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용철과 혁으로 날조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들 가운데 항상 반가운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용철에게는 첫눈이 그랬다. 일곱 살, 고사리손에 봉숭아물이 닳을까 점점 차가워지고 살을 애는 바람에도 두 손 맞잡고 비벼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기억에 남는 첫눈이 또 있다.

"첫눈이 손톱 끝에 닿으면 오마."

거짓말.

툭 걷어차인 눈덩어리가 데굴데굴 눈밭을 굴렀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고 미운 열여섯 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먼저 돌아서는 형이 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라 했었지. 그때 내 뒤통수는 슬펐을까. 씨발. 더럽게 많이 온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지만 겉으로 경계할 척이나마 할 적수조차 눈에 띄질 않는다. 괜히 책상 위 종이를 구긴다. 얼른 커튼부터 치고 볼 일이다. 돌아섰어야 하는 게 누군데, 날 돌아서게 만들어. 어린 나를…. 그래. 그 순간이 죽도록 밉다.

형에 대한 기억은, 인정하기야 죽도록 싫지만, 마음 한구석이 은은하게 데워져 오는 것을 아니라고 할 방법은 없다. 그야말로 손난로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한파에도 두툼한 손이 따듯한 사람이었다. 솜사탕이나 붕어빵 따위를 손에 들려주면서 환하게 웃던, 뽀얀 입김마저 성휘 같던 얼굴이 선명하다. 너른 등짝에 업혀 마구 팔을 휘저어도, 갑자기 온몸을 늘어뜨리고 잠이 들어도 그저 흔들림 없이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과 당신 키 높이 만큼의 세상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그런 형이 돌연 가출을 선언했을 때, 용철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막 이런 저런 잘못도 저지르고, 친구들과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형과의 어린 시절 추억이 점차 트미해질 때였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했다. 더 큰 세상을 만나러 떠나야 한다고. 어려운 말을 쓰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긴 어딜 가. 무슨 소리야. 내심 그냥 떠 보는 말이기를 바라면서 안 하느니만도 못한 말만 했다. 그렇게 다정하던 형은 한 번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답하지 않는 모습은 그때 처음 봤다. 그러더니만 첫눈이 내리는 날, 전에 없던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눈이 다시 내리는 날 돌아오리라고.

이제는 서른이 다 되어 간다. 매년 가을 끝자락을 기대하고 겨울 초입에 절망하며 산 지도 열 다섯 해 째를 앞두고 있다. 거친 욕은 예사고 형을 닮기는 영 틀렸다. 어떤 사람들은 형이 집을 나가서 애가 망가졌다고 말하고 참 안 됐다고도 하더라. 있었으면 정말 달라졌을까. 닮고 싶기야 했지만 지금 이 모습도 나쁘지 않다. 함부로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슬릴 뿐이다.

남 일 모르는 거지. 씨발새끼들.

차 키를 던졌다가 낚아채듯 잡으며 차고로 간다. 첫눈이고 나발이고, 일은 일이다. 지하는 습하고 서늘하다. 그래도 겨울에는 지하 주차장이 생각보다는 춥지 않다고, 계절을 불문하고 불가피한 일이 생기면 지하가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것도 형이 알려준 사실이었지. 눈도, 바람도 안 들어오니 그 말이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차를 찾아간다.

"어떤 새끼야?"

저 멀리 보이는, 차 앞을 서성이는 남자. 대답이 없다. 어떤 새끼냐고 내가 묻잖아. 그러잖아도 예민한 날에 잘못 걸렸다. 팔을 걷어 붙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험악하게 고함을 치며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는데도 미동조차 않고 제 차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상했다. 어깨를 덮고도 남는 머리를 반으로 갈라 묶었고, 옷차림은 꼭 산에서 도라도 닦다 온 사람 같았다. 눈을 맞고 다녔는지 어깨에는 녹지도 않은 눈이 쌓여 있었고 왼쪽 허리춤에는 칼집이 있었다. 어떤 새끼냐니까 왜 대답이,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고개를 스친다.

왼쪽에 있는 칼집. 왼손으로 칼을 휘두를 남자.

차마 어깨를 짚어보지 못하고 우뚝 멈춰섰다. 재수없게도 예상이 빗나가면, 기분이 더러워서라도 두들겨 패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참다 못해 손을 치켜드는 순간, 부드럽게 손목을 쥐며 막는 손길이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천이 떨어지고 용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고 싶어서, 허튼 짓을 했네."

그가 너무나도 환하게 웃는 바람에…… 아이처럼 우는 수밖에는 없었다.


남부지방에도 눈이 왔으면 좋겠소이다

여기까지 읽어주어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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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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