다>ㅅㅇ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받을 줄 안다. 이 문장이 생각나자 카게야마가 생각났고, 거기에 카레를 좋아한다는 게 생각나니 이런 게 나왔습니다.
이걸 생각하다보니 또 다른 애정 결핍 카게야마도 생각나서 시리즈가 됐어요.
다른 애정 결핍 카게야마는 다른 캐해석이다 보니 다른 세계관입니다. 물론 그것도 카게오이. 그것도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0ㅅ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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