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마미아 if 현패러

거위가 울어서 (2)

빔이 라우더의 존재를 몰라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란 제타크 형제. 페트라 시선

구엘 씨의 휴가는 우리보다 닷새 늦게, 주말과 함께 시작되는 걸로 되어 있어 다음 날도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했다. 멀리 여행온 김에 부부 단둘이 편하게 주변 관광하는 시간을 먼저 갖는 게 낫지 않겠냐는 구엘 씨의 제안대로였다.

저택에 도착한 날 우리는 방에서 쪽잠을 자다 구엘 씨의 부름으로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미적미적 나와 식탁 위에서 본 것은 통통한 새우나 성게알 따위의 재료들이 산더미처럼 올라간 토마토파스타였다. 구엘 씨는 요리마저도 잘하는구나…. 한입한입을 음미하며 우리는 구엘 씨에게 이 근방의 방문할 만한 곳들을 안내받았다. 시장, 미술관, 공원, 데이트 명소, 기타 등등. 특히 몇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격주로 한번 서는 장이 마침 오늘 열린다며 꼭 가보길 추천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말하는 구엘 씨는 마치 놀러가는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무척 즐거워 보였다.

식사 후 자리를 치우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알아서 쉬러 들어갔다. 선배가 기왕이면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구엘 씨는 다음날 출근을 해야하니 축사 관리 루틴 정도만 따르고 자러 가야 한다고, 내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우리도 일찍 자도록 하라고 권했다. 정말 바른생활 사나이의 표본 같은 분이셨다. 그는 우리가 세면을 끝마치기도 말한 루틴을 전부 끝내고 돌아오더니 2층에 있는 자신의 방 위치를 가르쳐 주며 무슨 일 있으면 깨워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올라갔다.


아침의 구엘 씨는 홀로 아침 조깅 후 거위 먹이를 주고선 출근룩인 듯한 캐주얼 정장까지 차려입고 그제서야 겨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는 우리를 맞이했다. 막 갈린 신선한 채소 스무디를 건네며 간밤의 꿈자리는 괜찮았는지 물었다.

“보시다시피,”

나는 스무디의 냉기를 눈가에 갖다대며 붓기를 빼려했다.

“정신없이 잤네요.”

“다행이네. 안맞을까봐 걱정했거든.”

“어윽.”

선배가 스무디를 단숨에 마시다 머리가 띵해졌는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게 뭘 그렇게 급하게 들이켰어요. 하지만 아침에 약한 건 선배의 귀여운 점 중 하나니까. 어쩌면 구엘 씨도 같은 걸 느꼈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시고는 정신을 차린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스케줄이야 너희 두 사람이 알아서 할 테고, 나는 별일 없다면 5시에 퇴근할 테니 저녁을 너희끼리 먹고 들어올 것인지 여부만 미리 연락 남겨주면 좋겠네. 거실 테이블에 카드 뒀으니 경비로 마음껏 쓰고. 어제 말한 시장은 현금결제 위주로 받는데 거기서는 내 이름 대고 외상 걸면 돼. 알았지?”

“으, 으응.”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구엘 씨는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뒤이어 뭉개진 자동차 소음이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우리는 잠시 동안 물방울 맺힌 잔을 손에 든 채 현관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돌풍 같은 사람이야….”

라우더 선배가 마침내 잠이 완전히 깬 목소리로 말했다.

“다가오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순식간이네요.”

선배는 잔을 손에 든 채 거실 쪽으로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나가길래 나는 남은 스무디를 마저 비웠다. 다 마신 잔은 싱크대에 가져가 씻어놓는 정도는 하려다가, 수세미나 주방세제도 따로 없단 걸 깨달았다. 어색하게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식기세척기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거기에 넣어두려던 순간, “아앗?!” 하는 선배의 비명이 들렸다.

“뭐, 왜, 뭔데요?!”

덩달아 놀라 외치자 선배가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이며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이거, 블랙이야….”

몇초 뒤 나도 같은 비명을 질렀다.


저택에서 나오는 길에 역시나 거위들의 집중견제로 약간의 곤욕을 치른 후, 오전 시간에는 주변의 데이트명소를 두어군데 방문해서 사진도 찍고 걷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 다음 유명 지역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선배가 특히나 마음에 들어했다. 구엘 씨가 제공한 카드는 차마 누군가에게 내밀 용기가 나지 않아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소화를 시킬 겸 구엘 씨가 추천해줬던 시장이 열리는 블록까지 걷던 중에 근처 공원에서 시에서 주최했다는 야외 미술전시를 감상했다. 본래 지나치고 말 뻔했는데, 후원단체 명단에서 제타크 헤비 머시너리의 로고를 발견하고는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로컬 예술인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였다.

“제타크사에서는 이런 것도 지원하고 있구나.”

“아무래도 대기업으로서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것도 한 역할일지도요.”

“사진 몇장 찍어서 형한테도 보내줄까?”

“기왕이면 기념품도 사갈까요?”

“그거 좋네.”

그리고 말한대로 했다. 인상적인 작품 몇장 앞에서 사진을 찍어 구엘 씨에게 전송하고는 이후 수공예로 만들어졌다는 기념품 매대를 둘러보았다. 온갖 장인과 예술인들이 정성들여 빚은 물건들 사이에서 둘이서 세트인 냉장고자석과 시어머니께 선물할 머그컵 잔을 구입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곳에 늘 살고 있는 사람이다보니 구엘 씨에게 선물할만한 물건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까다로운 시선으로 매대를 흝던 라우더 선배는 마침내 “이거 어때?”라며 반투명하게 빛나는 새 모양 문진을 가리켰다.

흰 몸통에 주황색 부리와 주황색 물갈퀴가 붙은 채 반듯이 서있는 그것은 오리라기엔 길고, 거위라기엔 짧아 보였다. 어찌보면 조금 짧고 통통해서 더 귀여워보일 지도.

“구엘 씨의 환심을 사기 딱 좋아보이는 선물이네요.”

“괜찮아 보인단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선배는 살짝 기쁜 미소로 그것을 구입했다. 선물은 나중에 저택에 돌아가서 직접 전달하기로 했다.

마저 이동하여 장이 열린 블록에 이르자 북적이는 사람들로 빚어지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지역 사람들보다 관광객이 훨씬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이 휴가철이니 그럴 만도 하지. 따라서 걷다 보니 신선한 식재료뿐만 아니라 즉석에서 조리해주는 길거리 간식과 포장 가능한 음식들에서 풍기는 냄새로 군침이 돌았다.

온갖 즉석요리와 간식거리를 하나씩 사서 선배와 나눠먹다보니 저녁 생각 따위는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금세 든든해졌다. 여전히 구엘 씨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지는 않았다. 솔직히 부끄럽잖아, 그런거.

마지막으로 고소한 기름과 짭쪼롬한 양념 냄새가 풍기는 졸인 고기 요리를 포장해가기로 했다. 늦은 시간에 배가 꺼진 후에 먹던가 내일 아침에 먹을 생각으로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빈 속에 넣어도 될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계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음식을 담으며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데, 숙소가 어디야?” 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무심코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여기서도 아득히 보일 정도니까. 식어도 데워먹으면 되고요.”라고 대답해버린 것이었다.

나도, 라우더 선배도 무얼 말했는지 미처 눈치 채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음?”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요리가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가판대에 올려놓고는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너희가 제타크 저택에 묵고 있는 애들이니?”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일부러 꽁꽁 숨기려 한 건 아니지만, 일부러 떠벌리고 다닐 생각도 아니었는데!

“아, 네…. 어, 어떻게…?”

“역시! 이 바닥에서 30년 넘게 장사하며 단련된 내 촉을 무시하면 안된다니까. 이 골목 주변에는 조망권 규제가 걸려있어 여기서 보일 만큼 고층호텔 같은 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했지. 물론 아주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지만, 혹시나 찔러봤는데 정확히 맞았네.”

아주머니는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에 리듬이 들어갔다. 현지인의 직감과 중년여성 특유의 관찰력을 허투루 봤었다.

“왜 말을 안 하고 있었어? 말하면 돈도 안받을건데. 구엘 그 녀석에게 얘기는 들어뒀지?”

“네, 들었는데… 그래도, 빚지는 건 좀 그런 기분이라.”

라우더 선배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며 말했다. 아마 빨리 거래를 마치고 도망가고 싶은 모양이다.

“됐어, 제타크네가 얼마나 돈이 많은데. 그정도는 등쳐먹어도 돼! 수십년만에 찾은 피붙이라며? 구엘이 얼마나 기뻐하는 티가 나던지. 그렇게 웃는 얼굴 보는 것도 몇년만이었어. 그 집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라, 내가 그 애가 이만할 적부터 알았는데……”

거래를 마치기는커녕 아주머니의 긴 수다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주도권을 뺏어와 본인 할말을 이어가는 중년여성 특유의 입담이랄까.

“이제보니 구엘의 얼굴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그 아비의 얼굴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정확히 무슨 사이야? 배다른 형제지? 내기가 걸린 일이거든.”

그리고 중년여성 특유의 무심한 침범!

“...네, 형제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형의 아버지를 잠깐 만났던 걸로 보고 있습니다.”

선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숨기는 건 포기했는지 대놓고 구엘 씨를 형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집이 이혼할 때는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빔 그 인간의 바람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 졸지에 엄마한테 버려진 아들만 안된 거지, 쯧쯧. 거기다 어른이 되어서는 결국 아버지도 그런 일로 떠나보내고, 이후 얼굴 볼때마다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오, 구엘 씨의 아버지, 유명했구나…. 돌아가신 분께 실례일지 몰라도 솔직히 청첩장을 못 받은 게 다행이지 않을까. 나나 선배의 동기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추근거리던 인간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듯 하길래 애써 흩뿌렸다.

“그렇게나 애정이 많은 녀석이었는데. 너희도 만났을 거 아니야? 거기다 착하고, 예의 바르고, 가끔 거위 똥냄새를 묻혀오길래 놀리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얼마나 귀여웠게?”

재밌는 사실이긴 한데, 구엘 씨의 명예를 위해 그만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그가 어릴 때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단 사실은 충분히 알겠어요!

아주머니가 수다 삼매경인 것을 보고 눈치를 보는 건지, 지나다니는 손님들이 전부 힐끗 보고 지나쳐버렸다. 구경만 하지 말고 제발 끊어줘요.

“그 까다로운 아비를 만족시키느라 얼마나 고생하던 녀석인데. 불쌍히 여겨줘. 귀한 가족이잖아?”

부자니까 등쳐먹어도 되지만 불쌍히 여기라니, 그것 참 까다로운 주문이다. 게다가 연민은 보통 가족 사이에 건전한 감정은 아니지 않을까요?

입밖에 내지 못하는 수많은 대답들을 삼킨 채 어색한 웃음으로 넘기고 있는데 선배가 진지하게 물었다.

“형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겁니까?”

“글쎄, 아비가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도 그만하면 오히려 좋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비를 존경하는 아들이였으니까. 그렇다고 아주 좋았냐면 말했다시피 아비가 보통 까다로운 인간이여야 말이지. 제 눈에 안차면 고함을 지르고 손가락질이나 해대는 인간이라 우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구엘은 거기에 응하려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음. 구엘 씨나, 시어머니나 취향이 조금 이상한 게 아닐까. 아니, 구엘 씨의 경우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니 함부로 단정짓지 않는 게 좋겠다. 시어머니도 어쩌면.

“훈육도 엄청 엄했어. 이 아줌마가 말이야, 부모님이 이 동네로 60년 정도 전에 이민을 와가지고 나를 키우면서도 당신의 조국에서 애를 다루던 방식으로 키운지라 꽤나 험한 취급을 받았거든. 그런 내가 보기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면 말 다했지. 뭐, 자식더러 부모를 싫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본인이 애쓰는 것과 달리 괴로움을 참는게 얼굴에 보이길래 가끔은 아비한테 반항해도 괜찮다고 말한 적은 있는데, 생각해보겠다고 했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의 사적인 정보도 알아버렸지만 구엘 씨에 대해선 꽤 기억해둘만한 사실을 들었다.

“최근은 어땠죠? 그러니까 아버지가 죽은 후의 형은…?”

“아아, 하기사 그것도 다 옛날 일이구나. 그 녀석이 혼자 살고부터는 늘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 같았어. 여유로운 척 웃고 다니기는 하는데, 어릴 적부터 봐온 우리네 눈은 못 속이지. 그런 큰 일을 겪고도 그 집에 계속 살면서, 가족이라고는 그놈의 거위들밖에 남지 않은 채….”

가만, 방금 중요한 얘기가 언급된 것 같은데.

“‘그 집에 계속 살면서’라니,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보다 선배가 한 발 빨랐다.

“어머나, 몰랐니? 그 집에서 사람이 죽었어. 다름아닌 그 아비가.”

그순간 온몸에 소름이 타고 오르며 주변의 가득차 있던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전부 물에 잠긴 듯 먹먹해졌다. 아무런 판단조차 되지 않는 반사적인 감각이었다. 아마 겨우 몇초였겠지만, 체감상으론 최소 1분 가까이는 온몸이 완전히 스턴에 걸린 듯 머리를 포함에 모든 게 작동을 멈췄다. 그런 나의 경직을 풀고 현실로 도로 끌어온 건 아주머니였다.

“엄머, 정말로 몰랐구나….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보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미안하다, 방금 얘긴 잊어도 돼.”

아주머니가 민망함인지 머쓱함인지 알 수 없는 어색한 몸짓으로 포장된 용기를 봉지에 담아 건네주는 걸 선배는 망연히 받아들고는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고 서있었다. 놀랐겠지. 나도 놀랐다. 구엘 씨는 그런 얘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설마 우릴 일부러 속인 걸까? 일부러 우릴 그 집에 들인 걸까? 우리가 머무름으로써… 뭔진 몰라도 뭔가를 의도하고? 어제 침대에 처음 누워봤을 때의 위화감과도 관련이 있을까?

우리를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판대를 정리하는 척하는 아주머니에게 선배는 천천히 물었다.

“혹시… 집 안에서 죽었습니까? 서재라던가, 1층 안방이라던가, 구체적으로 어디….”

질문의 요점은 두번째 거였겠지. 당연하다. 우리가 당장 오늘 아침에 일어난 자리가 시체가 누워있던 자리라면, 글쎄, 결코 다시 눕고 싶진 않으니까. 아주머니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아마도 못들은 척할지 고민한 게 아닐까)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집 안이 아니라, 마당 한가운데서 죽었어. 연못 근처에. 그때 기사 같은 거 찾아보면 자세히 나오니까 나머진 스스로 찾아봐. 구엘한테는 내가 말했단 얘기는 하지 말고? 나는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1차적으로는 안심이 되는 답변이기는 했다. 아니, 안심하기는 멀었지만. 오늘 밤은 잠을 잘 수 있을까?

우리는 들릴 듯 말 듯한 인사를 하고 나와 시장을 벗어났다. 생각해보니 결국 돈을 안냈네. 이런 타이밍에 구엘 씨에게 빚을 만들다니, 최악이다.

“일단… 돌아가봐야겠죠?”

“일단… 돌아가야겠지.”

우리는 뻣뻣한 침묵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바닥의 금을 보며 걷던 중 한 블록의 경계를 밟는 순간 울려댄 커다란 진동소리에 나와 선배 모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하마터면 손에 든 음식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동의 원인이었던 폰을 꺼내든 선배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유는 이미 예상이 갔다. 선배가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답지 않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듯 애절하게 날 쳐다봤다.

그렇게 쳐다봐도 나도 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난처하지만, 선배의 무력한 모습은 왠지 도무지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래요, 부부라면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무서운 일도 함께 마주하는게 맞겠죠.

나는 손을 내밀어 선배의 폰 화면을 터치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며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어, 형….”

“라우더! 재밌게 놀고 있었어?”

구엘 씨의 밝으면서도 묵직한, 지금 듣기에는 그 무엇보다 겁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추천해준 시장도 가봤어. 그러고보니 잊을 뻔했네. 우리는 거기서 하도 이것저것 먹어가지고 저녁은 따로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미리 말 못해서 미안, 대신 동파육인지 뭔지 하는 요리를 좀 포장했으니까 이따 들어와서 먹도록 할래?”

“아니, 안 그래도 나야말로 오늘 말했던 시간에 못 들어가게 되어서 연락한 거야. 갑자기 예전 동창들이랑 저녁 약속이 잡혀서. 미안해.”

선배가 괜찮다고 대답하던 찰나, 통신 저편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지더니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설마 그 동생이라는 사람이랑 통화하는 거야? 여기 와 있어?”

“사람을 집에 초대해놓고 너 혼자 출근하고 약속을 잡다니, 손님 대접이 말이 아니네~. 이럼 차라리 장소를 너네 집으로 옮기는 게 어때?”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 한 명과 반대로 나긋한 남자 목소리 한 명. 어느 쪽이나 건수 제대로 잡은 듯한 묘한 장난기가 느껴졌다. 이분들이 방금 말한 동창인가?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해?! 어차피 얘네도 저녁 생각 없댔거든!”

구엘 씨 목소리, 영 여유가 없다. 우리 앞에서는 보여준 적이 없는 자세이다보니 이런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휘둘리는 모습 같은건 상상이 잘 되지 않아. 고작 몇분 전까지의 속을 알 수 없는 무서운 거리감이 무색하게, 이렇게 들으니 또 그냥 편안한 또래의 남자 같아졌다. 여태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잘됐다. 그럼 오늘은 우리끼리 먹고 내일 동생 내외를 따로 보지 뭐. 계속 궁금했다고.”

“뭐? 너희끼리만 만나게 해줄 것 같냐?!”

“동생 씨, 그럼 내일 낮에 만나? 좋은 저녁 되시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아, 미안, 라우더. 끊어야겠다, 나중에 봐!”

전화가 끊기고, 선배와 나는 다시 침묵 속에 남겨졌다. 이내 선배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길래 나도 바짝 뒤를 쫓았다.

정류장에서 내려 저택 쪽으로 나아가는 길, 도로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와 새소리, 행인들의 말소리로 누그러진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도 역시, 타의가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기다렸다는 듯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좀 놀랐던 거지.”

“그렇죠.”

“…….”

“…….”

“…….”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피하는 느낌도 아니었고요.“

“그렇지.”

“…….”

“그 아줌마한테도 평가가 좋았는걸.”

“그렇죠.”

“…….”

이래서야 밑도끝도 없겠다. 단지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혼란스러울 뿐이지 않나? 이런 정도로 여행 둘째날부터 전부 망쳐버리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나는 선배 쪽으로 몸을 돌려 말을 꺼냈다.

“한번 알아보면 되죠! 기사로도 난 얘기라잖아요? 우리가 검색 한번 안해봐서 실수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선배 혼자지만.

“까짓거, 한번 훑어보고 부족하면 구엘 씨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죠!”

“...응, 네 말대로네. 그럼 오늘은 들어가서 형이 오기 전까지 같이 한번 기사를 찾아보자. 형이 오면 한번, 떠본다거나 하지 뭐.”

“좋아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이래봐야 그 집에서 쫓겨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아차, 방금은 조금 심하게 과장해버렸다. 선배가 맞장구는 치고 싶은데 상상조차 하기 싫은 듯 입술을 비틀고 있었다.

“에이, 구엘 씨 여태 봤잖아요! 그럴 분이 아니신 거.”

물론 ‘직접’ 본 날은 전부 합쳐 나흘 정도지만. 여전히 확신은 없는 듯 “그런가….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는 선배를 잡아끌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엘 씨가 귀가한 건 오후 아홉시 가까이 되어서였다.

우린 그보다 한참 전에 여전히 삼엄한 경계의 거위들 눈치를 보며 정원을 지나쳐(빔 제타크란 분은 이쯤에서 죽었던 걸까, 따위의 무서운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내쫓겼다.) 들어와 있었고, 저마다 보던 화면에 집중하느라 현관문을 열리며 구엘 씨가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를 듣고 우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형 왔어?”

“식사 잘 하고 오셨나요?”

구엘 씨는 우리를 발견하고 잠깐 눈이 커지더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되었다.

“응, 괜찮았어. 너희도 종일 잘 지냈고?”

“어. 여러가지 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앉아서 더 얘기할 수 있어?”

당장에 하고싶은,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많아. 하지만 일단 순서가 있겠지. 분위기도 풀어야 하고. 구엘 씨는 겉옷을 벗어들고 말했다.

“아아, 안그래도 나도 너희한테 전달할 게 있거든. 먼저 옷 갈아입고 올테니 소파에 자리잡고 있을래? 마실 것도 안 필요해? 과일주스도 있고 차나 커피도 있고, 물론 그냥 물도 있고. 주류도 있기는 한데-”

“나는 차면 돼. 어제처럼.”

“저도요!”

“좋아, 잠시만 기다려줘.”

잠시 후 우리는 첫날처럼 소파에 구엘 씨를 마주보고 찻잔을 한잔씩 손에 쥔 채 둘러앉았다. 먼저 얘기를 시작한 쪽은 구엘 씨였다.

“그, 아까 전화할 때 있었던 걔네 둘 있잖아, 내 동창인데, 너희랑 만나보고 싶다고 졸라대서 말이야. 내일 오후 두시에 시간을 좀 내서 네명이 만날 수 있을까? 카페 쿠에타라고,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곳이야. 싫다면 안가도 상관없어.”

구엘 씨, 졌구나. 그렇게 질색을 해놓고 자기 입으로 중개를 해주고 있다니.

“솔직히 불안해서 나라도 있을 때로 잡고 싶었는데 그조차도 양보해주지 않더라고….”

심지어 완패다. 그런 걸로 시무룩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괜찮아. 페트라는 어때?”

선배가 먼저 가볍게 답했다. 나도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 뭐 좋아요, 구엘 씨랑 가까운 사람들이면 믿어도 되겠죠.”

“못미더워서 문제인건데….”

눈썹을 내리깔고 웅얼거리는 구엘 씨, 뭔가 신선하네.

“안그래도 궁금하기는 했어. 정말로 안좋은 상대라면, 억지로라도 이어주지는 않았을 거지? 형이 우리한테 나쁜 일이 생기게 둘 리는 없으니까. 형은 우리 결혼식 때 와서 웬만한 우리 지인 한번쯤 봤잖아. 우린 형의 주변인을 거의 모르니까. 형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구엘 씨의 볼이 살짝 상기되고 시선이 방황하더니 이내 쑥스런 미소를 지었다. 선배 말대로 우리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이긴 하다. 구엘 씨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4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 듣고 싶어서. 구엘 씨가 결국 만남 주선을 하러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변인에게 그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거… 기쁘네. 솔직히 걔네한테 좋은 소리를 기대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하. 좋아, 그럼 걔네한테 얘기는 해둘게. 그래서, 너희의 오늘 관광은 어땠어?”

그래서 우리는 종일 다녔던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갈 때부터 들어올 때까지, 선배가 거위들에게 얻어맞을 뻔한 일, 점심을 먹은 식당, 낮에 보내줬던 사진들에 대한 설명, 시장에서 유독 맛있었던 요리들… 구엘 씨에게는 익숙하기만 할 이야기들을 그는 적극적으로 리액션을 하며 즐겁게 들어주었다. 좋아, 분위기가 느슨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야외 전시회에서 산 기념품을 꺼내며 구엘 씨에게 새 모양 문진을 내밀었다.

“이게, 거기서 형 주려고 산 기념품이야. 수공예로 만든 거래.”

1초… 2초… 3초… ….

선물에 대한 리액션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반응이 없는 그에게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는 순간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그걸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아아~! 우리 거위들 닮아서 고른 거야? 날 위해? 너무 귀엽다, 이거. 진심으로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그러면서 문진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반응이 늦게 왔던 것 치고 정말로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다. 달가움과 반가움 사이의 무언가. 그 갭에 위화감이 느껴져 선배 쪽을 힐끗 보면 그도 분명 당황해서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구엘 씨는 선물을 가슴 가까이에 안고 희색 가득한 얼굴로 어루만지다 문득 정신이 돌아온 듯 우리에게 말했다.

“그럼, 더 할 얘기 있어? 내일 만날 애들에 대해서 물어본다던가.”

있는데요. 있는데, 왠지 지금 그 얘기를 꺼내선 안될 것 같다. 지금의 구엘 씨에게 꺼내기 그리 현명한 대화 주제가 아닐 거야. 내 직감이 그래. 망설이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으니 구엘 씨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있지.”

선배가 먼저 용기를 낸 듯 운을 뗐다.

“그으… 그러고보니 그 사람들 이름을 아직 못 들었잖아. 그정도는 알고 만나야지.”

원래 하려던 얘기는 그게 아니었을 텐데요, 하지만 임기응변은 자연스러웠어요.

“아아, 이름, 그걸 안 가르쳐줬구나. 목소리로 대충 눈치챘겠지만 여자 하나 남자 하나거든. 여자는 미오리네 렘블랑이고 남자는 샤디크 제네리라고, 혹시 들어봤어? 걔네가 나보다 활동영역도 넓고 유명해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으음, 그렇게 말하면 곧장 떠올리기도… .”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가만, 제네리라면… 그래슬리 오너의 성이 제네리 아닌가요? 그나마 일로 몇번 본 성이네요.”

“맞아! 걔가 현 회장 아들이거든. 미오리네도 마찬가지고. 그러고 보면 새삼 너희는 이쪽 세계에 정말 관심 없었구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하기사 그쪽이 낫기는 하지. 사교계는 몸담는 사람에게나 구경하는 사람에게나 거품만 많고 영양가는 없거든. 생산하는 거라곤 가십과 루머와 순간포착 사진 몇장밖에 없어서 말이야. 여튼 더 알아보고 싶다면 둘다 공인이니까 기사 몇개 찾아보는 게 빨라.”

와, 구엘 씨 소식도 전화나 메일보다 인터넷 기사가 더 빨랐는데 그런 분들이 서로 지인이고 심지어 학교부터 같이 다니던 사이라니. 재벌들이란 도대체.

“이젠 정말 더 할 얘기 없나? 슬슬 나도 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내일도 출근이고.”

“으, 으응….”

결국 원래 하려던 질문은 하나도 못하게 생겼다. 오늘 오후에 하던 생각과 달리 본인 앞에 얘기를 꺼내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구엘 씨가 “그럼 오늘도 좋은 밤.”하고 일어나 2층으로 향하려는 순간 선배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웠다.

“형!”

“뭐야?”

“그 혹시, 형의,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쓰던 방을 가르쳐줄 수 있어?”

이것도 원래 질문이 아닌데. 아주 아닌 건 아니다. 이건 하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도 원래라면 다른 많은 질문들의 흐름과 함께 나왔을 질문. 그러나 구엘 씨가 품안의 문진을 만지작거리며 갑자기 왜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그러더니 시원하게 답해줬다.

“너희 방 쪽 말고 반대쪽 복도에 끝에 있는 더블도어 있잖아. 거기가 아버지가 쓰던 서재 입구야. 복도 오른쪽에 난 작은 문이 서재랑도 연결된 아버지 침실. 원한다면 가봐도 되는데 내가 음, 여러 사정으로 수년 째 마지막으로 사용하실 적 모습 그대로 방치해둔 곳이라 별로 기분좋은 공간은 아닐 걸. 좋을대로 해.”

“으응, 고마워.”

“천만에, 네 집처럼 지내라니까. 그럼 정말 자러 간다? 선물은 정말 고마워. 마음에 들어.”

구엘 씨는 우리의 선물을 소중히 안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좋아, 비록 원하는 내용은 거의 캐내지 못했지만 확실해진 것은 있다. 구엘 씨는 죽음의 흔적이 있는 공간을, 범위가 좁기는 해도 충분히 불쾌할만한 공간으로 보고있고 우리를 거기에 가까이 두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 오히려 반대편에 두는 사람이란 사실이다.

적어도 오늘 밤 꿈자리가 사나울 걱정은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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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꾸 창작자

    뻘설정 제타크=중장비 비롯 생산기기 취급 그래슬리= 자동차시계악기 등등 어디든 들어가는 정밀부품 취급 베네릭트(별개기업)=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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