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九重天下流浪奇談 1

그 날은 오전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밤새도록 창 밖 고양이 울음에 시달리다 눈꼬리에 커다란 눈곱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아양은 사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른 발정기가 왔든, 뒤늦은 발정기가 왔든, 영역 싸움이 났든 뭐 고양이가 좀 울 수도 있지. 사지를 쥐어짜 기지개를 켠 그녀는 부스스해진 머리만 한 번 긁적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처 다 해소하지 못한 피로가 그녀를 침대로 잡아 끌었지만, 이는 뜨거운 물에 몸 한 번 풀고 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게 욕탕으로 내려가서, 여관에서 준비해 뒀던 온수가 하필 그녀의 앞에서 똑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양은 연신 굽실거리는 점원에게 손이나 한 번 저어 보이고 말았다. 물이야 다시 받으면 그만인데,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죄 진 것처럼 구는지. 비싼 덴 다 좋은데 이게 문제였다. 점원들이 영 뻔뻔한 데가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여관의 시설 고장으로 온수 보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점원은 이제 거의 죽으려고 했다─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목욕이야 공중탕에 가도 되는 것이고, 사실 피로를 푸는 덴 목욕보다 식사가 더 효과적이거든.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부푼 가슴을 안고 주문한 오리 구이가 닭백숙으로 바뀌어 나온 것을 보고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닭도 먹고 오리도 먹으면 되지 뭐.

그렇게 닭백숙과 죽순 무침과 만두 세 그릇과 고기 국수 두 그릇, 계란 볶음밥 다섯 그릇, 고추 잡채와 돼지고기 덮밥의 산을 넘어 겨우겨우 당초의 목적(오리 구이)과 조우했을 때도, 하늘이 저를 배불리려는 속셈이려니 넘겼을 따름이다. 직원의 실수라고 하지만 음식은 맛있었고 상한 것도 없었고 배 부르고 등 따스우니 좋은 게 좋은 거지.

이후 그녀 혼자 14인분을 해치웠다는 (그래서 일행의 예산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양이 가계부를 가져다가 그녀의 등짝을 벗겨낼 듯이 굴었을 때도 그녀는…….

흠.

아니 뭐, 생각해보면 이건 늘 있는 일인가.

잠시 고민하던 아양은 오래지 않아 그 다음 단계로 생각을 옮겼다. 그러니까, 사양의 뒤를 이어 내려온 미오가 그녀 혼자 14인분을 해치웠다는 사실을 안 뒤 ‘공동 예산이니 천녀님만큼 저도 써야겠다’며 때는 이 때다 그녀의 지갑을 노렸을 때….

음. 이것도 늘 있는─건 아니지만 때에 따라 마땅히 있을 법한─일이긴 하다.

…하여간 그렇게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사소하고, 사소하고, 사소하고, 마음에 담아 두자니 구질구질하고, 그렇지만 짜증은 나고, 굳이 손을 쓰기엔 귀찮은 일들. 하지만, 그래도 아양은 꿋꿋했다. 사명신이 돌아버린 게 아닌 이상 그녀의 앞날에 불행이란 단어가 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그녀의 자신감은 어느 정도 타당한 데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아양이 그녀의 ‘액운’을 확신한 것은 그 날 오후 있었던 한 사건 때문이었다.

여행길 끼니거리를 구입하기 위해 들렀던 시장이 사건의 배경이었다. 여관을 떠나기 전 가장 먼저 식량 수레를 점검하던 아양은, 그들의 식량이 4분의 1이나 줄어 있는 천인공노할 상황과 마주하고 말았다. 그들이 수레 가득 새 식량을 채웠던 게 고작 아흐레 전의 일이건만 또 다시 재충전의 시간이 온 것이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야 고작 4분의 1을 가지고 뭘 그리 다급하게 구느냐 할 수도 있겠으나, 아양은 워낙 많이 먹고, 많이 먹고, 많이 먹는 데다 일행 사이에는 어린아이도 끼어 있었다. 아이들은 결코 굶어선 안 되고, 때마다 달고 말랑한 간식거리를 먹어야 한다는 게 아양의 철칙이거늘 이 상태론 간식거리는커녕 당장 이틀 후의 끼니도 간당간당하게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사양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행길 도중 식량이 떨어져 곤혹을 치루는 것보다야, 처음부터 두둑이 자루를 채워놓고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들이라면 도적질을 당할 염려도 없으니 조금 통 크게 군다고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최소한 아이의 즐거운 여행길을 책임질 당과 만큼은 확보해야지, 암.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장터의 초입, 아양은 웬 아낙네를 둘러싸고 있는 건달 떼와 마주쳤다. 싸구려 가죽옷을 두른 장정 열댓이 여자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건달 무리는 여자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고, 여자는 그런 사내들을 뿌리치며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이 건달들이 꽤나 덩치도 있고, 칼도 차고 있어서인지 장터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힐끔거리며 피해 다닐 뿐 누구 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제 막 장터에 들어선,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 없는 아양을 빼고는.

소란을 발견한 아양의 눈빛이 번쩍 튀며 이채를 발했다. 본디 그녀는 싸움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고, 때로는 직접 온갖 분쟁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였으며, 그녀 스스로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낀 일이라면 더더욱 열성적인 자세로 뛰어들었다. 매번 그래왔으니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속계의 소란에 경솔히 끼지 않는다’라는 팔선수칙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미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 후였다.

사양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멈추려 했으나 부나방 같은 아양의 본능이 더 빨랐다. 도움닫기도 없이 달려든 그녀가 순식간에 건달 하나의 뒷덜미를 잡아 지붕 높이로 던져 올렸다. 창졸간에 변을 당한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날았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난리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고 하늘을 보았다.

“뭐, 뭐야!”

여자를 둘러싸고 있던 건달패가 씩씩대며 아양을 향해 돌아섰다. 개중에는 돌아서다 말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동료를 보고─히죽 웃은 아양이 그를 받아 땅 위로 곱게 눕혀주었다─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자도 있었다. 아양은 놀라거나 화가 나거나, 겁에 질리거나 가지각색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들을 휘 훑어 보았다. 그너가 헤죽헤죽 웃는 얼굴로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개중 가장 덩치가 큰─아마도 건달패의 우두머리였겠지─자가 앞으로 나섰고….

그 후로는 뭐, 예정된 난장판이었다.

고요하던 (?) 시장 거리는 금세 아양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은 자, 발로 차인 자, 머리채를 쥐여 빙빙 돌려진 자, 바지가 벗겨진 자, 눈 깜짝할 새 맨발이 된 자, 말 못할 고통에 고간을 움켜쥔 채 기절한 자, 가게와 가게 사이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자 … 등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양은 그녀가 손수 만들어낸 아수라장을 뿌듯하게 둘러보다가, 일어날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손을 탁탁 털었다. 이후 다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야에 일련의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던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활짝 웃은 아양이 당당한 걸음으로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리고….

“악! 이건 진짜 말도 안 되지!”

…서른일곱 번째.

“시끄러워요, 쫌!”

본인의 무게, 위치는 생각 않고 발을 굴러대니 그 때마다 마차가 요동쳤다. 사양은 아무데나 뒹굴 거리는 아양의 등짝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후려갈겼다. 그렇잖아도 빠듯한 마부석이 아양의 몸부림 덕에 절반은 더 좁게 느껴졌다.

“인정 못해! 나는 이거 인정 못한다고!”

지가 인정 못하면 어쩔 거야. 입속말로 빈정빈정 호박씨를 깐 사양이 아양의 손에서 고삐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내내 의자에 엎어져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양의 등판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걸 확 걷어차, 말아. 원체 튼튼한 사람이니 마차에서 떨어졌다고 죽지야 않겠지만, 떨군 다음 징징댈 걸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부글부글 끓는 사양의 속도 모르고, 머리를 쥐어 뜯던 아양이 버럭 외쳤다.

“내 임자 판정기는 틀린 적이 없단 말이야!”

“자랑이다, 인간아.”

…그러니까 문제는 이것이었다. 아양이 건달패들을 냅다 집어 던지고 구출한 여성이 사실 (?) 유부녀였던 것이다. 희희낙락 미소를 짓고 다가갔다가, 여자의 남편이란 사람을 소개받고 굳어버린 아양의 모습이란!

사양은 분노 속에서도 잔잔히 올라오는 비웃음을 막지 않았다. 큭, 마차 위와 마차 안에서 동시에 들려온 웃음소리에 아양이 도끼눈을 하며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언 놈이야! 빽 소리 지르는 그녀를 향해, 마차 창문을 통해 빠끔 고개를 내민 미오가 이죽거렸다.

“갈 때가 된 거라니까요.”

“…시끄러.”

“유산은 제 앞으로 달아주세요.”

“됐네요! 율여한테 상속해서 사회에 환원할 거거든!”

“에이… 아율 도련님은 원래도 돈이 많잖아요. 저 같은 불우이웃을 도와야 진정한 사회환원이지.”

진짜 말은 잘 했다. 유들유들 돌아가는 혓바닥을 눈이 빠지게 노려보던 아양이 흥,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유산을 남길 바엔 내가 영생을 하고 말지.”

“아니 상신까지 되신 분이 뭐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내 참. 그냥 깔끔하게 때를 인정하고….”

“야!”

“꺅!”

울컥한 아양이 냅다 호리병을 휘둘렀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퍽 매섭다. 종전의 건달패를 후릴 때보다도 배는 더 매서운 서슬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맞아줄 미오도 아니었지만.

아양의 공격을 피해 목을 움츠린 미오가 잽싸게 마차 안으로 숨어들었다. 귀신처럼 치고 빠지는 것이 동화 속 박쥐새끼의 모습과 똑 닮았다. 아양이 성을 내며 미오를 따라 마차에 거꾸로 매달렸다. 쾅, 쾅, 호리병이 벽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호리병을 피해 열심히 도망 다니던 미오가 요란스레 외쳤다.

“아이고! 천녀가 사람 때린다!”

“맞지도 않았으면서 엄살이야! 일루 와, 안 와?! 안 와?!”

“아, 쫌! 가만히 있으라고!”

“악!”

두 사람의 난리에 마차가 덜컹덜컹, 제 멋대로 튀었다. 결국 참다 못한 사양이 발길질을 했다. 궁둥이를 채인 아양이 휘청거리다 마부석 난간을 붙잡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허공에 거꾸로 들린 다리를 몇 번 휘적이던 그녀가, 용케 균형을 잡으며 징징댔다.

“나 진짜 떨어질 뻔 했어!”

“떨어지라고 찼으니까!”

“너무해!”

“니가 더 너무하시네요!”

가만 있으라고 몇 번을 말하냐, 몇 번을!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사양의 기세에 그제야 찔끔한 아양이 머쓱한 얼굴을 하고 바로 앉았다. 도무지 얌전할 줄 모르는 그녀의 성정으로는, 장담컨대, 한 주향도 못 갈 평화였지마는.

씩씩대며 숨을 가다듬은 사양이 고삐를 세게 휘둘렀다. 빨리 노숙할 데를 찾아 마차를 멈추든가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덕이고 나발이고 화병이 나 먼저 죽게 생겼다. 매서운 채찍질에 엉덩이를 맞은 말들이 각기 투레질을 하며 속도를 더했다.

그렇게, 지축을 울리는 마차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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