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타입 9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 박문대

‘얘네는 할 일이 이거밖에 없나?’

박문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서 보면 얼핏 찌푸린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되는 음울한 분위기에 모두 저마다 숨을 삼켰다.

활자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박문대와 체리를 욕했다. 격했다가 차츰 가라앉았다가 격해지는 걸 반복했다. 하루 내내 타인의 욕을 안 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는 일이 생기나? 그럴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욕설 수위는 어마무시할 정도로 높았다.

처음에는 데뷔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박문대의 안일한 태도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앨범을 부수는 등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박문대로서는 안타까웠다. 기왕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대는 우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손가락으로 틈틈이 철저한 익명제 사이트나 자물쇠를 달고 있는 SNS 계정을 훑었다. 가볍게 보았을 뿐인데 질척거리고 추잡한 욕설이 난무했다. 양지에서는 그럭저럭 멀쩡한 사람인 양 굴고 있으면서, 음지로 가면 그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천박한 말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일단 사과해야 하는 건 알고 있는데, 도통 타이밍이 잡히질 않았다.

소속사에서는 박문대보고 ‘일단’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박문대는 얌전히 듣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자신들이 정한다는 듯, 거만한 태도로 나오는 회사를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윗선에서 자기들끼리 말을 맞추고,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다며 발을 빼고, 애꿎은 박문대 탓을 하고 있을 게 훤히 보였다.

박문대는 이대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가, ‘테스타’의 수명이 끝장나는 걸 알았다. 안 그래도 상태 이상이 버젓이 박문대의 목숨줄을 잡고 있는데,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 그냥 죽으라는 거나 똑같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익명으로 이루어진 음지 사이트에서는 하면 안 되는 말을 잔뜩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에 존재의의를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가가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어느새 그들은 체리의 과거사를 캐내었다. 자칭 지인들이 몇몇 썰을 풀었다. 박문대는 어이가 없었다. 비록 그는 체리와 같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도 단편적인 정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미새나, 억지로 불화를 만들고 누명을 씌우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알았다. 데뷔조에서 빠진 것도 다른 멤버가 의도적으로 체리를 따돌렸기 때문이다.

‘굳이 그 상황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정황이라는 게 있지.’

체리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데뷔조에서 체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체리는 망설이지 않고 데뷔를 포기했다. 박문대처럼 상태 이상이 걸려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굳이 데뷔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체리는 망설이지 않고 LeTi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하고 싶은 걸 하자. 체리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박문대와 만났다.

체리의 변덕이 아니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거다.

‘어찌 됐든 여기에 있는 건 다 사실이 아니야.’

완벽한 거짓말보다 그럴듯한 사실이 섞인 게 더 믿기 쉬웠다. 박문대는 턱을 괸 채 그리 생각했다. 소속사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 자체는 없었다. 그는 미리 장문의 자필 사과문을 적어놓았다. 언제든지 소속사가 움직이라고 하면 움직일 수 있도록. 혹시 모르니 다른 애들의 증언도 받아둘까 했지만……. 거기까진 필요 없을 거 같았다.

인터넷에서는 박문대의 열애설이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자연스럽게 박문대에게 정말 사귀냐고 묻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대부분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그룹 애들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안면도 조금이나마 트고 지냈다.

“문대문대! 이거 뭐야, 사실 아니지?”

“당연한 소릴. 열애설이고 뭐고, 아직 우린 그런 관계가 아냐.”

“뭐야! 그럼 나중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거야? 어휴, 우리 문대. 나중에 연애하겠다고 우리들 버리는 거 아닐까, 몰라. 문대가 없는 테스타는 상상도 하기 싫은걸!”

약간 과장스러운 몸짓과 말투였다. 박문대는 아무 감흥이 없는 눈으로 이세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이세진이 멋쩍게 웃었다. 박문대는 테스타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했다. 참, 한결 같은 인물이었다. 이세진은 이런 박문대의 면모가 좋았다.

이세진은 예전부터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거의 체리의 일방통행 짝사랑이었다.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박문대도 내심 호감이 있는지 어지간해서 만나주는 편이었다. 저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박문대가 알아서 잘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적어도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제 앞가림은 잘하는 편이었다.

“나, 나쁘다고 생각해!”

“나쁘다니?”

“그, 그냥… 모, 모두가 다들 잘 알지도 모, 못하고 이렇게 나쁜 말만 하는 거!”

“맞아, 우리 아현이가 잘 아네. 그런데 다들 자기보다 잘났다거나 하면 작은 허점이라도 노려서 뭐라고 한다? 진짜 우습지 않아?”

결국 선아현까지 볼이 붉어질 정도로 잔뜩 불만을 털어놓았다. 확실히 잘 알지도 못한 채 나쁜 말만 하고 있는 건 나쁘지. 박문대는 선아현이 제 화면에 있는 글자들을 보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가렸다. 안 그래도 나쁜 말을 넘어 심한 욕설까지 있다. 박문대는 <아주사>에 있을 때부터 부모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다들 체리의 부모님 안부를 친절히 묻고 있다.

‘체리는 괜찮으려나.’

박문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로 개통해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연락처는 테스타와 체리… 지극히 사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사람뿐이었다. 테스타 애들의 연락처를 저장해둔 것도 별거 아니었다. 내가 이만큼 너희들을 믿는다. 딱 그 정도였다. 체리가 단둘이서 몰래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홀린 듯 마련해두었지만,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박문대는 한쪽 스마트폰으로 여론을 훑어보며, 다른 쪽으로 체리에게 안부를 묻었다.

[ 괜찮아? ]

무엇을 괜찮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

박문대는 그렇게 보낸 뒤 작게 후회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밖에 보낼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 괜찮아! 우리 문댕은? 지금 막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나쁘게 말하는 데 그거 다 듣지 마! 다 거짓말… 까지는 아니어도, 문댕이가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박문대처럼 전문적으로 서치 한 건 아니었지만, 제 나름대로 열애설 기사를 기반으로 여기저기 조사한 모양이다. 그 과정 끝에 ‘박문대가 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걱정해주는 게 이상하게 웃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욕을 먹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체리였다.

그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일이 언급됐다. 얌전한 척 남자에게 꼬리치는 년이라는 말을 비롯해 가히 남미새에 가까운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졌다. 우스운 건 아무도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문대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나 얄팍하게 느껴졌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또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은 다들 저렇지.

‘굳이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두 번 다시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손 써두고 싶었다. 박문대는 스마트폰 자판을 꾹꾹 누르며 체리에게 말했다. 우선 이렇게 상황이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 않았다. 괜히 이런 사태에서 만났다가, 이상한 사생이 자신들을 촬영하고 익명 게시판에 올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들이라면 올리고도 뻔히 남았다.

[ 문댕, 이미 다 본 거야? ]

[ 다 봤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괜찮은 거 맞지? ]

[ 으응! 체리는 괜찮아! 학교에 있을 때도 자주 들었던 말인걸!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학교 때부터 들었다.

그 말에 박문대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여러 번 씹힌 입술은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주변에서 선아현이나 배세진이 머뭇거리며 립밤을 갖고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박문대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소속사에서 근신에 가까운 명령을 받았다고 하나, 박문대의 본분은 아이돌이었다. 극한으로 외모를 꾸미고, 뛰어난 실력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안 그래도 상태 이상으로 해야 할 일이 잔뜩 있는데, 이런 와중에 나설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테스타가 속한 소속사는 이상하리만큼 미적지근했다. 윗선에서 한창 회의라도 하는지, 아니면 이 사태에서 잠자코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화나게 만드는 건 똑같았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박문대는 조급함을 억누르며 인터넷 여론을 살폈다. 부모 안부를 넘어서 추잡한 말이 오갔다. 그중에서 체리가 몸을 팔고 다닌다는, 정말 근거 없는 말까지 있었다. 점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얼굴을 내밀었다. 박문대는 고개를 들어 김래빈에게 갔다.

“혹시 노트랑 펜 있어?”

“아, 네! 있습니다. 며칠 전에 새로 산 지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하시다면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정도는 아니고… 오늘? 아니다, 내일 정도만 잠깐 쓰다가 돌려줄게. 혹시 중요한 거 써둔 건 아니지?”

“이제 슬슬 쓰려고 여유분을 잔뜩 사놓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또한 아직 그 노트와 펜, 모두 아무것도 써 놓지 않았기 때문에 제 자료에 대한 소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알았어. 고맙다. 최대한 깨끗하게 써서 돌려줄게.”

이렇게 박문대는 장황한 김래빈의 설명을 듣고 펜과 노트를 빌렸다.

박문대는 빌린 노트 구석에 작게 낙서했다. 펜은 잉크가 막힘없이 잘 흘러나왔다. 좋아. 박문대는 그대로 인터넷 여론에서 반박할 만한 거리를 찾았다. 익명 사이트는 이래서 좋았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아도 저들끼리 자멸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으니까. 박문대는 슬그머니 여론을 살피며, 심각한 욕설을 입에 담는 사람은 PDF로 따로 저장했다.

익명이어서 법적 절차를 밟지 않는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어느 곳이든 다들 아이피만큼은 필수적으로 수집한다. 접속하는 곳에 따라 다르게 표기될 때는 있지만, 적어도 법적 절차를 밟으려면 충분히 밟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람들이 신나게 떠드는 곳은, 예전에도 여러 차례 익명의 힘을 믿고 욕하다가 걸린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는 점이다.

박문대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누구를 욕하는지 알 수 있다면, 그들은 족쳐버리는 것도 참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박문대는 자기 자신과 체리를 향한 악질적인 루머를 골라내는 작업을 해냈다. 그러면서 틈틈이 판을 헤집었다. 누가 보아도 쉴드라고 생각할 수 없고, 나는 너네들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이 점은 조금 이상하다. 딱 이 정도의 분란의 씨앗만 퍼트렸다. 다들 신나게 동조하면서, 박문대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다. 넘는 건…… 나중에 변호사를 선임하여 보면 될 일이다.

‘배세진이 좋아하겠군.’

안 그래도 배세진은 박문대에게 가장 먼저 욕먹고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박문대의 행실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다. 박문대는 오히려 덤덤하게 있었는데, 되려 배세진이 대신 고소하겠다고 말한 걸 함께 뜯어말린 적이 있다. 얼추 말린 후에야 박문대는 배세진에게 가장 최적의 상황에 고소를 때리겠다고 말했다. 배세진은 그런 박문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 나보다 똑똑한 놈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런 믿음이 얼핏 섞인 것 같았다.

‘믿는 건 아무렴 좋지. 일단 흐름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데.’

어느새 ‘박문대 열애설’에 관련된 기사가 내려가고 있다. 예상보다 조금 늦은 타이밍에 내려가는 걸 보며, 드디어 소속사가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테스타가 뜨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나,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않나? 박문대는 윗대가리를 전부 다 족쳐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뜻대로 안 되는 건 언제나 답답하다.

기사가 내려가는 걸 알아차렸는지, 사람들의 조롱은 일 못 하는 소속사와 안일하게 사진이 찍힌 박문대에 초점이 맞춰졌다. 안일하게 찍혔다고? 박문대는 인기척을 잘 느꼈다. 그는 예민했고, 주변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어지간해서 카메라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든, 인적 드문 골목길이다. 그런 곳에 카메라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아니, 이쪽으로 너무 생각하지 말자.’

박문대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한쪽에 몰입해서 생각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 있어도, 거기에 너무 매몰되었다가 나중에 본전도 찾지 못한다. 박문대는 어느새 소속사에서 올라온 입장문을 보았다. 자신의 변명이 하나도 안 들어간 입장문에서는, 박문대와 체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못 박아두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찝찝하게 구는 거지?

박문대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그럴듯하게 보이는 입장문을 보았다. 겉으로 보았을 때 책잡힐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말만 딱딱 써놓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차피 이 ‘입장문’은 단순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익명 사이트는 소속사에서 나온 익명문으로 신나게 물고 늘어졌다. 어차피 소속사에 큰 애착을 가진 건 아니었기에, 소속사 욕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무슨 선택지를 내놓아도 소속사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어지간해서 윗선들도 알고 있을 거다. 모르면, 조금 심각한 거고.

하지만 소속사를 물고 늘어지는 건 얼마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다 재밌는 걸 찾았다. 바로 체리였다. 아무리 LeTi 소속이었다고 해도, 그는 데뷔하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일반인을 위해 직접 나서는 회사? 정말 웃길 지경이었다. 박문대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뾰족한 말이 체리로 향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얼떨결에 자신의 비밀 계정을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박문대는 다른 어리숙한 사람처럼 비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파이처럼 물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보려고 팬인 척 판 계정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공식계정 또한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그걸 제외하면, 박문대의 사담이 고스란히 들어간 계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어디선가 합성해서 들고 오려는 건가? 이런 건 해명하는 게 어려웠다. 올린 사람이 알고 보니 자신이라는 둥, 짜고 치는 판이라고 말할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애들에겐 미리 말해둬야지.’

자신은 사담을 위한 계정을 만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그룹 내부가 흉흉했다. 다들 좋은 사람이었다. 박문대의 말을 믿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걱정 안 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으니까.’

익명 사이트에서는 어느새 박문대의 비밀 계정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유명 아이돌의 비밀 계정. 참… 할 짓이 없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면 즐겁나? 조금 더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면 좋을 텐데. 박문대는 혐오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작은 화면에 가득 메운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끝끝내 자신의 비밀 계정으로 추정되는 걸 들고 왔다.

하지만 믿는 건 오직 익명 사이트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다들 박문대에게 이런 계정이 있었냐고 가볍게 물었다. 박문대는 저렇게 사담을 하는 계정이 없다는 걸 딱 잘라 말했다. 내친김에 미리 만들어 둔 사찰용 계정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사찰용 계정에는 사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서로 같은 사람이라는 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관성이 없었다. 테스타의 팬, 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박문대의 계정임을 몰랐을 거다.

이세진조차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박문대를 토닥였다. 가벼운 토닥거림에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는 게 퍽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우선 깊게 심호흡 한 번 했다.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무엇이 좋을까. 더 큰 화제를 몰아와야 하나?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했다. 제대로 낫지 않은 몸이 혹사 당했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박문대는 뒤로 쓰러졌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배터리가 잔뜩 닳은 스마트폰을 보았다. 아직도 소속사에서 말이 없는 걸 보아, 입장문만 쓰면 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잠깐.’

입장문?

회사가 일개 일반인을 위해 스스로 나선다면, 심지어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면…… 조금 쉽지 않을까?

박문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마침 그 곁에 있었던 차유진이 영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뒤에 어색한 한국어로 박문대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아까 멋져요! 근데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천진난만한 차유진의 말에 박문대는 씨익 웃었다. 만약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면 대박이고,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읊지 않았지만, 간단한 설명만으로 차유진은 이해한 모양이다. 그는 검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며 OK라고 말했다.

“형 똑똑하니 잘하리라고 믿어요!”

그렇게 말하며, 차유진이 넉살 좋게 웃었다. 박문대는 나중에 일이 잘 끝나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말했다.

박문대는 곧장 청려에게 연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려에게 연락하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된다고 벌써 연락하다니. 답답함이 가득 찬 한숨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다행히 청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하게 박문대에게 대답했다.

[ 흠. ]

[ ^^ 한 번 믿고 맡겨보실래요? ]

누구나 쓰는, 흔한 이모티콘임에도 박문대는 꺼림칙했다.

도대체 무얼 믿고 맡기라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았다. 확실히 청려에게 일을 맡기면 편안할 거다. 현재 박문대는 직접 나설 수 없는 인물이다. 체리가 덜 욕 먹으려면, 청려가 움직이는 편이 쉬울 터. 거기다 이번 일의 발단은 따지고 보면 청려에게 있었으니, 순순히 협박해서 도우라고 말해도 될 거다.

박문대는 머뭇거리다 자판을 두드렸다. 방법은 전부 청려에게 일임한다. 단 하나, 체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 노력해보도록 하죠. ]

청려의 대답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애매했다. 아니, 이게 뭐야. 박문대의 부탁을 고려하겠지만, 원하는 결과물이 안 나올 수 있다는 건가? 박문대는 어이가 없었다. 하긴. 아무리 청려라고 해도 LeTi 소속에서 벗어난 연습생 하나를 커버하겠다고 움직이는 건 힘들겠지. 연예계에서 약점 잡은 놈들이라도 있나? 그런 놈들 기사를 뿌리면, 좀 나으려나? 화제 전환은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깨고 청려가 움직인 건 LeTi 회사 전체였다.

회사가 대놓고 악질적인 루머 유포시 고소하겠다고 움직였다.

……참신한 어그로라고 생각했다.

‘이 미X 놈이!!’

박문대는 차라리 청려의 머리를 몇 번 때리고 올 걸, 이라고 작게 후회했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놈이, 이젠 리셋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나오는 건 또 뭐람? 도대체, 뭐가 문제야! 확실히 사람들의 관심사는 체리라는 개인을 욕하기 보단, 어째서 LeTi가 움직이는지 관심 가졌다. 박문대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체리가 덜 욕먹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아찔했다. 어차피 그룹 자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해도, 아니, 회사를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나? 역시 회사 주식 가지고 있는 놈은 사고방식이 다른가? 만약 박문대 앞에 청려가 있었더라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멱살을 잡은 채 소리쳤을 거다. 일을 이따구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확실하게 하라고. 이래봤자 체리가 다른 방식으로 욕먹는다.

‘…늦었지만 일단 사과문을 올린다.’

박문대는 한 박자 늦게 정신 차렸다. 우선 미리 써둔 자필 사과문을 공식 계정에 업로드하기로 했다. 최대한 글자가 선명하게 잘 보이도록 찍은 뒤 올렸다.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지닌 팬들이 걱정해주었다. 알티와 마음이 잔뜩 찍혔다. 가끔 보이지 않는 인용이 우르르 달렸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을 욕한다는 걸 알았다.

안 그래도 자신이 올린 입장문이 익명 사이트에 언급되고 있다. 박문대는 5초 간격으로 새로고침 했다. 무서울 속도로 글이 올라왔다. 역시 둘이 움직이는 게 나았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회사에서 멋대로 움직인 박문대에게 잔소리할 거다. 그렇다면 박문대는 미리 준비해둔 회사용 변명문을 천천히 말하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팬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으니, 자신이라도 빨리 아니라고 하는 쪽이 이미지 회복에 더 좋을 거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미지 회복.

딱 높으신 분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머리 숙이고 나오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다면 자신은 너그럽게 용서하면 그만이다. 딱 이미지 챙기기 좋다. 박문대는 그 짧은 시간 내에 계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회사에 변명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우선 여론, 여론 확인이 더 급선무다.

놀랍게도 청려의 무식한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어지간해서 회사는 개인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따로 주어를 지정해서 지적하지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박문대’와 ‘박체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게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공개적인 SNS계정에서도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들 왜 LeTi가 이렇게 움직이는지, 혹은 체리가 여전히 LeTi 연습생인지 추측할 뿐이다.

‘그 무엇도 아냐.’

때로는 복잡하게 판을 짜는 것보다 단순무식하게 나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걸까? 여러모로 대담했다. 자칫 잘못하면 실패할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청려를 그렇게 만들 걸까? 설마 자신이 협박한 게 제대로 먹혔다는 뜻일까? 박문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익명 게시판에서 체리는 LeTi의 연습생이 됐다. 그것도 소속사 대표 사장의 혈연이나, 혹은 지인이나… 그런 것도 포함됐다. 그 무엇도 아니라는 걸 알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한 가지 아는 건 LeTi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조금씩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건 확실히 좋았다. 박문대가 원하는 것도 체리를 향한 욕설이 줄어들길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청려는 다소 과격하더라도 제법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익명 게시판은 여러 가지 있었다. 이렇게 짧게 글 토막이 올라오는 곳도 있었고, 아예 게시판 형태를 취하는 곳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다 둘러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박문대는 회사에서 근신 비슷한 명령을 받았다. 컴백할 때는 풀리겠지만, 그전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나마 박문대가 숙이고 들어간 덕분에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박문대는 제 앞으로 있을 스케줄을 가늠했다. 음.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병원에 입원했던 탓에 회사 측에서 뺄 수 있을 만큼 뺐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합성, 혹은 다른 날짜에 찍은 사진이 나왔다.

박문대는 사진 파일을 뜯어본 척하며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다들 혼란에 빠졌다. 이런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땅히 욕먹어야 할’ 인간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특히 열애설이 터지고도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남자 아이돌? 다들 수군거리고 싶어 할 거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누군가는 몰래 박문대와 체리가 찍힌 사진을 지금 풀었다. 지금 팬들은 이렇게 마음 고생하는데, 얘는 여자랑 만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작 박문대는 엊그제부터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만약 같은 멤버 눈을 피해 몰래 체리를 만날 정도면…… 그 정도 능력이 있으면 아이돌이 아니라 다른 걸 해야 한다.

아무튼 박문대는 절묘하게 익명 게시판에 거짓말이 있다는 걸 지적했다. 한 사람이 너무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면 안 되니 중간중간 아이피도 우회했다. 점점 지쳐가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다들 인터넷에 찌라시 루머가 많다는 걸 알았는지, 아님 공격적으로 나온 LeTi 때문인지 몰라도 다들 주춤거리고 있다. 박문대는 여기서 쐐기를 박아넣을 수 있는 걸 찾았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으면?

[ 근데 걔(ㅊㄹ) 뭔가 머리색이... 곰머 염색할 때랑 겹치질 않음? ]

……이런 것까지 나온다.

그 뒤로 온갖 추측이 오갔다. 박문대가 체리에게 염색 등의 컴백 관련 떡밥을 미리 알려준다는 헛소문이었다. 당연히 ‘그럴듯한’ 근거는 없다. 어디나 심증에 지나지 않았다. 박문대도 안일하게 사는 건 아니었다. 활동 준비하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만날 일이 적어진다. 어쩌다 만나더라도, 앨범 관련 소식은 비밀로 했다. 관계자도 아닌데 미리 알려주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체리도 박문대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 직접 확인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박문대는 단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다. 죄다 체리가 재주 좋게 관계자와 컨택하며 몰래몰래 정보를 알아냈다. 이따금 그 정보력이 어마어마해서 사생인 줄 알고 착각할 뻔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다들 처음에는 체리가 박문대 한정 사생팬인 줄 알았던가? 다행히 박문대가 직접 나서서 평범한 애라고 소개해주었다. 어느 정도 체리의 순수함에 같은 멤버들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당장 선아현과 연락처를 주고 받을 정도로 발전했으니까.

‘이건 어떻게 뽑아내야 하나?’

박문대는 감흥이 없다는 듯 훑었다. 비난의 대상은 다시 두 사람이 되었지만, 예전에 비해 억지를 부려가며 욕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일단 박문대는 공식적으로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다시는 러뷰어에게 이런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거기다 LeTi 까지 저렇게 나오고 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몸을 사리게 된다. 아마 이 익명 게시판에서도 자기가 쓴 글을 보고 지울 수 없나, 생각하는 사람도 몇 있을 거다.

하지만 이 익명 게시판은 관리자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이상 계속 기록에 남는다. 박문대는 그 점을 노렸다. 회사가 이렇게 작은 사이트를 노리지 않겠지. 뭐, 자신이 딴 PDF로 인해 관리자가 아이피 정보 등을 제공해야 할 일은 생기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박문대는 억지를 부려가며, 보다 천박한 욕설을 써가며 욕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LeTi가 좋은 점은 이거다. 아이돌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알만한 대형 회사. 이런 회사가 정말 ‘법적’ 절차를 밟게 되면? 일개 개인의 인생은 끝장난다. 특히 이것들은 익명이라고 안일하게 초성 처리만 하는 식이었다. 굳이 당사자가 아니어도, 이것들이 떠드는 걸 보며 ‘박문대’와 ‘박체리’를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것보다, 허술하게 익명 처리하는 법이 쉬웠다. 어차피 ‘사람’의 판단으로 처벌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된다. 그럴듯한 증거가 여러 가지가 모인다면? 그만큼 유리한 판도 없다. 박문대는 배터리가 몇 퍼인지 확인했다. 20퍼도 채 되지 않았다. 슬슬 충전할 때가 됐네. 그렇게 생각하며 보조 배터리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체리는 괜찮나?’

박문대는 슬쩍 시계를 보았다. 기사가 터진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인가? 시간 감각이 슬슬 아슬해졌다. 박문대는 뒷목을 긁적이다 그대로 체리에게 톡을 넣었다.

[ 지금 어때? ]

[ 괜찮아? ]

진부하지만, 진심이 가득 든 톡이었다. 마침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는지 금방 체리에게서 답장이 왔다.

[ 응? 체리는 아무 일도 없어! ]

[ 오히려 문댕이가 걱정돼...ㅠㅠ ]

‘딱히 밖에 안 나가서 큰 문제는 없는데.’

체리도 자신과 비슷하게 바깥을 나가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어지간해서 체리는 홀로 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혼자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라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되도록 아는 사람과 같이 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리고 그 아는 사람은 대부분 박문대였다.

[ 아마 너 한동안 밖에 나가기 힘들 거 같은데 ]

[ ..미안 ]

[ 아냐!! 문댕이는 잘못한 게 없어!! ]

[ 나쁜 건 쟤네야! 문대가 아니라! ]

활자로 이루어졌음에도 체리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박문대는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연락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칫 잘못해서 끝날 거 같았으니까.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박문대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무리 체리가 당차고, 당당하고, 밝게 행동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사고가 정지될 수 있다. 그 틈을 사람들이 노리면? 만약, 체리가 홀로 돌아다닐 때, 이상한 사람이 체리를 찾아가서 해코지한다면? 현재 체리는 알게 모르게 제 사진이 인터넷에서 많이 떠돌고 있다. 박문대가 활동할 때마다 맞춰서 머리 끝부분을 염색했다. 흑발을 바탕으로 한 그라데이션 염색은 거의 체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어지간해서 알아보기 쉽다는 말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체리 곁에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있으면 좋겠어.’

박문대는 이기적인 제 마음을 인정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욕먹는 것보다, 체리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게 제일 싫었다.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비정상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한 치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이상’이 일그러지면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체리처럼 겉으로 보았을 때 연약한,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나는 괜찮아. ]

[ 어지간해서 혼자 다니지 않을 걸? ]

[ 아하! 하긴, 문대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니까, 모두랑 다니겠네! ]

[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

[ 응? 나? 체리가 왜? ]

몰라서 묻는 말이냐고, 그렇게 치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한 화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박문대는 두 눈을 감았다.

‘지금 내가 뭐하자는 거야.’

이렇게 된 건 체리의 잘못도, 박문대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 찍힌 사진.

사생인지, 아니면 연예 가십지를 취급하는 기자가 찍은 건지 모른다. 이따금 사생이 찍은 사진이 기자에게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범인은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 제일 맨 처음 기사를 올린 기자의 이름만 알고 있다. 다짜고짜 기자를 찾아가서 혼내준다고 해도, 두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건 없다. 이미 사건은 터졌다. 모두가 체리를 알게 됐다. 박문대가, 테스타가 누리고 있는 인기만큼 체리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이 넘쳐났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잔뜩 쌓인 체리의 연락에 다급하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였다면, 지금 상황이 한결 나아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그 자식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테고. 적어도 체리가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타인의 눈을 피해 다닐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게 다 자기 잘못 같았다.

그제야 박문대는 자신이 아무에게나 화풀이하고 싶다는 걸 알았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제 3자를 원망하는 것보다, 익숙한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게 훨씬 편했다. 자신이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의미 없을 가정을 해보았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지쳤다. 상태 이상만 아니었다면 마음 편히 있었을 텐데. 박문대는 눈가를 지긋이 눌렸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감각은 언제나 불쾌했다. 바쿠스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 체링 ]

익숙하면서도 무미건조한 음악이 박문대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익숙하게 제 스마트폰을 보았다. 화면 가득 체리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아, 전화구나. 박문대는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타인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전화로는 마저 대화할 수 있다.

- 문대! 갑자기 왜 그래? 막 아프거나, 그래? 막 전에 아프다고 그랬는데, 다시 아프기 시작한 거야?

“왜 전화했어….”

- 그야 문대가 걱정되니까. 체리는 항상 늘 문대 걱정을 하는 걸? 아니, 문대의 생각을 해! 언제나 문대가 건강히 잘 있기를, 이상한 일을 겪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걸!

“오히려 나보다 네가 더 조심해야 하지 않아? 이상한 사람에 너에게 해코지하면 어쩌려고.”

서로 톡을 보낼 때와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달랐다. 활자만으로 체리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정말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도 체리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훤히 보였다. 아마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삐죽 내밀고, 그래도 자신을 걱정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기간은 적은 편이었다. <아주사>를 계기로 데뷔하며 잠깐 만났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문득, 박문대는 처음에 체리를 부담스럽게 여겼다는 게 떠올랐다.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누구나 다 알아차릴 만큼 자신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그. 박문대는 그런 체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거리를 두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애정을 전부 돌려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리는 반드시 애정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체리가 박문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특별하게 없었다. 아니, 무대에서 제 모습이 멋졌다고 했었나? 아무튼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박문대를 좋아했고,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에 그의 곁을 맴돌았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야 경계를 풀었다.

- 나는 괜찮아. 딱히 한동안 밖에 안 나가도 될 거고, 또 집 근처에 오면 경찰에 신고해야지! 그거 스토킹이잖아! 아냐, 신고도 하고 내가 혼내줄 거야!

“그래, 그래. 너라면 할 수 있겠지.”

- 꺅! 문대가 체링 믿어준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작게 웃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박문대는 문득 낯선 알림음이 들렸다. 급하게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잔량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림이었다.

“아…….”

화면 너머로 체리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었다. 박문대는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다며, 곧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체리는 아쉬운 듯 작게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웅얼거리는 소리에 이어서, 그는 씩씩하게 말했다.

- 그럼 배터리 다 충전되면 체링이랑 마저 대화하는 건? 아! 아예 우리 더 못 보니까 영상 통화하는 건 어때? 왜, 요즘 다 노트북에 캠이었나? 그거 달려있잖아!

“노트북 쓰려면 김래빈꺼 빌려야 하는데….”

- 지금 당장 아니어도 돼! 래빈이가 쓰지 않을 때 잠깐 빌리자! 그리고 얼굴 보고 잔뜩 대화하자!

“그래, 허락받으면 되겠지.”

무척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좋나? 박문대는 미리 인사하며 스마트폰을 껐다. 보조 배터리는 찾는 것보다, 직접 연결하는 게 더 좋을 듯했다. 갑작스럽게 전화가 끊겼음에도 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대에게 톡을 보냈다. 종종 문대가 급하게 끊을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트와 귀여운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며 제게 애교를 보내는 체리를 빨리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서서히 김래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김래빈은 흔쾌히 제 노트북을 빌려주었다. 급하게 작업해야 할 건 없다며, 오히려 문대와 체리를 응원해주었다. 어째서 응원하는 거지. 박문대는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냈다가 김래빈이 노트북을 안 빌려주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낼지도 모른다. 괜히 래퍼가 아니다.

박문대는 우선 제 방으로 향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거실보다 끽해야 두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안전했다. 이세진이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박문대를 보았다.

“문대문대~.”

“조용히 해. 멋대로 들어오지 말고.”

“…….”

자칫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태도였다. 이세진이 억지로 쾌활한 척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박문대가 선수 치는 게 더 빨랐다. 박문대는 이세진에게만 털어놓았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세 시간. 한동안 만나지 못할 수 있으며, 그동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침을 정한다는 말에 이세진은 얼추 납득한 듯했다. 뭐, 문대가 그렇다면야. 이세진은 말리지 않았다. 우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선을 정해놓아야, 나중에 그룹 활동 때 지장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아현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박문대에게 잘 하고 오라고 응원했다. 예상치 못한 응원에 박문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말해둔 덕분에 방에는 박문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익숙하게 노트북을 세팅했다. 새카맣던 자신을 비추던 화면이 밝아졌다. 박문대는 익숙하게 PC 톡에 로그인한 뒤, 체리에게 링크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리가 들어왔다.

- 짠! 문대! 나 왔어!

“어, 일단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할 건데 괜찮지?”

- 응? 어떻게 해야 할지, 라니? 아! 앞으로 못 만날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조용해질 때까지 한동안 만나는 건 자제하고, 전화나, 문자도… 포함되는 거지?

“비슷하지. 적어도 밖에서는 내가 연락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점 알아둬. 아, 잠시만.”

화면 너머로 체리가 잠깐이나마 굳은 게 보였다. 대략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니 싫은 모양이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박문대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 좋은 줄 아나. 체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투덜거렸다. 문득 화면 한구석에 밀어놓은 PC 톡 알림이 울렸다. 누구지? 야식 먹고 싶은 차유진인가?

[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는 안 받았네요. ]

청려였다.

……망할.

그는 기가 막힐 정도로 타이밍이 좋았다. 아니, 지금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는 걸 감시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안 거지? 고맙다는 인사? 그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대화하자고 보낼 참이었다.

[ 이렇게 입 싹 닦을 생각은 아니죠? ]

결국 박문대는 참지 못하고 청려에게 영상 통화 링크를 보냈다.

반쯤 말하자면 자포자기, 혹은 급발진 비슷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보낸 링크임에도 청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들어왔다. 숙소? 아니, 바깥이 어두운 걸 보아 밖일 수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컴컴한 배경에서 청려 혼자 유독 튀었다. 청려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 마침 잘 됐네요. 당사자 모두 있으니까요.

- 우와… 문댕, 설마 문댕이 초대한 거야?

“나도 하고 싶지 않았어.”

- 본인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되나요? 후배님.

청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렸을 뿐인데,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잘 느껴졌다. 여성팬들이 잔뜩 비명 지를 정도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박문대는 턱을 괸 채 그런 청려를 무시했다. 체리는 어째 청려가 등장하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딱히 숨길 기색이 없는 듯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불편해하고 있으니 적당히 인사하고 꺼져야 하지 않나? 박문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고 있는지, 청려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굴었다. 아무리 회귀했다고 하나, 험난한 아이돌을 헤쳐 나가려면 이 정도는 굴어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와. 진짜….

- 따지고 보면 선, 배가 문댕에게 먼저 못된 짓을 해서 이렇게 됐잖아요… 그러게 왜 그랬어요.

- 음? 벌써 후배님이 알려주었나요?

- 다 알아요! 발뺌하지 말아요!

어느새 두 사람이 박문대를 따돌리고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체리는 청려가 불편하면서도 누구보다 당당하게 나섰다. 청려는 그런 체리의 모습에 작게 웃을 뿐,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약간 제 무릎보다 작은 강아지가 낑낑 거리는 걸 구경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청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고 하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눈은 여전했다.

- 그래서 이번만큼은 무노동으로 도와준 건데 말이죠.

- 네? 도와… 설마! 회사가 멋대로 움직인 게, 선배님 때문?

- 그럼요. 후배님이 특별히 도와달라고 해서 움직였는데, 마침 감사 인사도 받지 못했다는 게 떠올라서요. 그런데 후배님. 자꾸 이렇게 조용히 있을 건가요?

“아….”

그걸 왜 지금 말해?

둘이 있을 때 적당히 말하면 되지 않나?

박문대는 평생 청려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표정 관리했었지만, 작은 화면에 자신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드러났다. 박문대는 이렇게 표정 관리를 못하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청려는 그런 박문대의 태도에 무어라고 할 법한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더 수상했다.

체리는 힐끗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 자신을 위해 청려까지 이용한 게 감동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아닌가? 감동은 어디까지나 박문대의 추측이었다. 약간 떫은 걸 보아하니 자신을 돕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쓴 건 좋은데, 그게 하필 청려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조금… 담긴 것 같았다.

‘사실 이 자식이 이렇게 눈치 없는 놈은 아니었는데, 뭔가 했나?’

청려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발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이상하게 됐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눈치 없는 척 구는 게 신기했다. 안 그래도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인데, 괜히 여기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박문대는 청려를 놔두고 다른 방을 팔까, 아니면 톡으로 대화할까 고민했다.

아.

“아무튼 선배님, 이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놈의 감사 인사는 잊지 않고 해주었다. 이래야 나중에 감사 인사 못 받았다고 계속 따라오지 않을 거다. 박문대는 어색하다 못해 기계가 덜컥거리는 감사 인사를 청려에게 해주었다. 청려는 보다 자연스럽게 인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박문대와 체리가 영상 통화를 마칠 세 시간까지 함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신개념 엿 먹이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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