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아스타브] 봄의 너머

조각보 by 유채
69
12
0

* 할 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할 님네 타브의 개인 설정이나 이름 등이 등장합니다.

* 아스타리온 로맨스 & 비승천 루트 기반으로, 에필로그 등의 스포가 있... 있나? 있는 것 같습니다.

* 어느 정도의 햇빛 저항을 얻었다는 설정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진짜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비슷하긴 할 거라고 생각했지."

"맙소사, 시간이 이만큼 지났는데. 내 사랑께서는 아직도 꿈이 크신걸."

쓸데없이 잘 돌아가는 입으로 말을 하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아, 방금 말은 잘못 나갔군. 아니나다를까, 몇 걸음 앞서가던 할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아스타리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조용히 양 손을 올려 항복 의사를 표했고, 다행히 그의 자비로운 연인은 금세 표정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망토를 둘러쓰고 피부를 가렸어도, 늦은 오후의 햇살은 뱀파이어 스폰이 버티기에는 지나치게 강했다. 두 사람은 웬만하면 낮에 자고 밤에 움직였지만, 지상의 법칙을 따르려면 어쩔 수 없이 낮에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할린은 그럴 때마다 꼭 지도를 보며 몇 시간씩 경로를 고민하곤 했다. 지금 둘이 걷고 있는 길도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길 중 하나였는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숲보다는 오솔길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머리 위로는 빼곡히 얽힌 나뭇가지가 햇빛을 꽤 잘 막아주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언제나 그렇듯 이런 부분에서 할린의 마음을 느꼈다. 종이 위로 풍경을 그리고, 그 아래 그가 걷는 모습을 상상하며 안전한 길을 찾는 마음. 그는 언제가 되어야 그런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발 밑으로 밟히는 젖은 흙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딱히 계절을 실감하고 지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풋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직 필 때가 되지 않은 꽃망울과 여린 잎사귀가 나뭇가지를 장식했고, 무르익어 주홍에 가까워진 햇살이 그물처럼 내렸다. 죽은 이를 물리치고 생명을 축복하는 빛은 언제나처럼 그를 거절했지만, 아스타리온은 이제는 별 생각 없이 망토 자락을 매만질 뿐이었다.

"아스, 괜찮아? 좀 쉬었다 갈까?"

이제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문제없지. 우리가 햇빛 면역을 주는 물건은 못 찾았어도, 어느 뱀파이어 스폰이 햇빛, 흠, 뭐라고 할까? 숙련을 얻긴 한 모양이야."

"뭐어?"

할린은 잠시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고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솔직하게 웃어 보였다. 아스타리온은 언제나 그의 그런 표정을 사랑했기 때문에,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비슷하게 웃는 중일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실없는 대화가 몇 번을 더 오가면서, 아스타리온은 할린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조금 전에는 나뭇가지의 그림자에 가려져 어두워졌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진다. 햇빛 면역에 관한 소문은 놀랍게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전혀 놀랍지 않게도 실체를 가진 것은 없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거의 쉬지 않고 페이룬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막상 제대로 손에 쥔 것은 손에 꼽을 필요도 없이 적었다. 그런 결과는 아스타리온에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 첫 번째로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기적일 것이며, 두 번째로 그는 인생에 기적이 그렇게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세 번째로는 그 모든 불가능에도 어김없이 그를 혼자 두지 않는 누군가의 덕일 것이다.

그렇지만 할린은 그 실패를 전부 하나하나 기억에 새길 성정이었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망하지 않음과 같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아스타리온이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몇 없었다. 기껏해야 늘 하던 대로 태연하게 곁에서 걷는 정도겠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 선함을 포기하지 않는 연인에게 뭔가를 더 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비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한 햇빛을 견디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아주 작은 노력 덕에 할린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걷혔다면 더욱 그랬다.

급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주 느리게 길을 걸었다. 빼곡한 나무 그물 사이로 새는 햇빛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태양이 지평선으로 떨어지면서 마지막 남은 햇살로 하늘과 지상을 태웠고, 아스타리온은 잠시 그늘 속에 멈춰 섰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사실이지만, 그는 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백 하고도 조금 넘는 세월 전에 죽음으로 박제당했는데, 수많은 생명은 봄에 태어나고 죽으며 그를 두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치 그 혼자만 시간 속에 남겨진 느낌이었고, 실제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의 시간인 밤이 오는데도, 마지막 저녁놀이 그에게 경계를 긋는 것 같았다. 예전이었다면 그 사실에 발이 잡혔겠지만, 아스타리온은 그저 그 자리에서 잠시 기다렸다.

"...아스? 언제 이렇게 멀리 떨어졌어? 역시 어디 아픈 거 맞지?"

왜냐하면, 이제는 그를 절대 두고 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완연한 빛 속으로 들어섰던 할린은 다시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있는 그늘 속,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안까지. 하지만 그는 그 안에 같이 머무르지는 않으며, 단지 손을 내밀 뿐이다. 그런 점이 할린다웠다. 그의 연인은 무척 고집이 셌지만, 그만큼 아스타리온이 손을 놓치더라도 그를 이 빛과, 봄의 너머까지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아프진 않아. 그래도 같이 가. 날 두고 갈 셈이야?"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말하며, 그를 위한 햇빛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있었고, 어쩐지 눈이 부셨다.

카테고리
#기타
  • ..+ 9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