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타브아스] 돌아가는 길

조각보 by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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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 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소금 님의 타브 설정과 이름이 등장합니다.

* 남의 집 타브를 냅다 죽여버린 관계로,,, 사실상 아스타리온 혼자만 등장하는 글입니다.

설리번이 죽었다.

평생 이유 모를 무게를 짊어지고 살던 그의 얼굴은 아주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음에서 돌아올 정도로 무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잠든 설리번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늙고 주름졌지만, 신기하게도 젊을 적과 별로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설리번이 속에 품었던 짐이 그의 주름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아스타리온은 생경한 눈으로 자신에게는 이제 생기지 않을 세월의 흔적을 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자기는 이 얼굴이 더 솔직한 것 같네. 이쪽이 좀 더 취향일지도 모르겠어."

그 후의 장례식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설리번과 아스타리온 모두 어렴풋하게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고, 특히 설리번 쪽에서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기 때문에 실상 그가 할 일은 조문객을 맞는 정도였다. 설리번의 책상에서 완벽하게 정리된 서류를 발견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서류를 집어던질 뻔 했다는 것은 아스타리온의 성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례식에서 기억나는 것은 몇 가지뿐이다. 예전의 동료들이 조문을 왔을 때, 누군가 아스타리온에게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흠,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는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겨 팀마스크를 겨누면서 생각했다. 팀마스크 포자가 횃불덩이와 엉켜 깔끔하게 터지는 걸 보면서, 그는 벌써 페이지 뒤로 넘어간 기억을 뒤적거렸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여행을 갈 생각이다, 라고. 바라지는 않았지만 익숙해진 언더다크의 공기가 그를 반겼다. 어둠과 습기와 매복이 기다리는, 여행을 떠나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날씨였다.

애인이 죽었는데 난데없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사실 별 거 없었다. 아스타리온에게는 앞으로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남았다. 설리번의 곁을 몇 년쯤 지킨다고 크게 문제될 일도 없었지만, 그는 그냥 그러기로 했다. 설리번이 살아 있었다면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몇 분쯤 보다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것이다. 벌써 기억이 미화되는 것 같았지만, 아스타리온은 그저 코웃음을 한 번 치고 말았다. 틀렸다고 말할 거라면 본인이 직접 와야 했다. 그리고 생전의 그를 오래도록 생각하기엔, 언더다크는 그냥도 가혹했고 혼자 다니는 이에게는 무자비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환경에, 어둠 속에 더 익숙한 뱀파이어 스폰이라고 해도 쉽지는 않았다. 미노타우로스 세 마리에게 걸려 밤새 절벽에 칼을 박고 매달려야 했던 날에는 이렇게 일찍 따라갈 예정이 아니었는데, 같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아스타리온은 다사다난한 여정을 거쳐 약간은 꼬질한 상태로 언더다크와 지상을 잇는 통로에 섰다. 통로 바깥에서는 다 저물어가는 햇살과, 아주 옅은 풀의 냄새가 났다. 그는 통로의 벽에 기대 밤을 기다리며, 이럴 때는 곁에 과묵한 동료라도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다 해진 망토를 쓰고 언더다크의 벽에 기대 밤을 기다리는 게 그의 인생 최악의 경험은 아니었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에메랄드 숲은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야영했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좀 헷갈렸고, 심지어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가려던 곳까지는 가지도 못 했는데 해가 뜨는 걸 동굴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대체 무슨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고 이렇게 헤매는지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이다.

노틸로이드 함선이 추락한 곳은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함선을 털어서 한 몫 잡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마인드 플레이어나 사람 시체가 사방에 널렸으니 어디에서든 잠재적 위협을 없애기 위해 치우긴 치웠을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천천히 밤의 평야를 걸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그를 위협하는 것도 없고, 그를 추억하게 하는 것도 적었다. 이쯤에 함선 잔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가끔씩 머리를 스쳤을 뿐이다. 그는 이제 정말로 여기까지 온 이유를 떠올려야 했다. 옛 기억이 치워진 자리에 자라난 풀들이 그를 재촉하듯 살랑거렸다.

설리번이 죽기 얼마 전쯤부터, 그의 애인은 아스타리온에게 자꾸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결국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아마 이별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스타리온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도 아닌 주제에 혼자 남겨질 그를 계속해서 신경썼고, 마치 그가 설리번의 마지막 남은 책임인 것처럼 굴었다. 그 말을 듣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지만, 아마도 그의 인생에 있어 처음 만난 무언가를 영영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의 필멸하는 첫 번째는 그를 떠나 사라지겠지만, 정식으로 나오는 말에는 언제나 마법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결국 책임감과 두려움만 남은 연인은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고, 아스타리온은 장례식에서야 그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발을 이끌었다. 아무리 '그런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설리번과 아스타리온은 서로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무엇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할 권리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하루가 지났다. 하늘은 희뿌옇게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진다. 아스타리온은 동굴 안쪽, 그림자와 빛의 경계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햇빛이 그렇게 눈부시게 보였는데, 지금도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저 아래로 나가서 인사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짧게 느껴지는 하루가 금세 지나고, 온 하늘이 마지막 햇빛으로 붉게 타오르며 빛난다. 마치 그를 두고 먼 세상으로 사라져버리는 그의 인연들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인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설리번이 그에게 남겨 준 무엇일 것이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 당신이 지금 있을 곳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서, 영원히 그 곳에는 갈 수 없을 뱀파이어 스폰은 마음 속으로 그의 전 연인에게 인사를 보냈다.

안녕, 설리번.

그 동안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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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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