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마미아 if 현패러

바다가 실어온 기적

빔이 라우더의 존재를 몰라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란 제타크 형제. 페트라 시선

오늘도 어김없이 낮고 긴 고동 소리가 한낮의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루 한 번씩 이곳을 드나드는 배가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다. 부두로 내려가려는 나를 라우더 선배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페트라, 가보려고?"

"네,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손님이 타고 있다면 맞이해야죠."

"이젠 당일에 오겠다고 연락해 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올 사람은 다 왔을 텐데. 그럴 필요 없지 않아? 차라리 파티 준비 멤버 중 한 명을 보내던가. 페르시라던가."

"페르시는 지금 손님들 통제하느라 바빠요. 혹시 모르잖아요. 어쩌면 선배가... 초대한 분들 중 마지막 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고요."

아, 선배의 표정이 티 나게 가라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배가 나도, 본인 어머니도 모르게 청첩장을 찔러넣은 세 명의 남자 중 둘은 이미 선배를 있는 대로 실망시켜 놓았다.

라우더 선배는 아버지가 없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호적상에는 어머니 한 분뿐이다. 소위 말하는 사생아라는 것이다. 선배의 어머니이자 내일이면 내 시어머니 되실 분은 본인의 이야기와 선배의 보충에 의하면 젊은 날에 '아주 화끈한 청춘'을 즐기셨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특정할 수 없는 아들을 덜컥 낳게 되어 홀몸으로 키우는 동안은 상당한 고생을 하셨다고.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모자 관계는 썩 나쁘지 않다. 때때로 어머니한테 투정도 부리고, 사춘기 시절에는 약간의 방황도 했다지만 이러나저러나 어머니께 걱정 끼치는 걸 끔찍이 싫어해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자식이 되고자 애써온 사람이 라우더 닐이라는 남자이다.

정정한다. 이게 냉정하고 이성적인 '보통의' 라우더 닐이다.

그러나 선배는 극히 드물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폭주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아주아주 가끔이지만. 나도 꽤 오래 선배와 교제를 해왔지만, 그동안은 딱 한 번, 그것도 내가 모르는 새 했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다들 쉬쉬하며 설명을 피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일단 사람 한 명이 죽을 뻔했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그건 다른 얘기고. 이후 두 번째 폭주가 겨우 사흘 전에 밝혀졌다.

말했다시피 선배의 어머니는 선배를 낳기까지 관계가 있던 남자가 여럿이었다고 한다. 어떤 기준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선배의 친부로 의심할 정도로 '깊은' 관계였던 남자가 거르고 쳐내다 보면 셋으로 추려진다고 한다. 라우더 선배는, 그 남자 셋 전부에 청첩장을 보냈다. 당신과 어머니 사이에 났을지도 모르는 자식의 결혼식에 오라고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한 명은 자신을 매장하려는 시도라면 후회하게 될 거라며 장황한 살해 협박을 늘어놓은 답장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선배가 벌인 일을 알고 당황하던 선배의 어머니는 이내 원래도 허풍이 심한 인간이었다며 가볍게 넘겼지만,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착잡함에 선배는 뜯겨나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또 한 명은 엊그제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남자에 비하면 나아 보였지만, 이내 선배나 선배의 어머니보다는 파티와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다른 여자들의 존재에 훨씬 관심이 있다는 게 드러났고, 역시나 선배의 앞머리만 혹사당했다.

솔직히 애초 여자와 놀아나기는 실컷 즐겨놓고 그사이에 자식이 생겼는지 관심도 없었을 남자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었던 건지도 의문이지만, 선배는 그 시점에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완전히 흥미를 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굳이 맞이하러 갈 이유가 안 보이는데."

"그래도 손님을 박대할 순 없잖아요. 부두까지 다녀오는 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초대 손님이 없다면 그대로 돌아오면 되는걸요."

또 애꿎은 앞머리가 괴롭힘당한다.

"그러면 나도 같이 갈게. 누가 타고 있는지만 보고 오지, 뭐."

언짢음을 숨길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나를 향한 불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데다 그대로 옆에 붙어오는 행동에 묘한 응석이 느껴져 마냥 귀여워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그림자가 드리워진 흙길을 따라 부두로 내려갔다.

원래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은 작은 섬이다 보니 부두는 모든 사람이 한눈에 파악될 정도로 한적했다. 육지로 다녀온 것으로 보이는 몇 명의 이곳 주민들과 매일 섬과 육지를 왕복하는 배의 선장이 보였다. 그리고 선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몸을 살짝 숙인 채 이쪽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선장의 반응으로 보아 대화를 상당히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짐의 크기나 가벼운 피서 차림인 걸 보면 여행객으로 보이는데 벌써 선장과 친해진 건가.

선배가 퉁명스럽게 역시 보통 관광객인가 보지, 하고 돌아가려는 순간에 대화가 끝났는지 낯선 남자가 허리를 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이쪽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을 마주쳤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이쪽을 보고 얼굴이 밝아지며 짐을 들고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를 발견한 것만은 확실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 몇초가 거짓말처럼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첫인상이 그렇게 강렬한 인간은 살면서 볼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덩치다. 키가 2미터에는 달할 듯이 훤칠한 데다 어깨도 벌어져 있다. 단련된 듯 헐렁하게 걸쳐 입은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건강한 구릿빛 피부 아래 근육의 두께가 가늠되었다. 거기에 사방으로 뻗은 머리카락은 햇살에 자줏빛으로 빛나는 묘한 갈색이다. 그 무엇보다도 시선을 앗아가는 존재는 그의 이마 위에 떡하니 솟아있는 선명한 핑크색의 앞머리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마치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한 묘사이지만 다르다. 이건 '반한다'가 아니라 '압도된다'라는 말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화려하고 곱슬곱슬한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새 코앞에 다가온 남자는 미소를 유지한 채 아까처럼 몸을 살짝 낮췄다. 그러고는 그의 덩치에 걸맞은 커다란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내렸다. 렌즈 뒤에 숨겨져 있던 이질적일 정도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하자, 나는 이미 마른 입안에 침을 한 번 더 삼켜야 했다. 거기다 아까는 잘 보이지 않던 삐침이 있는 길고 가는 눈썹도 모자랐는지 왼쪽 눈 밑에는 선명한 점 하나가 박혀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특징으로만 빚은 듯한 인간이다.

게다가 젊다. 멀리서 볼 때도 분위기에서 젊은 사람으로 예상되기는 했지만 둥글고 처진 눈이 짓는 표정은 젊다 못해 앳되어 보였다. 선배의 또래 정도일까? 1분 같던 찰나가 지나는 순간 남자의 미소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쪽이 라우더 닐인가요?"

그 말에 마비에서 풀려나듯 정신이 돌아오자 황급히 아까부터 반응이 없는 라우더 선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이 남자에게 압도되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말을 걸어진 쪽인지라 선배는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몇 번인가 입을 벙싯거리더니 쥐어짜듯 대답했다.

"네, 네... 제가 라우더 닐입니다만, 그쪽은...?"

"아! 제 이름은 구엘 제타크입니다. 몇 달 전에 닐 씨가 제 아버지 앞으로 보낸 청첩장을 받아서요. 드디어 만나게 되었네요. 그리고 이쪽은 신부 되시는 페트라 잇타 씨죠? 반가워요!"

구엘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기쁜 듯 내민 손에 선배와 나는 얼떨떨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악수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난처해한 것도 잠시, 쇼크에서 벗어난 듯 선배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구엘 '제타크'라고 했죠? 그렇다면 청첩장을 받았다는 아버지란 사람은 설마..."

"빔 제타크요. 저는 그를 대신해서 왔고요."

"왜 아예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아니라 아들이 대신 혼자 온 거죠...?"

선배의 약간은 가시 돋친 질문에 구엘 씨의 미소가 서글프게 바뀌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게, 실은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거든요. 그것도 3년 전에."

이건 예상 못 했네.

"닐 씨가 어머님과 관계했던 남자들에 대해 어떻게 정보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빔 제타크라는 이름을 한 번만 검색해 본다면 제타크 헤비 머시너리의 CEO의 부고에 대한 기사를 보셨을 텐데, 정말로 모르셨던 모양이네요. 이후 회사를 물려받은 제 이름도 이번에 처음 들은 모양이니. 처음에는 협박용인가 잠깐 의심까지 했거든요.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협박이 아닐 거로 생각하고 몸소 오기로 한 이유는?"

"선배, 그래도 초대받은 손님한테 그렇게 추궁하듯이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상대는 한 기업의 CEO라고요. 그것도 체격이 운동선수만 한.

"괜찮아요, 애초 초대받은 건 제 아버지고.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겠죠. 아버지의 부정을 인정하고 싶은 자식이 있을 리도 없는데. 저도 회사를 능숙하게 경영하던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기는 하다만..."

"하다만?"

"제 어머니부터가 제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외도에 질려서 이혼하고 집을 나가셨고, 커리어와는 별개로 제 아버지에게 혼외자식이 있었대도 '아버지라면 그럴지도'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달까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라우더 선배도 자신이 어느 재벌가의 스캔들의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는 대비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초 누가 대비해, 그런 거.

"가라앉을 필요 없어요! 아버지의 외도도 죽음도 저한테야 오래전 일이고, 저는 그저 진심으로 제 이복동생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축복해 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왔을 뿐이라서요."

선배의 고개가 휙 올라왔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아들이 대신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상한 전개와는 아주 다른데.

"말했다시피 어머니랑은 일찍 헤어졌고, 아버지도 돌아가신 이후로 줄곧 혼자였거든요. 회사 일로 바빠서 사람과 사적으로 어울릴 시간도 별로 없었고요. 여기 온 것도 청첩장을 받은 주부터 일을 미친 듯이 해치워 오늘내일을 어떻게든 비워서 온 거기도 해요. 그래서…."

아까의 압도적인 아우라는 사라지고 커다란 덩치와는 대조되는 살짝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라우더 닐 씨가 제 동생이 맞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아요."

우와, 우와, 우와...

약간 발그레해진 볼과 달리 흔들림 없이 곧은 눈빛이 선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목소리에서 부드러움과 순수한 기쁨과 기대감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이지? 결혼식 전날 나타난 훤칠하고 부유한 미남이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형제를 축하해 주러 왔다며 자신의 가족이기를 바란다고 말해주는 그런 편리한 망상이 실제일 리가 없잖아.

빛이 부서지는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푸른 눈동자가 비현실감에 박차를 가한다. 더 쳐다보고 있다간 그 속에 잠겨버릴 듯해 깨어나기 위해 라우더 선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 더 심각할 줄도 모르고.

선배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물론 선배가 늘 죽은 물고기처럼 탁한 눈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과 파티를 하나하나 기획하는 동안 받은 스트레스의 양은 어마어마했고, 거기다 본인이 벌인 '친아버지' 이슈로 요즈음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손님들을 대접하고 관리하고, 특히나 다른 여자 손님들에게 치근거리는 그 남자를 감시하느라 평균보다 체력이 좋은 편인 선배가 초저녁부터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다. 어젯밤 '차라리 결혼식까지 빨리 해치우고,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해오는 선배의 얼굴에선 생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 선배의 눈이, 세상 모든 환희를 한데 담아놓은 듯이 반짝였다. 선배가 이렇게 생기있는 얼굴인 건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 이 정도는 처음 아닌가? 해수면에서 반사된 빛이 빛나는 건가, 확인이라도 하러 고개를 다시 구엘 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살짝 초조해진 듯 눈썹이 처지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 별로 달갑지 않다면...... 전 그냥 돌아가도록..."

잠깐잠깐잠깐, 이 사람, 선배의 반응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인이 방금 일으킨 소생의 기적을 보라고요. 다시 몸을 일으켜 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우기도 전에 선배의 손이 먼저 나갔다.

선배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톤인 손을 붙잡아 눈앞으로 끌어와서는 양손으로 모아쥐었다. 그리고 아까의 구엘 씨처럼 곧은 시선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올려다보며, 벅차오름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처음 들어보는 높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내가 아는 라우더 선배의 세 번째 폭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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