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재희무현] 보고 싶었어요

완결 이후 날조

ready to dive by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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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치과에 들르던 발걸음이 뜸해진 지 3개월하고도 반, 박무현은 김재희의 치아 건강을 걱정했다. 틈틈이 보내오던 문자나 라피도포라의 사진도 끊겨 달리 소식을 알 방법이 없었다. 다른 이상한 종교를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어디 신점이라도 보러 가서 필요 없는 굿을 하는 건 아닌지, 또 무슨 위험한 일자리를 잡아 알 수 없는 곳에 틀어박힌 건 아닌지……. 자기 전에 박무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걱정은 4개월째부터 환한 낮까지 이어졌다. 치과에 발을 들이면 보이는 인도고무나무를 김재희가 선물했기 때문인가.

“똑같은 라피도포라로 사려고 했는데, 관리하는 게 꽤 귀찮아서요. 키우기 쉬운 걸로 골라봤어요.”

김재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후에 했던 말이 뭐였더라. 이게 더 크니까 눈에 더 잘 보일 거고, 그때마다 자길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원하는 대로 됐네. 이렇게까지 생각할 일은 아닌데. 신경 쓰이게 만드는 구석이 아주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인 아닌가. 인생을 어떻게 꼬아도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성인. 박무현에게 연락을 안 하는 것도 다 김재희의 선택이니 고작 그런 걸로 귀찮게 굴어서는 안 됐다. 연락 좀 안 된다고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하겠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원하지 않던 호칭으로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던 건 김재희다. 나와서도 무현 씨, 무현 씨, 불러가며 매일 같이 연락하지 않았나.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박무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위로해 주겠다며 찾아왔고, 치과 이름을 고민할 때도 옆에 있었다. 개업할 때도 옆에 있었잖아.

그런 생각이 드는 4개월 27일, 박무현은 치과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전화를 꺼내 들었다. 김재희와 나눈 메시지창으로 들어가면 날짜가 다른 다섯 개의 문자가 줄줄이 이어졌는데, 다 박무현이 보낸 무슨 일이 있냐거나, 이번엔 검진하지 않을 테니 치과에 놀러 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가장 최근 문자는 3개월 전.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참 휴대폰 액정만 바라봤다.

잘 지내고 있다고 믿고 연락은 더 안 할게요. | 오후 10:23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오세요. | 오후 10:23

일 년에 한 번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머나먼 기간을 정했단 말인가. 과거 박무현의 생각보다 김재희의 존재가 컸다. 항상 휴게실을 차지하고 있던 뿌리부터 새하얀, 끝부분만 빨갛게 남은 머리카락이 보고 싶다. 거의 5개월이 지났으니 많이 자랐을 텐데.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돌아보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선명해진다.

재희 씨. 보고 싶은데 치과에 놀러 올 생각 없으신가요? | 오후 4:11

그렇게 5개월하고도 7일,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박무현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보낸 문자를 후회하다가 다시 읽어보고, 읽고 나서 또다시 후회하는 짓을 한 시간. 근데 김재희가 왜 보고 싶을까. 신경 쓰이는 남동생 같은 느낌인가? 고민하며 한 시간. 아무래도 걱정이 되긴 하니까, 로 마무리 지으려는데 불쑥 나타나는 김재희의 손가락, 속눈썹, 피어싱, 입술…… 입술? 아니 입술은 왜? “무현 씨는 저를 좋아하시나요?” 아니, 이 목소리는 또 왜? “좋아하니까 매일 오는 건데요.” 아니, 아니. “과거로 못 보내주시는 거 알아요. 그래도 좋으면요?” 아니! 하면서 두 시간.

당시에는 또 장난이나 친다고 넘겼던 말이 왜 이제 와서 생각이 나는지. 그때 김재희의 표정은 생각나지 않는 게 억울할 정도다. 얼굴이라도 기억나면 정말 장난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구분이라도 해 볼 텐데. 박무현은 혼자 꺼내 올린 기억과 감정으로 밤새 씨름하다 출근해야 했다.

없어 보니 알겠다. 허전하니 알겠다고. 단순히 동생에게 하듯이 챙겨주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도, 보고 싶다는 감정이 어느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지도 다 알았다. 옆에서 ‘무현 씨가 좋아서요.’, ‘진심이에요.’ 떠들어대던 놈은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고백 공격에 휘말려버린 걸까. 어떻게든 탓을 돌려보려고 해도 박무현이 어디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이던가. 김재희가 저보다 몇 살 어렸는지 손가락을 접어보다가 하아아, 한숨이나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23일. 감정이 확실해질수록 김재희가 조금 괘씸해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장난으로 건네서는 안 된다. 진심이라는 말로 사람을 홀려가면서 말이야. 몇 번이고 만났던, 재미를 느낀다면 뭐든 괜찮은 듯이 굴던 김재희를 기억한다. 여전히 그때와 같은가?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는 것만큼 못된 일이 없는데. 장난으로 매일 연락하고, 매일 찾아오고, 매일 기다리고…….

박무현이 진료실에서 드릴로 이빨을 쑤시고 칼로 잇몸을 가르는 동안 구경 한번 못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건 재미없지 않나? 기웃거리며 귀찮게 만들 수도 없는데?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데? 오래 걸릴 때면 대기실로 나와 식물을 한 번씩 둘러봤다는 건 알고 있다. 김소원에게 소모품 시킬 때 식물 영양제도 주문해 달라고 했다가 사나운 눈초리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종종 때맞춰서 식물에 물을 줬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항상 박무현이 쉴 때쯤에는 휴게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꼭 내가 나올 시간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봤으면서 그게 다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고?

재희 씨. | 오후 1:51

6개월. 평소와 다름없이 점심 도시락을 먹은 뒤 양치를 하고, 커피까지 사 온 다음이었다. 잠들기 위해 누웠을 때나 잠들지 못한 새벽처럼 생각이 많을 시간대는 아닌 오후 1시 51분에 보낸 문자는 간결하다. 단순히 이름만 불러서 뭘 한다고. 하지만 이 괘씸한 연하를 불러나 보고 싶었다. 매일 찾아올 때는 언제고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게 서운해서. “그래도 좋으면요?”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때 진심이었대도 반년 동안 연락조차 안 할 정도면 다 정리한 상태이지 않겠나.

네 | 오후 1:52

기대한 적 없는 답장에 곧게 세워 놓았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답장했어? 6개월 동안 다 무시해 놓고 이제 와서?! 드는 생각과는 다르게 박무현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신호음이 한 번 제대로 가기도 전에 들리는 목소리에 서운함이 퐁퐁 솟아오른다. 이렇게 쉽게 받을 거면서.

“재희 씨.”

“네에.”

“…치과에는 왜 안 오십니까?”

“음. 별로 재미가 없어서요.”

“매일 와서 질린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지난 일 년은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좋아한다고 말할 때 반응이 재밌었다는 답이 돌아오면 기분이 꽤 안 좋아질 것 같아서. 그걸 빼면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무작정 통화 버튼을 누른 탓에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치과로 놀러올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기엔 방금 한 말과 너무 비슷한데. 박무현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김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보고 싶으세요?”

“……네.”

“왜요?”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소리칠 수는 없다. 박무현은 지금 치과 휴게실에 앉아있으니까. 밖에는 일찍 도착한 예약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놓는다는 건 재희 씨의 치아 건강이 걱정된다는 되먹지도 않은 문장이었다. 김재희도 그걸 아는지 작게 웃는 소리가 넘어왔다. 다시 재밌는 일이 생기면 오려나. 그러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나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김재희가 재미를 느낄만한 일은 박무현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도 한정적이라, 그 정도 자극이 아니면 반응조차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좋아한다고 전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지 김재희가 먼저 내일 가겠다고 말한 덕분이다. 사이사이 ‘무현 씨가 제가 보고 싶다는데’라던가, ‘제가 보고 싶은 무현 씨를 위해’ 같은 불필요한 문장이 여러 번 끼어있었지만, 당장 일 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에 보고 싶다고 했던지라 아무런 반박도 못 했다.

전화가 끊기자 타이밍 좋게 휴게실 문이 열린다. 오후 진료 시작에 맞춰서 끊기라도 한 건가. 박무현은 통화 내용을 곱씹을 시간도 없이 진료실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려드는 당일 접수 환자와 별별 진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유로웠다면 김재희 생각만 하다가 환자 한두 명의 멀쩡한 이빨을 구멍 냈을지도 모른다. 무사히 모든 진료를 마치고 나서야 다시 김재희를 꺼내 들 수 있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런데, 김재희가 몇 시에 온다고 했더라? 다른 날보다 일찍 치과 문을 열고 들어간 박무현은 문득 드는 생각에 눈만 껌벅거렸다. 로비부터 차근차근 불을 켜면서도 몇 시에 오겠다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생각했다. ‘내일 갈게요.’라고는 했지만, ‘몇 시까지 갈게요.’는 안 했다. 차라리 예약을 받아놓을걸. 말만 하고 안 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오전 7시라는 이른 시간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언제 올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나. 박무현은 당장 통화하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른 채로 치과 안을 청소하기나 했다.

재희 씨. 몇 시쯤 오실 건가요? | 오전 11:49

열심히 기다린 것에 비해 조금 이른가? 답장은 도통 올 생각이 없다. 11시 30분에 잡혀있던 예약이 당일 취소되어 시간이 뜨는 탓에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상어 머리뼈 위에 앉은 먼지나 털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온 뒤였다. 이 정도면 늦게 잠들었대도 눈을 떴을 만한 시간 아닌가? 6개월 사이에 일자리라도 구한 걸까. 문자로 이것저것 캐묻는다고 답이 올까 싶어 박무현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걸 택했다.

김재희가 얼굴을 비춘 건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문자에는 여전히 답이 오지 않았는데.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불쑥 찾아온 하얀 머리통에 박무현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애써 삼켜야 했다. 이젠 빨간 부분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쑥쑥 자라다가 잘라냈을 머리카락을 눈에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속상해서 입술을 꾹 물었다. 김재희는 속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다가온다.

“저 왔어요.”

“재희 씨. 오랜만이에요.”

“실망스러운 반응이네요”

“…무슨 반응을 기대하셨나요?”

“그리움이 담긴 뽀뽀요.”

변함없는 말투와 행동에 더 알 수가 없다. 미궁 속으로 빠지는 김재희의 진심이 밉다. 박무현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열이 몰려 화끈대는 게 창피하다. 김재희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잖아.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던 게 무슨 별일이냐는 듯 굴지 않나. 나쁜 자식. 잔인한 자식. 속으로 김재희를 매도하며 가운을 걸어놓고 나온 박무현은 문을 닫고도 그대로인 등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경첩이 박살 났던지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돌아보지도 않고 고무나무를 이리저리 살피느라 바쁘다.

“재희 씨.”

“네에.”

그제야 마주치는 눈에 웃음이 한가득 꼈다.

“왜 안 오셨습니까?”

“스케일링이 무서워서요.”

“매번 하는 거 아니잖아요.”

“충치 치료도 무서워요.”

“그것도 매번 안 하지 않습니까.”

한숨을 폭 내쉰 김재희가 박무현의 앞까지 걸어왔다. “무현 씨는 정말 나쁘네요.” 누가 할 소리. 나름 매섭게 노려보는 눈에도 김재희의 입가는 여전히 호선을 그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김재희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얼굴을 쑥 들이밀자 박무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이것 봐요.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얼굴 앞에서 울린다.

“좋아하는 건 느리면서 피하는 건 빠르잖아요.”

말 한마디에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고 귀 끝까지 피가 돌았다. 목덜미까지 온통 벌겋게 물든 박무현의 앞에서 김재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전부 용서해 드리겠다고. 무슨 말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저한테는 무현 씨 하나밖에 없거든요.”

박무현의 시야는 한껏 예쁘게 웃고 있는 김재희로 가득 찼다. 내일부터 매일 볼 수 있겠구나. 알 수 없는 확신이 든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타고 퍼지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박무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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