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

눈구름

Dua Lipa - Break My Heart

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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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겨울은 분명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갈색을 띤 가을 바람 사이에 숨어든 눈을 흠뻑 맞고서도 젖지 않은 채 따뜻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면 스스로 겨울에게 걸어가 한껏 눈을 맞고 감기에 걸려버린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사샤는, 솔직히 말하면,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축제에 참가했던 것을 후회했다. 사샤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내고 있었고, 그게 딱히 외롭다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만에, 혼자 있는 것이 정말 지루하고 어쩌면 외롭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아마도 길고 긴 대학 생활의 마지막 축제일 터였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 끝을 즐기려 결정했던 일인데, 어째서 지금은 세상을 다 덮을 듯 내려대는 흰 눈까지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 좌석에서 가만히 옛날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 이사샤의 삶에서, 지금까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정말?

중고등학생 때, 그러니까, 사샤가 사립 천화여중과 천화여고에서 그닥 좋지 않은 쪽으로 이름을 날렸을 시절. 그때의 사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웬만한 성인 남성 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키 하며, 입학하며 짧게 잘라버린 머리카락에, 제법 쓸만한 두뇌까지. 게다가 나 정도면 목소리도 좋잖아. 치기어린 중학생 사이에서 그 정도라면 세상을 가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무엇이든 평균 이상은 해내는 것으로 무릎 위에 앉을 사람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고, 염색한 티가 나는 친구들이 옆자리를 차지하려 서로를 노려봐도 사샤는 그 중심에서 능청스럽게 웃기만 했다. 아, 나는 여전히 녹색 머리인데도, 너희는 대체 왜들 그렇게 머리 끝을 물들여 와서는, 서로의 머리색을 보고 애써 외면하고만 있는 거니. 고등학교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사샤는 그저 여전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누구의 말을 들어주고 누구의 장단에 맞춰 줄지, 누구의 부탁을 들어 줄지 고민하면서. 어쩜 다들 내가 여전한 것을 보고도 계속 염색을 한 채로 오는 거야, 받아주지 않을 걸 알면서, 녹색이 되어가는 머리를 가리고 오는 애들이 몇인데.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이는 연녹색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은 사샤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일이었고, 그렇게나 스스로에 취해 시간을 보냈으니, 영운대에 뒤늦게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샤는 노력할 생각조차 없었고, 그렇게나 오만한 상태로 모든 일을 했으니.

1년 동안, 그는 처음으로 재능이 아닌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내는 경험을 했다. 한번 경험한 일은 점점 더 쉬워졌고, 어느새 사샤는 그게 재미있어졌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고. 반년이 넘도록 눈에 들어오는 아무나 신경질적으로 대하질 않나, 고작 샤프심이 부러진 것 하나에 하루종일 화를 내질 않나. 그 1년간 사샤의 화에서 비껴간 것은 어린 동생 뿐이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시오가 부르면 무엇이든 들어주곤 했었던 것은, 합격한 이후 그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 없던 사회성과 인간성을 시오가 조금 끌어올렸다고나 할까.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 모난 성질을 깎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끔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벚꽃 핀 캠퍼스를 거닌다던가, 카페에 앉아 달콤함에 취해 웃기도 했으며, 어떤 때에는―그저 질려버렸다는 이유 하나로―가볍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기도 했었다.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사샤는 그런 자신을 좋아했다. 스스로를 한없이 사랑했고 그걸 즐겼다.

그럼에도 사샤는, 금새 지나온 1년을 죄 잊어버려서는, 과녁을 잃은 채 활을 내팽개친 궁수마냥 살았다. 공부는 여전히 재미가 없었고, 특히나 일주일에 한번씩 있는 시험과 벽돌만한 두께의 전공책은, 또 핏내 진동하는 실습은, 학교와 그 사이에 심적이든 물리적이든 크나큰 거리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사샤에게 지난 고생은 고생 같지도 않아졌다. 그저 지금이 더 힘들고 괴로워서, 이사샤는, 툭하면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동생이 공부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부모님과 함께 미친듯이 운동이나 다녔고, 부모님 돈으로 같은 반지를 나눠 낀사람과 여행을 다니기도 하며 설렁설렁 살았다. 휴학이 끝나면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고 학교에도 나가긴 했으나, 가끔은 자체 휴강도 시행하며, 그 이상은 하지 않는 상태로, 그저 평범한 영운대 학생 중 하나로 살다가 곧바로 튕겨나오듯 휴학했다. 견딜 수 없다기보다는 그저 이 일이 자신에게 영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럼에도 오로지 어린 시절 쳤던 큰소리를 주워담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랬던 그가 반 정도 정신을 차린 것은, 2년 정도 전 처음으로 갔던 봉사활동에서였다. 요즘 시대에 스펙이라면 역시 몇 줄이라도 더 있는 것이 좋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안일하게 빈 자리가 많은 곳을 골라 신청했던 것인데,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 도착한 곳의 아이들은 그를 너무나 반겨주었다. 사샤는 또한 처음으로, 선행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순수한 사랑에 대해 알았다. 그전까지 멍청하다 여기던 행동들은 점차 당연한 일이 되었고 어린이는 그저 생각 없고 시끄러운 존재에서 각자의 우주를 가진 인격체가 되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아르바이트를 직접 나서서, 그것도 무조건 키즈카페 아르바이트를 고집하던 사샤는, 막연하던 졸업 이후 무슨 일을 할지 쉽게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졸업하려면, 학점부터 채워야 했지만.

그래서, 시험도 다 끝내고 전공책도 전부 내다버린 이후에 온 마지막 축제의 결과가, 이거라고? 녹색 눈썹이 무색할 정도로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 사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와 타인 사이에는, 언제나 비슷한 거리가 존재해왔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을 거리, 그러니까, 딱 아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대학에 오고 난 다음의 사샤는 꼭 그런 모양새로 10년 가까이 살아왔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아 도망치면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넘치는 사랑을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안달하면서. 그렇기에 믿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또다른 처음을 경험할 때에 다다랐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행이 끝나고 나서 도착한 곳은 또한 겨울이었고, 하얀 눈이 곳곳에 쌓여 흐린 햇살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아, 쌓인 눈의 안에서는, 꼭 네 눈처럼, 새파란 빛이 보인다던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져서, 사샤는 처음으로 염색을 했다. 그래봤자 또 바깥처럼 하얗게 변해버리겠지만 그새 네가 생각나지 않게 될지도 모르잖아. 함께 갔던 모든 곳을 떠올리는 동안 희던 머리카락은 다시 뱀을 닮은 연녹색으로 돌아왔다. 역시 흰색은 나랑 좀 안 어울리니까. 창문 너머로 파란 빛이 들어올 때까지 거울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사샤는 잠들 수 있었다.

물론 느지막히 일어난 다음, 욕실로 향한 사샤는, 간밤의 고민이 무색하게 물들어버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말았지만. 카드 결제 내역이 없었다면 염색을 했다는 사실조차 꿈이라 착각할 정도로 그의 머리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샤는 거울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도 잠깐 해 보았으며,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 있을 졸업식에서조차 하얀 머리로 전교생 앞에 서게 생겼으므로 차라리 머리를 밀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감당하기 힘들지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도 그의 삭발은 막아 주었다. 사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러고 있었다는 생각으로 대충 변명하고 욕실을 나섰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머리카락 색이 바뀌는 것은, 정말로 그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후회만이 밀려와 안 그래도 난장판인 머릿속을 헤집었다. 답답하리만치 밝게 빛나는 거울 너머의 상과, 두 눈에 잡히는 머리칼은 그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형광등을 반사해댔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대체 언제부터 참을 수 없이 가까워지고 싶고 반응 하나하나가 신경쓰이고 손길이 조심스러워지고 네게 쓰는 모든 게 아깝지 않게 되어버린 걸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서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는 왜 이렇게나 잘 들리며, 어째서 가라앉지도 않고, 점점 더 크고 빨라지면서 가까워지는 것만 같은 걸까. 모르겠다. 너를 처음 보던 그 순간에는, 분명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인사 한 두 마디 정도를 건넸던 것 같은데. 왜 너와 이야기하던 그 가로등 아래가 세상에서 가장 낯선 우리만의 장소가 되었을까. 왜 너와 함께 먹은 모든 음식의 맛이 지금까지 혀 끝에 생생하고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즐거울까. 왜 다정하다는 단어가 그렇게도 듣기 서글퍼졌을까. 왜 네가 걷고 말하고 웃던 모습이 눈만 감으면 머릿속을 가득 메울까. 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바보 같게도 사샤는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저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만을 받으며 스스로를 가득 채워 왔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자신에게서 새어나가던 마음은 결국 종착지를 찾게 될 것이란 사실을. 언제나 원하던 것을 가지던 사샤는 이제서야,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나눌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어쩌면 사소하고 운명적이게도—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제 눈 앞에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샤는 아픈 줄도 모른 채 멍하게 앉아 지난 열이틀을 떠올렸다. 거짓말 같이 아름다운 지난 겨울, 거짓말처럼 잔인한 그 시간. 그러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사샤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사샤는, 자신에게 처음 일어난 어떤 변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울은, 심장에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눈을 내리고 가서, 쌓인 눈이 빙하가 되어 사샤의 머리에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물든 것은 정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그저 편한 것만을 좇으며 좋게 말하면 여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대충 돌아가던 톱니 사이에 쌓인 눈은 녹슬지 않도록 더 철저해질 원동력이 되었다. 거울 너머에는 언제나 눈 내린 어깨와 꽃잎이 달라붙은 콧잔등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나 흘리던 입은 슬며시 닫히고 가만가만 눈송이가 내려앉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항상 이겨서 지루할 지경이던 게임에서 완패했다. 쉽게 풀리던 실이 어느순간 꼬이기 시작하더니 여지없이 모두 한 곳을 향했다.

나와 몇 개의 처음을 나눠 가졌다며 좋아하던 너는, 내게도 처음을 아주 많이 선물했구나.


그럼에도 사샤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들곤 했다. 이제와서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것 또한 일종의 욕구였으니까. 이 생각을 무겁다 해야 할지 가볍다 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샤였지만, 어느 쪽이건 마음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에 대처하는 것은 사샤가 가장 서투른 일 중 하나였다. 아이들 틈에 스밀 수 있었던 것은 시오 덕이었다 쳐도 지금의 사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다만 미숙한 열매는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면 무슨 일을 해도 쉽사리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분명 중심을 향해 활을 쏘고 있는데 자꾸만 바람이 불고 화살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더니 결국 과녁은 커녕 저 너머 새하얀 눈밭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쉽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덮인 눈 아래의 심장 쯤이야 전부 네게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 스스로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새 조금씩 녹은 눈은 다시금 심장에 스며 얼었고 가끔은 숨을 막아들었다. 그럴 때면 닿을 수 없는 설원이 눈앞에 아롱거렸다. 쌓인 눈 위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의 눈도 신경쓰지 않고, 곧 세상이 끝날 것처럼 눈밭에 누워 웃고 떠들고 눈을 뭉치고 쌓고 어쩌면 그 위에서 눈으로 작은 집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한 공기가 입가를 스치면 설원은 녹아 없어지고 신기루처럼 멀어져만 갔다. 지금 심장을 내리친다면 유리로 만든 것처럼 산산조각 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끝내 얼어붙고 말 것을 알면서도 눈구름 아래로 걸어 들어갔었나.

눈을 너무 많이 맞은 탓일까?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는 감기에 들었다. 감기에 걸린 게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심하게 아프다니. 사샤는 자신이 감기 대신 다른 병에 걸린 줄로 착각해 병원까지 다녀왔다. 그가 기억하는 한 감기라는 바이러스는, 미약한 열과 기침과 두통 같은 염증 반응만을 남기고 금방 사라졌는데, 이상하게도 며칠이나 이불 안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할 만큼 열이 오르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향한 병원에서는 지난 며칠 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별 것 아니란 눈치로 삼일 치 약만 처방해 주었지만. 약을 먹으니 안 그래도 뜨거운 몸이 제멋대로 식었다 다시 끓어오르곤 해서 사샤는 얌전히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아픈 머릿속에 보내지 않을 편지만 써내려가며. 어떤 문장은 잊어버렸고 중간에 삭제되는 일도 있었으며 한 문장 안에서 같은 말이 수없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편지지는 꽉 차버리고 봉투에까지 글자가 흘러나와 원래 색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나 긴 말을 전하고 싶은 상대를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보내지 못한 편지에 답장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대체 무슨 감정일까. 너는 감정에 대해서도 배울까? 너라면 지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참 누워서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결국은 네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 목소리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겨울빛이 도는 눈과 눈꽃처럼 조용했던 향기 뿐이라 결국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축제 중에 연락처를 받았었으니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네게 전화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고, 네게 ―그저 이름을 불러달라는― 약간은 사사로운 부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샤는 차마 전화를 걸지 못했다.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네게 전화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걸 받은 네 기분이 대체 어떨지 도무지 예상되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이렇게나 알기 어려웠었나? 언젠가 나는 그 마음을 장난감처럼 손에 쥐고 어루더듬으며 주무르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쁜 짓이라는 걸 알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네 머릿속에 번져갈 감정이 너무나 신경 쓰이고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너에게만은 감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네 표정이 한번이라도 그때처럼 굳어지고 만다면 유리로 된 것쯤이야 얼마든지 가루가 되어 혈관을 타고 흘러갈 수 있으니까, 너는 어느새 내가 나를 신경쓰도록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 미소를 띄운 얼굴은 꼭 손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닮아서, 언제 사라져 흘러내릴까 두려워지곤 했다. 이상한 망설임이다. 겨울의 중심에서 거짓말처럼 눈구름에 안긴 사샤는, 녹지 않은 채 쌓인 눈을 그러모아 새하얀 눈사람을 만들었다. 너를 꼭 닮아서 녹지 않기를 하염없이 바라게 되는.

적어도 이번 겨울이 끝나가는 동안, 사샤에게는 아무런 거짓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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