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함께라서 가능한 것
드에인퀴 침입자 DLC 이후 / 컬렌인퀴
언제나의 가내 컬렌인퀴
침입자 DLC 엔딩 후 3년쯤 뒤의 이야기 (이러면 인퀴는 37살이고 컬렌은 36살이네요… 세월이란)
이래저래 날조 잔뜩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아! 당연히 본편~침입자 DLC 스포 있음!
쓰면서 들은 노래: Laufey - Serendipity
고위 평의회가 끝난 뒤 3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물론 세상이 안정되기엔 퍽 짧은 기간이었기에 여전히 기적 같은 해결법은 나오지 않았고, 아직도 사람들은 뒤틀린 인식과 그에 기인한 차별과 혐오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혔다. 그럼에도 심문회 동료들을 포함한 많은 선한 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제 러더포드 백작 부부가 된 이블린 러더포드와 컬렌 러더포드도 있었다.
컬렌과 이블린이 커크월에 들른 것은 꽤 간만의 일이었다. 좀 자주 오라는 배릭의 타박 섞인 환영과 함께 그의 저택에 짐을 푼 둘은 일전에 배릭이 이블린에게 작위와 함께 선물했던 백작 저로 향했다. 백작 저가 있는데 대체 왜 배릭의 저택에 짐을 풀었느냐고? 그 질문을 배릭에게 직접 해보라. 어깨를 으쓱이며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거지. 이럴 거면 좀 다른 걸 줄 걸 그랬나 봐.” 하며 웃을 테니.
배릭이 자신했던 것처럼, 러더포드 백작 저택은 하이타운의 저택 중에서도 손꼽히게 크고 세련된 저택이었다. 컬렌과 이블린은 짧은 노크 후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저택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환자가 반, 그들을 간호하는 치료사나 사제들이 반인 듯했다.
백작 부부의 등장을 알아챈 수녀 하나가 그들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이블린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선 바로 저택 사람들의 근황을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떤가요?”
“늘 똑같죠.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교황님께서도 계속 지원해 주시고요.”
이블린이 수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컬렌은 근처의 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환자 둘은 컬렌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고선 벌떡 일어나 그에게 경례했다. 여전히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걸로 보아 신병들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증상도 비교적 양호해 보였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이젠 사령관이 아니니 그렇게 부를 필요 없네. 상태는 좀 어떻지?”
“늘 똑같죠, 뭐. 그래도 버텨보려고 합니다. 좀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고 싶으니까요….”
“이 친구는 최근에 애인이 생겼지 뭡니까. 덕분에 요새 악몽도 덜 꾼다고 계속….”
“사, 사령관님께 그런 얘길 왜 해!”
신병들은 각자에게 손가락질하며 투닥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선 컬렌에게 어설프게 웃으며 사과했다. 컬렌은 옅게 미소 지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 다들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되는군.”
“이게 다 사령관님과 심문관님 덕분입니다. 어제도 두 명이 퇴원했어요. 이제 통원 치료로 진행해도 될 거라면서요.”
“사령관님은 어떠십니까? 여전히… 금단증세가 남아 있습니까?”
그랬다. 이블린이 트레벨리안이 아닌 러더포드가 되고, 배릭에게 커크월의 백작위까지 받게 된 후부터 러더포드 백작 저택은 ‘리륨 중독 치료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심문회가 해체된 후, 컬렌을 따라 리륨 복용을 중단했던 병사들의 후속 치료를 걱정한 두 사람이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다시 성기사단으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심문회 휘하에서 일할 수도 없는 갈 곳 잃은 병사들과, 그들을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던 심문회 사람들, 혹은 사제들이 함께 커크월로 올라와 백작 저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처음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주변 귀족들의 반대도 있었고,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기에 참고할 선례조차 없어 치료법이나 이런저런 체계들을 정립해 나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컬렌과 이블린은 커크월에서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
다행히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중독 치료의 성과가 나타나자 테다스 남부 전체에 치료소의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고, 성기사단을 떠난 후 리륨 금단증세에 고통받던 중독자들이 하나둘 치료소로 모여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빅토리아 교황이 그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후로는 모여드는 환자들만큼 그들을 돕는 사람들도 차츰 늘어나, 어느새 백작 저택은 늘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상태가 되었다.
리륨 금단증세 치료는 무척이나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누구보다 컬렌 본인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치료소에 모인 병사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의지하면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 단결력은 성기사단의 장점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컬렌은 그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동안 리륨 중독 치료소가 단 한 곳도 없었던 거죠?”
“리륨 중독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이가 극히 드물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저희가 함께 만들어 낸 긍정적인 변화겠지요.”
첫 퇴원 환자를 직접 배웅하는 컬렌을 바라보던 이블린이 그의 손을 넌지시 잡았다. 컬렌은 그 손을 끌어와 수줍게 입 맞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제가 해야 할 말인데요.”
그리하여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 이블린과 컬렌은 커크월과 치료소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구태여 이곳에 들른 것이었다.
치료소가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한 둘은 가장 위층, 하이타운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하늘에선 굵은 솜덩이 같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그걸 본 이블린은 제 오른손을 뻗어 눈송이 하나를 붙잡고선 웃었다. 컬렌은 그런 이블린에게 제 겉옷을 덮어주며 춥지 않냐고 물었고, 이블린은 난 괜찮으니 당신이 입으라며 손사래를 쳤으나 컬렌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선 겉옷을 가져가는 대신 이블린의 오른손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사실 저는 커크월에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혹시 아직도 많이 힘들어요?”
이블린의 걱정 어린 질문에 컬렌은 다시 고개를 내젓고선 내리는 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물론 저는 여전히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 빈도나 정도가 약해졌다고 하더라도요. 그리고 커크월은 그러한 악몽의 단골 소재지요. 미쳐버린 기사단장, 무고한 마법사들이 궁지에 몰려 하나둘 흉물로 변하던 현장,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던 수석 마도사, 기사단장에게 칼을 겨누었던 때나 끝내 그가 붉은 리륨 석상으로 변해버렸던 것까지… 늘 생생합니다. 아마 오래도록 그럴 테지요.”
“후회하나요? 그때의 일들요.”
컬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날들은 정말로 후회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이제 막 성기사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컬렌은 모든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성기사로서 무고한 이들과 정의, 질서 같은 숭고한 가치를 지켜 나가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을 것이라 철없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고, 컬렌이 겪은 일들은 유년기의 꿈만큼 반짝이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퍼렐던 협회 사건 이후, ‘왜 나만 살아남은 걸까?’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얼드레드의 고문에 시달리면서, 제 앞에서 죽어 나가는 성기사 동료들을 보면서 컬렌의 어릴 적 꿈은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그랬기에 컬렌은 남몰래 연심을 품었던, 무척이나 강인하고 아름다웠던 바로 그 회색 감시자―퍼렐던의 영웅에게 구해지면서도 그의 옛 동료와 스승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바로 얼마 전에 이 퍼렐던 협회를 떠났다는 것을, 여전히 이곳의 마법사들과의 친분을 가지고 있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당시의 컬렌은 마법사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에 미쳐있었다. 그는 자신이 더는 그때의 순수하고 숭고한 신념을 품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신념이 사라지니 그 빈자리에는 관성만이 남았다. 그랬기에 컬렌은 기사단장이 자신을 다른 곳에 보낼 때도 묵묵히 그 명령을 따랐다.
그렇게 향하게 된 곳이 커크월 협회였다. 메러디스 기사단장은 마법사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사람이었지만, 퍼렐던 협회의 참상을 겪었던 컬렌은 자연히 그에 동조하며 그의 악행을 방조했다. 마법사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건 알았지만 그들의 자유나 행복보단 다수의 평화와 질서가 우선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었고, 끝내 너무 많은 무고한 이가 죽고 말았다. 컬렌은 자작이 된 호크 공을 도와 커크월의 뒷수습을 하면서,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옳은 방법일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카산드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심문회의 사령관이 되었음에도 고민과 후회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심문관을—이블린을 만났다. 오스트윅 협회 출신의 마법사. 그는 마법사임에도 협회와 성기사에 놀라우리만치 호의적이었다. 오스트윅 협회는 마법사들의 대우가 괜찮은 편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였을까.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야 컬렌은 이블린의 태도가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블린은 마법사들의 관리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롭고 평범한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자유와 질서,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옳은지를.
그러니 결국, 그도 나와 같았다. 우리는 공존하기 힘든 두 개의 대안 사이에서 과연 무엇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의 처우를 개선할 방법을, 마법사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존중할 방법을 말이다.
만약 퍼렐던 협회에 있지 않았다면, 혹은 커크월 협회에 있지 않았다면, 컬렌은 그처럼 멋지고 다정한 여성을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컬렌은 늘 자신의 가장 큰 행운은 각종 사건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아내, 이블린을 만난 것일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그의 악몽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힘을 잃었다. 눈을 뜨면 과거의 고통을 모두 덮을 정도로 거대한 행운이 제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부 진솔하게 털어놓진 못할 테지만.
“사실 심문회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니, 당신께서 절 붙잡아 주시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모든 걸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퍼렐던 협회에서의 일, 커크월 협회에서의 일, 그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습니다. 순수하게 사람들을 돕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결국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점이 특히 괴로웠지요.”
이블린은 컬렌의 손을 조심히 잡은 채 그의 곁에 조금 더 바짝 붙었다. 그러면서 잠자코 컬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어떻게든 만회하고, 속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게 심문회는 좋은 대안이었지요. 이번에야말로 그런 끔찍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며… 하하, 이런 얘기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었잖아요.”
“아예 아니었다곤 할 수 없잖습니까. 하지만… 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압니다. 퍼렐던 협회의 일도, 커크월 협회의 일도… 제겐 여전히 끔찍한 기억이지만, 그래도 그 일들을 겪으면서 저는 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성기사가 된 것도, 두 협회에서 그 모든 사건에 휘말렸던 것도, 그 끝에 심문회로 향한 것도 전처럼 후회가 되진 않습니다. 아니, 물론 그 희생을 기껍게 여기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 음. 아마 그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저는 평범한 성기사로서 전형적인 말년을 보내게 되었겠지요.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게 됐거나요.”
줄줄 잘 이야기하던 컬렌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이블린을 흘깃거렸다. 이블린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고 컬렌과 시선을 마주했다. 컬렌이 예의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남은 손으로 뒷목을 쓸었다.
“…그리고 그… 그랬다면, 당신을 만나지도 못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모든 끔찍한 일도 음,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마냥 되돌리고 싶은 일은 아니라고… 어,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전부 당신 덕분이에요, 이브.”
그 말에 이블린은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왜 내 덕분이에요? 당신이 그 모든 일에 꺾이지 않은 것도, 더 나아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 실제로 늘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전부 당신이 강하고 다정한 사람인 덕분인걸요.”
컬렌은 무어라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고선 이블린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마법사인 자신을 늘 싫어하셨잖습니까.”
이블린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데룩 굴렸다. 컬렌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이블린은 열네 살, 아주 늦은 나이에 마법이 발현되었다. 그와 동시에 제 세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과 단절되었고, 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성가회에서 창조주의 저주라 멸시하던 마법뿐이었다.
아주 많이 후회했다. 그러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결국 제가 원망할 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마법사라서 이 모든 재앙이 벌어진 건데,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건 마법사가 된 내 잘못이잖은가. 심지어 윗대, 윗윗대까지도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는데 갑자기 이 늦은 나이에 혼자 마법이 발현되어서… 역시 내가 무언갈 잘못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잘못을 저질러서 마법사가 된 게 아니니까.
이블린은 제게 이 빌어먹을 마법을 준 창조주를 원망하기도 하고, 제 세상을 박살 낸 마법사 협회 자체를 증오하기도 했다가, 곧 빠르게 순응했다. 심연 아래로 침잠하듯이.
본디 천성이 그러했다. 짧은 부적응기를 거친 이블린은 금방 협회에 녹아들었다. 겉보기에는 협회에 완전히 적응한 듯했다. 이블린은 협회 특유의 갑갑한 규칙에 순응하고, 스승님의 가르침에 열성적으로 따르며, 열심히 학업에 매진해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금세 그들의 진도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블린의 내면은 차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블린은 차라리 협회에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버리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랬다면 가문에 누를 끼치지도 않았을 테고 이런 비참한 기분이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블린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마법사가 매년 한 명씩은 꼭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블린과 달리 마음먹은 바를 이루고야 말았다. 이블린은 저 대신 그런 끝을 선택한 이들을 보며 기이한 동질감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마법에 대한 깊은 원망을 뼈저리게 되새겼다.
그렇게 십수 년을 보내고 나니 모든 게 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잘못된 것에 투쟁하고 싶은 열망도, 아닌 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그 모든 것들이 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평생 이러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창조주라는 작자가 날 이렇게 빚어놨으니 인간인 내가 무슨 수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 마법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협회에서 강제로 쫓겨났음에도 그런 생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이블린은 심문관이 되어 심문회의 사령관—컬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제가 좋아하던 소설에 나올 법한 멋지고 근사한 남자를. 무척 불안정해 보이면서도 용기 있고, 쉽게 꺾이지 않을 신념을 품고 그걸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 어떤 소설 속 등장인물보다 멋지고 강인한 남자를 말이다. …물론, 이 사실은 그에겐 여전히 비밀이지만.
“…물론 많이 후회했죠.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창조주께서 이런 벌을 내리신 걸까, 그런 생각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제 자신을 성가회 신자라 여기지 않게 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네요.”
성기사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장난스레 덧붙인 이블린은 목을 가다듬고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젠 마법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요. 마법에 대한 거부감도 전처럼 심하진 않고요…. 물론 여전히 내가 남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꿈을 꾸지 않게 되기 전까진 늘 이 불안감을 품고 살아가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컬렌의 입가에 쓴웃음이 배어 있어서 이블린은 따라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협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한 후,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이블린은 컬렌에게 자신이 흉물이 된다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법사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든 지금도 이블린은 여전히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할 생각이 일절 없었다. 자신이 마법사인 이상 언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제가 한 부탁이 컬렌에게 무척 고통스러웠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이블린은 그런 자신의 억지를 묵묵히 들어준 컬렌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데브에 대해서도요. 사실, 옛날엔 제가 마법사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했거든요. 데브도 그중 하나였어요. 나 때문에 그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심지어는 마법사인 날 지키고 싶다는 이유로 성기사가 된, 그래서 리륨 금단증세에 시달리게 된 그 애를 보면서 어떻게든 속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야말로 책임지고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고요.”
“기억합니다. 당신께서는 유달리 데빈 경께 약한 모습을 보이셨죠.”
“하지만 그런 강박은 데브가 성장하는 걸 보면서 점차 누그러지더군요. 내가 꼭 그 아이 곁에 있어 줄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내내 날 괴롭혀 왔던 죄책감이나 책임감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어요.”
내내 잘만 말하던 이블린이 별안간 입을 다문 채 컬렌의 눈치를 살폈다. 컬렌은 웃으며 괜찮으니 편히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당신이 없었다면 전 분명 협회로 돌아갔을 테죠.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지 않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이블린이 컬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전에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걸 갈망하게 돼요. 그런 걸… 바랄 수 있는 용기가 생겨요. 그러니까, 이거야말로 당신 덕분인 셈이죠.”
“그게 왜 제 덕분입니까. 전부 당신이 강하고 다정한 덕분인걸요.”
“그 말을 바로 이렇게 써먹기예요?”
어이없다는 투로 타박한 이블린이 냉큼 자세를 고쳐 서고선 제 어깨로 컬렌을 툭 쳤으나, 당연히 컬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컬렌은 이블린의 화풀이에 넘어가는 시늉을 하는 대신 그의 손을 제게로 잡아끌고, 이블린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째서인지 컬렌의 두 눈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있잖습니까, 이브.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컬렌은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법사라서 불행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니까, 마법사여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요. 게다가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고 있잖습니까? 마법사들이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요. 그, 그러니까… 음… …이런 얘기는 늘 어렵군요. 미안합니다, 그….”
결혼한 지 벌써 3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제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에 끔찍이도 서툴렀다. 이블린은 컬렌이 말을 꾸미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늘 가장 순수한 진심을 꺼내 보이려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컬렌은 제 진심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는지, 어떻게 포장해야 멋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늘 무척이나 투박하고 순수하게 반짝였다. 마치 암석 틈바구니에서 빛나는 커다란 원석처럼.
그렇기에 이블린은 그가 자신의 원석을 전부 캐낼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 원석의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므로.
“…예전에 했던 대화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때 당신은 혹여라도 우리의 자식이 마법사가 될까 봐,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게 될까 봐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그렇지만… 어… 만약 당신만 괜찮다면….”
어머, 설마?
이블린은 컬렌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단번에 눈치채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끊지 않은 채, 그가 생각해 낸 문장을 모두 토해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전쟁이 길었잖습니까.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지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지지 기반을 잃은 채 정처 없이 떠도는 아이들은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러니까, 혹시 말입니다. 그중 유독 눈에 밟히는 아이가 있다면… 의 이야기인데…. 음. 당신은 아이를 좋아하고, 저도 아이를 좋아하니까….”
이블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컬렌이 마침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냈다.
“…우리에게 더 많은 가족이 생기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상한 질문이었음에도 이블린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도 그럴 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던 탓이다. 물론 자식을 갖자는 이야기가 나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컬렌이 말했던 대로 이블린은 제 자식이 저처럼 마법사라는 이유로 고통받을 게 겁이 나,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단칼에 모든 여지를 뚝 잘라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법사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물론 아직 한참 멀긴 했지만. 또, 수많은 전쟁과 사건들로 인해 가족을 잃은 아이들도 무척 많았다. 그들 역시 유년기의 이블린처럼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세상을 잃어버린 셈인데, 만약 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건 무척 보람 있는 일일 터였다.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긴 세월 자신을 갉아먹은 두려움이 이번에도 이블린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지만 말했듯, 이블린은 컬렌과 함께라면 상상조차 못 했던 뜨거운 용기가 제 마음속 가득 차오르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와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성기사치고 운이 좋은 경우이듯 저 역시 마법사치고 운이 좋은 경우에 불과한걸요. 모두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순 없는 일이죠.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많이 두려워요.”
컬렌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 나가던 이블린이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컬렌과 눈을 맞추었다. 컬렌은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당신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러니까… 어…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 말에 컬렌은 잠시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둘 다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는데, 그게 매서운 눈보라 아래에서 한참이고 대화를 나눈 탓인지, 아니면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아낌없이 털어놓았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블린과 컬렌, 둘 다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컬렌은 이블린을 제 품 가득 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선 속삭였다.
“당신은 확신이 없다고 하시지만, 저는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좋은 보호자였는걸요.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잘 해내실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점차 거세지는 눈발 사이에서, 컬렌과 이블린은 한참이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예상치 못한 눈보라처럼 예상치 못하게 찾아올 새 온기를 상상하면서. 안 그런 날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특히 더 바빠지겠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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