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합주
아도스텔라 배경의 지구에서 활동하는 한 밴드멤버 시점의 이야기
“에이씨, 공연은 물 건너갔네….”
“공연을 걱정할 때냐? 살아서 나갈 수 있는지나 걱정해야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 쪼들리는 형편에 공연비 좀 챙겨준단 말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더니 오자마자 거기가 분쟁지대로 지정될 줄은.”
“여기로 투어 오자던 거 누구 아이디어였냐?”
“너요, 너.”
옆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귀를 닫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양손 검지를 귓구멍에 쑤셔박는 정도로는 청각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어 눈마저라도 꼭 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더 최악인 것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으면 멀리서부터 전해지는 바닥째로 흔드는 육중한 진동이 훨씬 잘 전해진다는 것이다. 몇분만에 “야, 치사하게 너 먼저 죽을 셈이냐.” 하면서 암논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숨마저 참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죽은 척한다고 폭격을 피해서 떨어질 것도 아닌데, 자세 좀 편하게 하고 있지 그래.”
“넌 괜히 가만히 있는 롯한테 시비야. 전쟁 한복판에 던져진 건 처음일 수도 있지.”
갈리아의 배려는 고맙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너무 꼭 감고 있어 시린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처음 아니야.”
“음?”
“처음 아니야, 전 밴드에서….”
“전 밴드? 아아-, 해체되어 없어졌다던 전 밴드.”
“전번에도 이렇게 재수없이 공연하러 왔더니 전쟁이라도 났냐?”
세 명의 시선이 내게로 꽃혔다. 무대 위에 설 때는 시선이 아무리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지금은 고작 여섯개의 눈동자도 이렇게 거북하다. 일부러 여태까지 혀 뒤에 숨겨오던 이야기를 꺼내려니 삐걱이는 걸지도. 하지만 앞으로 며칠안에 죽을지 살지도 분명치 않으리라 생각하니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응. 투어를 와서 첫 공연을 한 그날 밤에… 해당 지역에서 그때까지 대치만 하고 있던 두 부대 중 한 쪽이 기습공격을 감행했어.”
그날의 기억이 엄습하듯 주위를 색칠하기 시작했다.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때의 풍경과 지금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으니까.
“기습을 당한 쪽도 대응공격에 나서고… 전투는 민간인들이 장사를 하던 시내까지 내려왔어. 그러다 모빌슈트 한 대가 웬 모텔 건물을 방패삼아 뒤로 피신한 거야. 거기서 파손된 무기를 재장전하거나, 뭐 재정비를 하려던 모양이지. 그런데 추격하던 모빌슈트가… 빔 머신건으로 사이에 서있는 모텔에 대고 빔을 쏟아부었어.”
저 멀리서 먹먹한 폭음이 들리자 잠시 말을 멈췄다. 듣고있던 동료들은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요나가 방금 공격으로 죽어버렸으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이 들려던 차, 창문이 낮은 진동음을 골았다. 다행히 꽤 멀리서 터졌는지 그리 큰 충격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에 숨은 모빌수트는 걸레짝이 되었고… 모텔은 말할 것도 없었지.”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때 그 모텔에는 다른 밴드 멤버들이 있었어. 공연이 끝난 뒤에 거나하게 마시고, 취해서는, 공연을 보러왔던 관객들 중 여성팬 몇명을 데리고 들어갔었거든.”
“와아, 갈때도 예술이네.”
처음으로 암논이 끼어들었다. 눈치없기는 해도 그러려니 했다. 아무래도 팬이랑 난교니 뭐니 하는걸 해보는게 꿈이라는 놈이니까. 섹스와 마약은 그가 밴드를 시작한 이유래도 좋을 정도의 그에게 로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것치고 정작 한번도 실천에 옮겨본 적은 없는 찌질이 새끼 주제에.
“나는 그때 예산 조정과 공연비 분배를 위해 혼자 구석진 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어. 그러다 한밤중에 땅이 흔들리고 폭음과 쇳덩이 부딪히는 소리, 온갖 육중한 것들이 떨어지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뭐어, 아침이 되니까 공연 수익은 나 혼자만의 것이 되었지 뭐야.”
냉소가 섞인 마무리에 다들 말을 고르는 듯 천장을 보거나 허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밖에서 무언가 작게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모빌슈츠가 이쪽에 오는가 했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요나가 뛰어들어왔다.
“아…! 그래도 다들 살아있었네, 다행이다.”
“우리가 밖을 싸돌아다니던 너보단 안전했을걸. 그래서 우리 트럭은 무사해?”
요나는 숨을 고르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차 위로 부러진 가로수 둘이 쓰러져있어 당장은 꼼짝도 못하게 생기긴 했지만 전체적인 외형이나 안의 장비들은 아직 쓸수있어.”
“그것 참 잘됐네.”
“거기다 휴대용 라디오까지 챙겨왔지! 적어도 밖에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어야지.”
“정말로 수고했어! 꼭 필요한 거였는데.”
“아직까지 송출할 기지국이 남아있다면 말이지….”
미가가 비관적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라디오 전원을 켜서 주파수를 맞췄다. 한동안 치직거리는 소리만 들리더니 반가운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다. 갈리아가 약간은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음이네. 기다리다보면 현황 보도가 나올 거야.”
“그래. 조금만 기다려보지, 그럼.”
대기음만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라디오를 머리 위에 둔 채 매트리스 위에 멤버 다섯이 꾸역꾸역 나란히 누웠다. 바닥에 납작하게 누울수록 멀리서 오는 충격은 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몇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허밍을 시작했다. 이어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발끝을 튕기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당장 악기조차 손에 없는 빈털털이 밴드맨들의 합주 속에 잠시 몸을 내맡기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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