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外蒼天 운외창천

하늘은 저를 놀라게 한 자에게 걸맞은 상을 내리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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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7 포스타입에 업로드 된 글과 같은 글입니다.

이 글은 트위터 안전벨트(@tttTaeyang)님의 그림을 모티브로 작성된 남궁혁님의 팬 소설입니다.

등장인물인 남궁혁님, 관계자, 그림의 원작자분의 요청이 있을 경우 글은 지체없이 삭제됩니다.

다소 잔인한 묘사가 조금 포함되어 있으니 감상에 앞서 주의 부탁드립니다.

무협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 드립니다.

https://x.com/tttTaeyang/status/1674078860022026245?s=20


雲外蒼天 운외창천

 

 

사내의 발끝에 어디서 떨어져나온 것인지 모를 작은 돌조각이 채였다. 그 작은 것이 내는 소리가 무어라고 이렇게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지! 사내는 터져 나올뻔한 비명을 입술을 씹어 겨우 속으로 삼켰다. 사내의 동행자 또한 그 태도에 더욱 겁을 집어먹은 듯, 마른침을 삼키며 더 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드문드문 박힌 야명주가 그나마 시야를 분간케 했다. 밖에서 볼 때는 이렇게 커 보이지 않았건만. 허탕이라면 야명주라도 떼어갈까 하며 올려다본 천장엔, 이곳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칼자국이 사방에 남아있었다. 마치 산의 내부를 통째로 깎아 파낸 것 같은 흔적이었다. 자국에서 느껴지는 예기에, 절로 피부에 선득한 기운이 드는 것만 같아 사내는 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길 한참, 길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자 사내와 그 동행인은 슬슬 긴장을 내려두었다. 헛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 투신闘神이 잠들어있다는 것은. 흔하지 않나. 이곳은 그저 강호의 고수들이 잠시 기거했던 은신처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저 이 뜬소문을 믿었던 우둔함을 씁쓸해하며 돌아가는 것이 옳은 일일 수도······.

“허, 허억···.”

옆에서 동행인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바위로 가로막혔으나, 얼마 전 있었던 산사태로 인한 것인지 그 오른쪽에 약간의 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을 보기 위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저를 둘러싼 공기가 몸을 내리누르는 기분,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이는 것만 같은 감각···. 바들거리는 다리로 기듯이 걸어 그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자-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금이 가고 부스러진, 바위를 통째로 의자로 깎아낸 듯한 것 위에 앉은 사내. 깊게 가라앉아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을 뒤덮은 푸른 부적 사이로 드러난 그 탁한 호박빛 눈동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음에도 그 시선이 정확히 저를 따라온다는 것을 안 사내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땅에 처박힌 이마에서 피가 스며 나오는 것을 사내는 느꼈으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동행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듯 옆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은 채로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까. 사내는 문득 숨을 쉬는 것이 수월하다는 것을 느꼈다. 몸을 짓누르는 압력도, 숨통을 조이는 기운도 더는 없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세간에 떠돌던 투신임이 틀림없을 그 자는 제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자 그의 팔을 감싸고 있던 푸른 부적들이 볼품없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바랜 붉은 글씨가, 종이가 삭아 생긴 작은 구멍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그것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분명 단정했을 머리카락은 거칠게 흘러내렸고, 완갑을 단단히 조였을 붉은 띠는 거의 풀린 채로 매달려 있었다. 찢겨 나간 옷자락까지,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을 볼품없어 보이게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였으나- 그는 아니었다.

흐른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잘 벼려진 검을 들고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과 검을 덮은 부적들도 모두 바닥에 내려앉은 뒤였다.

  


‘얼마나 잠들어있었던 거지.’

투신이라 불렸던 사내, 남궁혁이 의식을 차리기 시작한 것은 저 사내들이 찾아오기 얼마 전이었다. 산이 흔들리며 정기가 흐트러지고 동굴을 막아두었던 바위가 기울어지면서, 공동 안으로 외부의 기운이 흘러들어와 그를 묶어두었던 봉인술이 힘을 잃었던 탓이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의식조차 차단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서서히 돌아오는 시야에 왼손을 담고, 주먹을 쥐며 감각을 찾았다. 제 것이 아닌 숨소리가 들리고, 빗물을 머금는 산의 흙 특유의 습한 냄새가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쥔, 제 분신인 천경검 天驚劒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 자리에서 일어나며 왼손으로 옮겨 쥔 천경검을 그는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저를 영원토록 잠들게 해야 했을 부적에 잠시 눈길을 두고 남궁혁은 저를 찾아 들어온 두 사내를 보았다. 갈무리하지 못한 기운에 노출되었을 텐데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무릎까지 꿇고 조아리는 모양새라니. 이 태도는 필시-.

“나를 부러 찾아온 것이겠군.”

남궁혁이 저를 조금 전부터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에게 말을 건네자 그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오래도록 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거친 기색 하나 없는 낮은 미성이 공동을 한번 울렸다. 그 사내는 연신 입술을 달싹거리다, 몇 번이고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반신반의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 어투에 절실함이 묻어있는 것을 모를 순 없었다.

“투신···이십니까?”

투신. 그를 이르던 말. 그가 이곳에 자기 자신을 가둔 이유. 언젠가부터 그가 전장에 서면 창룡검蒼龍劍을 대신하기 시작한- 원치 않았던 그 별호. 그 단어에 담긴 감정이 감탄과 동경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단어가 가진 이질감으로부터 알아야만 했던, 아니, 알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도- 불렸지.”

“그렇, 그렇다면! 제발, 제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사내는 다리라도 붙잡을 것처럼 무릎으로 기어 남궁혁에게 조금씩 다가가다- 곧 통탄과 비탄에 젖은 목소리로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교가 다시 득세했노라고.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고통받고 있으며- 사파는 숨을 죽였고 정파가, 심지어 새외무림까지 그들과 손을 잡고 마교와 대적하고 있으나 도저히 이 난세가 끝날 것 같지 않다고. 강호인들조차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니 양민들은 피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노라고.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재앙이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일백 년 전 마교의 난 때 선봉에 서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당신께서 그 난을 종식하였다고···! 다시 한번 도와주십시오. 이 괴로운 세상을 제발······.”

침묵이 습기를 머금은 먼지처럼 공동에 내려앉았다. 남궁혁은 사내의 부탁에 대한 답을 이미 정한 상태였다. 이 난세 속에서 협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저자가 저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에, 물을 것이 있었다.

“···남궁은 어찌 되었나.”

“안, 안휘의 남궁세가 말입니까? 건재합니다, 물론 건재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앞의 사내는 당황한 빛을 숨기지 못했으나 대답만은 성실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운명을 결정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그에게 또다시 돌아간 질문엔 꽤 곤란한 낯을 띠었다.

“별다른 소식은 없던가.”

남궁혁은 저 또한 이 질문을 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바란 질문이었는지도. 그저 남궁의 소식을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제가 더는 없는 남궁이 어떠했는지 듣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그 무엇도 아니었는지. 그러나 그는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사내가 할 대답을 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을 연신 굴리던 사내는 드디어 할 말을 찾아낸 것인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친우가 남궁세가의 사람이라 아는 것이온데···.”

“자네!”

사내의 일행이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는지 작지만 분명하게 사내를 불렀다. 경고가 분명한 어투에도 사내는 동행에게 고개를 한번 젓더니 말을 이었다.

“소식, 이라기보다는···. 특이한 일은 있었습니다. 약 40년 전 눈을 감았던 남궁의 원로께서··· 마지막까지 남궁혁이라는 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남궁세가에서 그 이름은 금기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럼, ···그 원로의 이름을 알고 있나.”

사내는 이 질문에 대답해도 되는지, 그리고 지금껏 답해 왔던 이 질문들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끝내 겨우 그 이름을 입에 담자, 남궁혁은 눈을 감았다.

‘혁아.’

그리운 그 이름이 만들어 낸,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일으킨 눈동자의 파문을 도저히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가에 이는 잔물결조차 모두 사라진 뒤였다. 처음부터 그 끝까지, 그 누구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잡설은 이만하지. 안내하게.”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사내는 문장 뒤에 숨겨진 목적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장, 그리고 그곳의 가장 앞으로.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이 달성되었다.

사내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며 남궁혁은 종종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강호가 전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어디 하나 피 흘리지 않는 이가 있는 곳이 없었으며 마주치는 이마다 표정은 어두웠다. 이 광경을 그는 잠들기 전에 본 적 있었다. 아직도 생생한 그 기억. 그리고,

‘투, 투신이다! 투신이 왔다!’

‘투신?’

어두운 표정에 깃드는 희망, 그리고 다른 종류의 두려움. 어째서? 그 투신이 저를 이르는 말이라는 것을 그때의 남궁혁은 뒤늦게서야 알았다. 강호에 어울리지 않는 별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별호에 담긴 감정은 경외만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 어느 날 돌아보았을 때 제 뒤에 아무도 없었던, 멀찍이서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무엇이 담겼는지 마주했던 그 순간에-.

“도착했습니다!”

사내의 말에 남궁혁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도착한 그곳은 한창 치열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 의원들은 환자를 살피고 무인들은 저마다 무구를 정비하고 있었다. 새로운 이가 전방에 투입되자 몇몇 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누굴 데려온 건가, 자네.”

“놀라지 마십시오. 왜, 무림에선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분을 데려왔습니다. 투신 말입니다, 투신!”

“그런 전설을 믿는 이가 어디 있나! 그거야 뭐 공을 나누기가 애매해 선대께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겠나. 다들 뻔히 아는 사정을 모르는군.”

“아니, 정말로···!”

“그래, 그럼 내가 묻지. 내 강호에선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인 것 같은데- ‘대협’께서는 누구신가?”

“나는···.”

남궁혁은 입술을 떼었으나 곧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를 칭하는 그 모든 말 중 그 어떤 것도 입에 담을 수 없었으므로. 남궁세가의 삼 공자라는 말도, 다른 단어로 지워져 버린 창룡검이라는 별호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궁세가에서 그 이름은 금기시되었다고, 합니다.’

남궁을 입에 담을 수 없는데 어떻게 제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있을까. 하물며 이제 모든 이가 잊어버린 이름을.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이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잊혔다. 그를 둘러쌌던 모든 세계로부터.

“···그저 무명소졸의 협객일 뿐이네.”

이름조차 없지. 투신은 제게 무언가를 더 물어오는 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 대신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도 곧 눈치챈 듯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해를 등진 산등성이가 검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온다!”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모두가 제가 있을 자리로 달려 나갔다. 투신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전황을 살폈다. 어디에서 몇 명의 이들이 어떤 식으로 합을 맞추는지, 그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며, 이 상황이 지속되었을 때 전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투신은 정확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데려온 사내가 제게 원하는 것. 이 전장에서 남은 역할과- 그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해야 하는 것. 투신은 천경검을 뽑았다. 세상에서 그를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손에서 낮게 울었다.

너무도 새삼스럽게 피비린내가 났다. 너무도 새삼스럽게 비명으로 귀가 울렸다. 투신은 저를 막는 이들을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거침없는 그 몸짓으로 만들어지는 결말은 마치 그 자리에 선 이들이 당연히 맞이해야 할 정해진 운명 같기도 했다. 투신이 계속해서 나아가는 동안 그의 길은 단 한 순간도 막히지 않았다.

그리고- 투신의 주변에 선 이들은 하나의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완벽한 남궁의 검이라는 것을. 검이 그려내는 투로도, 그가 휘두르는 방식과 땅에 딛는 그 걸음 하나조차 모두 남궁이었다. 그러나 전장에 선 남궁은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합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투신은 그것이 익숙한 듯 보였다. 지독하게도.

그리고 투신이 전장에 들어선 그날부터, 전쟁 발발 이후로 언제나 검게 구름만이 끼어있던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이 울렸다. 전장에 선 이들은 그것이 낯설었으나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자 그것에 곧 익숙해졌다. 이유조차 찾지 않았다. 아니,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그들이 번개와 천둥에 익숙해지면서, 투신은 저를 향했으나 동시에 향하지 않은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제 이립이 갓 넘어 보이는데 대단하군······. 저것은 남궁의 검인데······. 하지만 남궁의 이들은 저자를 아무도 모른다던데······. 그럼 혹시 남궁에서······. 투신은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눈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는 모르나 그자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투신은 길게 시선을 주었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 그를 두고 남궁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그를 향한 말은 그것을 제외해도 너무도 많았으나 하나만은 명확했다. 그가 온 뒤로 지지부진하게 교착되어 있던 전세가 달라졌다.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그는 마치 답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확신에 찬 움직임, 망설임 없는 검, 곧게 향하는 길. 인간이 아닌 것만 같던 마교의 것들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자. 전장의 절대강자가 불러오는 바람이란 멈출 수 없는 태풍과 같았다. 그들은 느꼈다. 곧 끝날 것이다, 이 난세가, 이 재앙이.

그 어떤 날보다 번개가 거칠게 내리치고 천둥이 세상을 채울 듯 울리던 날. 비가 내려 땅을 적신 피가 씻겨 내려가던 날. 투신은 모두를 등진 곳에서 천마의 목을 베었다. 마교에 몸담은 것들은 천마의 숨이 끊기자마자 마치 제 목이라도 날아간 듯 비명을 지르고 스스로 목을 조르다가 어딘가로 달아났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쫓아 최대한 도륙했으나 절반가량은 끝끝내 도망친 듯 보였다. 그 모습에서 사람들은 알았다.

천마가 죽었다. 마교가 달아났다. 전쟁이, 끝났다.

폭우조차도 감출 수 없는 승리의 함성이 전장을 뒤덮었다. 그의 발치까지 굴러온 머리의 눈을 감기고, 투신은 빗물과 핏물을 털어내며 그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투신은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처럼. 모든 이들이 저마다 모여 기뻐했으나 그와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이는 없었다. 가끔 누군가가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의 소속과 이름을 물었으나 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름이 없소이다. 그 대답을 들은 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제가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들의 세계는.

그에게 물음을 던졌던 이들이 일행에게 돌아가 그의 대답을 전했다. 기쁨을 나누면서도 그들의 신경 끝이 누구에게 닿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대답을 전해 들은 그들의 시선이 종종 투신에게 가 닿았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두려움, 불안, 경계.

‘전쟁이 끝났으니 저 검이 누구에게 향할지 모르는 것 아닌가!’

‘너무 과한 힘이야. 균형이 무너질 걸세.’

지독히도 익숙했다, 저 시선이. 접어두었던 과거의 상념이 다시 그를 덮쳤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내 존재가 남궁에게 해악이 되겠구나. 나의 가족을, 나의 세상을 무너뜨리겠구나. 모든 견제가 남궁으로 향할 것이고, 그렇다면 남궁은-. 그래, 그래서 죽음으로써 끝내야 하였는지를 고민했다.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전쟁이 끝나고 찾았던 도가의 문파들. 그를 스스로 봉하겠다는 말을 듣고 숨길 수 없었던 기꺼움. 남궁에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그를 아끼는 사람들을 위한 그 나름의 염치였으나, ···마주하였을 때, 그 소식을 전했을 때 그 눈빛에 행여나 담길 감정이 혹여···.

‘마지막까지 남궁혁이라는 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럴 리 없었겠구나. 그럴 리가······. 이 길을 걸은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나, 한 번은, 한 번쯤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군.”

그를 조심스레 둘러싸고 다가오는 이들이 보였다. 숨길 수 없는 적의와 살의가 피부로 느껴졌다. 투신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천둥이 울리고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빛을 채우는 번개가 내리쳤다. 시야가 부서져 내렸다. 그래, 나를 죽일 수 있는 이가 없다면- 이런 끝도 나쁘진 않지. 이런 끝도···.

 


“혁아.”

남궁혁은 눈을 떴다. 그의 머리맡에서 다정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누군가의 무릎이 보였고, 멀리서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과 다리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손으로 얼결에 누른 무언가가 푹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언제까지 잘 생각이니. 지회에서 힘들었겠지만, 슬슬 일어나는 게 좋겠구나.”

그는 이 목소리를,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이를 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남궁혁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서야 그의 말에 대답했다.

“형님?”

“그래. 이런, 자는 동안에도 검을 쥐고 있었구나. 검수로서 보이는 모습이 멋지지만- 나는 네가 잠은 편하게 잤으면 하는 마음이란다.”

그의 손에 검집째로 들린 천경검이 낮게 울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방금 천마를 베어내고, 공기마저 앗아가는 폭우 속에서 타인의 살의를 마주했는데. 그때 번개가 내리쳤고, 그리고··· 그리고.

“시비가 이미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단다. 내가 너를 꼭 깨우겠다고 약조했거든.”

그러니 일어나야지, 내가 약조를 지킬 수 있게 해주렴. 부드럽게 덧붙여진 말에 남궁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처럼 검을 매자, 그의 형이 애매하게 웃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방에서 나와 걸으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없었다. 비도 내리지 않았고, 공기를 채웠던 전장의 냄새도 없었다. 그저 티 하나 없이 푸르게 맑은 하늘이었다. 이 하늘을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혁아, 조금 멍해 보이는구나. 괜찮니?”

“···괜찮습니다. 그냥, 좋아서요.”

남궁혁은 드물게도 어물거리며 대답하곤 앞서 걷는 그의 형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게 환상이라면, 그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라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니, 어쩌면 환상이 아닐지라도. 그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형님. 만약 제가- 너무도 강해져서··· 오히려 이 남궁세가를 곤란하게 한다면, 그때 형님께서는 어떡하실 겁니까.”

그의 형은 농으로 받아들인 듯 웃으며 돌아보았으나- 그의 표정을 보곤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 남궁에서 누구보다도 지식에 뜻이 있는 이니 분명 그의 말을 알아들었을 테다. 몇 초가 지났을까, 혹은 몇 분이 지났을까. 남궁혁은 가만히 선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왜 그런 것을 묻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혁아. 네가 어떤 이가 되든 너는 남궁의 사람이란다. 나는 그런 너를 곁에 둘 것이고- 다른 이들이라고 하여서 별로 다를 것 같진 않구나.”

그의 형은 몇 걸음 돌아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이 남궁이 너 하나 지키지 못할 것 같더냐. 속삭임 뒤에 마주한 눈에서 그가 본 것은 견고한 자신감과 자부심이었다. 남궁혁은 또다시 드물게도 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아니면, 듣고 싶었던 사람처럼.

도로 앞서가는 웃음소리를 따라 그리웠던 풍경을 걸었다. 속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눈을 두는 어디 하나 그가 모르는 곳이 없었다. 그 누구 하나 그가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애정을 담아 그의 등을 두드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궁혁은- 아주 오랜만에, 웃음 지었다.

하늘이 무척이나 맑고, 푸르렀다.

 

그의 검劒은 천경天驚이라.

하늘은 저를 놀라게 한 자에게 걸맞은 상을 내리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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