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omer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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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현관 계단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요 몇 달 간 잘만 입고 다녔던 가디건은 더 이상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슬슬 진짜배기 겨울옷을 꺼내야 할 시기가 온 거다. 작년에 걸쳤던 두꺼운 코트며 패딩이 옷장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으려나.

하여간 도진은 가디건 주머니에 늘 전자담배를 지참하고 다녔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연초를 태웠지만, 얼마 전 이사 아닌 이사를 가 버린 이웃에게서 받은 마지막 선물이 바로 이것이었다. 딱히 좋아하는 이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애착이 들어서. 커피맛 액상의 전자담배를 몇 번 피우는 사이 도진은 연초를 완전히 끊고 말았다.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애가 해 줬던 잡스러운 이야기를 떠올린다. 흡연할 때 머리가 아찔한 건 담배를 태울 때 나오는 일산화탄소의 탓이라고 했다. 일산화탄소는 적혈구에 무지하게 결합을 잘 하기 때문에 적혈구의 산소 운반을 방해한다. 이 때 산소를 잘 공급받지 못한 뇌가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거라고.

"일종의 질식이죠. 차에서 연탄 피워서 죽는 것도 똑같아요. 연탄에서 생성된 과량의 일산화탄소가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 고이는데, 그걸 잔뜩 들이마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산화탄소가 적혈구에 죄다 달라붙어서, 산소는 한 톨도 못 마시게 되는 거지."

"아, 음......"

연초를 물고 있던 당시의 도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도진의 울적한 표정을 보고, 성격 나쁜 이웃은 입가를 찌그러뜨리며 웃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 씩, 질식사의 예행 연습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 뒤에 무슨 말을 했더라.

커피맛 액상을 태우며 생각해봤지만 영 떠오르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가디건 주머니가 진동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두 번 이상을 진동하기에, 도진은 이것이 전화 알림임을 깨닫는다. 느릿느릿 꺼낸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의외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수신 버튼을 황급히 슬라이딩한다.

"여보세요, 작가님?"

"으응, 오랜만이다. 도진아."

독고유진은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로 하하, 하고 웃었다.

도진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연락을 남긴 건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특별한 용건은 없었다. 그저 지금 연재하고 계신 웹소설 잘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낮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녁에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유진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밤에 메일을 보낼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그것까진 너무 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련히 바쁜 일이 있으시겠거니. 급한 일이 생기셨겠거니.

하지만 유진은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나뭇잎을 물들여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도진은 그가 전화번호를 바꾼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새 전화번호를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하나 고민하던 와중 길거리의 가로수는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말았다.

유진이 연재하던 웹소설은 10월 중순에 갑작스런 휴재를 가졌다. 그리고 11월 말에 이른 지금까지도 새 연재분은 올라오지 않고 있다.

"미안, 연락이 좀 늦었지? 한동안 몸이 안 좋았었거든."

"모, 몸이요?"

"응. 갑자기 사고가 나서...... 한참 입원했다가 얼마 전에 겨우 퇴원했어."

"지금은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아. 아아, 약간 후유증이 있어서 서울까진 운전을 못 하겠지만......"

"서울에 무슨 일이라도..."

"간만에 도진이 얼굴이라도 볼까 했지."

도진은 경기도 남부의 한 위성도시에 살고 있다. 유진이 말하는 서울이란 분명, 서울 근교까지의 대강을 포괄한 개념이리라.

"아, 아뇨. 무리하지 마세요. 뭣하면 제가 내려갈 수도 있고......"

"천안 관광이라도 하려고?"

유진은 또다시 하핫, 하고 웃었다. 그 목소리에 여전히 맥아리가 없어서, 도진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염려하고 만다. 무슨 사고가 나셨길래 근 세 달을 입원해계셨던 걸까......

세 달?

도진이 유진에게 연락을 한 건 여름, 연재가 끊긴 건 가을. 여름부터 입원을 했으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인데, 그렇다면 가을까지 웹소설 연재는 어떻게 하신 거지?

"작가님, 그......"

"응?"

"입원하셔서도, 연재를 하신 거예요? 조, 좀, 쉬시지......"

전파 너머의 유진은 여태까지의 웃음 중 가장 크게 웃었다.

"하하, 아냐, 아냐. 내가 세이브를 좀 많이 해 두는 편이거든. 거진 한두 달 치를 써 둬. 그런데 이번에,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세이브로도 커버를 못한 것 같네."

뭐야, 그런 거였구나. 도진은 내심 안심하고 만다.

"아무튼, 메시지 잘 읽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진이가 내 소설을 재밌게 읽고 있다니 다행스럽네."

"다, 다행스럽다뇨......"

"너무 오래 쉬어서 연재가 중단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너에게만큼은 꼭 결말을 보여줄게."

그 뒤로 몇 분간 대화가 오갔지만, 내용이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귀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던 탓인지 귓바퀴가 따스해졌다. 단순히 피가 몰린 것인지도 모른다.

상냥한 작별인사를 듣고 통화를 마치니 등 뒤에서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도진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백도화. 한 동 짜리 아파트의 중층에 사는 이웃사촌이다.

도화는 현관 계단에 앉아 있는 도진을 보곤 씨익 미소지었다. 언제 보아도 호쾌한 미소다.

"담배 피워요?"

"음, 네......"

"나도 피우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마다 짤랑, 짤랑하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 차 키라도 들어있는 것 같다. 도화도 그 소리를 인지하였는지, 어딘가 멋쩍은 얼굴을 해선 담배를 꺼내든다. 현관 근처의 재떨이에서 언제나 보이는 던힐 육미리다.

"서울 갈 일이 생겼거든요. 주차장에서 차 빼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고 가려고."

"아, 네......"

"아니면 같이 서울 나들이라도 갈래요? 벌써 열두 시가 넘었는데 여기 계신 걸 보니 오늘은 서점 안 가시나 봐."

"아, 아뇨...... 늦게 일어나서. 슬슬 가려고......"

사람 좋아보이는 눈웃음을 짓는 도화.

"태워다 줄까?"

"걸어서 금방이에요..."

"날이 춥잖아."

"아니, 그렇게 춥진 않아서..."

계단에서 엉덩이를 떼는 도진을 보고, 도화는 흣 하는 미묘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나중에 봐요. 서울 가고 싶으면 얘기 해. 태워다 줄 테니까."

도진은 애매한 미소로 화답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평소와 같이 귀가했다.

학교 주차장에서 각자의 차를 뺀다. 같은 길로 귀가하다가, 서천의 차는 공용 주차장에 세워둔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영의 차에 서천이 올라탄다. 별 말 없이 천영의 빌라로 향한다. 가끔은 연구실의 일을 상의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딱히 상의할 만한 일이 없었다.

적막으로 가득한 차내. 들려오는 소리라곤 크지 않은 주행음 뿐.

결국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천영의 자가용은 빌라 근처에 세워졌다.

최상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서천은 겨우 말을 꺼냈다.

"생신이시죠."

생신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뜬 후에는 이런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서천은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담당 교수를 바라본다.

천영은 엘리베이터 문이 위치한 정면만을 바라보다가, 이내 짧게 대답했다.

"그래."

"밖에서 저녁이라도 먹을 걸 그랬나."

천영은 그제야 서천을 곁눈질했다.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시선.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고, 몸에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고 싶었냐?"

"그랬을지도 모르죠."

"네가?"

"당신이."

천영이 코웃음을 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인간을 감지한 복도의 전등은 재빨리 제 몸을 밝힌다.

"전혀."

서천은 문득 전등이 너무 밝다는 생각을 했다.

계단실 너머의 창문으로 이쪽이 보일까.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천영의 손목을 잡았다.

행동을 멈춘 천영은 살짝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서천을 올려다 본다.

네 자리 중 두 자리만을 입력받은 도어락은, 집주인을 몇 초 간 기다리다가 에러음을 내며 초기화되었다.

"뭘 먹고 싶은 건데?"

조금 뾰족한 티가 나는 천영의 어투.

서천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한다.

"아니죠, 생일인 사람은 당신이니까."

당신이니까.

입을 반쯤 벌렸다. 고개를 좋은 각도로 기울인다. 여자와 하는 것과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심박수가 조금 오른 걸 느꼈다.

당황한 얼굴이 지근거리에서 보였다.

눈을 감을까 고민하던 찰나, 입이 막혔다.

부드럽지 않다.

이건...... 손바닥?

손으로, 입을 막았다?

"멍청한 짓 하지 마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막힌 채로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서천은 원망어린 눈으로 상대를 노려본다.

"너, 감정을 혼동하지 마."

혼동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막힌 채로는 여전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네가 나랑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말이야, 그걸 이런 감정과 헷갈리면 곤란하지 않겠냐."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해야만 사랑해주는 게 아닌가.

"나는...... 나는, 너랑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손이 떨어져나갔다.

얼굴 근육의 팽창과 이완을 확인한다.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오롯한 내 욕심이다. 그게, 네가 처한 상황이랑 잘 맞물렸을 뿐이고."

"헛소리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원하지 않는 짓을 할 거 같아요?"

"지금의 너는 그래!"

작지 않은 음량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잔향을 남긴다.

"너......"

한숨, 내리깐 시선,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제스처.

서천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시야에 담는다.

"......잘 생각해라. 그런 선호가, 한순간에 달라지는 건 본 적이 없어."

"한순간의 변덕일 뿐이라고?"

"그래. 한순간의 충동으로 일을 벌이고 후회하지 말라는 거야."

"한순간?"

상대의 어깨를 잡았다. 과하게 힘이 실린 팔은 그 가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를 뒤로 밀고야 만다. 소화전에 가볍게 부딪힌 교수. 쿵, 하고 울리는 충돌음.

"내가, 내가......"

서천은 몇 번을 어물대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얼마나 고민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이다."

"나는요, 착각 같은 건 안 해요."

"그럼 더 고민해."

"얼마나 더?"

"착각했던 거라고 깨달을 때까지."

"교수님, 그런데요......"

어깨를 잡고 있었던 손을 물린다.

천영은 올곧은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이, 원망스러워서 버틸 수가 없다.

"이게 수단이라면, 저는 얼마든지......"

천영은 제자를 밀어냈다. 도어락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한다.

해제음. 문이 열리는 소리.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구둣발. 따라 들어가는 스니커즈.

"그런 걸 수단으로 쓰면 안 돼."

육신을 잃은 신발 두 켤레.

"나는, 네가 구태여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계속 곁에 둘 생각이니까."

거실 전등이 켜지는 소리. TV가 켜지는 소리.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청계천 근처 폐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짤막한 뉴스. 사상자는 한 명 뿐. 세상 어디에서나 일어날 법한 흔하고 뻔한 사건사고.

"더 고민하고 행동해."

침실. 옷장. 벗어던진 겉옷. 날씨가 추워졌다. 작년에도 입었던 회색 코트. 같이 백화점이라도 가는 게 좋을까. 생신이시니까.

항상 같이 잠드는 침대.

두 사람의 체취가 밴 이불.

교수님, 그런데요......

원래 사랑이란 호르몬 작용에 의한 착각의 산물이 아니었나요?

착각에 빠져있겠다고 결심한 건 저인데, 왜 그런 모진 말을 하시는 거죠?

눈이 마주쳤다.

외투를 벗지 않고 있는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서천아."

그거 아니다, 라니.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에게 섹스는 언제나 수단이었는데......

그걸로 당신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준다면 그것으로 좋은데.

"가서 씻어라. 자자."

배알이 뒤틀렸다.

뜨거워졌다.

이상하게도 그러했다.

다가간다.

팔을 뻗는다.

상대의 어깨를 양 손에 넣는다.

놀란 얼굴의, 와이셔츠 차림의 동거인.

"윤서천."

입을 맞춘다.

억지로 침입한다.

피워보지 않은 담배의 맛이 났다.

상대의 무게중심이 침대에 안착한다.

억지로 끌어안는다.

저항은 크지 않았다.

혼합된 타액. 뒤엉킨 신체. 내려간 눈썹. 가빠진 숨결.

"안 돼, 이러면......"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선물?"

"생신...... 선물."

상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야 만다.

"수단으로 쓰지 말라고."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선택이 아냐, 착각이지."

"그럼 착각에 좀 어울려 주세요."

서천은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이런 짓을 해도 곁에 둬 달라고요......"

매트리스에 누운 천영의 볼에 물기가 서렸다.

천영은 깊게 한숨을 쉬고 나서, 물기를 손가락으로 쓸어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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