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함부로 애틋하게 PR.

라케아니아 남부에서 손꼽히는 명문 카르마의 수장 에두마 카르마는,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엉덩이가 가볍고 행실이 가뿐한 자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애인 편력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지조도 절제도 없이 방자하다는데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고자가 아닌 성인이라면 한 번쯤 에두마의 침대를 보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아니었다. 수백 년 간 이어져 온 카르마의 ‘전통’이 아니었더라면 그 유서 깊은 명문가의 권속들은 지금쯤 삼백이 넘는 안주인을 모시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에두마 카르마는 천하의 카르마였고, 남부에서 가장 고루하고 깐깐하며 융통성 없다는 카르마의 규율에 따라 대다수의 애인들은 그저 하룻밤 침대 상대인 채로 에두마를 지나쳤다. 해서 시간이 흘러 에두마의 부인으로 가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단 여섯뿐이었다. 그들 모두가 카르마의 기준과 계명에 따라 엄격히 선발된, 미색이 뛰어나고 가문이 좋고 능력 있는 여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부인들을 통해, 에두마는 자그마치 열다섯의 자식을 얻어 카르마의 가계에 올렸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하나같이 총명한데다 재능이 있어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뒤에는 또 하나 둘 남부의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개중 대표 격으로는 셋째 부인 소생이면서도 뛰어난 수완을 가져 카르마의 차기 가주 자리를 거머쥔 장남 로단 카르마가 있었고, 일찍이 중앙까지 이름을 알린 천재 시브온 카르마나, 주술사의 재능만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디산, 디손 쌍둥이 형제가 그 뒤를 이었다. 다른 형제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모두들 어디에선가는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카르마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승승장구하며 콧대를 높였다. 

  

하지만 굳이 또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자를 대라면, 알만 한 사람들이 이르는 것은 언제나 항상 ‘에스반 카르마’의 이름이었다. 로단도, 시브온도, 아나, 아야, 디산, 디손도 아닌 에스반 카르마.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뽐냈던 카르마의 후계들 중에서, 으뜸으로 쳐지는 것이 변변한 마법 하나 쓸 줄 모르는 ‘평인’이라는 사실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야 분명 의아한 일이었다. 허나 카르마 내부에서도, 남부의 그 어느 명문가에서도, 에스반 카르마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이의를 표하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에스반 카르마가 세상에 출사한 방식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하기사 출사표를 차치하고서도, 에스반 카르마는 그 자체로 이미 남부의 유명인사였다. 우선 부친의 장점만을 꼭 빼다 박은 외모가 명성의 첫 번째로, 남부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 굵고 강직한 선과 사막인 특유의 짙고 건강한 구릿빛 피부, 또렷하다 못해 칼로 새긴 듯한 이목구비, 목탄처럼 짙은 곱슬머리에 더하여 카르마가 숭배하는 호박색 눈동자까지 가진 그는 단언컨대 카르마의 우두머리로 인정받기 위한 모든 신체적 조건을 타고난 자였다. 에스반 카르마가 세상에 났을 적 가문의 원로들이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입을 모았던 이유가 따로 있지 않았다. 남부의 뭇 명문가가 그러하듯 카르마 또한 주술사의 혈족에 근간을 둔 바라, 어린 소년의 짙은 황금색은 그가 말 못 하는 갓난아이이던 시절에도 동경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소년기, 남부 제일의 아카데미를 재학 내내 수석만 거듭하며 졸업한 그의 성적도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교과 성적은 물론이요 각종 경연 경시 대회의 수상을 비롯하여 (말로는) 소소한 취미라 하는 체술, 사격, 승마 대회의 수상 경력과 자격증까지. 성인식 이후 에스반이 분가해 나간 사택 시타델의 지하 창고에는 그가 학창 시절 받았던 트로피와 상장들이 산처럼 쌓여 먼지걸이가 되었다. 그 중 주인의 사무실에 전시될 영광을 얻은 것은 고르고 골라 엄선된 백 여 개의 상장과 오십 개의 트로피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러나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만약 그랬더라면, 에스반 카르마는 제국 남부의 그렇고 그런 인재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도리어 카르마의 이름을 바래게 하노라 질책 받았을지도 몰랐다. 오래된 집안들이란 늘 자식에게 더욱 큰 영광을 요구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렇기에 에스반 카르마의 이름이 유명해진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좋은 성적이나 높은 시상대 따위의 정형화된 기록이 아니라. 그것은 에스반이 그토록 완벽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카르마의 수장 후보에서 제외된 이유와도 맥락을 같이 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평범한 이유도 아니었지만. 

  

남방 카르마의 차남 에스반 카르마는, 그 성미가 ‘아주’ 거칠기로 유명했다. 

  

그것도 몹시, 

굉장히, 

너무나도, 

지나치게─ 라는 수식어까지 달아서. 

  

그를 과연 ‘거칠다’는 말로 다할 수 있을런가, 에스반 카르마를 한 번 대해본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혀를 차며 고개만 저었다. 개중에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자리에 있지 않겠다 치를 떠는 이들과, 에스반(Ishpan)의 ‘I’ 자만 들려도 경기를 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세상에 성질 더러운 이가 드물지는 않지만, 그만치 성격 나쁜 이는 억만금을 줘도 온 대륙을 뒤져도 도저히 못 찾겠다 할 만큼. 

  

혈족의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이야 카르마의 태생 자체가 본디 야수에게서 비롯됐다 하니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주이나, 살육과 파괴를 즐기는 행태까지 수용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르마는 강고한 하늘의 제국, 라케아니아의 명문가였다. 정의(正義)국가로 불리는 제국에서 명분 없이 흐른 피는 결코 떠들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이 단순 흥미에 기반하였다면 더더욱. 그 아비 에두마의 편력이야 그만의 가벼움으로 치부되면 그만이라지만, 상대를 가리지 않는 잔인함은 경우가 달랐다. 때문에 에두마 카르마는 그의 차남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즉시 가문의 그늘 아래로 그 이름을 감추었다. 

  

그렇다 한들 그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성미나 형질까지 바뀌는 것은 아닌지라, 에스반 카르마는 가문 안으로 족적을 감춘 후에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자신에게 주어지는 위치와 그 위치의 한계를 알고 나서는 경계만 넘지 않다 뿐이지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인 태도로 그 속에 감추어진 본능을 끄집어내 휘둘러 댔다. 에스반 카르마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날 또한 카르마의 오랜 정적이 단말마에 세상을 떠났던 바로 그 날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해, 에스반의 그런 성미는 그가 카르마 가문의 처리반으로 이름을 날리는 데 더없이 적절한 ‘재능’이 되었다. 특히나 그의 형 로단 카르마가 아직 집안의 후계자로는 미숙하다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을 때, 에스반은 로단의 동업자이자 카르마의 총탄으로서 가문의 치부를 땅에 묻고 원적을 처리하는 처리반의 수장이 되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게 완벽한 능력을 보였다. 본래는 남부의 그저 그런, 조금 오래된 명문가에 지나지 않았던 카르마가 근 10년 만에 남부 제일의 명문이라 불리게 된 것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에스반 그만의 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다. 에두마 카르마가 노쇠하여 그만 몸져누운 이후, 장남 로단 카르마가 집안의 지휘봉을 옮겨 받은 것을 보고 이제 에스반 카르마가 일어서리라고 생각했다. 성미 나쁘고 누군가 제 위에 있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는 카르마의 차남이, 유약하고 평범한 형님을 보아 넘길 리가 없지 않은가. 남부의 지하에 뿌려졌던 피를 기억하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로단 카르마와 척을 지지 않고 에스반 카르마에게 줄을 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실로 쓸모 없는 고민이었다. 정말 쓸데없었다. 

  

그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에스반 카르마는, 제 형에게 역심을 품은 적일랑 남부 땅의 모든 황금에 맹세코 단 한 순간도 없었으니까. 

  

놀랍게도 그랬다. 에스반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제 형제들을 그다지도 아꼈으며 그가 속해 있는 카르마의 이름도 끔찍하게 아꼈다. 그 애정이 순수한 혈육의 정에서 파생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뿌리와 그 소유물에 대한 탐욕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어쨌든 에스반이 그 형제와 어머니, 집안을 아끼는 것은 카르마의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에스반은 제가 아끼는 것이 타인에게도 대우 받기를 원했다. 

  

다시 말해, 에스반 카르마는 누구든 카르마 가문을 우러르며 존경하기를 바랐다. 그는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이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형의 자리를 탐하는 대신 카르마의 처리반 수장이자 차기 가주의 남동생으로서 카르마와 척을 지고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도륙 내었다. 그들이 다시는 카르마를 내려다 볼 수 없게끔. 그로 인하야 그 외의 다른 자들도 카르마를 두려워하게끔. 실로 참혹하고 잔인하게. 

  

그리하여 에스반 카르마가 처리반의 수장을 맡은 이래, 에두마 카르마가 병석에 앓아 누운 이래, 카르마 가문을 향한 시선에는 항시 형태 없는 공포심이 뒤따랐다. 더 정확히는, 에스반 카르마와 그가 속한 것들에 대한 공포였다. 에스반은 깔끔한 일 처리의 명사였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더 열심이었다. 때문에 그가 지난 자리에는 언제나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이니셜이 남았다. 에스반 카르마. 작위 귀족도, 장남도, 후계자도 아닌 이름이 제국 남부의 유명세를 차지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그 유명하신 카르마의 차남께서는 빈 탄창에 탄환을 채워 넣고 있었다. 한 알. 그리고 또 한 알. 

  

리볼버의 탄창이 명쾌한 소리를 내며 맞물리고 돌아갈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얼굴이 물감을 탄 것처럼 희게 질렸다. 반면 에스반의 얼굴에는 상쾌하다 말 할 정도의 미소가 말갛게 떠올라 있었다. 그 뒤로는 에스반의 명을 받들어 ‘적’을 학살하듯 죄 짓밟아 터뜨린 오말이 부복했다. 

  

무거운 침묵 속 에스반이 마지막 탄창을 채웠다. 짤깍, 하는 소리가 여덟 번째로 방을 울린 순간 오말이 입을 열었다. 

  

“주군.” 

“시킨 일은?” 

“물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누가? 내가?” 

  

미소로 가득 차 있던 에스반의 얼굴이 순식간에 메말랐다. 가뭄 끝의 땅처럼 바삭해진 표정에는 미소의 잔뿌리도 남아있질 않았다. 다만 검은 총구가 오말의 미간을 향해 정확히 겨누어졌다. 날카롭게 얼어붙은 얼굴의 에스반이 부복한 부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살기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주군.” 

“데만.” 

  

파리해진 오말의 앞에 또 다른 사내가 나섰다. 에스반의 첫 부하, 데만이었다. 또 하나 예상치 않았던 상황에 짙게 다듬어진 에스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거친 사내는 자신의 불쾌한 심기를 결코 감추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을이었던 적 없는 존재란 늘 그런 것이었다. 

  

“감히 내게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지.” 

“…….” 

“어디 한 번 지껄여 봐라. 오랜 부하의 유언 정도야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오말은 쓸 만한 패입니다. 지금 잃기에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데만은 에스반이 처음 처리반에 임명되었을 무렵부터 함께 했으므로 그 주인의 성정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명석했다. 에스반에게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은 ‘나는 이제 그만 살고 싶고 가는 길도 최대한 괴로워 보고 싶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차라리 조금 오만하더라도 스스로의 효용을 주장함이 나았다. 에스반은 본디가 욕심이 많은 자였고 인재라면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밑에 두고 싶어 했다. 능력 있는 자라면 조금의 흠집 정도는 묵과해주기도 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데만의 발언권 자체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말의 미간을 향했던 총이 거두어졌다. 에스반의 짙은 인상 위로 미비한 짜증이 서렸다. 

  

“데만.” 

“예, 주군.” 

“두 번은 없다.” 

“예.”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오말의 다리에 총탄이 박혔다. 생살이 찢어지며 타오르는 감각에 오말이 이를 악물었다. 데만 만큼은 아니나 오말 또한 처리반에서 지낸 지가 수년이었다. 에스반 카르마의 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숨소리라도 내는 순간에는 에스반이 얘기했던 ‘두 번’의 때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었다. 

  

등 뒤에서 대기하던 가담과 그나스가 오말의 양팔을 잡고 끌어냈다. 오말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끝내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단단한 강철 문만 끼익, 거친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또 조용히 닫혔을 뿐이다. 

  

문이 닫힌 이후에도—사람이 조금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총기 특유의 화약 냄새와 양탄자의 핏자국만이 옅게 남아 방금 전의 상황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찰칵, 한 칸이 비어버린 탄창을 가볍게 굴린 에스반의 시선이 다시 그의 맞은편을 향했다. 그의 입가로는 처음과 같이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에스반이 말했다. 

  

“시답잖은 것도 모두 처리했으니, 우리도 거래를 시작해볼까.” 

“이, 이, 은혜도 모르는 졸부 놈들이! 내가 네놈들을 어찌……!” 

“시끄럽군.” 

  

총성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총을 쏜 장본인이야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연기 모락모락 나는 총을 이리저리 흔들어댈 따름이었다. ─ “어디 이런 싸구려를,” ─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던 에스반이 이내 표정을 풀고 연기가 사그라진 총구를 다시 상대방에게 겨누었다. 한결같이 웃는 얼굴을 하고. 

  

“다시 말해 보지 그래.” 

“아니, 아니…….” 

“카르마가 무어라고?” 

“자,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카르마를 향한 무례는 사과하지. 사과하겠습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무엇이건 줄 수 있네. 광산을 바라나? 이, 이번에 새로 발견 된 광맥이 있다네. 아니면 땅을? 그도 아니라면 회사를……?” 

“오.” 

  

낮은 목소리에 흥미가 서렸다. 그러나 결코 좋은 의미의 흥미는 아니었다. 부복해 있던 데만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주군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일의 끝이 좋지 않았다. 

  

“사실 카르마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 그럼……?” 

“물론 내 귀애하는 형제들이 거기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다시금 총구가 불을 뿜었다. 처음에는 다리, 그 다음에는 어깨. 에스반의 총알은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훅, 총구의 연기를 입으로 불어낸 에스반이 시뻘겋게 물든 고라를 보며 환히 웃었다. 

  

“지독하게 운이 없는데, 지부장. 그동안 어찌 회사를 꾸리셨나.” 

  

퍽도 다정한 목소리. 그 말에 화답하듯 붉고 탁한 것이 울컥 쏟아졌다. 돌바닥 위로 주륵주륵 흐르는 것을 보며 사내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지저분하게.” 

  

에스반이 끌끌 혀를 차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스보가 고라의 어깨를 짚어 바로 했다. 바닥을 흐르던 피가 양탄자에 가로막혀 짐승의 노란 털을 축축하게 적셨다. 허옇게 까뒤집힌 남자의 눈알은 소리도 못 내고 경련하고 있었다. 

  

피비린내와 비명이 가득한 수라장에서 흥겨운 것은 오직 에스반 뿐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총이 한들한들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처럼 흔들렸다. 

  

찰칵, 찰칵, 찰칵. 세 번인가, 네 번인가 탄창을 돌린 에스반이 고라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가문도, 사업도 그닥 중요하진 않아. 그렇다면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끅, 끄으…….” 

“맞춰 보지 그래. 살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찰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을 텐데.” 

“…시, 헉, 시간을 준다면, 분명…….” 

“내게 자비를 바라다니, 대단한 배짱이야. 마음에 드는데!” 

  

이죽대는 어조를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핏기와 생기가 빠진 얼굴에 두려움이 그득그득 찼다. 에스반을 즐겁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보란 듯이 웃은 에스반이 하느작대던 총을 다시 바로 잡았다. 빙글빙글 흔들리느라 연기는 가셨어도, 열기만은 여전히 한여름 용암처럼 뜨거웠다.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양탄자를 밟은 에스반이 고라의 이마 한 가운데에 총구를 눌렀다. 

  

“보답을 해야지. 우리 지부장께서는 어디, 도박을 좋아하시나?” 

  

피부에 닿은 총구에서 열기가 자글자글 끓어 그을리는 소리가 났으나 에스반은 늘 그랬듯 관심 한 올 주지 않았고 도리어 미소만 짙어졌다. 허옇게 뒤집혔던 눈이 이번에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 그를 향해 짐짓 안쓰러운 체를 하며 에스반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혹시 모르지 않나. 이번에는 운이 좋을지도. 어제는 그렇게 갔지만 말이야.” 

“어, 어…….” 

  

그래 자못 상냥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잭팟이군.” 

  

당연하다고 할까, 총구는 잠잠했다. 

  

“훌륭해, 훌륭해.” 

  

총을 거둔 에스반이 손뼉을 쳤다. 다정하던 얼굴은 금세 흉흉해진 차였다. 지옥에서 또 지옥의 지옥으로 곤두박질 친 분위기에 스보는 고라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몸을 빼었다. 그 사이 의자로 돌아가 앉은 에스반이 호박색 눈동자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그게, 그게……,” 

“시간은 이미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은 참으로 야차나 다름이 없었다. 하긴 그 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어디 야차에 비할까마는. 숨도 못 쉬고 흉부만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고라를 기십쌍의 눈이 덤덤히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스보가 마음속으로 딱 열까지를 세었을 때, 에스반의 구두 뒷굽이 바닥을 딱 소리 나게 두드렸다. 

  

“안됐군, 지부장.” 

“잠깐, 자, 잠깐, 잠깐!” 

“잭팟은 그리 쉽게 터지는 게 아닌데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반이 총을 들었다. 바닥은 이미 피로 흥건했다. 그 주인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다리나 어깨나, 죽을만한 자리를 맞은 것은 아니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돈 깨나 들여 장만했을 호랑이 가죽 양탄자는 이미 피에 절어 검정인지 빨강인지 모를 색으로 변해 있었다. 

  

빙글, 총이 돌았다. 이전과는 달리 명백한 살의를 담고. 꺽꺽대는 소리가 커지더니 이어 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잦아들었다. 뒤로 넘어가기 직전의 고라를 스보가 걷어찬 것이었다. 척추와 골반 사이를 비틀린 사내는 뻑뻑하게 굳은 채 벌벌 떨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허옇게 뜬 얼굴을 보며 에스반이 빙긋 웃었다. 

  

“가는 길 아쉽지 않게 정답은 알려주지, 지부장.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총구가 불을 뿜었다. 미간을 정확히 겨눈 총구에서 쏟아진 총탄이 두개골을 꿰뚫었다. 회잿빛의 뇌수와 피와 살점들이 뒤엉켜 어두운 시멘트 위로 흥건하게 쏟아졌다. 에스반은 그것을 덤덤히, 정확히는, 길고양이가 헤집은 여름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양탄자 경계 너머에까지 침범한 핏물이 구두에 닿을 새라 발을 뒤로 물린 그가 빈 총을 쓰레기 버리듯 쓰러진 시체 위로 내던졌다. 

  

“내 기분이 몹시 나쁘기 때문이야. 더러운 낯짝을 내 앞에 들이대다니. 괘씸하지 않으냐, 데만.” 

“주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는 어찌할까요.” 

“내버려둬.” 

“…내일이면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그렇지.” 

  

에스반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반지를 낀 손가락 마디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끝으로 데만은 말을 삼갔다. 이렇게까지 말을 붙여도 내버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에스반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하며 에스반에게 익숙한 덕이었다. 허나 그 유능의 필요를 넘어설 정도로 거슬리게 되는 순간 데만의 가치도 끝이었다. 카르마에는 사람이 많았다. 데만을 대체할 정도의 인재야 사나흘이면 능히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에스반 카르마는 ‘발정기 원숭이도 세 번은 참는다’는 명언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데만은 부하가 건넨 새 코트를 에스반의 어깨에 걸치며 길을 비켰다. 스보가 내민 시가까지 입에 문 에스반이 드디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지하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상쾌한 바깥 공기가 훅 쏟아졌다. 방 안을 갑갑하게 채웠던 비린내와는 차원이 다른 바람이었다. 문턱 밖으로 발을 내디딘 에스반도 바람결을 맞아 만족스레 웃었다. 그의 목 아래에서 그릉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알아야 하고 말고.” 삽시간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콧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감히 이 에스반 카르마에게 덤비면 어떤 꼴이 될지.” 

  

이 땅의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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