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8

데뷔 못하는 죽는 병 걸림 - 박문대

박문대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마시지 않나? 다들 속이 답답할 때마다 한두 캔 정도는 마시잖아. 만약 이런 박문대의 생각을 다른 멤버들이 알고 있었더라면 모두 기겁했을 일이다. 박문대는 본인의 주량 자체가 아무 문제도 없고,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답답할 때 한두 캔 마시는 것 자체는 문제없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성인이라면 대부분 그 정도의 양은 마시니까. 하지만 박문대가 간과하고 있었던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횟수였다.

한 번에 마시는 양 자체가 많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었다. 박문대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마셨다. 자연스레 분리수거 할 때마다 박문대가 곧잘 마시던 맥주캔이 나왔다. 하루에 두 캔씩 잡아도 일주일이면 거의 여덟 캔이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이렇게 꾸준히 마시면 언젠간 간에 무리가 온다.

가장 먼저 이 상황을 눈치챈 건 의외로 배세진이었다. 배세진은 제 나름대로 박문대가 술을 최대한 마시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최연장자라고 해도 박문대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이겨낼 수 없었다. 배세진도 자기가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배세진은 몇 번 박문대를 홀로 저지하다가 장렬히 실패하고 다른 애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류청우로부터 시작해 이세진, 선아현……. 적어도 박문대의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나설 법한 애들만 골랐다. 아직 어렸던 막내 두 명은 박문대의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안 그래도 눈치 빠른 놈이다. 자기가 술을 못 마시게 모두가 막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아무리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먹고 마시는 걸 뺏기면 눈이 돌아간다.

그렇게 몇 주 내내 모두 손발을 합쳐가며 박문대의 음주를 제한했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진행되는 줄 알았다. 배세진이나 선아현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일주일에 마시는 횟수가 조금씩이나마 줄어들었다. 분리수거 할 때도 맥주캔이 덜 보였다. 다들 안심하며 열심히 노력한 박문대를 칭찬해주려고 했었다.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은 여러 가지였다.

첫째, 왜 그렇게 대한민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지.

둘째, 어째서 여기저기 알코올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는 센터 등이 있는지.

알코올 중독이란 결코 주변인들이 약간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당사자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들은 간단하면서도 사소한 걸 놓쳐버렸다.

박문대는 처음에 무난하게 줄이는 듯했다. 그러나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꺼번에 마시기 시작했다. 차츰 과음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심지어 본인마저 아무 감흥이 없다. 다음날에 있을 일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마셨기 때문에 숙취에도 그러려니 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도 좋은 경험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리가. 당장 소중한 멤버 한 명이 알코올 중독으로 비명횡사할 지경이다. 그들은 수북이 쌓인 맥주캔을 보며 고민했다. 자기들의 힘으로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으니 외부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일단 박문대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거 기자들의 눈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 있다.

[ 문대! 뭐해? ]

띠링, 하는 문자 소리와 함께 박문대의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졌다. 다들 반쯤 도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소리가 나는 근원지를 찾았다. 덩그러니 주인을 찾지 못한 스마트폰이 소파 위에 놓여있다. 문대가 무슨 일로 폰을 두고 간 거지. 아, 지금 씻고 있지. 그들은 함부로 박문대의 스마트폰을 뒤적거리지 않았다. 아무리 테스타라는 그룹에서 오랫동안 지냈다고 한들 사생활은 존중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알림 팝업창이 뜨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박체리.

본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유일하게 박문대가 교류하고 있는 여자 지인이었다. 일단 다른 멤버들 눈에 박체리가 박문대를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박문대는 무덤덤한 반응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크게 싫은 눈치는 아니다. 적당히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선에서 대처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체리가 꿋꿋하다고 해야 할지, 아님 애매하게 여지를 주는 박문대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거의 절반쯤 현실 도피에 빠진 멤버들은 차라리 체리에게 알리는 게 좋지 않냐고 말했다. 체리는 일단 박문대의 편이었다. 문대에 관련된 사항이라면 성심성의껏 들어주었다. 마치 제 일처럼. 생각해보니 박문대도 체리에게 무른 구석이 있었으니, 의외로 잘 해결될지 몰랐다.

멤버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다행히 선아현이 체리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다. 선아현이 제 스마트폰을 쥔 채 체리에게 연락했다. 장문의 톡을 몇 번에 걸쳐 박문대의 현 상황을 설명했다. 1이 놀라울 정도로 사라지고, 엄청난 반응이 쏟아졌다. 이세진이 힐끗 선아현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장난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체리는 당장 숙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어. 아니. 이거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거 아냐? 누군가 말했다. 체리의 행동력은 그 누구보다 끝내 주었다. 괜히 박문대를 좋아하는 게 아닌지 이런 쪽으로 민첩했다. 뒤늦게 체리가 아니라 매니저나 회사에 연락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일반 개인이 할 수 없다면 기업의 힘을 빌려야 했다. 비록 윗대가리가 이상했지만 일단 멤버 케어 자체는 잘하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었다. 실무진들도 다들 테스타에게 관심이 많았고.

무엇보다 테스타는 지금 한참 인기몰이를 하는 그룹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한들, 현재 테스타는 브이틱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순위를 유지 중이다. 아주사에서 시작된 화제성이나, 지금껏 보여준 무대 등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그러니 만약 회사 측에서 이런 박문대의 변화를 눈치챘더라면, 적어도 보여주기식으로 무언가 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거 어쩌지.

한순간의 현실 도피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거 같았다. 선아현이 필사적으로 체리와 대화하고 있다. 체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지금 숙소로 가고 있다고 했다. 아니. 저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시는 건데요. 이런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화장실에서 줄곧 들려오던 물소리가 뚝 끊겼다. 여섯 명이나 넓은 거실에 있음에도 침묵이 맴돌았다.

“…뭐야? 다들 왜 그러고 있어.”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박문대가 나왔다. 싸늘한 거실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황에서 모르는 게 더 이상했지만. 다들 애써 박문대의 질문에 회피했으나, 그럴수록 더 수상함만 늘어날 뿐이었다. 박문대는 눈을 반쯤 깔더니 터벅터벅 소파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나아가는 것만으로 이상할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얘는 또 언제 연락했대.”

“아, 아 그게……!”

“왜 갑자기 온다고 하는 건지.”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왔다. 선아현이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체리는 선아현과 대화하면서도 박문대에게 연락하는 걸 잊지 않았다. 부디 잊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체리가 치밀한 건지, 자기들이 허술한 건지 도통 알 수 없다. 박문대는 수건으로 계속 물기를 닦아냈다. 수건이 순식간에 물기를 가득 머금으며 축축해졌다. 비스듬한 자세로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았다.

“근데 얘 우리 숙소 아직도 알고 있나?”

“…그러게! 갑자기 무슨 일로 온다고 그래?”

이럴 땐 넉살 좋은 이세진이 나설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박문대에게 다가갔다. 박문대는 이세진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세진은 여태껏 신을 믿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무 신이나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부디 체리가 박문대에게 이상한 말 하지 않기를 바라며.

“갑자기 뭐 나에게 문제 생긴 거 아니냐며 괜찮다고 그러고, 걱정 되니까 오겠다는데? 너네 무슨 말 했냐?”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이세진은 신을 부정했다. 역시, 세상에 믿을 건 없다.

아무래도 체리는 과할 정도로 문대에게 이것저것 말한 모양이다. 박문대가 체리와 대화 내역을 보여주지 않은 탓에 제대로 판단할 수 없지만. 일단, 그, 문대가 말하는 걸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괜히 아주사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세월이 있는 게 아니다. 박문대는 여섯 명을 한 명 한 명 눈에 새겼다. 그게 어찌나 무서운지. 도저히 일반인의 담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래도 숙소 근처에 있었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문대에게 보고 싶다며 찾아오려고 했던 걸까? 체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숙소로 찾아왔다.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이상하게 섬뜩했다. 그들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함께 움직였다. 문밖에 허리까지 닿는 구불거리는 투톤 머리카락의 여성을 보며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왔네.”

“그, 러게! 엄청 빠르네? 혹시 근처에 있었던 걸까?”

“그 전에 여기 숙소 보안이 철저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이세진의 어색한 맞장구를 뒤로 배세진의 현실적인 발언이 나왔다. 이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터라 박문대는 익숙하게 넘겼다. 괜히 테스타 숙소 앞에 오래 세워 두고 있다가 이상한 소문이 날 수 있다. 박문대는 그런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익숙하다는 듯 문을 열어주니 체리가 문대에게 달려왔다.

“문대! 알콜 중독이 되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무슨 중독?”

“알콜! 알코올! 술! 에탄올! 막 다른 애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아니었어?”

……에탄올이랑 알코올은 조금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냐?

박문대는 제게 쏟아지는 체리의 말에 잠자코 있었다. 따로 변명하고 싶다거나,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었다. 체리가 말하는 것만으로 다른 애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황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마 다른 애들이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걱정한 나머지 체리에게 말한 듯했다. 체리는 모든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었다. 박문대가 걱정되면 가장 먼저 나서기로 유명했다. 함께 살지 않으니 미세한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다. 대신 한 번 알아차리면 어떻게든 끝을 보고 말았다.

박문대는 체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우선 뽑아낼 정보가 있다면 다 들어두어야 한다. 체리는 처음에 알코올 중독이라고 알려준 게 선아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지금까지 몰라주었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제 이름이 언급되자 선아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박문대는 그런 선아현의 모습에 타박하지 않았다. 딱히 잘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다들 저를 걱정하느라 나름 머리를 쓰다가 잘못 꼬였을 뿐이니까.

아, 그래서 어쩐지 자기를 보며 술을 줄이라고 잔소리 한 걸까.

박문대는 여전히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마셨나? 이번 주에는 좀 많이 마셨고, 숙취 때문에 고생했으니까 앞으로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긴가민가했다.

알코올이 박문대의 두뇌를 마비시켰다. 점점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거 아냐? 류청우와 배세진이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기가 중독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형태였다. 아무래도 박문대가 없는 사이에 제 32회 긴급 회의를 열어야 할 것 같았다.

체리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한껏 토해냈다. 가쁘게 토해내는 숨을 보며 박문대가 무어라고 하지 못했다. 어, 어. 그래. 어색한 반응이 체리에게 쏟아졌다. 체리는 박문대의 어정쩡한 대답에 상처 입지 않았다. 문대가 그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체리는 이상할 정도로 긍정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다.

체리의 걱정에 박문대는 우선 괜찮다고 말했다. 무엇이 괜찮은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체리는 알코올 중독은 전혀 괜찮은 게 아니라고 말했다. 확실하게 딱 잘라 말하는 면은 좋았다. 상대하는 게 버거울 뿐이지. 박문대는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차분한 대화를 나누자고 권했다. 현관에서 계속해서 소리쳤다가 주변 사람들이 들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체리는 순순히 거실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으며 박문대를 걱정했다.

“도대체 왜 술을 마시는 거야! 그러다가 막 건강이 나빠진다거나 그런 거 알면서!”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어. 그냥 남들 마시는 것만큼 마셨지.”

“아현이가 막 분리수거 할 때마다 계속 맥주 캔이 나온다고 걱정했는데? 그게 남들 마시는 거야? 무, 물론 마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빈도가 너무 잦다고 걱정하더라!”

박문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선아현 쪽으로 흘러갔다. 안 그래도 선아현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안색이 새파랗고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니 자기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이런 걸로 자기가 뭐라 할 인간처럼 보였나? 요즘 자꾸 술을 빼앗기는데 예민해져서 저도 모르게 욱한 적 있었지만. 박문대는 선아현에게 잘 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착하다 못해 마음이 여린 애다. 원래 아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면 그걸 말리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일단 자리에서 성큼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커다란 최신형 냉장고 안에 맥주캔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음. 예전에 세일 할 때 한꺼번에 사둔 걸 이렇게 보니……. 장난 아니었다. 어째서 쟤네들이 말렸는지, 그리고 체리에게 말했는지 알 거 같았다. 슬쩍 분리수거 용으로 나눠둔 쓰레기통을 보았다.

쓰레기통에는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맥주캔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쓰레기로 분리되고 있다는 건 내용물이 텅 비워졌다는 소리다. 일단 캔의 개수를 어림짐작으로 헤아리니 장난 아니었다. 매주 한 번씩 분리수거 하는 편인데, 이게 이렇게 쌓였다고?

테스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류청우, 아니면 박문대. 심지어 류청우는 그다지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분위기상 마실 뿐이다. 그럼 저 많은 캔을 비운 게 자기라는 소리인데.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확실하게 박문대의 잘못이었다.

다른 애들에게 신경질적으로 굴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체리는 쓰레기통 안에 캔을 보며 잔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은 덤이다. 문대의 어깨 부근을 거칠게 두들기며 잔소리했다. 아니, 아파, 그만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어깨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얘가 이렇게 손이 매운 애는 아니었는데.

“하…… 그래. 내가 잘못했어.”

“당연하지! 이건 누가 말해도 백퍼 문대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여기 냉장고 안에 있는 술 전부 압수야!”

박문대는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여기서 발뺌해봤자 이상한 사람이 된다. 다행히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은 덕분에 이성적인 판단이 약간이나마 가능했다. 박문대의 사과를 들었으나, 체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냉장고 한가득 채우고 있는 술을 압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뭐? 박문대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데?”

“그야 이대로 체리가 가버리면 문대가 마셔버리거나 그럴 수 있잖아? 체리는 문대가 아픈 거 전혀 보고 싶지 않아. 이건 누구나 다 그래! 다들 문대가 혹여 아플까봐, 숙취 때문에 고생할까봐 그런 거라고!”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압수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강제로 못 하게 하려면 압수하는 게 제일이니까. 그런데 뭔가 단계를 건너뛴 거 같지 않아? 박문대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체리는 완고한 면이 있다. 행동력이 장난 아닌 것도 있었지만, 한 번 마음 먹은 건 끝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테스타 숙소에 들어올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압수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체리가 체력이 좋다고 해도 도저히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있을 무게가 아니었다. 심지어 저거 살 때만 해도 다들 무겁다며 들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는가? 점점 진실을 알 수 없는 채 미궁으로 빠져갔다. 그런 박문대의 고민을 모르는지 체리는 여전히 조잘거렸다. 대부분 박문대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꺄아! 무서워!”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박문대는 저를 향해 겁먹은 듯 과장스럽게 움직이는 체리를 보았다. 체리는 박문대가 갑자기 저를 노려보았다며 무섭다고 말했다. 아니, 나 너를 노려본 적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다.

박문대는 제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이 체리를 노려보았나? 대답은 NO였다. 박문대는 체리를 노려본 적이 없었다. 만약 노려보았다고 해도 체리에게 반발을 일으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체리는 이따금 박문대의 사소한 행동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판단해도 될 터. 박문대는 일단 모두가 보는 앞이었으므로 보여주기식이나마 해명하기로 했다.

“노려본 적 없어.”

“거짓말! 체리가 압수한다고 하니까 문대 표정이 엄청나게 무섭게 변했는걸! 다들 그렇지?”

“어? 어, 그랬지?”

대답이 시원찮은데.

다들 정말 박문대가 체리를 노려보았는지 아닌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 모를 수 있지. 비록 여섯 명이나 된다고 해도 다들 박문대와 체리를 주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당장 차유진만 해도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지 다른 것에 관심 두기 시작했다. 일단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건 일단 제쳐두고, 도대체 어떻게 압수하려고 하는데? 할 방법이 있어? 저걸 다 가져가게?”

“그거야 당연히 있지! 자, 봐봐.”

아무렇게나 내뱉은 건 아닌 모양이다. 체리는 당당하게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너무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기에 되려 불안해졌다. 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이 익숙했다. 분명 테스타 숙소에 온 건 한두 번이 전부일 텐데, 마치 여기에 산 사람처럼 느껴졌다. 체리는 냉장고 문을 열더니 그대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한 손으로 다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길쭉한 캔이 체리의 손에 들려있다. 체리는 이내 캔을 땄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캔 내부에 갇혀 있던 탄산이 빠져나왔다. 얼핏 캔 입구에서 보글보글 맥주 특유의 거품이 올라왔다. 체리는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꿀꺽. 목 넘김이 괜찮은 수입 맥주답게 한꺼번에 마실 수 있었다. 모든 일련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도 체리의 돌발적인 행동에 말을 얹지 않았다.

캔을 절반쯤 비웠을까? 체리는 입술 근처에 한가득 거품을 묻힌 채 당당하게 박문대를 보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문대의 이름을 불렀다.

“짠! 이렇게 다 마셔버리면 굳이 가져갈 필요도 없어지지? 물론 캔 버릴 때 좀 고생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대가 마시지 않으니까 괜찮아! 체리는 의외로 주량이 세다고!”

“……야.”

“으응? 문대.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야? 설마 체리가 문대 맥주를 마셨다고 그렇게 화내는 거야? 꺄, 체리는 문대가 화낼 때마다 무서워.”

이건 진심으로 화났다. 끽해야 맥주 몇 캔을 가져가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박문대는 술 하나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다. 마시고 싶어도 남들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술을 마신다고? 거기다 다 마셔버리면 그만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아무리 체리의 주량이 세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박문대는 제 표정이 무섭게 변한 걸 인지했다. 주변에 있는 배세진이 제대로 겁먹은 모습을 보였으니까. 류청우나 이세진은 박문대가 혹여 모를 돌발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말릴 준비 했다. 선아현과 김래빈은 상황파악 했으나 무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차유진은 생략. 그는 지금 이 상황에 관심이 없다.

박문대는 화가 났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르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적으로 행동할 줄 알았다. 아이돌이 주먹을 휘두른다? 당장 내일 뉴스에 뜰 일 있나. 그는 화가 날 일이 있다면 말로 표현하는 쪽에 가까웠다. 조곤조곤, 사실만을 말했다. 안 그래도 화낼 때 말투가 제법 날카롭고, 박문대 특유의 분위기로 어지간한 사람들은 덤비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다. 박문대는 체리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일정 거리를 둔 채 천천히 체리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언급했다.

“일단 지금 나는 어떤 상태지?”

“어?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야! 모두가 술을 많이 마신다고 걱정했으니까.”

“그런 사람 앞에서 캔 맥주를 반이나 넘게 비우는 걸 보여주는 건 옳다고 생각해?”

“아, 아냐? 그렇지만 이렇게 비우는 게 가장 빠른데? 아, 설마 체리가 취한다거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체리를 걱정해준 건 고맙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아. 버릴 걸 그랬나? 근데 그러면 너무 아까운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점점 화내는 것조차 지치기 마련이다. 박문대는 제 속에서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어째서 체리의 행동이 잘못되었는가. 그것부터 제대로 알려주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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