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다만희곡

1차창고 by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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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

등장인물

지운, 19세

현지, 28세

기정, 52세

때: 8월

곳: 가공의 서울 소재 스케이트파크 ‘징크’. 

1장

 

이른 아침, 지운과 기정, 쿼터파이프에 걸터앉아 있다.
지운,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하면서 팔을 길게 뻗고, 한쪽 눈을 감고 있다

지운 제일 어려운 건 킥턴인데요, 스케이터들한텐 제일 먼저 마스터하는 트릭이지만요. 이렇게 가다가 

손으로 만든 동그라미를 한 쪽으로 움직이다 돌연 방향을 바꾼다.  

갑자기 휙! 자전거가 보드보다 빠르긴 한데, 방향을 바꿀 땐 보드를 못 이기죠. 자전거로 180도를 일 초 만에 바꾸긴 힘들걸요. 근데 저는, 스케이터의 발이 15분 동안 이 동그라미에서 벗어나지 않게 찍을 수 있어요. 셔빗, 알리, 킥오프처럼 위로 뛰는 기술은 리듬게임 같아요. 스케이터가 날아오를 땐 정확히 중앙에 맞춰야 해요. 힘든 기술이니까 돋보이게 보여주는 게 좋죠. 물론 변칙도 있어요. 윌리엄 스트로벡은 일부러 스케이터가 다른 기물들에 가렸다가 나타나게 찍었어요. 다음에 어떤 장애물에 뛰어넘을지 미리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 한 획을 그으려면 그런 변칙을 잘 쓸 줄 알아야죠. 하지만 전 기본기를 중요시하거든요. 툭하면 클로즈업에 색보정 떡칠하는 비디오는 싫어요. 결국 카메라 들고 찍는 일이면 영화랑 뿌리는 같다고 봐요. 오히려 제 색다른 경험이 강점이 되지 않을까요? 입학하고 나서….

기정 ‘습니다’!

지운 네?

기정 면접에선 어미를 ‘습니다’로 통일해야지. 

지운 빨리도 말씀해주시네.

기정 코칭 받기 전엔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해서.

지운 이거 코칭이에요?

기정 현지가 나보고 그랬는데. “아는 동생한테 면접 코칭 좀 해 주세요.”

지운 언니답네요, 무슨 말이든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게…. 그래서 어때요, 좀 붙을 거 같아요?

기정 (웃는다)

지운 무슨 뜻이에요?

기정 모르겠다.

지운 솔직히, 떨어질 것 같죠?

기정 얼마나 남았니?

지운 수시 두 군데가 둘 다 11월 말이에요. 정시까지 보고 있긴 한데 제가 공부를 놔서 솔직히 기대는 안 하고요. 솔직히 공부가 됐음 학교 때려치지도 않았죠. 근데 절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언니가 돈 냈어요?

기정 아니.

지운 그럼 언니가 돈 내고 돈 냈단 말 하지 말라고 했어요? 

기정 늘 하던 일이야. 학교에서도 너처럼 자퇴한 아이들 끝까지 붙잡고 달려서 대학 보냈어.

지운 그럼 현지 언니도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제자로 만난 거예요?

기정 내가 현지 학생인데?

지운 네?

기정 보드 강습 들으면서 만났어. 시니어 반.

지운 진짜요? 언니랑 십 년은 알고 지낸 사이 같던데…. 

기정 현지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서.

지운 그쵸. 스케이트보드 타실 줄은 몰랐어요. 왜 그 수업 들으신 거예요?

기정 넌 영화과에 왜 가고 싶니?

지운 재밌어서요, 소질도 있는 것 같고.

기정 나도 그래서.

지운 진짜 그게 다예요?

기정 봐라. 

지운 뭘요?

기정 네가 영화과에서 학생을 뽑아야 해. 그런데 왜 영화과에 오고 싶냐고 물어봤는데 지원자가 “재미도 있고 재능도 있어서요”라고 대답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그게 다야?” 면접에선 네가 어떤 애인지가 알고 싶은 거지, 재능이 있고 없고는 포트폴리오로 평가하고.

지운 언제부터 다시 면접 수업이 된 거예요?

기정 나랑 있는 시간 동안은 모든 얘기가 면접이랑 이어질걸. 

지운 고3 담임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기정 영화과 가고 싶은 이유, 가서 뭘 할 건지, 왜 뽑아야 하는지. 내일까지 만들어 와. 네 장점과 단점까지.

지운 내일까지요? 이거 계속 하는 거였어요?

기정 그럼 면접이 하루아침에 되겠니?

지운 근데 저 내일은 바빠요.

기정 입시보다 급해?

지운 입시 때문에 바쁜 거예요. 포트폴리오로 제출할 영상을 찍어야 돼서. 다큐멘터리요. 지금까지 찍어둔 게 많긴 한데 다 스케이트보드 필름이라서 입시에선 쓸모가 없대요. 

기정 그거 아이템 좋다. 뭐에 대한 다큐멘터리니?

지운 여기요. 징크의 역사를 담으려고요.

기정 징크?

지운 여기, 이 공원이요.

기정 이 공원에 역사가 있어?

지운 징크의 역사가 한국 스케이트보드의 역사라고 봐도 돼요. 

2장

현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서 멈추고,
기정, 서서히 무대 구석 쪽으로 멀어진다. 벤치에 앉는다. 

지운, 카메라를 들고 현지를 비춘다. 

현지 스케이터란 태생부터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사는 종족들입니다. 그래서 우린 대한민국 최고의 스팟을 ‘새마을운동기념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이 장소에 새로 부여된 세례명은 ‘징크’입니다. 추억의 장소, 만남의 장소인 이곳은 징크.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생계 유지의 수단, 즉 밥줄입니다. 특히 여기서 강습을 하는 제게는 그렇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이유만 해도 필르머에게 줄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다큐멘터리 출연료로 스케이트보드 필름 촬영료를 땜빵한 셈인데요.

지운 컷, 컷!

현지 아무 말이나 하라며?

지운 진짜로 아무 말이나 하면 어떡해! 

현지 디렉션을 제대로 해 줬어야지.

지운 어휴, 잠깐 쉬자.

현지, 지운, 펀박스에 걸터앉아 잠시 쉰다.

현지 (기정 쪽을 향해 외치며) 선생님! 우리 지운이 면접 준비는 잘 돼 가요?

기정, 엄지를 들어 보인다.

지운 저분은 오늘도 여기 나와 계시네?

현지 한 번도 못 봤어? 

지운 나는 이쪽으로 잘 안 다니니까 몰랐지. 

현지 학기 중에 아들이랑 같이 열심히 배우시더니, 방학 돼도 가끔 아들 데리고 나와서 있다 가셔. 

지운 (가리키며) 쟤야, 아들이? 되게 어리네.

현지 준호? 어. 누가 여기가 애들 노는 데냐고 뭐라고 하길래 내가 한 마디 해 줬지. 징크는 스케이터들의 놀이터고, 일곱 살이더라도 스케이터는 스케이터라고. 

지운 언니, 그거 멋있다. 영상 찍을 때 그런 얘길 좀 해 봐! 

현지 뭔 얘기?

지운 징크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놀이터다, 뭐 이런 거. 

현지 오케이. 근데 그럴 거면 쟬 직접 찍는 게 낫지 않아? 

현지, 스케이트보드 타고 구석 펀박스에 가서 앉는다.

지운, 기정에게 다가가서 기대에 찬 눈으로 기정을 바라본다.

기정 미안하지만 안 돼.

지운 되게 잠깐만 나올 거예요.

기정 준호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운 데뷔하는 게 아니라 교수님들만 보시는 영상이에요.

기정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운 그럼 선생님께서 출연해 주실 수는 있을까요?

기정 나?

지운 연기 못 하셔도 괜찮아요. 다큐멘터리라서요. 

기정 내가 나오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냥…. 

기정 선생님도 스케이터잖아요. 

기정 무슨 말을 하면 되니?

지운 그냥 징크가 왜 선생님 삶에서 필요한지, 그동안 어떤 의미였는지, 그런 얘기요.         

기정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줘.

지운 편하게 하세요. 

3장

지운 스케이트보드는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기정 박현지 강사님 때문이에요.

지운 박현지 강사님이요?

기정 처음엔 아이가 들을 만한 수업을 찾으려고 했어요. 근데 여자 보드 강사는 처음 봤어요. 시니어 반이라는 것도 처음 봤고. 스케이트보드는 남자애들 놀인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남자가 아니고 학생은 애가 아니었죠. 여기선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만하면 됐을까?

지운 컷! 감사합니다!

기정, 지운 쪽으로 까딱 묵례. 

지운, 카메라의 영상을 체크하며 퇴장한다.

현지 진짜 저 때문에 시작하신 거예요?

기정 솔직하게 말하면 실망할 거니?

현지 뭘요?

기정 사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물어봐서 대답을 만들어 놓은 거야. 내 나이에 스케이트보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고3 담임이라서, 서른 명 생기부를 다 쓰다 보니까 말 만드는 거 하나는 잘 해. 

사이. 

현지 그럼 진짜로는 왜 시작하셨어요?

기정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을 지어내는 거지.

현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짐작 가는 건 있어요.

기정 뭔데?

현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요.

기정 글쎄, 그럼 그 이유가 맞겠다.

현지 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데요?

기정 준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현지 네, 바로 아시네요? 준호를 절대로 아들이라고 안 부르시잖아요.

기정 날 엄마로 생각하지 않는 애를 함부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으니까. 

현지 무슨 사연인지 여쭤봐도 돼요?

기정 그게 애한테 좋을지 모르겠어.

현지 그럼 안 여쭤볼게요.

기정 가정위탁보호라고 아니?

현지 단어에서 느껴지는 뜻은 알겠어요. 그럼 준호가….

기정 그래, 그런 관계야, 준호랑 나랑. 올해가 지나면 보호기간이 끝나고. 스케이트보드는 그 애를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했어.

현지 아.

기정 정말 그거 하나로 알았어? 아들이라고 안 부르는 거? 아니면, 우리 사이가 서먹한 게 밖에서 봐도 티가 나니?

현지 아뇨, 그냥 엄마 아들 같아요.

기정 하긴, 이렇게 물어보면 네, 서먹한 게 완전 티나요 하고 대답 못 하지. 이제 궁금증이 풀렸니.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현지 저 입 무거워요.

기정 비밀은 아닌데, 애한테 안 좋을까봐. 

4장

지운, 노트북을 들고 등장

지운 여러분, 우리 영화 초안이 나왔습니다!

현지 벌써?

지운 한번 보실래요?

지운, 노트북에서 영상 재생한다. 

세 인물 모두 영상에 집중한다.

영상 사운드:

(대사가 스케이트보드의 긁는 소리와 교차되며)

이 장소에 새로 부여된 세례명은 ‘징크’입니다. 

대부분 제 나이에 스케이트보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선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후 힙합 음악이 계속 이어진다) ]

현지 잠깐, 잠깐.

지운, 영상을 멈춘다. 

현지 이 뒤로는 음악만 계속 나오는 거야?

지운 아니, 아니, 내가 나레이션 따로 녹음할 거야. 3분 45초까지는 음악이랑, 스케이터들 영상. 멋있는 마무리 멘트 한 마디 딱 하고 빰, 까만 화면. 

기정 그럼 영상이 4분 길이야?

지운 분량 제한 없던데요?

사이.

그래서, 마무리 멘트를 정해야 하는데….

현지 지금 마무리 멘트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기정 지운아, 영화과는 왜 가고 싶은 거니?

지운 죄송해요, 영상 편집하느라 바빠서 아직 대답을 못 만들어 왔어요. 

기정 아니, 면접용 대답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습니다’로 안 끝나도 돼. 왜 하필 영화과야?

지운 솔직하게요?

기정 그래, 뭐가 됐든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지운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요. 승산도 있는 것 같고.

기정 흠…. 영화는 좋아해?

지운 어느 정도는?

기정 스케이트보드 필름과 영화가 다른 건 알고 있지?

지운 물론이죠. 하지만 스케이트보드 필름의 미학을 메이저로 끌어올리고 싶어서….       

기정 그 미학이 뭔데?

지운 날것의 질감이죠. 잃어버린 시대의 향수이기도 하고요. 화면비는 레트로하게 사 대 삼. 이젠 단종된 VX 카메라, 영화에선 거의 쓸 일 없는 어안렌즈가 기본적인 세팅이에요. 그럼 스케이터를 강조하면서 주변 환경도 많이 보여줄 수/있거든요.

기정 그만. 좋아, 좋은데, 그런 거 다 못 해도 영화를 찍고 싶어? 영화과 교수님이 어안렌즈며 사 대 삼 화면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해. 그래도 영화가 찍고 싶어?

사이. 

지운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겠죠. 완성품인 채로 대학에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기정 이 영상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냐, 나는 네가 영화과 가서 원하는 길이 아니라 힘들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 광고 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지운 광고는 수능 성적을 봐요. 평생 광고를 찍고 싶지도 않고요. 

기정 왜?

지운 저는…. (짧은 사이) 제 작품을 갖고 싶어요. 

기정 왜?

지운 안 그러면 이게 다 무의미해지니까.

5장

현지의 전화벨이 울린다.

지운, 노트북으로 영상을 편집한다. 간헐적으로 재생되는 영상 소리들.

기정, 아이를 보듯 자세 낮춘다.

지운 아, 아, 마이크 체크. 전화 한 통에 원래 징크에 대한 헌사로 기획되었던 이 영상은 갑자기 추도사가 되었습니다.

현지 스케이트파크 철거요? 아뇨, 그런 건 전달받은 적이….

기정 준호야.

현지 아, 네, 그런데 혹시…. 징크가 철거되지 않으면 하반기 보드 수업 계약 연장이 가능한지…네? 아, 징크요…. 새마을운동기념공원이요. 네, 아, 아…. 네. 아니에요, 어려운 거 이해합니다, 네, 네, 네…. 

지운 지방선거를 앞둔 구청장의 변덕일까요? 공식적으로는 상의 탈의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풍기문란 행위와 야간 소음이 문제시되었습니다. 

기정 준호야, 집에서 보드 타면 아래층에서 올라와.

지운 우리는 징크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어….  

현지 아, 네, 그런데 혹시…. 네, 네, 아뇨, 확답해 주실 필요는 없고요, 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좋은 하루 되세요.

현지, 전화 끊고, 정적.

지운 아! 마무리 멘트가 생각났어요. 아, 아, 마이크 체크. (짧은 사이) 우리는 징크를 지켜야만 합니다. 징크는, 얼마든지 넘어져도 괜찮은 곳이니까요. 

녹음 종료음, 지운이 스페이스 바를 경쾌하게 누르면 힙합 음악이 시작된다.

6장

힙합 음악, 경쾌하게 주고받는 대화에 반주처럼 계속된다. 

현지 빨리 움직여야 승산이 있어.

지운 뭘 하면 돼?

현지 일단은, 탄원서.

기정 새마을운동기념공원 징크 철거를 반대합니다?

지운 제목으로는 좀 슴슴한데요.

현지 이건 어때요? 스케이터는 구청장의 독단적 결단을 규탄한다.

지운 독단 결단 규탄, 라임이 맞네. 

기정 설득을 하려는 거지 선동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

현지 뭘 하려고 하든 강렬해야 돼요. 부정을 긍정으로 뒤집으려면. 

기정 구청장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어.

지운 간결하게 가요, 이제는 스케이터들이 일어나야 할 때.

현지 좋다. 서명운동은 어때요?

기정 4207명.

지운 오, 꽤 되네요.

기정 징크 철거에 찬성하는 쪽이. 

지운 새마을 정신 때문에?

기정 소음 때문에. 그리고 상의 탈의한 스케이터들이랑.

현지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기정 난 있어. 

지운 나도. 

기정 하지만 웃통 벗은 일부 때문에 스케이트보드 타는 걸 금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현지 그래서, 우리 쪽에서 받은 서명은 얼마나 돼요?

기정 62명. 

힙합 음악, 멈춘다. 사이.

현지 괜찮아, 십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우리가 이겼어.

지운 어떻게?

현지 물고 늘어지기. 솔직히 말하면 공무원 괴롭히기.

기정 이번에도 먹힐까?

현지 이번엔 성숙한 대화화 소통으로 해결하려고요. 구청에서 간담회를 해요, 거기서 뒤집을 수 있을 거예요. 

기정 간담회라. 언제지?

지운 사흘 뒤요. 언니랑 다른 스케이터 두 명이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어요.

기정 무슨 얘길 할 생각이고?

현지 제 생각은 이래요. 스케이터가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시민임을 강조할 거예요. 어디서 뚝 떨어진 동네 양아치가 아니라요. 아들과 함께 보드를 타는 엄마 얘기 해도 돼요?

기정 좋을 대로. 

현지 학교 밖 청소년이 징크에서 여가를 즐기고 사람을 만나며 고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도 괜찮아?

지운 그럴싸한데!

현지 고로 스케이터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다, 이런 결론으로 마무리지을 생각이에요.     

기정 일이 잘 안 풀려도 상심하지는 말고.

현지 잘 될 거예요. 

현지, 퇴장한다. 

지운 잘 될까요?

기정 솔직히 잘 안 될 것 같아. 사천 명 대 육십 명인데. 공무원 달달 볶으면서 진상짓 하기도 싫고.

지운 간담회에서 잘 되지 않을까요? 현지 언니 말 잘 해요.

기정 간담회 같은 건, 일을 다 결정해 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거야.

지운 그런가요…. 준호가 많이 실망하겠어요. 여기 아니면 어디서 보드 타. 근데 오늘은 준호 안 보이네요?

기정 영어학원 가는 날이라.

지운 그럼 현지 언니가 이 일 때문에 불러서 혼자 오신 거예요?

기정 갑자기 부르길래 중요한 일인가보다 했지. 그리고 사실 현지한테는 말 안 했는데….    

지운 뭘요?

기정 준호는 아직 어려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밖에 못 해서, 저런 무서운 기물들이 굳이 필요 없어. 그래서 어떻게 결정이 나든 난 전면 금지만 피하면 괜찮아.

지운 그럼 딴 데서 타도 되잖아요.

기정 애들은 참 모르겠어, 징크가 아니면 싫대. 

지운 그래도 준호가 클 거 아니에요! 현지 언니도 열두 살 때 킥플립을 했는데.         

기정 열두 살…. 그때까지 준호가…. 

지운 네?

기정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할까?

7장

현지, 스케이트보드 타고 등장

현지 다들 여기 있었네!

지운 언니!

기정 간담회에서 오는 건가?

현지 네! 

지운 뭐야, 왜 기분이 좋아 보여? 설마?

현지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지?

기정 정말? 일이 이렇게 잘 풀린다고?

현지 결론만 간단히 말할게. 모든 기물을 유지하기로 했어. 

지운 진짜?

현지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열 시까지 시간만 잘 지키면 된대. 

지운 구청에서 무슨 약을 판 거야, 언니?

현지 부끄럽지만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었고요, 같이 갔던 스케이터님께서 전략을 잘 짜 오셨습니다.

지운 그 문신한 오빠?

현지 문신한 스케이터가 한둘이어야지. 단!

기정 단?

현지 상의 탈의가 한 번이라도 더 목격되면 행사라도 열리지 않는 이상 다시는 개방하지 않겠대.

지운 이렇게까지 했는데 누가 웃통 벗고 타겠어.

기정 잠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지운 왜요?

기정 어떻게 징크를 개방할 수 있지? 실외 공원인데? 문이 없잖아.

현지 아! 그 얘길 먼저 했어야 했는데. 펜스가 생길 거예요. 

지운 어, 진짜?

현지 회원제로 운영하기로 합의했어요. 평소에는 잠가 두고 동호회원 사이에서만 비밀번호를 공유하기로. 근데 걱정 마세요, 모임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사이.

기정 나는 이렇게 되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아. 여기서 우리가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탈 수 있었던 건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이야. 일단 담벼락이 생기면 누가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나누기 시작할걸.

지운 다 같은 스케이터들끼리, 안 그래요.

기정 돈 내고 쓰는 시설에서도, 숙련자들이 주행에 방해만 되는 시민들을 다 같은 스케이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지 전 최선을 다했어요.

기정 네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분명 징크가 모두를 위한 놀이터라고 했잖아.         

현지 저는 모든 스케이터를 위한 놀이터라고 했어요.

기정 울타리가 생기면, 그 말의 의미는 달라져.

현지 그렇게 불만이면 선생님께서 좀 노력해 보지 그러셨어요. 아무것도 안 해 놓고.       

기정 널 믿어서 아무것도 안 한 거야, 네가 날 대변해 줄 줄 알고.

현지 제가 왜 선생님을 대변해요? 전 스케이터를 대변해요.

기정 그래, 봐. 벌써 난 스케이터가 아니잖아. 

기정, 퇴장. 

8장

지운 언니, 그 말은 하면 안 됐어.

현지 무슨 말?

지운 선생님께서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 그 말 때문에 선생님이 너무 열심히 뭐라도 하고 계시잖아.

현지 그래, 징크에 울타리를 치느니 차라리 철거하려고. 민원이 300통 넘게 들어왔대.       

지운 스케이터 때문에 시민이 위협받는다고. 

현지 스케이터는 시민이 아닌가.

지운 민원을 보낸 건 대부분 학부모고.

현지 교사로서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지운 공무원 달달 볶기 싫다더니.

현지 사실 공공장소에 펜스 치고 입장료 받는 게 정직한 행동은 아닌 것 같긴 해.        

지운 그래도 우리 아들이 못 타면 아무도 못 타, 이건 아니지.

현지 준호는 선생님 아들이 아냐.

지운 그런 것 같더라.

(기정, 등장)

현지 준호가 진짜로 스케이트보드 타는 걸 좋아하긴 해요?

기정 너보단 내가 걔에 대해 잘 알아.

현지 준호가 스케이트보드 타는 걸 더 많이 본 건 강사인 저라서요.

기정 준호가 어땠는데?

현지 동작 몇 갤 알려 주고 자유롭게 타 보라고 시간을 주면, 또래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데 준호만 화단에 앉아 있었어요. 혼자서. 그게 다예요.

지운 혼자 오셨네요.

기정 준호는 피씨방에 있어.

지운 스케이트보드는 질렸대요?

기정 준호는 오버워치를 좋아해. 아무도 자길 몰라서. 누가 채팅으로 부모님 안부를 물어와도 괜찮대. 어차피 자길 모르고 하는 말이라서.

현지 춥지 않아요?

기정 그래, 12월이니까.

현지 작별이 다가오네요.

기정 다가온 정도가 아니지. 내일이면 보호가 끝나. 여긴 그래서 온 거야. 

현지 추억을 되새기려고?

기정 추억, 그래.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그 애한테 보드를 가르쳤나 보다.

지운 준호는 왜 보드를 좋아했을까요?

기정 나랑 같이 밖에 나오는 걸 숙제로 생각했대. 바깥에서 제일 또래가 안 다니는 곳이 여기였고.

사이.

지운아, 입시는 어떻게 돼 가니?

지운 수시는 망했고, 정시는 기대 안 하고.

기정 포트폴리오 보고 교수님들이 뭐라셔?

지운 독특한데 너무 짧다, 끝.

기정 대체 영화과는 왜 가고 싶었던 거니?

지운 저한테는 울타리가 필요했으니까요.

기정 일 년 더 할 거야?

지운 몰라요. 준호랑 같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기정 마지막 날이니까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피씨방 간다고 했어. 우리 가족들이랑 보내는 게 아니라. 걔 가족은 거기 있나 보지. 디지털 세상 속에.

기정, 퇴장.

현지 쉿!

지운 왜?

현지 경비 아저씨 지나가서.

기정 뭐 잘못했니?

현지 여기서 스케이트보드 타면 이제 잡아요. 법적 구속력은 없어도, 그냥 쫓아내요.       

지운 다 철거했는데 아직도 여기서 보드가 타고 싶어?

현지 다 철거했는데 저건 기물인지 몰랐나 봐. 계단 난간. 지운아, 나 좀 찍어 줘.       

지운 나 이제 에이에스도 안 되는 VX 카메라 다 팔았어, 그 돈으로도 괜찮은 데쎄랄 사려면 모자라서 알바해서 보태야 돼. 다음 포트폴리오는 제대로 만들려고.

현지 이제 나만 스케이터야?

지운 알았어, 알았어. 찍어 줄게. 대신 폰카로.

현지 그건 스케이트보드 필름이 아니잖아.

지운 언니가 스케이턴데 뭐가 문제야. 한 번에 가야 돼. 

현지, 지운. 영상 찍을 준비하고, 

지운 고고!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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