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심연에 침잠하지 않도록
드에인퀴 컬렌인퀴
술김에 쓴 글인데 이걸 진짜 완성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컬렌 아다만트 공성전 참여 했으면서 심문관이 영계에 들어갔다 나온 거 다 봐놓고도 일언반구 안 한 거 좀 섭섭해서 왜 그랬나… 생각하다가… 공교롭게도 1회차 컬렌 리륨 금단증세 이벤트가 딱 아다만트 공성전 직후에 뜨더라고요? 그래서 그 두 개를 잘 엮으면 좀 납득이 될 것 같았음
꽤 우울하고 딥한 글이니 읽을 때 주의하시길… 독백도 많음
요약: 컬렌이 이블린에게 조금이나마 멘탈케어 받는 글입니다
쓰면서 들은 BGM: lost melody - yutaka hirasaka
컬렌이 성기사단을 떠나 심문회에 합류한 것은 더 이상 성기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퍼렐던 협회와 커크월 협회 모두 각자의 사유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컬렌은 자신이 정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성기사로서 보아온 두 가지의 상반된 대처가 전부 정답이 아니라면, 어쩌면 현재의 성기사단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컬렌은 더 이상 성기사단에서 제가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컬렌은 여전히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성기사단에 남아있는 한 그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될 것이다. 그는 무고한 마법사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고,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애당초 성기사는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반대로 성기사가 마법사로부터 다른 평범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되레 마법사를 억압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가 생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컬렌이 지키고 싶은 정의나 질서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심문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제가 저지른 잘못들에 속죄하고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전환점. 컬렌은 구도자들과 노선을 달리한 카산드라처럼, 저 역시 작금의 성기사단을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치명적인 부작용을 알면서도 리륨 복용을 그만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더는 성기사가 아니게 된 자신이 성기사의 족쇄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으므로.
게다가 컬렌은 아직도 메러디스 기사단장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붉은 리륨이든 일반 리륨이든 결국 그 끝이 그런 파멸뿐이라면…. 컬렌은 퍼렐던 협회 시절 함께 근무했던 동료 성기사, 캐롤을 떠올렸다. 성기사들은 다 그런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걸까? 물론 다른 길을 선택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성기사들이 많다는 건 안다. 리륨 중독이 극심해 리륨을 복용하지 않고는 하루도 제대로 버티기 힘든 고참 성기사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니까. 그 지경이 되면 결단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성기사들이 리륨 복용을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러고도 멀쩡히 여생을 보낸 선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그 산증인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컬렌은 캐롤을 포함한 수많은 동료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 때문에 심문회에 지장이 생기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건 당신 역시 마찬가지겠죠. 그러니 만약 제가 사령관으로서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알겠습니다, 컬렌 사령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구도자이고, 심문회의 위험을 좌시할 생각은 일절 없으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당신을 주시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분명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게도 카산드라는 그런 컬렌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금단증세를 이겨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기까지 했다. 컬렌은 그런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잘 알았다.
그렇게 지난 몇 달간 컬렌은 금단증세에 허덕이면서 남동생이 준 행운 동전을 들여다보거나 손에 쥔 채로 기도문을 읊었다. 다행히도 금단증세는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운 좋게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졌던 걸지도 모르고.
심문회의 상황은 콘클라베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엄중했던 탓에 심문회의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게 컬렌에겐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는데, 그렇게 바쁜 덕분에 눈 붙일 짬도 없어 비교적 악몽에 덜 시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파훼가 가능한 악몽보다 심각한 것은 피할 방법도 없이 그저 감내해야만 하는 리륨 금단증세 특유의 조바심과 강박증이었다. 컬렌은 금단 증상이 심한 주간엔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고르며 지금 상황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아직은 쓸모가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되새겨야만 했다. 그가 유독 매사에 예민하게 굴었던 것은 본디 그의 융통성 없고 꽉 막힌 천성 탓이긴 할 테지만, 그러한 강박증 역시 큰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컬렌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건 얼마 전, 아다만트 공성전에서였다.
컬렌은 성벽 위에서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물론 심문회 병사들의 피해가 있긴 했으나, 공성전에서 그 어떤 병력 손실도 내지 않는다는 건 안드라스테가 다시 한번 테다스에 재림하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일이잖은가.
병사들을 지휘하던 컬렌이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주변을 살폈다. 마침 심문관이 클라렐 사령관을 찾아 요새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다행히 작전에 이상은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안심하던 때에, 별안간 컬렌의 시야가 크게 일렁였다. 컬렌은 반사적으로 성벽을 짚은 채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근처의 병사들이 사령관의 상태를 염려하자, 컬렌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입에 붙어버린 지 오래인, 버릇처럼 내뱉는 공허한 문장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만 하니까. 이런 긴박한 전장에서는 특히 더.
하지만 괜찮다는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컬렌은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한 채, 금방이라도 암전해 버릴 것 같은 시야를 겨우 붙잡으며 병사들에게 현재 상황을 물었다. 마침 보고를 위해 달려온 병사는 무척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나? 그걸 자각하자 가뜩이나 불안하던 컬렌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병사에게 신경질적으로 윽박질렀다.
“무슨 상황인지 보고하라는 말이 안 들리나?”
“사, 사령관님, 그게….”
제 심장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단 충동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컬렌은 그 대신 제 가슴께를 거칠게 내려치며 제 앞의 병사를 노려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병사의 표정을 보며, 컬렌은 그 사실을 바로 직감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문관들이 향했던 장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심문관님 일행이 갑자기 사… 사라졌습니다. 거대한 용의 습격을 받은 것까지는 저희가 확인했는데, 이후에 다리가 무너지면서… 아마 그 아래로 추락하신 게…….”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적어도 컬렌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가 전장에서—심문관들에게서 눈을 뗀 시간은 그가 생각하기로는 고작 눈을 두어 번 깜빡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 잠깐 사이에 심문관들을 영영 놓쳐버렸단 말인가?
컬렌은 만류하는 병사들을 뿌리친 채 다급히 성벽을 내려갔다. 병사들은 여전히 균열에서 쏟아져 나온 악마들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만약 정말로 심문관들이 추락한 거라면? 컬렌은 자신이 과장되고 비약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리륨을 복용하지 않겠단 오기를 부려서 모든 걸 망쳐버린 거라면? 컬렌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강박은 특히나 그의 자책감이나 죄의식과 연결되어 있어서, 아주 사소한 실수도 거대하게 부풀려버리곤 했다.
그가 마침내 의식이 벌어지고 있던 구역에 도착했을 때, 그 가운데에 있던 균열에서 누군가 우당탕 튀어나왔다. 심문관과 동행한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심문관들은 보이지 않았다. 컬렌이 제대로 숨조차 고르지 못하고 있던 그때, 마침내 이블린과 데빈, 그리고 호크가 마지막으로 튀어나오며 균열이 닫혔다. 그걸 보고서야 컬렌은 제대로 호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제 몸이 온통 식은땀투성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때, 이블린이 컬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컬렌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피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물론이죠, 난—”
“아뇨! 당신은 제가 한 짓을 비난하셔야 합니다.”
컬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제가 정확히 무얼 참을 수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컬렌은 자신이 더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큰 실수를 하기 전에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고. 지금 컬렌은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린 상태였다.
이블린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해서 되레 더 괴로웠다. 그의 자애로운 시선이 닿을 때마다 컬렌은 마치 제가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체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제 모든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버린 것만 같은, 그 모든 걸 그가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성녀 안드라스테의 눈을 마주한 헤사리안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까?
컬렌은 도저히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조차 없어 강박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이블린에게 마구잡이로 제 감정을 쏟아부었다. 창조주 맙소사,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지금 컬렌은 그런 자각을 할 정신조차 없었다.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들을 바로 토해내지 않으면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으므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우리의 성공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달려 있겠습니까? 전 이 대의에 나 자신을 바치리라 맹세했습니다….”
이블린의 시선이 비수처럼 박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가 저렇게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의미가 없으니까. 심문회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제가 저지른 짓을 온 힘을 다해 속죄하겠다고, 이번에야말로 창조주와 안드라스테의 뜻에 투신해 제 모든 걸 바치겠노라고 맹세했으면서!
내가 주군을—이블린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이던가? 헤이븐에서 우린 죽겠지만 어떻게 죽을지 결정할 순 있다고 말한 제게, 살길을 포기하고 죽음을 조언한 제게 기꺼이 자신을 바쳐 모두를 구하겠다고 말한 게 바로 이블린이었다. 그 후로도 이블린은 몇 번이고 위험을 감수해 왔다. 오로지 심문회를 위해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그는 결국 타의로 심문회에 속하게 된, 얼마 전까진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사람인데도….
내가 정말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되도 않는 고집으로 내겐 너무 과분한 이를 물고 늘어진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가 나를 정말로 아끼고 있다고? 이다지도 고귀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로 나를…….
“…성가회에 헌신했을 때보다 심문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겁니다. 리륨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걸 사용해야 한단 말입니다.”
컬렌이 내려친 책장에서 책 몇 권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애당초 당장 제 손이 아프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상태이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이블린은 컬렌의 호소를 묵묵히 들으며,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컬렌을 바라보았다. 그래, 바로 저 눈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수룩하고 어리던 시절, 컬렌은 저런 눈을 한 여성을 딱 한 명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으며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눈.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한겨울에도 좀체 얼지 않는 깊은 호수 같은 그런 눈동자 말이다. 그 눈은 저와 같은 것—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보고 난 후에도 여전했다. 자신의 믿음은 흔들리고 꺾여 끝내 퇴색되고 말았는데, 저보다 더한 것들을 보고 왔을 그 사람의 눈은 여전히 깊고 잔잔했다.
커크월 사태 후, 자신이 길잃은 원망과 분노로 미쳐있었다는 걸 자각했을 때 바로 떠올랐던 것도 그 눈이었다. 그 어떤 사제보다 믿음으로 가득하며 그 어떤 병사보다 망설임 없이 확고한 그 눈을 컬렌은 동경하고 사랑했다.
컬렌이 이블린을 마음에 담게 된 것 역시 균열을 닫던 이블린의 올곧은 시선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눈은 앞선 이의 것보다 조금 탁했지만, 더 깊고, 훨씬 잔잔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모두 덤덤히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침착한 태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은 채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평등한 시선. 그 눈이 자신을 담을 때, 제 얼굴을 담은 그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 접힐 때, 컬렌은 그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은 또 없으리라고, 그를 사랑하는 건 일종의 불가항력이라고 여겼다.
그 두 눈이 다시금 컬렌을 가득 담았다. 평소보다 냉담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무척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심문회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은 정말 이걸 바라나요?”
이블린 특유의 조곤조곤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컬렌에게 가 닿았다. 이블린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자, 그 구멍 사이로 컬렌의 내면을 잔뜩 부풀게 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힘없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컬렌은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아뇨. 하지만… 이 기억은 항상 날 괴롭혔어요. 더 심해진다면, 만약 내가 더는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이블린의 손이 컬렌을 막아 세웠다. 할 수 있어요.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 문장이 마치 언령처럼 컬렌의 뇌리에 박혔다. 이블린은 그게 확고한 진실인 양 말하고 있었다. 컬렌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이블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잔잔한 파도 사이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 붉은 홍채가 타오르고 있었다.
빛이 그 앞길을 무사히 인도하매… 컬렌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길이 곧 감로와 같도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불안과 강박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제대로 사고할 수 있게 된 컬렌은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또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자각했다.
사령관실을 나선 컬렌은 가장 먼저 보인 카산드라에게 이전의 발언들에 대해 사과했다. 카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이제는 좀 괜찮습니까?”
“그… 네. 미안합니다. 그렇게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아지는 과정일지도 모르죠. 중요한 건, 당신이 순간의 충동에 휩쓸려 리륨에 손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심문관에게 감사 인사는 했습니까?”
“…아뇨. 부끄럽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전처럼 봐주실지도 의문이고요….”
카산드라는 의기소침한 컬렌을 답답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의 등을 세게 내려쳤다. 갑옷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에 컬렌은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대체 뭘 걱정하는 겁니까? 그 심문관이잖습니까. 당신이 걱정돼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을 텐데, 빨리 가서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과연 카산드라의 말은 정확했다. 고민하던 컬렌이 급사를 통해 이블린을 성벽 위로 불렀을 때, 한달음에 달려온 이블린은 컬렌을 꺼리거나 피하는 기색일랑 전혀 없었다. 컬렌은 망설임 없이 제게 다가오는 이블린을 보며 생각해 두었던 말을 했다.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절 보러 왔을 때… 제가 혹시라도….”
젠장.
생각할 땐 꽤 그럴듯했는데, 왜 늘 입 밖으로 내면 이렇게 어설퍼지는지 모를 일이다. 컬렌은 뒷목을 쓸며 멋쩍게 웃었다. 머릿속에선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이블린 역시 미소로 화답하는 한편, 컬렌의 상태를 빠르게 훑으며 물었다.
“좀 괜찮나요?”
“그게… 네.”
이블린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것이 컬렌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용기를 얻은 컬렌은 그때 자신이 그렇게 거칠게 굴었던 이유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금단증세로 인한 고통, 협회에서 있었던 일들, 그로 인해 변한 것들….
퍼렐던 협회 사건 이후, 컬렌은 자신이 마법사들에게 돌린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마법사들은 모두 그렇게 끔찍한 족속들이라고, 자유롭게 풀어줘봤자 다른 이들을 해칠 뿐이라고.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기에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의 컬렌은 어렸고, 지금의 저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까.
으레 성기사란 마법사를 거뜬히 제압할 수 있을 것처럼 비치지만, 강한 마법사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달려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컬렌은 뼈저리게 알았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그런 수를 쓰기 전에 그들을 최대한 억눌러 일말의 틈조차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마법사들이 괴로워하는 건 전부 가증스러운 연기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마법사들이 모두 끔찍한 게 아니란 걸 인정하면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컬렌은 종종 악몽 속에서 교수대의 마법사들을 본다. 그들의 절망한 얼굴을,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모습을, 부당한 것에 소리치다가도 힘없이 꺾여버리는 그 모든 불의를. 대균열을 닫으려다가 쓰러진 후 깨어난 이블린도 꼭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죄수 신분이 아니었기에 그 두 손에 족쇄를 차고 있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을 어색해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내가 커크월에 있을 때 이블린을 만났다면, 그 지친 얼굴을 보고도 그를 억압하려 들었을 테지. 그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은 성기사단을 떠났지만, 마법사를 믿을 수 있나요? 성기사단과 마법사 협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컬렌은 여전히 퍼렐던과 커크월 때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게 비단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과 자신을 조금이나마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컬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지금의 당신이 좋아요.”
하지만 그런 컬렌에게도 이블린의 고백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컬렌은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놀란 눈으로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이블린은 컬렌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런 컬렌의 두 손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계속 옳은 길을 찾는 사람은 무척 드물죠. 아니,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도 못하거나, 자각했음에도 관성적으로 계속 같은 짓을 저지르곤 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컬렌은 숨을 죽인 채 이블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얼드레드는 당신을 상처입혔지만, 당신을 만들지는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으로 남았어요. 컬렌은 일전에 콜이 전한 편지의 내용을 회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난 그게 무척 용기 있는 행동이라 생각해요. 당신이 리륨을 복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도,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전부 지금의 당신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죠.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컬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코끝이 찡한 것을 매서운 서리등 산맥 바람 탓으로 돌리며, 컬렌은 이블린을 껴안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쩌면 창조주께서 저를 이리로 인도한 것은 비단 제 실책을 바로잡을 기회뿐 아니라, 이 사람과 만날 기회를 선물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끝내 욕심을 이기지 못한 컬렌은 이블린의 왼손을 끌어와 그 손등에 조심히 입 맞추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좀 더 욕심부릴 자격이 있다면…. 컬렌은 자신이 처음으로 이후의 일을 꿈꾸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늘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수습하기 급급해 이후의 일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는데.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때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같다면….
그러려면 우선 이블린이 이어질 전투에서도 계속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테다. 컬렌은 자신이 이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제 품 속에 있는 조그마한 동전을 떠올렸다. 이미 가장 큰 행운을 얻었으니 이 이상 욕심내봤자 부질없는 일일 테지. 그러느니 차라리, 이블린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제 보잘것없는 행운이라도 그에게 얹어주자. 그러려면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여유를 만들어야 했다. 뭔들 못하겠는가. 마음을 정한 컬렌이 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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