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知火
알 수 없는 불빛
"부탁드립니다, 무녀님. 제발 저희 마을 좀 살려주십시오."
나이 든 사내의 목소리에 무녀, 카구라즈카 유레이는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시선은 기둥 너머를 잠시 향했다가 이내 사내에게 돌아왔다. 허공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무녀님?"
"아, 죄송합니다. 잠시 소리를 듣느라."
소리? 사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신과 소통이라도 해봤던 걸까 생각한 듯 끄덕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근심과 걱정에 잠겨있었다.
"최근 들어 마을에 도깨비불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돕니다. 저를 포함해 실제로 본 이들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도깨비불이라… 특별한 특징이라도 있습니까?"
"처음에는 하나에 불과했다가 갈수록 선처럼 늘어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가 되면서 사라지더군요. 게다가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해도 오히려 멀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해를 끼친 적은 있습니까?"
"일주일 전, 마을의 창고 하나가 전소했습니다. 창고가 불타기 전에 주인이 도깨비불을 보았다 하더군요. 그 이후부터 마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녀님, 이러다 저희 마을은 전부 불타버리고 말 겁니다. 부디, 도움을…!"
"… 알겠습니다. 방책을 마련해 보죠."
그 말에 사내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 말하고 마을의 위치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예로부터 인간이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 불길한 일이 일어나면 신에게 기대곤 하였으니, 신의 말씀을 듣는 무녀에게 부탁한 것만으로도 사내의 걱정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큰 걱정을 던 사내는 이후 사소한 고민거리까지 유레이에게 말한 뒤, 작은 위안을 안고 신사를 떠났다. 최근 들어 신사에서 자주 온다 싶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 유레이는 떠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원인을 정확히 특정할 수 없었다. 하긴, 원래 이런 의뢰는 현지 조사가 필수적이니까.
"그래서, 마가. 어떻게 생각해?"
유레이는 고개를 돌려 기둥을 바라봤다. 그러자 곧 기둥 뒤에서 붉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여성, 도우메키 마가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불렸지만 그리 놀라지 않은 듯 마가는 가벼운 태도로 유레이의 곁으로 걸어왔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 일부러 기척을 냈잖니."
"역시 지부장님이라니까~ 아, 지금은 무녀님이라 불러야 했죠?"
장난스레 웃던 마가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흔들었다. 흰 봉투 앞에는 한자로 의뢰서라고 적혀있었다. 의뢰라면 전화로 알려줘도 충분했을 텐데. 의뢰서를 바라보던 유레이는 용건을 말해보라는 듯 마가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무소 쪽으로 의뢰가 들어와서 말씀드리러 왔는데~ 이거,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아무래도 방금 방문하신 분이랑 같은 마을 출신인 분이 의뢰하신 것 같거든요. 불탄 창고의 주인분께서 의뢰하신 거라."
"주인이?"
"네. 간악한 요괴를 붙잡아서 혼쭐을 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일반적인 사고나 범인이 있는 건 아니냐 한 번 더 물어봤는데, 분명 요괴의 짓이라고 확신했어요. 도깨비불을 봤다면서."
"… 얽혀있다고 판단하고 있구나."
신사에 부탁을 하러 온 이는 도깨비불이 불길하기에 그것을 잠재울 방도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허나 사무소에 들어온 의뢰는 범인을 알고 있다는 투의 의뢰. 도깨비불보다도 범인으로 생각되는 요괴를 먼저 언급했다. 그 점에서 레니게이드가 얽힌 사건으로 판단한 것이리라. 정말로 요괴가 있다면 레니게이드와 관련된 사건일 확률이 높으니까. 유레이가 마가의 추측을 계산하는 동안 마가는 태평한 호기심을 꺼내 들었다.
"만일 요괴의 짓이라면 어떤 요괴가 범인일까요?"
"방금 온 분의 증언을 토대로 추측하면… 시라누이일까. 처음에는 오야비라는 불빛 하나지만, 오야비의 좌우로 수많은 불빛이 생겨 이내 수평선을 뒤덮는 요괴야. 증언과 흡사한 모습이지. 하지만, 시라누이는 바닷가에서 나타나는 요괴고 마을 위치를 볼 때 바닷가는 없을 테니까…"
"역시 얽혀있겠죠."
마가는 조용히 웃었다. 불, 시라누이라면 이미 눈앞에 있지 않느냐고. 수없이 불타오를 수 있는 불꽃이. 화를 화로 제압할 수 있는 오니가. 그래서 온 거구나. 유레이는 웃음 속에 담긴 의미를 읽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마가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가의 힘은 불안정했다. 에이전트로서 뛰어난 힘을 갖고 있으나 폭주의 위험성이 높았다. 가장 공격성이 높은 살육의 충동을 느끼는 오버드인데다가, 성장 배경에 쌓인 스트레스는 언제 갑자기 레니게이드를 자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충동 제어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거지만…
"마가. 다른 직원들은?"
"한 명은 다른 의뢰 받아서 처리하러 갔고, 임무 나간 둘은 아직 복귀 안 했고, 아! 의뢰 처리하러 간 거 있잖아요. 그것도 파헤치다 보니 레니게이드 연관 사건이라서 시간이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고 연락도 왔었어요."
소규모 지부는 이런 점이 힘들다니까. 해결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인력이 부족하니 늘 최선의 효율을 생각하며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게. 이미 각자의 임무를 처리하러 간 에이전트들, 사무소―지부를 지킬 인력도 필요했으니… 계산을 마친 유레이는 짧게 침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올려 마가를 바라봤다. 마가는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아까부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과 관련된 일에는 그가 제격이라는 걸 자신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마가."
"네."
"언제나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해."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럼요. 다녀오겠습니다."
마가는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독에는 독으로, 괴이에는 괴이로 맞서야지. 레니게이드가 얽힌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 의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단 자신이 날뛸 수 있는 환경이 생겼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유레이가 보내길 고민한 것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부족한 것을. 유레이는 그저 마가가 이성을 유지한 채, 이번 의뢰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도우메키 마가는 발을 멈췄다. 도착한 마을은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산을 등진 마을의 풍경은 퍽 평화로웠다. 산기슭에 있는 한 건물이 앙상한 토대만 보이고 있지만 않았다면. 저게 의뢰인의 창고로군.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지만, 분명한 화재의 현장. 나중에 방문할 곳을 눈여겨보며 마가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아야카시 사무소에서 나왔습니다."
마가는 활짝 웃는 얼굴로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를 했다. 반응은 썩 달갑지 않았지만. 외부인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마가에게 향했다. 예상한 반응이라 그리 당황하지 않은 채 마가는 주머니에서 명함까지 꺼내 주민들에게 하나하나 나눠주었다. 이런 반응은 이미 예전에 겪은 적 있었으니 하나하나 동요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반응하는 게 답이라는 걸 마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곳에 의뢰를 맡긴 적이 없소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나가보시오."
"창고를 불태운 요괴를 혼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었거든요. 창고 주인분께 물어보시면 맞다고 하실걸요? 그리고 어르신께서도 도깨비불 문제로 신사에 자주 들르셨죠? 그 신사의 무녀님께서 제게 이 일을 맡겨주셨거든요."
"무녀님께서…?"
"저도 그 신사의 일을 돕고 있거든요. 안타깝게도 저는 신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이런 이상한 일은 제법 잘 해결하고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사무소에서 일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조금만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하는데요."
신사에서 유레이에게 부탁하고 돌아갔던 사내가 마가를 경계하자, 마가는 사람 좋게 웃으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무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사내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마가를 훑어봤다. 붉은 머리칼을 묶은 여성, 가벼운 셔츠와 검은 슬랙스에 검은 구두까지. 신토를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부적처럼 보이는 것을 귀걸이로 차고 있는 것을 보자, 사내는 우선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자는 태도를 비쳤다. 이 붉은 여성의 말처럼 지금 불로 마을이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맞았으니까.
"오면서 보았겠지만, 이미 불탄 창고가 하나. 그 밖에도 마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소. 그때마다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이들이 많지. 나도 보았고 말이네. 자네가 정말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있는 흔적이 불탄 창고, 도깨비불 정도라는 거네요? 흠…"
"못 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게. 우린 무녀님이 아닌 이를 쉽게 믿을 수 없으니…"
"아뇨?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추측되는 건 있는데~ 창고를 보면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할 수 있다고?"
"에이, 제가 괜히 이런 오컬트, 요괴 관련 사무소 직원이겠나요. 저희 사무소 실력 좋은 곳이에요. 모처럼 의뢰해 주신 거 조금 더 신뢰해 주셨으면 하네요."
손을 휘휘 털면서 마가는 산기슭을 바라봤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창고에서는 착각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을 내에서도 흐릿하지만, 분명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가는 이 사건이 요괴의 짓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아, 이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선 요괴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레니게이드 바이러스는 공표된 바이러스, 힘이 아니니 일반인들에게는 인간을 초월한 힘, 이상한 힘, 불길한 힘 등으로 여겨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마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다시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면, 사내는 아까와 달리 제법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마가의 할 수 있다는 소리가 허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을의 경계심 어린 태도에도 끄덕하지 않는 미소만 보아도 저 여인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원하는 대로 하게 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걸로 일이 해결되면 좋은 것이고 안 된다면 쫓아내면 그만일 테니. 머릿속에서 짧은 셈을 마친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마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곧장 창고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을 등진 그 얼굴에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 모습은 조금 전까지 보이던 밝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살기로 느껴질 정도의 날카로운 기세가 서려 있기까지 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 보통 요괴니, 신이니 하는 것들에게 의지하는 것들은 하나 같이 저런 식인가? 자기들이 맡겨 놓았는데도 신뢰하지 못하고, 해결해도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볼 작자들. 마가는 불만스럽게 발치에 채인 돌멩이를 툭 찼다. 일이니까 상냥하고 협조적인 것처럼 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포장에 불과하니 내용물은 붉게 썩어가는 것이다. 유레이가 주의를 준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일을 해내는 것은 좋으나 그 과정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마가에게 치명적이었으니까.
"생각해서 뭐 하냐. 괜한 화만 나고 말지."
주민들이 어디까지 협조해 줄지는 모르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그것이 오컬트 사무소의 해결사가 맡은 역할이었으니까. 충동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으며 마가는 눈앞의 창고를 바라봤다. 앙상한 뼈대만 남은 모습은 안쪽에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는 물건들 몇 개만 없었더라면 창고라고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검게 그을린 자국들은 분명한 화재의 현장이었다. 이상한 점이라면 창고의 중앙은 눈에 띄게 그을린 자국이 적었다는 점일까. 마치 불이 그곳만 피해 가기라도 한 듯한 흔적이 있었다. 불은 바깥에서 시작된 것일까, 안에서 시작된 것일까. 흔적은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안쪽이 바깥 면보다 더 그을려 있었으니.
육안으로 보이는 흔적을 살펴본 마가는 가볍게 창고 중앙의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평범한 불이 아니란 것쯤은 창고 부근에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익숙한 레니게이드의 잔향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마가의 샐러맨더 능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분명 샐러맨더 특유의 힘이지만… 대기 중에 남아있는 기운이 미묘했다. 보통 샐러맨더는 열에너지의 온도를 조절하여 불을 피우거나 얼음을 얼린다. 이 레니게이드도 그런 류처럼 여겨지지만…
"이상한데."
샐러맨더로서 느껴지는 미묘한 차이가 마가의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불을 일으켜 화재를 유발했으니, 상대는 고열을 사용하는 샐러맨더일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마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샐러맨더이면서도 샐러맨더 같지 않은 이상한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지금껏 다양한 오컬트 의뢰를 받아왔지만 지금 같은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흔적을 쫓으면 범인을 못 잡을 것도 아니지만 이 기묘한 감각은 무엇일까. 노이만이 아닌 그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끙끙 앓던 마가가 범인을 붙잡는 것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을 무렵, 마가는 빠른 속도로 팔의 뼈를 발도하듯 뽑아내어 제게 날아든 불꽃을 갈랐다. 《워딩》과 동시에 날아든 불꽃은 목표를 맞추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불타 사라졌다. 뼈의 검을 쥔 채로 마가가 주위를 경계했지만 《워딩》의 주인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불꽃은 분명히 마을 쪽에서 날아왔다. 범인은 마을 안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점차 옅어지는 《워딩》을 느끼며 마가는 뼈의 검을 다시 자신의 팔에 돌려두었다. 명백히 사람을 노린 공격이었다. 건물, 잔불을 일으키기만 하던 것이 이제는 사람을 해치려는 것일까. 이 이상 시간이 소요되면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마가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자신의 의뢰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게! 무사한가!"
"어머, 무슨 일인가요?"
"이쪽에서 도깨비불이 보였단 말일세!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말씀해주셨던 도깨비불은 보지 못했지만… 흔적은 보긴 했지요. 저를 태우려 들더군요."
"역시 마을의 소란은 그 잔악한 요괴 놈이 벌인 게로군! 그래서 뭔가 알아낸 건 있는가? 무사한 걸 보니 상대하는 비책이 있을 법한데."
의뢰인은 탐욕스러운 눈을 빛내며 마가를 바라봤다. 방법을 알면 당장이라도 흉내라도 낼 기세였다. 무사한지 살핀 것도 자기가 고용한 사람이 불타버리면 곤란한 데다 퇴치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겠지. 마을에서 보이지 않던 것도 나름대로 이곳저곳 들쑤시고 왔기 때문이리라. 이 의뢰인은 의뢰할 때부터 자기 재산에 피해를 준 것을 혼쭐내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마가는 그런 상대를 가볍게 흘겨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었다.
"있긴 합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뭬야! 진척 상황 하나도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이냐! 의뢰는 내가 했을 텐데!"
"계약 사항에 있었잖습니까. 해결 방식이나 과정 자체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의뢰인께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으니, 해결은 저희 측에 일임해 두시죠."
"해결할 수 없으니 수작 부리려는 것은 아니고?"
"하하핫, 어르신. 농담이 과하십니다."
웃음소리를 흘리던 마가는 보랏빛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의뢰인을 응시했다. 의뢰인은 그 기세에 눌렸는지 빠른 시일 안에 결과를 내놓아야 할 거라며 소용도 없는 으름장을 놓고는 자리를 떴다. 의뢰인을 따라왔던 몇몇 주민들도 마가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면서 그를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마가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힘줄이 가득한 손은 이성으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날뛸 것 같았다. 얼른 일을 마치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불태울 게 이 범인이 아니라 마가 자체가 되어버릴지도 몰랐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옛날 기억이 살살 새어 나오는 것이 불쾌했다. 범인만 붙잡으면 당장 돌아가야겠어. 마가는 끓어오르는 불꽃을 최대한 죽이며 다시 조사를 진행했다.
야심한 새벽의 산기슭. 어두운 수풀을 헤집으며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다. 거친 숨을 연신 뱉으며 달음박질하는 사내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공포에 질린 사내가 절벽에 몰리자, 그의 뒤로 불빛이 떠올랐다. 붉은 불꽃이 하나. 그리고 둘, 넷, 여덟… 점차 수를 불려 나가는 불꽃은 선으로 이어졌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는 듯 타오르던 불꽃 사이로 사내를 향해서 불똥이 튀었다. 작은 불씨는 사내에게 향하자마자 거대한 화염으로 돌변해 그를 덮쳤다. 붉은 해일에 뒤섞인 사내는 검은 잿더미만 남길 듯이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타올랐다.
"꼴좋구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픽 웃는 이가 있었다. 선으로 이어진 불꽃의 한구석에 나온 이는 불타는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얼굴은 후련했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사내에게 앙금이 쌓였던 듯 타오르는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재조차도 남기지 못하게 그의 죄만큼이나 불타오르도록. 붉고 붉은 화염은 어두운 산 한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산불로 번질 수도 있지만 불타는 팔을 가진 자는 그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불이 꺼지지 않게 화력을 더욱 올리고 있었다. 마치 태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러나 사내는 타오르지 않았다.
불꽃이 타는 소리 사이로 작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귓가에 닿자, 그는 눈을 의심했다. 붉은 파도를 헤치며 나온 것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을음 하나 남지 않은 모습으로, 불꽃으로 착각할 듯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나온 것은 마을에 방문한 이방인이었다.
"음~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거대한 화염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둘러보듯 훑으며 나온 여성은 씩 웃었다. 그 시선은 눈앞에 마주한 자의 팔에 닿아있었다. 불타는 팔, 저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란 걸 단박에 꿰뚫고 있는 시선이었다.
"어, 어떻게 그 불 속에서… 아니, 애초에 내가 태웠던 것은…!"
"아, 그거? 물론 미끼로 던진 거였지. 설마 이렇게 냉큼 받아먹을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히도 쌓인 게 많았나 보지? "
여유를 잃지 않는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자리했다. 이방인, 도우메키 마가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닌 지난 몇 시간 동안의 노고를 잠시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자들에게 아첨하며, 될 수 있는 한 정보를 긁어모았던 시간, 넉살 좋은 척 웃으며 주민들의 잔심부름을 도와주어야 했던 그 찰나를. 그렇게 모은 정보를 종합해 보면 창고가 불탄 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과거에 주웠던 돌멩이가 알고 보니 보석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흔해빠진 물건 하나라도 허투루 관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비싼 돈을 주고 특이한 물건을 수집하기도 했다. 골동품으로 묵혀두고 나중에 산값의 배로 쳐서 팔기 위해서 투자를 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눈에 띌 정도로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이에게는 그만큼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도 있는 법이다. 눈앞에 있는 이 자가 바로 대표적인 예시중 하나이고.
사실, 붉은 여성, 도우메키 마가는 눈앞에 있는 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알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맡은 의뢰는 요괴를 발견해 '혼쭐내주는 것'이지, 요괴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보를 모은 것도 그저 요괴라 불리는 자의 정체를 확고히 하고 꾀어내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도우메키 마가에게 있어서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의뢰자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떠한 연유로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의 힘을 발현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불은 네 전유물이 아니거든. 아무튼… 잡았다, 시라누이."
"큭… 역시 그 작자의 끄나풀이라는 거냐! 이렇게 된 이상 물러날 수도 없겠지."
"물러날 수 없으면, 뭐… 어쩌려고? 날 이겨볼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그래! 어떤 잔재주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이 힘만 있다면 두려울 것 없으니 말이다!"
시라누이는 한껏 붉은 화염을 팔에 두른 채 주먹을 쥐었다. 불은 그의 가장 든든한 무기였다. 이 힘을 다루기 위해서 지금껏 시행착오가 여러 번 있었으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뒤였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방해물 정도는 거뜬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과 기대가 서려 있었다. 이 자만 넘어선다면 그자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으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지금 그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음~ 뭐, 좋아. 사실 나도 말로 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마가는 상대를 가볍게 훑고는 긴장감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기지개를 쭉 켰다. 적의를 품은 적 앞인데도 불구하고 마가는 전투태세조차 갖추지 않았다. 도리어 검지를 까닥이며 적을 도발했다.
"덤벼."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
상대는 그 도발을 바로 받아들였다. 붉은 화염이 팔에서 뻗어 나와 마가를 향해 맹렬하게 솟구쳤다. 붉은 파도는 순식간에 마가의 눈앞까지 다가왔으나 마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가는 이 불이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가 마가에게 파고들었으나 그는 평범한 열기에 상처 입는 몸이 아니었다. 붉은 파도는 분명히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의 힘으로 만들어진 화염이지만, 그 열기는 오버드를 상처입히기에는 부족했다. 이펙트의 수준이라고 부를 수 없는 힘. 겉모습은 제법 이펙트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인 힘은 이지 이펙트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마가는 처음 불길에 휩싸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상대에게 걸어갔다. 여전히 그을음 하나 남지 않은 채로.
"너, 넌 대체 뭐냐! 정체가 뭐냐! 어째서 타지 않는 거지? 그 화염이 두렵지 않은 거냐?!"
불을 피운 것은 시라누이의 쪽이었지만 그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분명 타올랐어야 할 자는 태평하게 불꽃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다루는 힘 또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건만 그 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그는 겁을 먹어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은 분명 자신을 칭하는 말일 터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자가 시라누이라는 말에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을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소개해 줬는데, 못 들었나? 아야카시 오컬트 사무소에서 나온 직원이라고 말이야. 오컬트를 마주하는 게 일인데 이런 거에 겁먹어서야 쓰나."
마가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괴물 보는 듯한 시선에는 제법 익숙해져 있지만 그것이 유쾌하단 뜻은 아니었으니까. 자기도 지금 그런 힘을 다루고 있으면서 겁이나 먹기는. 보랏빛 눈이 서늘하게 빛을 내며 불꽃이 치솟는 팔을 바라봤다. 저자가 구사하는 힘은 분명한 샐러맨더의 힘. 그러나 위력에 비해서 느껴지는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의 강도가 이질적이었다. 단순히 갓 각성해서 컨트롤이 미숙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힘 자체가 한 곳에만 몰려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마가는 눈을 크게 뜨며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쥐었다. 왜 이제야 깨달았지? 이상하리만치 팔에 집중되어 있는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와 그에 비해 팔을 제외하고는 느껴지지 않는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오버드라면 전신에서 레니게이드 바이러스가 느껴져야 했다. 더구나 지금의 그는 한껏 힘을 휘두르고 난 뒤였으니 팔에 힘이 집중되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위의 레니게이드 바이러스도 자극받아 활성화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오직 팔에서만 힘이 느껴졌다.
"시라누이는 네가 아니라 이 팔이었네."
상대가 옴짝달싹도 못 하게 붙잡은 마가는 허탈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자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왔고, UGN과 함께 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에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유레이라면 이런 것을 본 적 있었을까?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판단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힘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조금 더 완만한 방법을 강구했겠지. 그 사람은, 그자는… 요괴로 여겨지던 나와는 달리 무녀로서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때려눕히는 걸 기본 전제로 하고 있던 나하고는 다른 인간이니까.
마가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예상치 못한 케이스를 마주했기 때문일까 불쾌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런 팔 하나로도 요괴로 여겨지는데, 전신에 그런 힘이 흐르고 있는 나는 이 마을 주민들의 눈에 어찌 보였을까. 어쩌면 나도 힘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 괴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이 의뢰를 해결한 사실을 알리면 분명 그자들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다. 그 치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다루는 것은 괴물이나 다름없을 테니.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괴물 취급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전부 태워버리자.
태워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그런 취급을 받지 않을 테니까.」
"…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
"네, 네? 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 저… 그런데… 슬슬 팔이 아픈데 놓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태워버리라고 했잖아."
"저,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무섭게 팔만 노려보고 계셨잖아요!"
시라누이가 깃든 상대는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힘으로 감당이 안 될 상대란 것도 알았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에게 있어선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자신 있던 화염을 그을음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빠져나오질 않나 눈을 깜박이니 눈앞에 다가와 있질 않나, 팔을 붙잡은 힘은 어찌나 강한지 발버둥 칠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팔을 분지를 듯이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걸었냐니! 눈물을 찔끔 흘리던 그는 문득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 저 그… 그러고 보니 저도 허공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목소리?"
"예…! 제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힘을 빌려주겠다고… 그, 그러고 나서부터 팔이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 어디에서 들렸지?"
"부잣집의 창고에서 들었습니다. 물건을 가져다 두라고 하길래 들렸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말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저, 정말로 그게 다입니다! 창고에서 들린 목소리가 제가 바란다면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힘을 빌려주겠다고 했다고요. 그 목소리가 저를 어떻게 도와줄지는 몰랐지만 평소에도 그 주인 작자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말했더니 그날부터 불꽃을 만들 수 있게 되었죠. 이게, 지금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 그러니까 이만 놓아주시지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예!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을 뿐입니다요.”
억울하고 두려운 얼굴은 마가를 향한 채로 지금 자신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고하고 있다고 대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가는 시라누이가 깃든 이의 팔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 팔에 깃든 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의뢰인의 바람대로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맞겠지만… 솔직히 불타는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대로 구속한 상태로 UGN측에 연락을 취해서 사건 종료 및 기억처리니, 뭐니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겠지만, 다른 마음이 피어나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욕망, 오래 전부터 마가에게 쌓여 있던 원한을 건드리는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에.
억울함을 풀 수 있는 힘. 태어날 때부터 재앙으로 여겨져 온 이에게 달콤하게 들리는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목소리의 말대로 애초에 전부 태워버린다면 더 이상 억울할 일도 없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을 재앙으로 여기던 마을을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고.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인간으로서 살기를 바랐기에 그 마을을 나온 거잖아. 마가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자고 생각한 순간, 다시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역시 원망스러운 거지? 너는 이 녀석보다도 더한 원망을 품고 있어.」
“… 시끄러워.”
「나는 원한을 풀어줄 힘을 나눠주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너는 그걸 바라고 있고.」
“누가 그딴 말을 믿을 줄 알고…!”
멋대로 마가의 속을 파고드는 목소리는 마가의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려는 것을 해냈다. 겁먹어 잠잠해졌던 팔의 불길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마가의 팔까지 번진 것이다. 시라누이가 깃들었던 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가를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마가에게 항변했지만 지금 마가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레니게이드 바이러스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 이에게는 단순히 불길이 옮겨붙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오버드로서 수많은 사건을 겪어온 마가는 이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덩어리가 민간인의 팔에서 자기 팔로 옮겨오는 것을 똑똑히 보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애초에 이 팔, 시라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을 품으며 마가는 다급하게 침범해 오는 낯선 레니게이드를 벗겨내기 위해서 엑자일의 힘을 발현해 자기 팔과 시라누이를 분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빠르게 목소리가 울렸다.
「―이로써 계약은 성립했다. 나는 너의 원한을 풀어줄 힘을 빌려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더 이상 분노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어지겠지.」
불길은 목소리와 함께 사그라들고 마가의 팔에는 이전까지는 없던 불꽃, 화염의 문신이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 시라누이가 깃들어 있던 이의 팔에 새겨져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말한 ‘계약’. 마가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UGN에 들어와서 배운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지식 중에는 인간이 아닌 물체 등에 감염된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EX레니게이드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수한 EX레니게이드는 계약을 통해 소유주에게 강력한 힘을 준다는 사실과 그것을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지금 자신은 유산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정황은 명백했으며 자신의 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힘은 분명히 유산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마가는 본의 아니게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시라누이라며 자조하던 존재에서 정말로 시라누이 자체가 되어버렸으므로.
“아… 망했네.”
마가가 유산과 계약한 직후, 시라누이의 원 계약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마 유산과 계약이 해제된 반동이었겠지만 마가의 입장에선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언제 계약 같은 거에 동의했다고 그래. 물론 날 괴물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작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마가는 UGN 처리반이 일련의 레니게이드 바이러스 사건이 얽힌 마을을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예상 못 한 사고를 친 덕분에 속에서 맴돌던 잡생각이 사라지며 빠르게 UGN에 연락을 취한 것까지는 좋았다. 마가의 예상대로였다면 이대로 마가는 의뢰도 완수하고, 레니게이드 사건도 해결하고 일석이조의 상태로 지부로 복귀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가가 유산과 계약해 버리는 초유의 이변이 일어나버린 탓에 마가 또한 잠시 마을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UGN은 마가가 어떤 유산과 계약을 맺은 것인지, 계약함으로써 마가의 상태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지금 마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뭐가 힘을 빌려준다는 거야. 망할 레니게이드 같으니.”
설상가상으로 계약이니 뭐니 시끄럽게 굴며 마가를 건드리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가의 팔에 깃든 채로 잠든 것인지, 혹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것인지 마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놈의 힘이라는 건 도움이 되질 않아. 태어날 때부터 그러긴 했지만 난 뭘 기대한 거야? 원망스러운 마음이 비죽비죽 튀어나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유레이가 걱정한 거, 설마 이거 때문이었나?”
때때로 유레이가 미래마저 예지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던 마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노이만이 약간의 단서만으로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신드롬이라 해도 설마 유산이 얽혀있는 것까지 읽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평소의 마가를 파악하고 있는 유레이라면 마가가 사건을 해결하던 도중에 충동에 휩쓸려 폭주하는 걸 우려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테니까. 그 사실은 마가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마가의 입장에서 이번 일은 더욱 곤란했다. 그 노이만마저도 예상하지 못했을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마가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호언장담하고 지부를 나섰는데 이런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벌써부터 긴장됐다. 마을 사람을 대하거나 시라누이와 대치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UGN에게 연락을 취한 시점에서 UGN이 지부 쪽으로 다시 연락했을지도 모르지만, 지부장에게 지시받은 이상 지부원은 따라야 했다. 마가는 고민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유레이의 번호를 지정해 둔 단축번호를 꾹 눌렀다. 사고를 친 건 친 거고 보고를 올리기도 해야 했으니.
발신음이 울리는 동안에도 마가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최대한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유산과 계약을 맺어버렸다는 사실을 밝히면 잔소리를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는 사항이었다. UGN에서 지부 측으로 검사 결과도 보낼 테니까! 결국 늦거나 빠르거나 밝혀질 일이라면 차라리 지금 밝혀버리자. 마가가 각오를 굳히고 꺼낼 말의 순서를 다시 검토할 무렵, 유레이가 연락을 받았고 동시에 긴장했던 혀는 생각과는 다른 말을 먼저 뱉어버리고 말았다.
“유레이, 저 유산이랑 계약해 버린 것 같아요.”
아, 망했다.
마가는 다시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당신의 잘못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