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풍랑
드에인퀴 컬렌인퀴 / 침입자 DLC까지의 스포o
부부가 쌍으로 정병파티인데 이거 쓰고 나서 다음 글 반드시 유쾌한 걸로 쓸게요 미안합니다…
침입자 DLC 이후 시점이라 당연히 인퀴 침입자 DLC까지의 스포일러 o
예전에 썼던 “닻이 올랐으니” 이후 시점 ~ “함께라서 가능한 것” 이전 시점입니다
언젠가 비계에서 풀었던 그 썰… 관련 글 맞음
상당히 우울한 글이니 읽을 때 주의할 것…
쓰면서 들은 BGM: 夢も志もあった - 得田真裕
커크월과 오스트윅을 방문한 후, 컬렌과 이블린은 컬렌의 가족이 살고 있는 퍼렐던의 남녘기슭으로 향했다. 마침내 만나게 된 러더포드 가족은 모두 무척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컬렌이 데려온 새 가족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이블린은 컬렌의 다정한 성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다면 그러지 않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이블린이 마법사라는 사실에도 크게 개의치 않은 듯했다. 되레 마법사인 이블린이 그 사실에 더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블린이 여기선 절대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그들은 오히려 고개를 내저으며 편한 대로 하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블린이 왼손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더 그랬던지도 모른다. 그로 인한 불편함을 마법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여겨 더더욱 배려하고 싶었던지도.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이블린은 복잡한 얼굴로 그들의 호의를 감사히 받았다.
다행히도 이블린은 새로운 환경에 꽤 빠르게 적응했다. 애당초 이블린의 적응력이 좋은 편이었던 데다 컬렌의 가족들도 그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던 덕분일 테다. 심문관으로서의 의무와 압박, 그리고 협회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이블린은 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컬렌과 이블린은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거닐거나, 근처의 잡일을 거들거나, 조카의 공부를 돕거나, 가족들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느긋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냈다.
컬렌이 이변을 알아차린 건 그렇게 보름 정도를 지낸 후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블린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물론 이블린은 무척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기에 처음부터 러더포드 가족들에게 특유의 거리감을 보이긴 했었다. 그렇지만 점점 그들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게 눈에 보였으므로, 컬렌은 이제 다 괜찮아졌을 거라 여기며 별 대수롭잖게 넘겨버렸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블린은 가족들과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이블린이 원체 표정을 숨기는 데에 능한 탓에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의 컬렌은 이미 이블린이 꾸며내는 얼굴이나 태도 몇 개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컬렌이 보기에, 이블린은 가족들과 늘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다 그들이 무심코 그 선을 넘으면 무척 불안하고 초조해했다. 이블린의 그런 태도는 특히 컬렌의 어린 조카를 대할 때 가장 두드러졌는데, 아이가 이블린의 손을 잡을 때마다 그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장난감을 쥐여주거나 그 손을 다른 곳에 놓아두는 식으로 아이의 손을 은근히 피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보다 못한 컬렌이 이블린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블린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컬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저희 가족들 말입니다. 혹시라도 불편한 거라면….”
“맙소사, 아니에요! 그냥 좀 어색해서 그래요, 미안해요.”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만…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겁니까?”
“그렇다니까요. 다들 좋은 분들이신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블린은 컬렌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컬렌은 좀 더 캐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가 직접 이야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엔.
그러나 컬렌도 그 순간이 설마 이렇게 갑작스러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주말 아침. 러더포드 가는 여느 때처럼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부엌에 모인 식구들이 화로에 불을 때려는데,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장작이 젖어 있어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컬렌의 누나, 미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블린을 돌아보았다.
“어휴, 잘 안 붙네요. 불 좀 붙여줄래요?”
“어… 그럼요.”
이블린이 장작을 향해 무언가를 가볍게 던지는 시늉을 하자, 별안간 거대한 불이 화로를 집어삼킬 듯 거세게 피어올랐다. 불이 잘 붙지 않는 젖은 장작이기에 힘 조절을 얼마나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불길은 이블린이 손짓하자마자 바로 잠잠해졌기에, 가족들은 겁에 질리는 대신 감탄하거나 짧게 웃으며 대수롭잖게 넘길 수 있었다.
“어우, 깜짝이야. 역시 전직 심문관님은 다르네요. 이렇게 화력이 셀 줄은 몰랐어요.”
정말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냥 웃으며 그러게요. 장작이 젖어서 힘 조절이 잘 안됐어요. 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이블린도 그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블린은 그 대신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더니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문밖을 나섰다.
그 뒤를 컬렌이 조심히 따랐다. 문을 나설 때 얼핏 보인 이블린의 표정이 심상찮았던 탓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집을 나선 이블린은 드넓은 들판을 무작정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을 끊임없이 쥐었다 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던 이블린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습니까?”
컬렌이 그런 이블린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이블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았다. 컬렌이 이블린의 앞에 앉아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블린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의 멍한 시선 사이로 굵은 눈물이 불규칙적으로 흘러내렸다.
“…역시 그냥 협회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저히 못하겠어요, 컬렌. 내가… 마법사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낸다는 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이블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컬렌은 말문을 잃은 채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애당초 협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먼저 말했던 건 이블린이었으니까. 남녘기슭에서 그가 내내 불안해 보였던 것도 그저 갑작스러운 평화가 어색해서 그러는 것이려니, 아니면 가족들과 부대껴 사는 삶이 익숙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끔찍해 했던 협회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마법사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내는 게 말도 안 된다는 부분이었다. 물론 이블린이 본인의 마법 능력을 껄끄러워한다는 건 알았다. 애초에 마법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그런 마법사들이 테다스 남부에 몇이나 있으랴—협회로 보내지면서 잃은 게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마법사 당사자인 이블린에게서 나온다니?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마법이 위험하단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협회가 왜 존재하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마법사들은 너무 위험하니까, 마음대로 풀어놨다간 모두에게 피해를 줄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한곳에 모아놓고 격리한 거죠. 그게 너무 싫었는데, 정말 너무 끔찍했는데, 그런데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협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서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지내는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까? 혹시 가족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컬렌은 이블린의 팔을 붙잡은 채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블린의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말은 오히려 그가 괜찮지 않다는 얘기처럼 느껴졌다. 이블린의 괜찮아요는 그가 보내는 위험 신호나 다름없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 가족들은 내게 정말 잘 대해줬어요. 마법사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 대하듯이요.”
이블린은 컬렌의 시선을 피한 채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자꾸만 쥐었다 놓았다. 그의 상태가 무척이나 불안정해 보여서, 컬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문제예요. 내가… 그걸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요. 만약 내가 잘못해서 집에 불을 지르면요? 당신들의 농작물에 벼락을 꽂아버리면요? 자고 일어났더니 흉물이 되면? 그러면 누가 날 막아주죠? 그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내 손으로 해치게 되면요? 성기사도 없는 이곳에서 대체 누가 날 죽여주나요?”
“그런 걱정을… 했습니까?”
“네. 나라도 해야죠. 여기선 아무도 그런 걱정을 안 하잖아요. 마치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요! 왜 아무도 날 경계하지 않죠? 나는 마법사라고요!”
컬렌은 그 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블린은 처음부터 그랬다.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것이, 남들의 경계 어린 시선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자신을 마법사라는 이유로 매도하는 이들에게도 반감을 표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대균열을 닫는 걸 도와달라며 직접 성기사들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자신과 같은 마법사들을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도.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연히 마법사를 감시할 성기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었다.
하지만 이블린의 말에 틀린 구석이 있던가? 데빈 경이 마법사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 내가 그에게 뭐라고 했었지? 마법사를 감시도 없이 풀어 놓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마법사들은 악마만큼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컬렌은 여전히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역파 마법사들은 이미 갖은 문제를 일으켜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들이 자유로워지는 걸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이건 이블린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라고….
그런데 이블린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마법사와 다를 바 없다고, 언제든 흉물이 될 수 있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컬렌은 자신이 충격받은 이유가 그런 말을 하는 마법사를 처음 봐서인지, 아니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제 아내라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조세핀이 그랬었지, 트레벨리안 가문은 대부분 독실한 성가회 신자라고. 컬렌은 다수의 마법사가 성가회에 가지는 반감을 알았다. 교리를 이유로 마법사를 억압하고, 곧잘 마법은 창조주의 저주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종교를 좋아하는 마법사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성가회와 비슷한 시각으로 마법을, 마법사인 자신을 바라보는 마법사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야 당연하지, 보통 그런 마법사들은 결국…….
맙소사. 그제야 컬렌은 이블린에게서 느껴지던 불안정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눈치챘다.
“…여기는 내가 잘못되면 날 막아줄 사람이 잔뜩 있던 하늘보루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가정집이잖아요. 심지어 당신 가족들이라고요. 컬렌, 정말 괜찮나요? 왜 괜찮죠? 나는 다른 마법사들이랑 다르니까? 위험하지 않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아니면, 내가 빙의 당하면 당신이 날 죽여줄 건가요?”
“이블린!”
컬렌은 다급히 이블린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꽉 붙잡지 않으면 영영 놓쳐버릴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엄습했던 탓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무엇이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을까? 컬렌은 이미 답을 알았다. 교수대에 있던 마법사들과 이블린의 표정이 비슷해 보였던 게, 무척이나 지치고 체념한 듯 보였던 게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거다.
성가회—협회와 성기사단이 그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 환경이 좋든 나쁘든 상관 없이, 그들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종의 폭발물 취급을 했던 탓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했으니까.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마법사보다 협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마법사들이 훨씬 많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그 횟수가 적더라도 마법사들이 한 번 문제를 일으키면 그 피해가 너무 거대했으므로, 그걸 막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그게 옳은 거라고 여겼다.
이블린은 14살이 될 때까지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살아왔다. 마법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을 테다. 아니, 아마 그 역시 비슷한 인식을 지녔으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될 줄 몰랐을 테니까.
마법사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게 반드시 선행돼야 해요. 이블린이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조직을 어떻게 개편하든 큰 효과가 나지 않을 거예요. 그와 함께 마법사의 처우 개선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이블린은 컬렌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덧붙였다. 곱씹어 보니, 결국 컬렌 본인도 마법사가 일반인과 함께 지내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억압받고 있단 건 인정하지만, 그들이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선 결단코 의견을 굽힐 수 없었던 탓이다. 아직도 퍼렐던 협회에서의 일이 어른거리는 컬렌으로선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렇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협회로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위험하지 않아요. 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않단 걸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제발…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지난 3년간 한 번도 그런 일 없었잖아요.”
“고작 3년으로 그 사람이 위험한지 알 수 있다면, 나도 열일곱이 되던 해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테죠.”
이블린의 목소리는 무척 공허하고 씁쓸했다. …난 16년 동안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었어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래요, 저도 제가 그렇게 쉽게 흉물이 되진 않을 거란 건 알아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걸 생각할 때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난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게, 심지어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는 게 내가 죽는 것보다 더 싫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안식화를 받겠어요.”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립니까?”
“안식자가 되면 많은 문제가 사라지잖아요. 왜 그들이 안식화를 택했는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더군요. …하지만 안식자가 되는 것보단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러니까… 어차피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못할 말도 아니잖아요, 컬렌….”
이블린은 컬렌을 붙잡은 채 애원했다. 혹시라도 누굴 해칠까 봐 두려운데, 그렇다고 협회로 돌아가거나 안식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면 내가 잘못됐을 때 망설임 없이 날 죽여줄 사람이 필요했다. 협회의 성기사들처럼,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날 막아줄 수 있을….
더는 성기사단에 속하고 싶지 않다던 사람에게 할 법한 부탁은 아니었다. 그게 제 남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블린은 너무 지쳤고, 더는 희박한 가능성에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제 손에 칼이 쥐어진 것보다야 제 목에 칼이 드리워져 있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그건 제게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일평생 좁은 방에만 갇혀 있던 귀족들의 관상용 동물들이 곧잘 이상행동을 보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심지어 더 넓은 장소로 이동하더라도 자신이 갇혀 있던 방 크기만큼, 그 좁은 공간에서만 움직인다고 했다. 이블린은 자신도 그와 다를 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운 것보단 차라리 억압당하는 쪽이 편했다. 참 이상도 하지,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질 않는 걸까?
“나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니까….”
허울 좋은 감옥에 갇히기 싫다며 제 발로 협회를 배신하고 나간 주제에, 그렇게 쟁취한 자유조차 마음 편히 누리지 못한 채 덜덜 떠는 꼴이라니. 이블린은 고개를 들어 컬렌과 시선을 맞추었다. 둘 다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이블린은 오른손으로 컬렌의 눈물자국을 닦으며 슬피 웃었다. 그 언젠가 협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처음 제 속내를 꺼내 보였을 때처럼.
“……미안해요. 당신이 이런 부탁 싫어하는 거 정말 잘 아는데….”
이블린의 목소리가 볼품 없이 떨렸다.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상처 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이젠 이 사람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해주면 안 되나요? 그렇게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래요…….”
컬렌이 보기에 이블린의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단번의 강렬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면, 이블린의 문제는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쌓여온 것에 가까웠으므로. 그러니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은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당장 컬렌 본인도 금단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엔 어떤 말을 듣던 그 고집을 꺾지 못하지 않았던가.
…컬렌은 정말 빈말로라도 그를 죽이겠단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야만 이블린이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한참을 말이 없던 컬렌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야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아니게 되면. 제가 책임지고 당신을 막을게요.”
그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엷게 웃는 이블린을 보며, 컬렌은 창자가 꼬이는 것만 같았다. 컬렌은 저를 고문하고 제 동료들을 무참히 살육하던 얼드레르를 떠올리는 한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며 사지로 뛰어들던 퍼렐던의 영웅을 떠올렸다. 커크월 성당을 터트려 무고한 이들을 학살한 앤더스를 떠올렸고, 앤더스의 친구였음에도 그를 제거한 후 성기사들을 도와 커크월이 질서를 되찾도록 최선을 다했던 호크를 떠올렸다. 배후지대의 민간인들을 괴롭히던 배교자들을 떠올렸고, 심문회의 동맹으로서 대의에 충실했던 반역파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끝에 이블린이 있었다.
나쁜 마법사, 좋은 마법사. 너무나도 위험한 마법사들과, 성기사들 못잖게 질서 유지에 충실했던 마법사들. 남에게 고통을 주는 마법사가 있는가 하면 남에게 고통받는 마법사도 있었다. 정말로 모든 마법사가 위험한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들의 위험성을 묵과할 수 있는가? …컬렌은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블린과 같은 선량한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삶을 박탈당하다 못해 끝내 자기 자신을 저버리는 게…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정의인가?
과연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컬렌은 그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분명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이블린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기사였기에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처지가 부당하다 주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이 마법사라는 이유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어요.”
퍼렐던 협회의 사건이 나로 하여금 촉발된 게 아니라고, 그로 인해 내가 변해버린 것이 오롯이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커크월 사태를 막지 못한 게 온전히 나의 죄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줬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니까. 그러니 당신도 제 잘못이 아닌 것까지 끌어안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고….
컬렌은 다시 한번 이블린을 끌어 안았다. 어쩌면 이 또한 제가 해야 할 속죄의 연장선인지도 모르겠다고, 혹은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여전히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우리 둘 다 괜찮아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나 보죠. 쓴웃음을 머금은 채 조용히 중얼거리던 컬렌은 언젠가 금단증세로 힘들어하던 제게 카산드라가 이 역시 나아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오래 방치한 상처를 치료하려면 반드시 그 부위를 다시 찢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의 나와 당신도 그런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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