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myself

용철과 대협과 만두

용가리당당 by 용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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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도 슬프지도 않다. 돌아보면 다 지난 일 뿐이고 앞날은 없으니 무한히 발산해 결국 0에 수렴하는 순간의 이름을 영원이라고 하자.

영원도 오늘도 참 살아나가기 어렵지 않냐.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는 게, 그게 안 되니까 걱정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니까 어제를 후회하고, 인간은 참 멍청해. 그렇지 않냐. 죽고 없는 놈 말빨이 무섭지, 그래. 그거 당연한 거야. 미련이 없잖냐. 뭐야, 인마. 표정 펴라. 누가 보면 너도 곧 갈 놈 같겠어. 웃자고. 응? 편하게 들어. 가는 마당에 베푸는 친절인데 후해야 아쉽지 않지. 그렇잖아.

배신은 등 뒤에서 오는 법이라고 말들이야 하지만 막상 꺼끌거리는 제 뒷목 더듬어보기가 어디 쉽던가. 용철은 습관이 된 듯 왼손으로 뒷머리를 스윽 스윽 훑는다. 아, 이게. 허전하네. 이제 뒤에서 칠 놈도 없는데. 가는 놈 위로하는데 아끼지 말고 담배 하나 태우자. 그 말에 무언가에 홀린 듯 잘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쥔다. 언제 넣어뒀는지 모를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섬주섬 불을 붙인다. 꿩 대신 닭이라고. 털털하게 웃는 용철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당신은 몽유병을 의심한다. 그런 당신의 생각을 읽은 듯, 용철은 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운을 뗀다. 그래. 귀신이다, 인마. 좋은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당신이 마음을 놓길 내심 바랐는지, 기대한 적 없는 말이 뒤이어 나온다.

대협인지 소협인지. 좋은 사람이더라. 이야, 눈을 왜 그렇게 번쩍 뜨냐? 벼락 맞은 나무 같네.

아무 데에나 털썩 걸터 앉는 것도 그 자세도, 꼭 살아 있는 것만 같다. 앉으라고 자연스레 옆을 툭 툭 치며 권하는 것까지.

자주 봐서 막역한 사이도 아니다. 여전하고 말고를 따질 추억도 특별히 없다. 그런데 대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나. 언제 한 번 이야기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열심히 눈을 굴려 보지만 부지런히 주변을 살피는 것과는 상관없이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네가 막 칠렐레 팔렐레 여기저기 이야기라도 하고 다녔을까봐 겁이라도 나냐? 그냥 내가 눈치가 좋은 거야, 인마. 인정하지? 그새 생각을 읽은 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까지 환청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하다. 당신은 꿈이라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 생전에도 느낀 적 없이 반가운 마음으로 그가 앉은 그 옆에 앉는다.

마음에 걸리더라고, 아, 참. 좋아하는 것 같던데, 싶어서 말이야. 가는 마당에 비밀이 있어 봐야 뭐하겠냐. 용철이 그렇게 운을 떼고 당신의 눈에는 기쁜지 슬픈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인다. 거칠면서도 담담한, 꾸밈없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가 무지하게 많이 내리던 어느 여름 밤이었더랬다. 얼큰하게 취한 동료들의 등을 떠밀어 택시 태워 보낸 뒤 한산한 길가를 걸으며 담배 한 대 태울 때였다. 축축한 공기에 담뱃불도 제대로 붙지 않고 눈 앞은 무수하고 굵은 빗방울들과 취기로 어지러운데 웬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기울이며 뭐냐, 하고 중얼거렸다.

"비 오는 날 밤에 길 걸어가면서 담배라니, 정신 사나운 짓은 다 하는구만."

독특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꽤 빠른 손놀림으로 담배를 쳐내는 바람에 화낼 때를 놓쳤다. 허, 하고 기가 차 숨을 내뱉자 그런 저를 지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참견을 잘 하시네. 담배 한 대 가지고 작정하고 싸움 붙을 생각은 없었다. 취기가 올라 있기도 했고 저보다 더 취한 놈들을 하나 하나 챙기느라 진이 빠져버린 탓이었다. 나 오늘 피곤한데. 그냥 좀 두지. 날카로울 일은 아니었고 단지 정말 피곤하기만 했다. 뜻이 통했는지 뒤이어 다시 붙인 담배불에는 다행히 간섭이 없었다. 한 발짝 멀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담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 끼어들 만도 했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낯선 사내를 훑는다. 푸르고 긴 머리, 금빛 눈동자에.... 언뜻 이야기 들은 바가 있었다. 무협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사람에 대해서. 대협! 해맑게 부르며 뛰어가던, 길을 잃고 애타게 누군가를 찾던 어린 아이, 아니, 어린 아이는 아니었나. 아무튼 그때 보았던 실루엣과 겹치는 듯도 하다. ...대협이라면, 진짜 무협소설 주인공 감이신가? 귀공자? 그런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저도 모르게 속에서 나오는 말을 무심코 뱉었다.

"나를 아는가?"

"예. 뭐, 알다마다.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그 쪽도 나를 본 적 있지 않나? 길 잃은 아해 하나 데려다 드린 기억이 나는데, 내가."

"아, 자네는―"

"아무튼 그렇게 되네. 오늘은 아해들 안 달고 나왔어?"

오늘은 누구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밤이라 이 시간을 기다렸다가 나왔는데, 비가 이렇게나 쏟아지는 날 새벽이라면 아무도 없겠지, 싶었는데.... 씁쓸한 한숨이 퍼지는 것을 보아하니 예삿일은 아니다. 대강 사정을 알아차린 용철이 피식 웃는다. 대협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순진한 감이 있네. 지금 토요일 새벽이거든. 취객들이 굴러다닐 때란 말야. 타박을 주는 말에도 그런가, 하고 수긍하는 모습은 사색에 잠긴 것도 같다. 사람을 피해서 밖에 나오고 싶다라, 도련님도 고민이 있으셔? 무협 따위 모른다. 이래저래 바뀌는 호칭만 해도 그렇다. 아무튼 예부터 귀하다는 남자에게 붙었던 이름이라면 다 가져다 붙이고 있지만, 그런 태도에도 너그러운 것을 보아하니 명예와 가세가 중요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고민이라, 심마가 왔다고 해야 하나. 요즘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러셔. 담배 연기 때문에 죽상이시구만. 끌게. 끄면 되잖아."

고맙네. 고맙소이다. 뭐가 그리 고맙다고 두 번 씩이나.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빈다는 것을 찰나 조금 휘청거렸더니 어깨를 붙잡혔다. 친절하고 단호한 손길에 기분이 묘했다고 해야 하나. 평소 같았으면 만지지 말라고 사납게 으르렁댔을 터였는데, 귀하신 몸이라 그런지, 반가운 얼굴로 품에 뛰어드는 어린 아이 같은 이를 자식처럼 반기던 인상이 떠올라 그랬는지 그저 말없이 몸을 추슬렀다. 취한 사람 몸에 손 대는 거 아니지, 나으리. 부러 순순히 받아들인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뜸 제 할 말을 하는 것이 무협에서 말하는 사내다운 모습인가. 의문을 품든 말든, 사내는 또 불과 몇 분 전에 했던 말을 또 한다.

"자네에게 고마운 것이 또 있는데."

"아니, 뭐가 그렇게 고마우신데?"

"길 잃은 소형제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었네. 무척이나 반가워 하면서 달려오는 바람에."

"소형제?"

그렇소이다. 모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이지. 워낙 심성이 선하고 순한 자들이라, 바깥에 혼자 남겨지면 위험하네. 처음에는 자네를 오해했었는데, 같이 있었던 소형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고 이야기해 주더군. 길을 잃어 겁먹었을 소형제를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꽤 썼을 것 같아서 기억해 두었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네. 세상은 넓은 듯 좁으니까.

어떻게든 웃게 해 주려고 했다? 뭐, 그러기는 했지. 누구라도 그렇게 울고 있으면 안 그럴 수는 없었을 텐데. 게다가 여기, 위험하다고. 이런 말은 내가 더러운 일 하는 사람이오, 광고하는 것 같아서 뒤가 좀 구리기는 한데, 아무튼 이 쪽은 어깨 벌어진 아저씨들 득시글거리는 데라. 용철은 그렇게 답하고 세 번째로 담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담배 연기를 참아 준 것이 저 같은 놈과 말 한 마디 나누기 위해서였던 거라면, 한순간의 욕구는 참아 볼 만도 한 일이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려다 관두는 모습을 보곤 사내가 싱그럽게 웃는다. 물론 자네를 오해한 이유도, 이 근처라면 으레 그런 작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지만 말이야. 아무튼 미안하고 고맙소이다. 아, 거 아까부터 별 것도 아닌 일에 계속 고맙다고. 고마우면 다음에 술이나 삽시다. 도련님도 휴대폰은 가지고 계시지? 여기, 내 명함. 날 개고 기분 괜찮을 때. 오케이? 나는 좀 취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이만 들어갑니다. 용철은 먼저 손사래를 치며 얼른 그 사내를 피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부러 단숨에 몰아치듯 명함도 쥐여주고, 얼른 뒤돌아섰다. 비 속에 명함을 쥐고 멍하니 서 있게 만든 건 좀 미안했지만,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때 그렇게 생각했거든. 막 고마워하는 걸 보니까, 널 엄청 아끼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더라. 난 그렇게 날 걱정해주는 놈이 없으니까. 친해지고 싶더라. 나한텐 없는 게, 너하고 그 사람한텐 있는 것 같아서.

용철이 당신을 보며 쓰게 웃는다. 당신은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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