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7

데뷔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림 - 박문대

여러모로 바쁜 나날이었다.

박문대는 비스듬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졌다. 이렇게 좋지 못한 자세로 있어봤자 자신만 후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쉬이 고치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박문대는 여유롭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웬 이상한 놈에게 시달렸다. 납치당하지 않나, 협박받질 않나. 겨우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숙소로 돌아온 후 박문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때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만약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방법을 쓸 거다. 박문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게 쏟아진 톡을 훑었다. 박문대에게 톡을 보낸 사람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극단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이렇게 도움 될 줄이야. 이상함을 눈치챈 애들이 몇 있었지만, 이 정도야 괜찮았다. 그 전에 이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청려가 이상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메시지 어플의 창을 닫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박문대는 다른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아무 탈 없이 쉬고 싶었을 뿐이다. 활동기 내내 빡빡하게 굴렀으니, 휴식이라도 잘 취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근데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계속 화났다. 하.

메시지 어플을 닫았음에도 스마트폰은 계속 쥐고 있었다. 이제는 미처 살피지 못한 인터넷 여론을 볼 때였다. 혹여 누가 박문대나 청려에게 과도한 관심을 쏟아내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치했다. 그 과정에서 좋지 못한 악플을 많이 읽게 되었지만, 박문대의 멘탈은 나약하지 않았다. 뭘 새삼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겼다. 박문대가 그럴 때마다 주변인들은 다소 걱정하는 표정으로 보았다.

대략 이번에 박문대와 청려의 행방에 관심 가지는 이는 없었다. 이것도 그나마 다행인가? 애초에 청려가 자기를 납치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걱정하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만 끼치고. 박문대는 설마 그놈이 그렇게까지 돌아버린 놈인 줄 몰랐다. 하. 그나마 마지막에 얼추 제 말을 알아듣는 거 같았는데. 혹시 모르니 박문대는 녹음본을 더 철저하게 백업하기로 했다.

박문대는 신중했다. 의심이 많았고, 무엇이든 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혼돈에 빠진 아이돌 업계에 도무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인재였다. 박문대는 대충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스마트폰 화면을 닫았다. 소리 없이 화면에 들어온 불이 사라졌다. 새카맣게 변한 유리가 박문대를 비추고 있다.

박문대는 그래서 안 됐다. 만약 주변 언론 등에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제게 쏟아진 메시지 어플 맨 밑까지 제대로 훑어보았더라면. 뒤늦게 후회해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심연까지 가라앉은 후회의 진흙이 박문대의 뒤를 노렸다.

[ 박체리 ]

부재중 통화 + 24 건

*

“뭐야?”

박문대는 다음 날 늦은 아침에 일어났다. 제 스마트폰을 한가득 메우는 부재중에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평소에도 제가 일어났을 법한 시간대에 한두 통씩 전화를 걸었다. 어제는 예외적으로 늦게 잠들었고, 그 부작용으로 기상 시간이 대폭 늦어졌다. 덕분에 박문대는 원치 않은 늦잠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얘는 갑자기 왜 이렇게 전화했대? 통화하지 않았는데도 체리가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거 같았다. 박문대는 일단 체리에게 간략하게나마 연락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지금까지 체리와 이틀에 한 번씩 연락했다. 대부분 체리가 먼저 톡을 보내면 박문대가 하루 이내에 대답하는 식이었다.

어디 보자, 제일 마지막으로 체리랑 대화한 게…….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체리가 마지막으로 보낸 톡의 시기가, 하필 제가 청려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청려에게 연락받고 어쩔 수 없이 나간 이후로 쏟아지기 시작한 톡. 시작은 늘 그렇듯 체리였다.

하지만 보통이라면 박문대가 어떻게든 대답할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다. 심지어 청려 이 자식, 다른 놈들에겐 잘만 대답했으면서 체리만 무시했다. 읽씹했다는 소리다. 체리는 여러 번 박문대를 걱정했다. 보고 싶다는 낯간지러운 말도 덤이다. 여기까지 괜찮았다. 언제나 일어나는 일상이니까.

그렇지만 그 뒤로도 ‘박문대’는 읽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청려도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박문대인 척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그 미션 하느라 바쁜 와중에 연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졸지에 개인 프라이버시가 침해됐다는 걸 자각하자 정신이 다시금 아찔해졌다. 하. 그놈은 도대체 내 폰 잠금을 어떻게 푼 거야. 가만 안 둔다.

[ 문대! 바빠? ]

[ 혹시 체리가 너무 바쁘거나 그럴 때 너무 연락한다고 생각해? ㅠㅠ!! ]

[ 문대???]

대화 후반부에 가선 거의 체리 혼자 박문대를 부르고 있었다. 거의 여섯 시간 간격이다. 참고로 그때 박문대는 청려에게서 벗어나 병원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도저히 스마트폰을 만질 짬이 나지 않았다. 뭐, 하라고 하면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극단적으로 연락할 사람이 적었던 부작용이었다.

대부분 테스타 멤버나 매니저… 이 정도가 박문대가 아는 사람의 범위다. 청려는 이제부터 아는 사람에서 제외다. 테스타는 대부분 숙소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지냈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게 빨랐다. 매니저는 적당히 필요할 때만 부르면 됐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체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더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체리는 박문대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선아현이랑 연락처를 교환했지만, 안타깝게도 선아현은 이번 사건에 아무것도 몰랐다. 왜냐면 박문대가 사전에 미리 막았으니까. 괜히 테스타 애들 다 알게 되어서 모두에게 걱정 한가득인 눈빛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부재중 24통이나 남긴 건 좀 무섭기도 했지만, 반대로 얼마나 체리가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지표였다. 체리는 이렇게 많이 전화하지 않았다. 박문대는 연락처 어플을 켰다. 체리의 이름과 번호가 보였다.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연락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나 이번 휴식 내내 웬 이상한 놈에게 걸려서 납치당했어. 이런 말이라도 하라는 건가? 하. 사실만 온전히 말하는 건데도 어질어질했다.

체리라면 아마 박문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터다. 조건 없는 신뢰와 애정. 박문대는 어째서 제가 체리와 계속 만나는지, 이토록 사소한 대화를 하며 인연을 이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 차리니 이렇게 됐다.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체리는 선을 지킬 줄 알았으니까. 박문대에게 해를 끼칠 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물론 만약 그랬다가 박문대가 냅두지 않았을 테지만.

‘일단… 말해야 한다!’

무슨 말로 운을 떼야 하지?

박문대는 한 번도 제가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사회성도 나쁘지 않았고, 모두와 무난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일단 인성 자체로 큰 논란 없이 무탈하게 지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체리는 박문대의 사정을 알았다. 상태창이나 상태 이상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돌 활동에 진심이고, 팬 모두를 생각해주는 박문대. 체리가 알고 있는 박문대는 빈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제가 내뱉은 건 어떻게든 실현했다. 모두의 웃는 얼굴도 저도 따라 웃게 되는…… 이건 부끄러우니 그만하자.

“문대문대! 다 씻었어?”

“어? 아, 아직. 지금 준비할게.”

박문대는 저를 부르는 이세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 같이 무언가 하기로 했었지. 이세진은 계속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박문대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는 잔정이 많은 편이었다. 정작 박문대는 그런 이세진의 속내를 전혀 모르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오케이~ 시간 얼마 없으니까 빨랑 와.”

박문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조금 안심한 투로 이세진이 말했다. 그래. 일단 체리는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하자. 요 며칠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하자. 대답할 짬이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하자. 박문대는 가슴 한 켠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왜지. 분명 사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멀쩡했었는데 왜 체리에게는. 박문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간단하게 씻으러 갔다.

*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더라. 짧은 휴식 내내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강행군이다. 회사 윗대가리는 참 오래 살겠네. 자신이 매번 갈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튼 그런 연유로 박문대는 체리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무려 여덟 시간이나 지났다.

아마 박문대가 활동할 시간대라고 생각한 건지 전화는 걸지 않았다. 그래, 전화까지 걸었더라면 더 곤란했을 거다. 아니. 차라리 해주지. 그랬다면 까맣게 체리를 잊지는 않았을 텐데. 박문대는 제 얼굴에 묻어난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스마트폰을 만졌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했다. 하.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박문대를 압박했다.

[ 미안. ]

우선 사과는 해야지. 박문대는 파렴치한이 아니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확실하게 사과할 줄 아는 남자였다. 물론 이 뒤로 꽤 많은 문장을 쓰고 지우는 걸 반복했지만. 최대한 자신이 연락하지 못한 이유를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자세한 설명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여러 번 거듭 고민했다.

[ 이번에 좀 폰을 만질 여유가 없어서 대답해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어. 거기다 일하다 보니… ]

어째 설명을 피하려고만 했는데 구질구질한 사람이 됐다. 이게 아닌데. 박문대는 순간 터치 미스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하. 조금 더 생각하고 보낼 수 있었는데. 이미 보낸 건 어쩔 수 없지. 일단 체리가 읽었다는 표시가 뜨니까 적당히 대화하고 얼버무려야지.

이상했다.

박문대는 제가 보낸 이후로 20분이 넘게 조용한 톡창을 보았다. 원래 체리는 확인도 빨랐고, 대답은 엄청 빠른 애였다. 거의 보자마자 대답하는 애였다. 이렇게 시간을 길게 들여가며 장문을 쓰지 않는 애다. 심지어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걸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질 거 같았다. 뭐지? 지금 자신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박문대는 제 직감이 나름 쓸만하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직감이 무언가 외치고 있으면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 문대야!”

그때 선아현이 박문대를 불렀다.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의아하게 여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런 생각 하며 선아현을 보았다. 선아현은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바깥을 가리켰다.

“바, 밖에….”

“밖에?”

“체리가 왔어.”

……지금 이게 또 무슨 소리더냐.

박문대는 순간 비틀거렸다. 선아현이 깜짝 놀라며 박문대 근처로 다가갔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박문대는 일단 고맙다고 인사한 후 체리에게 가보겠다고 했다. 선아현은 아마 박문대와 체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다. 솔직히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저 잘 다녀오라며 인사만 해주었다.

선아현의 말대로 체리가 숙소 입구 근처에 당당헤 서 있었다. 아니, 그럼 쟤는 내가 톡 보낸 거 보자마자 바로 온 거야? 쟤네 집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꽤 있는데? 그걸 20분 만에 온 거라고? 택시라도 밟았나? 아닌가? 슬슬 이쯤되면 정신이 어지럽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걸 그러려니 넘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체리는 숙소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박문대를 보더니 표정이 환해졌다.

“문대!”

“쉿. 밤중에 그렇게 크게 부르는 거 아냐.”

“아, 에헤헤… 그렇지. 미안. 너무 문대가 보고 싶었고, 또, 계속 톡으로만 대화하는 건 외로워서 그냥 만나러 왔어. 혹시 체리가 방해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냐.”

그래. 톡으로 구질구질하게 기록이 남는 것보다 직접 말하는 게 나았다. 상대의 반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말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리를 보았다. 여기까지 급하게 왔는지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었다. 박문대는 능숙하게 체리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아래로 갈수록 화려해졌다. 밑 부분만 염색했다고 했지. 박문대가 테스타 활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염색할 때, 체리도 따라서 했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 머리색을 하고 싶다고 수줍게 털어놓았을 때는 마냥 귀엽다고 느꼈다. 뭐. 실제로 나름 귀여운 편이긴 했다. 아닌가. 박문대는 제게 콩깍지가 씌어 졌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건 미리 자각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했지만.

“나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진짜? 진짜 체리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거야?”

“어. 그냥 이번에는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으니까. 근데 그 24통은 또 뭐야?”

“아! 그거, 그, 문대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싶어서. 그야 지금까지 그렇게 읽씹만 하고 넘어간 적이 없었잖아! 막 문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가슴이 쿵쿵 뛰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그러니까 요컨대 박문대를 걱정했다. 그 방식이 조금 과했을 뿐. 박문대는 여태껏 제대로 말하지 못한 속내를 토해내는 체리를 보았다. 한마디 할 때마다 누구보다 저를 가장 걱정했다는 걸 알았다. 우스웠다. 초반에만 해도 그저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제 마음의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될 줄이야.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박문대답지 않게 들떴다는 소리다.

체리는 박문대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이번 휴식 내내 바빴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렇겠지! 그래도 연락 한 번만 해주었더라면. 앗, 이러다가 박문대가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머릿속으로 혼자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도중이었다.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체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숙소 앞에 의아하게 여겼다.

“왜?”

“아, 아냐. 아무것도! 그냥… 이렇게 문대랑 마주하고 있는 게 너무 기뻐서 살짝 예민해졌나봐!”

“뭘 그 정도로 예민해질 것까지야. 애초에 이번에는 연락하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너무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

“어? 진짜? 막 체리가 싫어진 건 아니지?”

“이런 일로 안 싫어져.”

단호한 박문대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체리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시시,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체리를 보자니 박문대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애초에 박문대는 체리를 싫어하지 않았다. 24통이나 되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신이 아찔했었다만, 그건 미처 체리를 잊고 있었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박문대는 밤이 늦었으니 슬슬 가보라는 말을 했다. 마음 같아서 배웅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체리는 혼자 갈 수 있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한쪽 손을 크게 휘저으며 박문대에게 인사했다.

“문대! 그럼 나 이만 가볼게! 아직 버스 안 끊겼으니까 갈 수 있어!”

“그래… 갈 때 조심하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응!”

세상의 행복을 모두 얻은 듯한 체리의 표정을 보니 박문대도 덩달아 웃었다. 미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옅은 미소였다. 그래도, 뭐. 뚱한 표정보다는 미소가 낫지. 알 수 없는 합리화를 하며 박문대는 그대로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저를 지켜보는 카메라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

“하아…….”

체리와 만난 이후로 며칠이 지났더라? 박문대는 포털사이트에 대문짝하게 올라온 뉴스를 보았다. 어두운 밤거리에 두 남녀가 마주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다. 초상권 침해 방지를 위해 사람 얼굴에는 모자이크 처리해두었으니까. 아니. 그래. 다 좋다. 박문대는 천천히 뉴스 제목과 기사를 읽었다. 내용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왜냐면 이거 며칠 전에 박문대가 체리와 만났을 때의 사진이거든.

당장 뉴스 제목만 해도 한참 주가가 올라가는 아이돌의 한밤중 밀회, 열애설… 같은 온갖 자극적인 키워드가 들어갔다. 꼭 웹소설 제목 같았다. 심지어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안 그래도 박문대는 인기가 폭발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이런 아이돌이 한밤중에 이성을 만난다고? 심지어 다정하게 대화하는 듯한 사진까지 있다면?

자기 아이돌이 연애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있다고 해도 그들은 라이트한 팬이다. 이쪽의 생태계를 전혀 모른다. 그저 좋아하는 아이돌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볍게 축하해줄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들 하나하나 과민하게 반응하면 이쪽이 되려 곤란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악개 등 코어팬에게 있다. 아니. 악개를 코어팬이라고 해도 되나? 안 그래도 아주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테스타가 한껏 묶여 활동하며 최근에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나, 1위인 박문대를 시샘하거나 꼬투리 잡으려고 기를 쓰는 애들이 있다. 타 아이돌 팬들도 승승장구하는 테스타를 노릴 때가 많았다.

특히 박문대는 자기 이미지를 잘 관리하는 걸로 유명했다. 물밑에서 종종 박문대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악개들이 있다. 아직 사생이 붙지 않았으나, 붙는 건 시간문제다. 박문대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감추었다. 최대한 미션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자기 처신을 잘 한거지.

문제가 있다면 모두가 박문대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문대의 극단적인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팬들. 아니. 팬들도 있고, 어그로도 몇 있다.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나….

‘다 족쳐버릴 수도 없고.’

사진이 있으니 루머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기사에서 A양이라고 써 놓은 주제에, 누군지 짐작할 만한 단서를 잔뜩 써 놓았다. 그래. 체리가 이전에 아이돌 그룹 데뷔하려다가 탈퇴했었지. 아니. 근데, 이러면 누군지 다 알게 되잖아.

기사를 쓴 기자가 노린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박문대와 체리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몇 가지 자극적으로 버무려서 올려두었으니, 이제 너희는 이걸 보고 조회수나 올리라는 거다.

하. 답도 안 나오네. 심지어 이 기사, 밤중에 치고 들어왔다. 모두가 잠들 때 슬쩍 올라왔다는 말이다. 그게 늦은 밤에 활동하는 테스타 팬에게 퍼졌고, 아침이 되니 더 본격적으로 퍼지고 있단 말이다.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인드 처리되겠지. 여기가 뭐 그만큼 바보인 회사도 아니니까. ……안 내려가면 내가 내리게 할 수밖에.

얼핏 익명 게시판이나 트위터 비계 등을 보았는데, 박문대에게 실망했다는 사람이 다수였다. 이건 내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자. 심한 말 하는 건 PDF 따놓고. 근데 왜 애꿎은 체리의 신상을 털지? 왜 모자이크 처리한 건지 전혀 모르는 건가? 그냥 어그로꾼이라고 하자니 석연치 않은 점이 몇 군데 보였다.

아마 저쪽은 팝콘이랍시고 신나겠지. 아침이어도 이런데, 낮이나 저녁이 되면…… 박문대와 박체리, 둘 다 인터넷 상에 신상 다 털리겠군. 그런 건 사양이다. 자기야 회사 빨로 어떻게든 유야무야 할 수 있다지만, 체리는? 안 그래도 그룹 내에 괴롭힘으로 아이돌을 그만둔 애다. 만약 아이돌을 계속 하고 싶다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데뷔하기 힘들어진다.

박문대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체리의 학교 졸업 사진을 올린 놈들이나 심한 말을 하는 놈들을 예의 주시했다. 누군지 특정하기 어려운 익명 게시판에도 다 신고하는 방법이 있다. 번거로워서 그렇지. 거기다 깔깔 웃으며 욕설을 내뱉는 트위터 비계도 다 PDF 떴다.

‘진짜 누군지 몰라도 가만 안 둔다.’

우선 박문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끽해야 증거 자료를 모을 뿐이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자료는 많으면 좋으니까. 나중에 어느 정도 증거가 모이면 체리랑 연락해서……. 하. 아니. 그 전에 이 기사 쓴 놈이 누구야? 박문대는 기사를 쓴 사람을 보았다.

이런 사진까지 올렸다는 건 기사를 쓴 사람과 사진을 찍은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말이다. 따로따로 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정보다 생명이다.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 중요해질 수 있다. 인기 아이돌의 한밤중의 열애설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고도 남을 사진을 감히 남에게 공유한다? 인간이 그렇게 언제부터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너그러웠다고.

‘유식호 기자, 두고 보자.’

일단 기사 올린 놈도 박문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이 기자를 족치면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나오겠지. 기사가 내려가기 전에 혹시 몰라 박제했다.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보았겠고, 입소문도 여기저기 퍼졌겠지만. 적어도 못 보게 하는 게 나았다.

졸지에 박문대는 예정에도 없는 일을 하게 됐다. 무서울 속도로 PDF 따는 모습에 테스타 멤버들은 박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대담한 차유진조차 상황을 살피고 있다. 본능적으로 저건 건드려서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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