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갈라테이아> IDEN 로그 소설 재편집본
FOR IDEN, 12님의 CoC 시나리오 <잠 못 드는 갈라테이아> 전체 스포일러 포함. 문제 시 내립니다.
* 본 소설은 12 님의 CoC 시나리오 <잠 못 드는 갈라테이아>의 전체 스포일러 및 내용 발췌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본 재편집본의 일부 문장 표현은 시나리오에 수록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백업 용으로 업로드하나, 문제 시 바로 삭제 예정이니 참고 바랍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열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열정일 뿐이라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기반은 없을 것이다.” - 에리히 프롬
바닷가에 밀려드는 흰 파도 거품이 자갈 틈에 먹혀 사라지고 있었다. 흰빛 하나 없이 시퍼런 밤하늘 아래, 해안가 절벽을 휘둘러 굽이치는 이차선 도로를 따라 나아가는 한 승용차가 있다. 차창을 내리면 손끝은 물론이고 코끝까지 아릴 정도로 찬 바람이 밀려닥칠 것이다. 운전자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상상만으로도 그 짠 내음에 코가 아렸던 모양이다. 경로를 이탈할 곳도 없는 길, 네비게이션은 진즉부터 조용하기만 했다. 도착지는 한참 남았건만, 창밖으로 해를 살라 먹은 수평선은 검푸른빛으로 묵묵하니 무겁게도 빛났다.
거친 도로 탓일까, 자꾸만 덜컹거리는 차체는 운전자의 성질을 곱게도 긁어놓았다. 안 그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뻑뻑하다 못해 시렸다. 운전자는 신경질적으로 눈꺼풀을 꾹 눌러 닫았다가 연다. 이젠 차선이 고작 하나뿐이니까 좀 더 정신을 북돋울 때도 되었다. 좁아빠진 비포장도로 위로 연신 출렁이는 차체가 한 척의 배처럼 헤드라이트를 켜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네비게이션은 묵묵히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음을 화면에 띄운다. 계속해서 줄어드는 숫자가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운전자는 비포장도로에 접어들기 직전, 길목에 세워져 있던 표지판을 떠올렸다. ‘갈라테이아 지협까지 100m 남았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바싹 메마른 모래와 얼룩덜룩 푸릇하던 바위만이 가득하던 도로 주변에 드문드문 마른 나무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키 큰 나무들이 도로 주변의 시야를 가득 채워댔다.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순간 덜컹, 하고 차체가 약간 기울어졌다.
운전자는 정신을 바짝 세우고 조심스레 주행하던 터라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저 놀란 근육들이 약간 욱신거릴 뿐,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천천히 차를 세우고, 내렸다. 차가 왜 그렇게 들썩였는지 상황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하늘을 다 가릴 듯 빼곡하게 들어찬 나뭇가지들 탓에, 헤드라이트로 밝혀진 곳을 제외한 주변은 죄 음산하고 어두웠다. 운전자는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카메라 조명에서 나온 불빛은 꽤 환하다. 문제가 생긴 지점을 얼추 확인해 볼 정도로는 환했다.
그는 타이어와 그 주변을 재빨리 살폈다. 아마도 이 문제는 도로에 흩어진 날카로운 돌멩이 사이로 게슴츠레하게 빛나는, 저 쇳덩이들이 주범인 듯했다. 그것에 제대로 구멍이 난 모양인지, 납작하게 흙바닥 위로 주저앉은 타이어를 보고 운전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대로라면 운전이 힘들 터였다. 그렇다고 걸어가기까진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네비게이션을 얼핏 보았을 땐, 도착지까지는 몇 km가 넘도록 에둘러 길이 나 있다고 했으니. 운전자는 핸드폰을 조작해 귀에 댄다. 견인차를 불러볼 양이었다. 실패했지만. 외곽 지역인 탓인지, 전파가 제대로 터지지 않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고.
“젠장.”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의 반듯한 입매에서 낭랑한 욕설이 튀어나와 겨울밤 한구석을 뚫고 흩어졌다.
“뭐, 고립된다고 죽는 거도 아니고.”
사실이었다. 한동안은. 하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주변은 온통 칠흑같이 어둡고, 어느새 하늘을 희미하게 밝히던 달빛마저 구름에 덮이고 가지에 덮여 사그라들었다. 오직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이, 그의 꼿꼿한 자세처럼 앞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 덕에 어둠 속에서 벌거벗은 잣나무의 허리께가 훤히 드러났다. 이안은 고개를 살짝 움츠렸다. 그는 주변 온도가 밤을 바깥에서 새기엔 지나치게 낮음을 쉬이 인정했다. 그래, 도움이 필요했다. 슬슬 차의 연료도 떨어져 가고 있었으므로, 밤새 시동을 걸어둘 수는 없을 터였다. 작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뭇가지들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 너머로, 저 멀리서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고 밀려들기를 반복하는 파도 소리가. 그리고.
작은 소음들의 틈으로, 어디선가 작게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선율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연주였다. 지나치게 감미롭고 부드러워 어딘가 작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인기척에, 이안은 옷깃을 가볍게 여미곤 목도리를 고쳐 맬 뿐이었다. 그리곤 핸드폰의 조명 불빛에 의지해, 희미하게 이어지는 피아노 선율을 좇아 걷기 시작했다. 단단한 흙바닥과 돌이 구두굽에 채여 저벅거리는 소리가 꽤 요란했다. 다행스럽게도, 핸드폰의 배터리는 충분했다. 차체의 배터리도. 한동안은 차를 밝혀두어도 괜찮을 터.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면, 사람이 사는 곳이 나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나치게 작위적인 상황인 감은 있다만. 그게 대수인가. 이안은 어둠에 익은 눈으로 숲길 사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 험한 길은 아니어서, 구두를 신고도 직선으로 가로지를 수 있을 법했다.
얼마나 많은 바위와 나무를 지났는지. 우둘투둘하고 거칠다 못해 어두운 길을 한참 더듬어. 이안은 마침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는 곳 앞에 이르렀다. 거대한 3층 저택이었다. 따스하니 옅은 빛이 온 창에 가득했다. 앞뜰에는 손길이 닿은 기색이 역력하니 소담하고 작은 화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앞으로 고급스러운 정문이 반듯하게 닫혀 있었다. 이안은 문으로 다가가 벨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벨을 누르기도 전에 안에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누구십니까?”
갑작스러운 인기척과 함께, 환하니 밝힌 랜턴을 들며 정문 너머로 나온 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단정한 집사복을 입은 그는 문 너머에 서서 낯선 방문객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까지. ……외지인이십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여자는 이안의 행색을 가만 살피더니, 그 능청맞은 대답에 예의 바른 톤으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관광을 하러 오신 분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혹시 무언가 곤경에 처해 계십니까?”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어요. 운전을 해서 지나가려 했는데…… 뭔지는 몰라도, 쇳조각 파편 같은 거에 타이어가 터져서.”
“저런. 저는 일개 집사이기 때문에 주인님의 허락 없이는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 어르신께 도움을 구해보시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요. 부탁 드리겠습니다.”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흔쾌히 이안에게 저택 안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육중한 쇠문을 걸어 잠갔던 잠금 장치가 해제되고, 문이 끼익, 하는 자그만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집사는 그를 저택의 입구로 인도하였다. 입구 옆,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예의 화원엔 푸른빛을 내는 자그만 꽃들이 만개하여 겨울 바람을 타고 살랑대고 있었다.
집사가 저택의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따스한 온기가 흘러들어 한기에 살짝 굳어있던 이안의 살갗을 적셨다. 저택의 내부는 꼭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에 시간이 멈춘 양 오래된 인테리어였다. 그럼에도 깔끔하게 관리된 양, 홀 정중앙에 자리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 뻗친 빛이 구석구석 닿는 곳마다 명랑한 반짝임이 일었다. 대리석 바닥은 깃털이라도 미끄러질 양 반질거리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 고풍스러워진 목재 가구와 장식품들은 예스러운 우아함을 풍겼다.
그러나 이 저택에도 현대 문명은 닿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듯, 천장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피아노 선율이 저택을 그득히 메우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바깥까지 소리가 들릴 법도 했다. 이안은 집사를 따라 곡선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벽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자그만 초상화들이 액자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집사는 그를 2층 오른쪽 복도로 안내하였다. 그러고는 복도 끝, 첫 번째 방 문 앞에 다다르자 예의바른 손길로 노크한다. 일순 저택 전체에 은은히 울려퍼지던 피아노 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나.”
집사가 문을 열었다. 로코코 패턴의 벽지와 페르시안 러그를 깔아 우아하게도 꾸며진 방 안쪽에는 흰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엔 모자와 코트를 푹 눌러 써서 살갗이 거진 뵈지 않는 이가 앉아 있었다. 피아노 쪽을 향해 있던 휠체어가 부드럽게 인기척이 난 쪽으로 돌아갔다.
“…손님을 데리고 오느라 늦었군, 에리카.”
약간 놀란 기색이 섞인 쉰 목소리는 별다른 질책 없이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그러고서야 저택의 주인은 방의 가운데에 자리한 소파로 향했다. 걷지 않고, 오로지 휠체어에 의지해서. 소파 맞은편에 휠체어를 멈춘 그는 난데없이 찾아든 외지인에게 정중하고 절도 있는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이런 맞이가 처음은 아닌 양, 휠체어와 2인용 소파 사이에는 동그란 커피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흙발로 밟기 꺼려질 정도로 부드럽고 매끈한 카펫에, 방 안에 훈기를 가득 더하는 벽난로는 밖에 쌓인 잿가루 하나 없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관례처럼.
“반갑습니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이에요.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요?”
의외로 친근하게 존칭어를 쓰는 것에 이안은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사람에게 경칭을 쓰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은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며 이안은 사무적으로 친절하려던 말씨를 거두고 살갑게 말투를 돋우었다.
“네, 그렇습니다.”
“외지인을 보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군요, 허허. 젊은 사람 같은데, 이 곳에는 무슨 일로 오게 되었나요?”
“이 근방에 볼 일이 있어서, 갈라테이아 지협 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쇳조각에 타이어가 터져서요. 길에 뿌려져 있었습니다. 외지인에 대한 환대가 엄청난 땅이더군요. 참.”
저택의 주인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한참을 웃었다. 이어 모자 아래로 가볍게 손끝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아마도 눈물이라도 훔친 양.
“이런, 미안하군요. 이 근처에는 위험한 짐승이 많아서 짐승들을 잡기 위해 그런 물건들을 설치해두곤 합니다. 그건 내가 내일 아침 사람을 불러서 해결해주지요. 흠, 그렇다면… 미안함의 표시라기엔 묘하지만 이 주변에는 인가도 이 저택을 제외하고는 딱히 없으니, 하룻밤 묵고 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저택의 손님 방은, 늘 이런 일을 겪은 객을 위해 열려 있으니 말입니다.”
“곤경에 처해 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죠? 인덕이 많으시니 장수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안은 매한가지로 농담하듯 웃고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서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머물도록 해요. 아, 이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갈라테이아 지협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려는 건가요?”
“그……,”
이안은 곧잘 무언가를 말하려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고서야 말을 이었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 근처의 바다는 유독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하긴, 이곳의 바다는 무척 아름답지요. 모쪼록 이곳에 있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랍니다. 간만의 방문객이니 이대로 헤어지기는 조금 아쉬운데… 아하, 그러고 보니. 내가 꽃차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불면증에 무척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난 것인데… 한 잔 마셔보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좋습니다. 꽃차는 무엇으로 만든 건가요?”
이안은 미소지으며 그의 근처로 다가가선 멋대로 스툴을 끌어 앉았다. 마치 친근한 손자인 양 굴면서.
“직접 재배하는 꽃으로 만든 겁니다. 워낙 효과가 좋아서 마을에도 납품하고 있지요. 아, 여기 차 두 잔만 가져다주게.”
마찬가지로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음 섞인 목소리를 내며, 저택의 주인은 집사를 향해 가벼이 지시했다. 주인의 말에 밖으로 향했던 집사는, 머잖아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찻주전자와 귀퉁이에 금테를 두른 흰 찻잔 두 개를 트레이에 받쳐 들고 돌아왔다. 그는 트레이를 이안 앞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차례대로 찻잔에 투명한 하늘색이 감도는 찻물을 따랐다. 한 잔은 이안 앞에, 한 잔은 주인의 손에 내어 놓는 손길이 매끄럽고 정중했다. 이안은 눈만 굴려 찻잔 안을 살폈다. 맑은 하늘빛이 감도는 찻물 안으로 푸른 꽃잎이 몇 장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독특한 찻물 색의 원인인 듯했다. 이안은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삼켰다. 코와 혀에 와닿는 향은 달콤한 꽃내가 부드러웠고, 쌉싸름하면서도 희미하게 단내가 돌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몸 안에서 훈기가 도는 듯했다.
“필요한 것 같아서 내어주신 건가요?”
희미하게 웃으며 이안이 물었다.
“하하, 어떨까요? 하지만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군요. 평소에도 좀처럼 밤에 잠을 못 이루는 편인가요?”
“네, 그런 편이죠.”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지는 약 6개월 정도 되었다. 정신과 의사는 신경 쇠약, 사별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이안은 진단하는 의사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렇게 진단하는 게 의사의 일이었을 뿐, 불필요한 공감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뻔히 "사별"을 입에 올리면서 대수롭잖다는 듯 말하는 작태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뭘 알아. 그런 말을 억누르며 미소짓는 그를 두고 의사는 자기 제어가 매우 뛰어나다고 해 주었다. 그 말에는 닥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여전히 건재하다. 세상은 그가 없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간다. 그리고 애당초 그는 누군가의 상실에 그렇게 오래 매여 있는 부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설령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이제는 벗어날 때가 명백했으므로.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사랑한 것이 자신을 떠나간 후에도 그 스스로는 멀쩡히 살아있다는 게 가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끌어다 저 벼랑 끝에 놓고는 했다. 마치 그가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니 그의 어떤 무의식 어느 곳이 그를 끌어다 슬퍼하라고, 절규하라고 만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런.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제법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사람이란 잠을 자지 않으면 한밤중에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중간에 끊어내길 영 곤란해하는 생물이니까요.”
저택의 주인은 작게 한숨을 쉬곤,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모쪼록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오늘 밤만은 좋은 밤을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기왕이면 행복한 꿈을 꾸는 것도 좋고. 영 가망이 없어보인다면 꿈 하나도 꾸지 않고 푹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안은 편안하게 웃으며 차를 조금 더 들이켰다. 입맛에 딱 맞게 달아서 마음이 흡족했던 탓이다. 짤막한 담소를 끝으로 그가 찻잔을 깔끔하게 다 비우고 나면 주인은 집사에게 그를 손님 방으로 안내해 줄 것을 명했다. 손짓으로 집사를 물리곤 그 자신도 휠체어를 돌리려다, 주인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기이한 이채가 도는 눈동자와 보석처럼 투명한 자안이 서로.
“그러고 보니, 아직도 객의 이름을 묻지 않았군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이안. 이안 칼릭스입니다. 선생님은요?”
“나폴레옹입니다. 우스운 이름이지요? 좋아요, 이안, 멋진 방문객. 이 저택에서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길 바라요.”
느긋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나폴레옹에게 이안은 가볍게 목례하곤 집사를 따라 자리를 떴다. 문을 닫고 주인의 방을 나서면, 집사는 그를 1층으로 안내하였다. 그러고선 비슷비슷하게 생긴 방문들 사이 한 방문을 열어 그 안으로 향하는 길을 이안에게 틔워주었다. 누군가가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시피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였으므로 흠잡을 곳은 없었다. 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지나치게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 탓에 이따금 솜털이 돋았을지도 몰랐으나, 애석하게도 이안은 그렇게 섬세한 성정은 못 되었다. 그는 마치 여기가 제 집인 양 곧장 방을 가로질러서는 침대 곁 전등갓에 가벼이 손을 얹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불러 주세요. 방 안의 물건은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 식사 시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안내 감사합니다.”
“그럼,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집사는 가볍게 목례하고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이안은 느긋한 태로 방 안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한쪽 벽면에는 푸른 계열의 색실을 엮어 섬세하게 직조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벽난로는 작은 장작을 살라먹으며 방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전등은 현대식이었고, 문 옆 벽면에는 아마도 전등을 끄고 켤 수 있을 스위치가 붙어 있었다. 커다란 창문 옆에는 성인 남성이 넉넉히 누워 잠들만한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남색 벨벳을 써서 만든 요와 이불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이안의 눈썹이 가볍게 들렸다 내려갔다. 태피스트리의 반대쪽 벽면에는 방문과 색이 다른 문이 있었다. 아마도 욕실이겠거니, 하며 이안은 태피스트리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가볍게 살폈다. 실을 엮어다 꼼꼼하게 이야기가 짜여 내려간 태피스트리는 외풍을 막는 기능 외에도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물고기인 형체. 파도의 물결이나 소라고둥, 다른 물고기로 추정되는 것들과 알 수 없는 형체의 심해 생물까지, 누군가의 상상 속 심해의 광경을 고스란히 담은 게 손이 많이 간 태가 났다. 저택 주인의 취향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어라.”
욕실 안은 깔끔하고 건조하여, 사용감이랄 게 전혀 없었다. 욕조가 있는 곳과 세면대가 있는 곳을 구분하기 위한 가림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방에 올 사람을 이미 다 고려한 듯 기본적인 세면 도구들은 전부 새 것으로 구색을 맞춰 두었다. 사람이 어지간히도 안 들락인 모양이지. 그럼 가볍게 씻을까… 그런 생각을 주워섬기며 이안은 욕조에 더운 물을 받기 위해 마개를 막고 물을 틀었다. 바디 워셔를 몇 펌프 뿌려둔 뒤 밖으로 나와 커튼을 걷어보면 밖은 어둠과 나무 그늘에 덮여 칠흑처럼 검었다. 그 어둠의 머리 위. 겨울밤의 한복판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달을 제외하면 그랬다. 바닷가로부터는 약간 떨어진 곳인지, 바다는 보이진 않았다.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접어두고 이안은 창문을 다시 닫고 반쯤 커튼을 쳤다. 새어 나오는 달빛을 뒤로 하고, 이안은 더운 김이 서린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물에 몸을 담갔다. 수증기를 따라 올라오는 향은 무척 깨끗했다. 담백하고 옅은 수선화 향과 소나무 향이, 바디 워셔 특유의 달달한 향취와 섞여 어떤 여행자의 피로도 말끔히 닦아줄 터였다. 그저 누군가에겐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향이었기 때문에 문제였을 뿐.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도 구분할 수 있는 향이었다.
한숨을 쉬며, 이안은 코 위만 내어놓고 입술까지 물 안으로 제 몸을 파묻었다. 바디 워셔 특유의 향이 그에게 엉겨 붙는다. 그 향의 주인이 곁에 있다 여기기엔 다소 빈약한. 그는 조금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씻고 나왔다. 남색 벨벳 사이로 파고들어서는 제 손목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시고 있자니, 여전히 뭔가 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잠기운은 금세 몰려들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눈꺼풀이 닫히고,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었다.
잠에 든 지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경, 그의 귓가 언저리에서 무언가 갉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한 암석들이 쉼없이 마찰하는 듯한 음색과, 사납게 컥컥대는 불쾌한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머리 깊은 곳에서 울려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는 듯한, 잠들 적마다 어김없이 그를 시달리게 했던 바로 그 소음이었다. 결국 그 소릴 이기지 못하고 이안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쯤 걷어둔 커튼 사이로 달빛이 햇살처럼 환히 쏟아져 들고 있었고, 시곗바늘은 새벽 3시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그의 머리 안쪽을 지끈거리게 만드는 소음은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마치 꿈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실존하는 소리인 것처럼. 미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들면, 이안은 문득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리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매끄러운 파도 소리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창틀을 넘어 흘러들어와선, 방 안을 침범하고 그의 귀를 적셨다. 지체없이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이대로 그의 온몸을 적실 것도 같았다. 고작 소리일 뿐인데도. 어쩐지, 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바깥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이 이안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이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잠겨 죽겠다, 싶은 생각에 젖어 있자니 어쩐지 호흡이 곤란해져 오는 것도 같았다. 이 소리의 근원지는 분명, 창밖의 나무 사이, 그보다도 저 멀리 있을 바닷가일 터였다.
이안은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와 정문을 열어젖히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달빛이 너무도 환했으므로 불빛이 될만한 것을 챙길 이유가 없었고, 기실 그럴 여력도 없었다. 그는 바닷가 쪽을 향해 무턱대고 걸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두꺼운 스웨터 사이를 파고들어 뒷덜미와 손목을 서늘하게 식혔다. 바닷가라 더 쌀쌀한 건지도 몰랐다. 새벽달이며 하늘에 촘촘히도 박힌 별들은 등불 없는 객의 앞을 환하게 밝혔다. 들풀 사이로 핀 꽃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사람 아닌 것의 속살거림처럼 들려왔다. 파도 소리와 바다 내음이 전해지는 곳을 따라, 발 아래로 버석대는 흙을 밟으며 몇 그루의 나무와 커다란 암석을 지나쳤는지도 헤아리기 어려워졌을 즈음, 흙 없이 온전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바다 절벽이었다.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탁 트인 절벽의 풍경이 이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검고 푸르러서는, 그 속에 무엇이 잠겨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고 넓고 깊은 그 아름다움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파도 소리는 이제 머릿속이 아니라, 눈앞에서 찰랑이는 겨울 바다로부터 들려왔다. 기이할 정도의 기시감. 이 절벽가에 방문한 것이, 이 곳에 방문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이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히 와 봤던 곳이라는 확인과 함께.
“……잊을 수가 있나.”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닷가에 밀려드는 흰 파도 거품이 자갈에 먹혀 사라져 갔다. 쌀쌀한 바람은 그의 언 볼을 썰어낼 듯 사납게 달려들었다 꼭 한 겹만을 베어낼 정도로 얇게 뺨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이안은 차를 타고 지나오며 보았던 풍경들과 함게 갈라테이아 지협을 말하던 표지판을 떠올렸다. 그랬다. 이곳은 갈라테이아 지협. 그가 헤이든의 유골분을 뿌려주었던, 바닷가의 낮은 절벽이었다.
그가 뱉는 숨이 희게 얼어 공중에 퍼지고, 그대로 멈춰 선 채 파도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분명 밤인데도, 환한 빛을 마주한 양 눈이 시렸다. 밝은 달빛을 반사하며 산산이 부서지는 포말들이 꼭 이 세상에 더 없을 보석처럼 찬란했고, 그 사이로, ……부서지는 포말보다 반짝이는 인영이 저 파도 사이에 섞여 있었다. 사람의 상체 아래에 물고기의 하체가 이어지는 인영이 거기 있었다.
실존도 이따금 우리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 때가 있다.
이안과 시선이 분명히 마주친, 그의 얼굴을 빤히도 마주하고 있는 저 얼굴은, 분명 헤이든이 맞았다.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의 삶에서 단 하나뿐이었던 반려. 그리고 하나뿐일 반려. 그의 짝, 그의……. 반인반어의 모습을 한 헤이든은 밀려드는 파도 한가운데서 암석을 붙잡고, 이안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눈부터 코끝, 입술까지 떨어지는 이목구비, 그를 바라보는 저 눈빛까지. 물론 이럴 수도 있다. 이건 불면증과 그리움이 그려낸 환각일 수도 있다. 달빛에 미친 듯이 반짝이는 바다가 그를 어떻게든 먹어 치우려 수를 쓰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생이 자신에게 놓은 장난이든, 덫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지금 그의 심장을 잡아끄는 것이 저 아래에서 중력처럼 자신을 끌어 부르는데.
헤이든이, 아니, 헤이든을 닮은 인어가 이안을 향해 입을 벌려 무어라 뻐끔거렸다. 잡고 있던 암석을 놓고, 파도와 함께 해안가로 다가와 절벽 아래에서 무언가 말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헤이든의 낯을 꼭 닮은 저것의 저 부분을 입술로 불러도 된다면, 에 한한 표현이지만 그랬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안은 반쯤 홀린 듯 절벽의 측면을 따라 만들어진 나무 계단을 내려가 그 인영, 혹은 무언가의 가까이로 향했다. 파도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어서. 그리고 어쩌면, 혹시나 그가 기억하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봐. 곧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그 소음도 차마 그의 정신을 이성에 비끄러매진 못했다, 아니. 그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판단했다. 그렇게 느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저것을 가까이서 목도할 날은 영영 다시 없을 거라고 직감과 이성이 동시에 속삭였다. 걸음마다 위태롭게 비명을 지르는 층계참을, 이안은 거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자갈이 빼곡히 들어찬 연안은 파도와 달빛에 물든 돌멩이로 은하수를 떠다 흩뿌린 듯 반짝거렸다. 부쩍 가까워져선,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그것이 있었다. 그것이 물속을 헤엄쳐 그에게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물에서 난 생명인 양 부드럽고 유려하기 짝이 없었다. 비로소 그것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축축한, 특유의 물먹은 목소리가 이안의 귀를 적셔왔다.
“이안.”
“……. ……뭐?”
“……오랜만이지. 나 보고 싶었어?”
이안은 드물게도 얼이 빠졌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종종 이래왔지만, 그래도. 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 하며, 살짝 물먹은 듯 울리는 목소리나 발음이라든가. 아주 많은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정말 너야? 어떻게 여기에 있어? 왜 그런 상태인 거야? 그런 말을 제쳐두고 튀어나온 말은 단 하나였다.
“……, ……어. 보고 싶었어. 많이.”
짭조름한 바닷냄새가, 겨울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시린 바람이 그의 오감을 쉬이 흐트러뜨렸다. 그것의 작은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뚫고 그의 귀에 선연히 감겼다. 높게도 뜬 날 아래, 달빛을 면사포처럼 두르고 환히 빛나는 그것은 이안의 대답에 안도한 듯 물기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내가 어떻게, 왜 살아난 건진 모르겠지만…….”
살아났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말도 안 되는 명제이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기 선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의 뼛가루를 제 손으로 직접 이 갈라테이아 지협에 뿌렸으니까. 시선이 수면 아래 잠긴 그것의 꼬리에까지 미쳤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에게 말을 거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모든 살아남은 인간들은 일정 수준 평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중력을 거슬러 생의 궤도에서 튕겨 나가니까. 그래서, 평범한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는 평범하게, 죽은 연인의 얼굴을 한 그것에게 이끌리듯 다가가고 만다. 중력에 순응하듯이.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그를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그것은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잔인한 파도 소리가 세차게 밀려닥쳐 부서지고, 눈앞의 모든 순간이 현실임을 일깨우듯 고막 안까지 밀려들었다 바깥으로 쏟아져 내렸다. 새하얀 포말 사이로 빛이 산란하며 시야를 씻어내듯 어지럽혔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은 물과 빛 속에서 시야를 바로 확보할 수 없다. 우리는 악몽에서 깨기 전까진 그것이 악몽인 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지나치게 과거를 닮은 악몽이어야 마땅했다. 이토록 눈 시리게 아름다워서, 추억 위로 두껍게도 덧발라 두었던 슬픔을 일순간에 치솟고 흩뜨리는 거라면.
“보여줄 게 있는데, 잠깐만 이리 와 줄래? 이리 와. 잠깐이면 돼.”
그것이 이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 자리한, 저 얇은 막처럼 투명한 물갈퀴는 그것이 사람이 아님을, 그가 알던 헤이든은 죽었음을 재차 이안에게 상기시킨다. 그것이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바닷가의 자그마한 생물체들을 심해까지 끌고 내려가는 파도처럼. 그것이 끌어당겨 안는 바람에 이미 이안의 종아리는 바닷물에 흠뻑 젖었다. 구두 안의 양말까지 푹 젖어버려, 가죽이 상할 것은 뻔했다. 달콤하게 웃는 저 모양새를 멀거니 바라보며 이안은 그의 품에 방금 안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에게서 풍긴 바다 특유의 짜고 창백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숲의 푸르른 냄새나 수선화의 향취가 아니라.
“어디로 데려가려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질 만한 걸 보여주려고.”
이성이 저 젖은 낯을 분석해 낸다. 그것은 최소한, 그에게 적대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기, 그런데 나는 겨울 바다에 들어가면 저체온증으로 죽거든.”
“아.”
다소 멍청한 투로 그것이 탄식했다.
“…안 죽게 해 줄게! 그렇게 할 수 있어.”
그것은 어설피 헤실거리며 웃었다. 부끄러울 때마다 항상 헤이든이 그러했듯이. 그래선 안 됐다, 그것이 정말, 진실이 아니라 악몽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망상에 잠겨 삶을 포기하는 건, 그의 과거와 그의 반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고민할 때 항상 그러했듯이, 이안은 눈꺼풀을 두 번 깜빡였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쉬며, 저 어설프게 헤실거리는 사랑스러움에 짧게 입맞추곤 그의 인도를 따라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고, 곧 이조차 둔해질 터였다. 이게 그의 망상이고, 그것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글쎄, 그건…….”
말꼬리를 뭉개며 그것이 이안의 손을 잡았다. 소름이 돋았다 꺼진 자리에 다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매끈했다. 그리고, 그것의 손가락이 이안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단단히 맞잡더니 일순간 저 아래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의 발목 근처에 차가운 물결이 스쳤던 것도 잠시, 파도는 금세 그 위까지 휩쓸고 지나가며 정강이까지 파고들었다. 가까이서 본 인어의 얼굴은 정말…… 헤이든과 한 군데 틀린 곳 없이 닮아있었다. 다소 창백하고 투명해 보이는 피부나 차가운 체온, 무엇보다도 물 속에서 선연하게 반짝이는 저 물고기 꼬리만 제외한다면. 빠진 곳 없이 빼곡한 비늘들은 달빛을 받아 새로이 닦인 듯 그 색이 선연했다. 그런 그것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치듯 몸을 기울여 그의 품에 그 젖은 고개를 묻었다.
“인간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지?”
“없지.”
그리곤 그것은 이내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곤 환히 웃는다. 겨우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그것은 이안의 고개를 낚아채 제 입가로 끌어당겼다. 이성이 잠깐 되물었다. 순순히 입맞춤을 받을 것인지, 밀쳐낼 것인지. 그리고 이안은 결정한다. 그냥… 하게 두기로. 일단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해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그 예전의 막연한 믿음이 이어진 결과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믿음의 본질은 결국 이렇다. 상대에 대한 오롯한 확신이 없을 때에도, 그것이 자신을 끝내 해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 그리고 다소 그것이 자신을 상처입히더라도, 그 손을 쉬이 놓지 않는 것.
그건 내가 널 사랑하며 배운 덕목이었어. 이안은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그것을 향해서는 아니었고, 과거를 향해서도 아닌, 제 마음 안에 사는 헤이든에게.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이렇게 동화처럼 소원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믿기엔, 그는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세상을 겪었다. 그렇다고 이 지독히 달콤한 몽상 혹은 악몽에서 단숨에 깨어서는 혹독한 현실에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한 사실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그것은 그에게 숨을 불어넣듯 제법 오랫동안 그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어떤 그리움, 혹은 슬픔, 혹은 가장 고대하던 재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천국에 갈 수 없을 테니까. 이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교두보라면 여긴 아마도 망자에게 주입되는 마지막 모르핀일지도 몰랐다.
갑작스레 이안이 밟고 있던 자갈 지반이 흔들렸다. 그가 휘청이는 틈을 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체온을 가진 손이 그의 팔을 잡고 파도 사이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풍덩, 하고 무거운 것이 제법 높게 파고를 그리며 빠지는 소리가 났다. 차가운 물이 그의 온 몸을 핥듯이 밀려들었다. 사나운 물살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 비릿하고 짭쪼름한 바다의 체취가 그의 오감을 뒤흔들었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물에 푹 절은 옷가지가 그의 사지에 감겨 들러붙었다. 한기에 뼛속까지 몸이 시렸다.
그러나 이내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점차 그 한기조차 사라지더니, 곧 그의 몸을 감싼 물살만이 그의 감각 안에 남았다. 귓가에 맴돌던 파도 소리는 먹먹히 잦아들어서는, 이따금 꼬르륵대는 소리만을 제하고선 잔잔하니 정적으로 화했다. 밤의 바닷속은 지독히도 검고 또 어두워서, 환히 빛나는 그것이 저를 단단히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것은 이안을 끌어안고 더, 더욱 깊은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원한다면 저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물살과 낯선 체온에 안긴 채 이안은 생각했다. 뭐, 이대로 죽나? 헤이든이 죽고 나서 둔해진 정신머리에서 떠오른 감상이란 딱 이 정도였다. 분명 자신은 그의 부재로 말미암아 죽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의 부재가 자신을 해하게 두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도. 어쩌면 이것도 실존과 실존의 틈바구니에서 빚어지는 눈속임일지 몰랐다. 인어는 물속 깊은 곳에 먹이를 끌고 가 먹는 습성이 있다는 전설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이것 또한 그런 경우일까?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 네가, 일말이라도 ‘너’일 가능성이 있다면.
이안의 입장에서, 헤이든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대뜸 보여주고 싶다고 할만한 게 있다며 저를 끌고 가는데 안 보겠다고 벗어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게 뭔진 몰라도, 그것은, 아니, 그는, 무엇인가를 이안에게 아주 보여주고 싶었던 거니까. 귓가를 스치는 물소리가 싸늘했다. 눈 안으로는 바닷물이 밀려들어 시야는 온통 뿌옇고 어두웠다. 그러면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가 자신을 붙들고 내키는 대로 가도록 둔다. 네가 정말 ‘너’라면, 아무런 대책 없이 날 데려가진 않겠지. 하지만 네가 ‘네’가 아니라면…….
죽은 반려와 똑같은 허상에 잠겨 죽는 건가? 이안은 짧게 웃었다. 그러곤 아주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죽은 제 반려와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자신을 유혹해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무언가라니. 어떠한 정보도, 분석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란 차라리 동전 던지기에 가깝다. 믿음이 우선이냐, 이성이 우선이냐. 본디라면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는 당연히 후자의 인간이지만. 최소한 그가 헤이든과 같은 모습을 한 이상, 혹은 헤이든인 이상, 그가 이를 드러낼 때까지는 참고 믿어보기로 이안은 결심한다.
이안이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모습을 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태를 살피려 들었다. 그리고,
“이안. ……이안?”
그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안의 뺨을 감싸들 즈음, 이안은 이변을 직감했다. 숨이 전혀 막히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아도 이 깊은 물속에서의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이안을 끌어안고 헤엄치는 그의 감촉은, 이안을 삼키려 들기보단 오히려 이안을 보호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희뿌연 공기방울이 아니라 어느새 신비로이 반짝이는 심해어 무리로 변해 있었다.
“……어디 아파?”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이안의 뺨을 감싼 채 상한 곳이 있나 살피듯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 모양새에 이안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몰랐다. 커다란 공기 방울이 입에서 터져 나와서는 저 위로 천천히 올라가 버렸다. 어떠한 유보도 함께.
“아…… 음. 모르겠네. 아팠던가? 지금은 괜찮아.”
그는, 헤이든은,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해가 분명한데도 낭랑하게 전해지는 이 말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미안, 내가 너무 급하게 데려왔지. 그래도 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되도록이면 빨리 보여주고 싶었어. 밤바다는 정말 아름다우니까. 너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도 이런 밤바다의 모습을 지금 여기서 들여다볼 수는 없을걸.”
헤이든은 애살스럽게 속삭이며 장난스럽게 이안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이안을 감싸 안은 그의 꼬리는 유려하게 물살을 가르며 바다 더 깊은 곳으로 이안을 인도하고, 물살을 헤치고 나아갈 적마다 이전에 본 적 없던 찬란한 아름다움이 어둠 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광활한 해저 암석층, 기이한 물살, 빛나는 저 작고 날랜 물고기들, 보통의 수 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고 푸른 산호초. 온 주변이 반짝였다. 작은 반짝임조차 이 심해 속에서는 별보다 눈부시고 환했다.
“……그럼 줄곧 여기서 지내왔던 거야? 아름답네.”
“계속 이곳에서 지낸 건 아니야. 여긴 조금 춥기도 하고… 근처에 갈라테이아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있거든.”
헤이든이 이안의 손을 잡아 어디론가 이끌었다.
“넌 어때. 잘 지냈어? 내가 죽은 뒤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묻는 건 너무한 짓일까… 그래도 가끔은 네가 날 떠올려 줬을지, 아니면 날 잊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을지 궁금했어. 후자길 바란다면, 너무 욕심부리는 걸까?”
“도시가 있구나. ……노력했길 바랐어?”
이안의 얼굴에 번진 희미한 웃음기가 어둠에 묻혔다. 이어지는 말은 조금 느릿하지만, 선명하게 나왔다.
“그래. 네가 없어도 그럭저럭 잘 지내왔어.”
이안의 대답을 들은 헤이든은 그가 영 잘했다는 듯 뻔뻔스럽게도, 참으로 기특하단 표정을 지으며 품에 안긴 그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내 두 사람은 어느 거대한 산호에 다다랐다. 어지럽게 가지를 뻗은 나무, 혹은 무수히 많은 꽃잎이 겹친 꽃처럼 생긴 분홍색 산호. 개중에 가지 하나는 두 사람이 앉기에 충분히 넓고 길었다. 헤이든은 이안을 그 가지에 조심스레 앉혔다.
산호는 두껍지만 아주 딱딱하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작은 구멍에서 기포가 몽글거리며 솟아오르기도 하고, 옅은 빛이 일렁이기도 했다. 그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은 헤이든의 꼬리 지느러미가 물살을 따라 살랑거렸다. 그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을 6개월이란 간극이 있었다. 단순히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안은 헤이든의 죽음을 겪었다. 그 죽음의 주인공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널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헤이든은 조심스럽게 이안의 어깨에 상체를 기대왔다. 싫어하는 반응이 보인다면 언제든 몸을 물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이안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실 산호를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었다. 그들 주변의 깊고 짙은 어둠은 그의 빛에 조금이나마 걷힌다. 지금도 그렇다. 모든 사실이 전부 어두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안은 잠시 그의 죽음을 회상했다. 그는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봉사활동을 하던 보육원의 어린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려고 잠깐 나왔다는 메시지가, 이안이 그로부터 받은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가 죽어가는 동안 이안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한창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최소 그랬던 것 같다, 고 지금의 이안은 회상한다. 답잖은 일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어서 문자가 왔다는 사실도 깜빡 잊고선, 그가 금방 오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래,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그것도 대낮에 벌어진 사고였다. 이안은 그의 얼굴을 법정에서 보았고,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써서 그의 형량을 부풀렸다.
매스 미디어를 활용하진 않았다. 음주운전 사고로 사람이 죽는 일은 흔했고, 싸구려 기삿거리에 헤이든의 죽음을 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죽은 그가 원치 않을 거라고 맘대로 생각해 댔다. 그래서 이안은 판사에게 뒷돈을 줬다. 그 피고인을 가능한 한 세상에 오래 나오지 않게 해 달라고. 영국의 음주 운전에 대한 형량은 가혹하다. 그는 14년의 형량을 받았다. 그러고도 이안은, 판사가 거진 전 재산을 몰수해선, 기초 생활만이 가능할 정도의 돈을 제하곤 전부 벌금으로 거두게끔 형량을 조절하도록 부추겼다. 일은 뜻대로 진행되었다. 잘 됐다. 잘 풀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자신을 위한 복수를 한들 속이 개운해질 일 따윈 없었다. 네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지. 그 새끼를 죽이면 네가 슬퍼할 거잖아.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면서. 그리고 살아서 고통받는 게 죽음으로 간단히 삶을 빼앗는 것보단 낫다고, 이안은 자부했다. 그래서 그는 살았다. 자비는 없었다. 건조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가며, 반려가 죽은 것을 반증하든 검은 옷에 휩싸여 살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네가 없는데. 그래서 그는 그것도 어느 날 돌연 그만두었다. 다 부질없는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 그에 대한 애도를 휘장처럼 두르고 사는 게 역겨웠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가 헤이든을 위해 무슨 복수를 했다 한들 죽은 사람으로선 알 방도가 없다. 그러한 복수에 마음이 후련해질 일도, 복수를 당한 이에 대해 안타까움이나 동정의 마음을 품을 일도 없다. 이것은 마음이나 의지의 문제라기보다는 능력의 문제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든 멀 하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어 있었으니까. 본디 시체에게는 의견을 가질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법이다. 시체란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존재니까. 그럼에도 지금은 살아있으니. 죽기 직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때, 한참 동안 문자를 확인하지 않는 그에게 장난을 치듯 우는 이모지를 연달아서 길게 보냈었던가. 아직 제 핸드폰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장례식 날까지 핸드폰이 멀쩡했다면 헤이든은 이모지들까지 문상객으로 초대한 셈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우스워져서 헤이든은 희미하게 키득거렸다. 키득대는 소리가 입술 밖으로 약간 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러게, 문자 좀 일찍 읽으라니까, 따위의 말로 투정을 부리며 그를 놀리는 것은 분명 과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사안이었으므로. 그저 그를 놀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듯 작게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며, 헤이든은 가볍게 맞대어 기댄 그의 어깨 쪽으로 상체의 무게를 실었다.
“……마지막 유언이 아이스크림 사러 가겠다는 말이라니, 면목이 없네. 차라리 네게 유언을 남긴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는데 말야.”
웃음기 섞인 농조에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상스럽다.
“그 말이 그 말 아냐? 그런 사소한 것까지 나한테 전달하는 거. 내가 네 행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그건 그렇지만. 말로 직접 하는 건 느낌이 다르잖아.”
잠깐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헤이든은 이안의 입술에 짧게 소리나도록 입 맞추었다.
“키스 이모지를 보내는 것과 직접 키스하는 건 다른 것처럼?”
정작 말하고도 본인에게조차 확신이 없다는 듯 헤이든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 관두었다.
“잘 모르겠으니까 한 번만 더 해 줘.”
“놀리는 것 같은데…….”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빛이 어설프게 웃는다. 금세 거리는 좁혀지고, 이안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환히 달아오른다.
“한 번 더 하면 알 것 같아?”
“음…… 조금은?”
헤이든은 장난스럽게 그를 끌어안고 다시 한번, 가벼운 마찰음이 날 정도로 입 맞추었다. 조금씩 붉어지는 목덜미는 어둠에 가려진다.
“어때?”
“……한 번만 더……”
장난치는 소년처럼 키득거리다 제 쪽에서도 마주 입술을 누르고서야 이안은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맞구나.”
마주 키득거리던 헤이든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떨어진다. 다시 돌아오는 시선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아니길 바랐어?”
그러고는 제 입술로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낸다.
“……그렇다기보단…… 네가 여기 혼자 남아있으면 많이 외로웠겠다, 하고 문득 생각했었지. 인어들의 도시가 있다고 하니까 그건 아닌 모양이지만?”
“확실히, 알고 있던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게 된 건 아쉽긴 하지. 물론 제일 아쉬웠던 건 네가 여기 없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널 생각해서라도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난 물 밖에 오래 나와 있을 수가 없어서…… 몇 번 실패했어.”
헤이든은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허공 이리저리로 굴리다 말았다. 어둠 속을 이리저리 향하던 눈동자가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도시는 해저 평원을 조금만 더 가면 있어. 그들이 날 받아줘서 다행이었지. 궁금하면…… 다음에 구경시켜 줄까? 그러니까, 너만 좋다면.”
“좋아. 나도 네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니까.”
이안은 해사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느른히 붙잡았다. 그리고 깍지를 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깍지를 끼면 만족스러운 듯 약간 부끄러워하는 기색과 애정 어린 표정이 헤이든의 얼굴 위로 번졌다. 손끝으로 그의 손가락을 문질러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모습은 6개월 전의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네 이야기를 안 물어봤네. 널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바다에는 무슨 일로 왔어?”
“네 생각이 나서.”
“그래서 직접 본 소감은 어때?”
“……그냥, 좋아. 예쁘고. 여전히.”
이안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를 만나는 기분은 영 기묘하기만 했다.
“너는 이제 6피트 아래 묻혀서 영영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질 줄 알았는데.”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전자에 대한 답인지, 후자에 대한 답인지 모를 얼굴로 웃으며, 헤이든은 고개를 기울여 제 어깨에 기댄 이안의 머리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래도 네가 날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네게 나쁜 기억이 된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 근처에서는 얼마나 더 머물 생각이야?”
“너에 대해서 나쁜 기억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이안은 고집스럽게 그를 끌어안고 제 머리를 묻었다.
“모르겠어. 네가 여기 살게 됐다는 걸 이젠 알았으니까……. ……. 재택 근무로 아예 돌려버릴까? 펀드 매니저라는 게 이런 데서 도움이 되잖아. 이 근처에 집을 사는 거야. 그리고……. ……나 좀 징그럽나.”
끌어안는 손길이 마음에 들어 그의 품에 마주 파고들면서도, 어린애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헤이든은 어중간하게 손끝으로 허공을 헤집어 댔다. 이어지는 말을 듣는 내내 멍청하니 입을 벙긋거리다, 곧 헤이든은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내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네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네가 날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어. 아, 아니. 사실 조금 기분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나야말로 징그럽지?”
“왜? 아니. 왜 기분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너 날 뭐로 보고, 어? 내가 네 죽음에 후련해할 정도로 널 사랑하지 않고 짐짝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어?”
조금 발끈해선 이안은 헤이든의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꾹 눌렀다.
“빨리 해명해. 지금 네 그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러고서 이안은 정말 골이 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뺨을 움킨 채로. 그 모양새를 보며 잠깐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헤이든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어 의미를 눈치채고서야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치부를 스스로 떠벌린 탓에 눈가가 조금 붉어진다.
“아, 아니! 기분 좋다는 건 네가 여기로 거주지를 옮기는 걸 고민하니까. 내 기분이 좋은 것 같다는 뜻이었지. 징그럽다는 말도 내가 애인이 날 위해서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곳을 바꾸려 드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인간이라 징그럽지 않냐는 뜻이었고…….
……네가 그런 인간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했다면 네게 지금까지 사랑한다는 말도 안 했을 거고. 처음에 네가 날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 걱정한 건, 네가 예전부터 날 싫어하거나 귀찮게 여기는 사람으로 여겨 왔으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건 상당히 큰 충격이잖아. 네가 날 트라우마로 여길까 봐 걱정한 것뿐이야.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건 상대방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니까.
……마지막 모습이 워낙 흉하긴 했잖아.”
가벼운 농담조로 사족을 덧붙이며, 헤이든은 애교를 부리듯 제 뺨을 감싼 손에 입맞추었다.
“죽은 사람의 망그러진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를 느낄 정도의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었으면 날 끌어안고 헤엄쳐 내려가는 널 보면서 눈물 정도는 흘렸겠지. 안 그래?”
제 손바닥에 입술이 눌리면 희미하게 미소 짓다가, 그의 얼굴이 제 쪽으로 마주 돌아올 즈음 이안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 눌렀다. 숨. 그는 느릿하게 재회한 짝과 입술을 포개고 있다 천천히 얼굴을 떨어뜨리며 말을 잇는다.
“나에 대해선 욕심을 더 부려도 된다고 늘 그랬잖아. 네 죽음이 충격이 아니라고는 안 할게. 그게 나름의 트라우마가 아니라고도. 하지만 그건 네 <죽음>에 대한 것이지, 너에 대한 게 아니니까. 전후 관계가 잘못됐잖아. 네 부재를 다시금 확인하기 어려웠다면 여기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그런 생각은 안 들어?”
“어라. 아까 그거 눈물을 흘려야겠단 생각을 할 정도로 무서운 상황이었어? 하하…….”
미안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이안이 재차 입술을 눌러오면 물의 찬 기운에 희게 질려 있던 그의 낯은 단숨에 색이 올랐다. 천천히 얼굴을 떼어내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눌러 식히는 태는 평소의 그와 같았다.
“……네가 내 버릇을 나쁘게 만드는 것 같아.”
얼굴이 약간 식어갈 즈음이면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이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질문 하면 안 되는 건 아는데…… 그럼, 아직도 날 좋아해? 그러니까, 네 감정을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허락해 줄 거야?”
“ ‘나에 대해서 욕심을 더 부려도 돼.’ 그건 내 허락을 구할 사안이 아니잖아. ……사랑해.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 사랑하는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길 바라.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삶에 흔치 않기도 하지만, 하하, 그만큼 네게 내 오랜 시간과 마음을 들이기도 했고, 그만큼 네가 내게 아주 큰 의미가 되었거든.
그 의미와 시간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고작 죽음이라는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고 해서. 네가 날 버린 게 아니니까. 나로선 널 밀어낼 이유가 없어.”
그러면 헤이든은 이안을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하지만 너라면 ‘난 네가 진짜 헤이든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단 말이야. 내가 의심스럽지는 않아?”
“의심스럽지.”
“그런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허락해 줄 수 있어?”
“스웜프맨 실험에 대해서 알아? 늪 근처를 지나고 있던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아서 죽었는데, 어떤 전기적 파장의 영향으로 그 근처의 늪에서 똑같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면, 그리고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의 삶의 목적과 지향성을 똑같이 지니고 있다면. 그는 죽은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니까.”
헤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사람을 취급하겠다는 뜻이야?”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날 여전히 사랑하길 택한다면, 널 이전의 헤이든과 같은 사람은 아니라도 연장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뜻이야. 최소한 나에겐.
그도 그럴 게, 인간은 언제나 변화하고, 어느 부분은 죽어서 새롭게 채워지며, 연속성이라는 건 그 본인이 정의하기 나름일 뿐 외부의 정의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데.
너는 내가 이런 장광설 늘어놓는 거 재밌게 들어주잖아.”
이안은 키득거리며 그에게 다시 한번 입 맞추었다.
“네 모습이 좀 바뀌었거나, 네가 그의 기억을 가진 새로운 무언가일 뿐이라고 해도, ……내가 네게 이렇게 마음이 가고 네가 내게 마음이 간다면 널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안 그래? <진짜>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거니까.
게다가 난 네가 <진짜>라서 사랑하는 게 아냐. 네가 날 사랑할 수 있게 만드니까 사랑하는 거지. 어쩌면 내게는 영원히 성립될 수도 없었을, 사랑이라는 공식에 너라는 값이 들어와서 성립이 되고 감히 정의가 되어서, 내 삶을 이루는 수식이 되었을 뿐인 셈이야.”
이안은 눈을 내리깔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헤이든의 몸에서 나오는 엷은 빛이 그의 얼굴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널 사랑하면 겸허해져. 세상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겼던, 그 빛나는 자신감들이 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하지만 난 네가 어떤 변수가 되어서 내게 오더라도 좋은 거야. 이해하겠어?
그러니까 너에게만은 가능한 한 영영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서 계속해서 네 곁으로 돌아오는 거야. 계속해서…….”
그러고서, 이안은 헤이든의 뺨을 쥐고 있던 손을 내리곤 그의 어깨에 제 눈가를 아주 묻어버렸다. 그의 어깨에 기대지 못하던 시간에는 제 무릎께에 그렇게 했듯이.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과 외부 세계를 첨예하게 달리 생각하는 그 같은 인간이, 피부 너머에 있음에도 자신인 것처럼 귀히 여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게 영원히 자신과는 다를 것을 알면서도.
이안이 어깨에 얼굴을 묻을 즈음, 헤이든의 얼굴은 이미 잔뜩 붉어진 채였다. 꼭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양. 하긴, 고백. 그것도 제법 절절한 고백이 맞기는 하다만. 헤이든은 속으로, 진짜가 아닌 너도 인정하겠다는 말에 얼굴을 붉혀대는 모습은 조금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자신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으니,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이안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웃었다. 목소리에 장난스러운 투정이 섞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건 아쉬운걸. 네가 날 내가 아닌 무언가 대체된 다른 존재로 본다면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네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은 언제나 변하고, 그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겠지만. 난 그 변화의 기반이 된 환경의 변화가 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아쉬워.
그러니까 이건 옛날에 맛있게 먹었던 간식을 지금 먹어봤자 그 맛이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먹어보고 싶은 거랑 비슷한 감정이겠지. 게다가, 지금 같은 경우는 그 간식을 내가 질려서 그만 먹게된 게 아니라, 갑자기 간식을 팔던 디저트 가게가 문을 닫아서 더는 그 간식을 못 먹게 된 것 같은 상황이니까.”
그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곤 분명한 농조로 말을 잇는다.
“그래도, 불평할 생각은 없어. 죽은 건 내 책임이기도 하고.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난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의 변화라고 해도 그게 변화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난 네가 이런 사람이라서 좋아하는 건데, 네가 이런 식으로 네 생각을 전부 늘어놓아 버리면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헤이든은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으며 이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난 적어도 아직까지는 내가 분명 널 사랑했던 헤이든 멀 하브고, 다른 무언가라고는 생각 안 해. 그러니까. 인간을 흉내 내는 새로운 다른 존재를 흉내 낼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말한 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내가 다른 존재 같다면 네게 난 헤이든 멀 하브가 아닌 그의 대체품이 되는 거고. 아니라면 그 반대가 되겠지. 어차피 네 말대로 사람이란 타인의 <진짜> 모습은 둘째치고서라도 자신의 <진짜> 모습조차 모르는 생물이니까. 달라질 건 없어. 달라지는 건 오직 네가 내 어떤 면을 보는지에 대한 사소한 차이뿐이겠지. 네가 날 어떻게 보든 난 내 모습 그대로 존재할 테니까.
그러니까…… 넌 나한테 변명할 필요가 없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헤이든은 눈앞에 마주한 이가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머리에 입 맞추며 웃었다.
“넌 그냥 내가…… 널 사랑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기만 하면 돼.”
“누가 예전처럼 사랑 안 한다고 했어? 네가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랑하겠다는 얘기였지.”
투덜대듯 말하곤 이안은 웃었다.
“디저트 가게 문 안 닫았는데.”
그러곤 그는 고개를 들어 헤이든과 코를 맞댔다. 금세 입술을 포갤 듯이 얼굴을 마주하고선.
“먹어볼래?”
“누가 네가 날 사랑 안 할 거래? 예전이랑 똑같은 방식은 아닐 거라 이거지. 디저트 재료 일부가 바뀌었으니까. 레몬 젤리 케이크랑 레몬 사탕 케이크는 맛이 다르잖아?”
코를 마주 문지르다, 눈짓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헤이든이 웃었다. 그러고는 입술과 입술 사이에 약간의 틈을 둔 채 입술을 가볍게 맞물렸다.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응.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니까. 가게가 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먹을 거야.”
짧은 침묵 새로 입술이 영원처럼 맞물린다. 어떤 숨도, 타액도 오가지 않지만, 그 자체로 영혼이 맞닿아 굳어 뭉친 것처럼, 둘은 제법 길게 움직임을 멈춘 채 그대로 있었다. 입술이 살풋 떨어지면 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예전이랑 같은 맛인 것 같아?”
그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입술을 마주 부볐다.
“원재료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가공법만 달라서, 맛은 별다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안은 애교스럽게 헤이든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당겼다. 품에 안기는 부피감은 그대로다. 부러 만지려 든 건 아니지만, 자연스레 손끝에 감기는 비늘을 느릿하게 쓸어보기도 하고.
“글쎄, 한 번 더 해봐야 알 것 같은데…….”
스스로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헤이든의 얼굴이 묘하게 벌갰다. 저 스스로 빛을 내는 중이었는데도 티가 희미하게나마 날 정도로.
“하지만 가공법이 다르다는 건 식감이 다르다는 뜻이고 식감이 다르다는 건 줄 수 있는 느낌이 다르다는 뜻이지.”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한숨을 쉬다가, 헤이든은 애살스레 제 꼬리로 그의 손을 쓸어보았다. 그러고서는, 느른하게 움직이는 꼬리와 달리 아침 메뉴를 말하듯 느긋한 투로 말을 잇는다.
“이런 모습으로는 못하는 것도 많잖아?”
“물론 그건 그렇지.”
이 와중에 반인 반어는 성감대가 어디일지를 생각하는 자신을 두고 이안은 조금 웃었다. 생각을 더 이어가는 대신 그의 꼬리를 느릿하게 쓸어보았다. 손끝에 자르르 걸리는 지느러미와 비늘결이 생경했지만, 덕분에 더 호기심이 드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생식을 하는 동물이라면… 까지 생각이 닿으면 생각을 아주 그만둔다. 기침하듯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허리를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그런 건 다음에 실험해 보자. 일단 지금은 너랑 입맞추고 얘기하고 싶어.”
실험을 할 거리가 있나? 헤이든의 입장에서, 물고기의 성감 따위는 생각해 본 적조차 없기에 명확한 상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뇌에 전기자극을 주듯 물고기에게 전극을 연결하는 상상을 하다 키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엔 붉어진 낯으로 당황한 듯 잠깐 입을 벙긋거리다가 어설피 웃었다.
“당연하지. 지금 여기선 그런 거 못 해.”
그러고서 헤이든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이안의 뺨에 손끝을 문지르며 헤실거렸다.
“나도 너랑 입 맞추고 얘기하는 게 좋아. 사실 네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그냥 네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꽤 마음에 드네. 그러고 보니, 넌 어디서 머물고 있어? 이 근처에서 인가는 못 본 것 같은데…….”
“다른 데선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말이야…….”
어설피 웃는 얼굴에 대고 이안은 마구 입술을 눌러댔다. 그리곤 그의 손길을 받으며 마주 웃었다. 대수롭잖다는 듯 사실을 말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 근처에 저택이 하나 있던데? 운 좋게 거기에 걸려서 거기 머물고 있어.”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헤이든은 순순히 이안의 입맞춤을 받았다. 이따금 틈이 날 때면 그의 얼굴에 대고 마주 입술을 누르기도 하고. 그러다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택? 그런 게 있는 줄은 몰랐네. 흉가 같은 거였어?”
“아니? 멀쩡히 주인이 있던데? 꽤나 오래된 곳 같았어.”
“음, 내가 못 본 모양이네. 그 주인은 믿을만한 사람인 것 같아?”
“응, 느끼기엔 그래. 꽃을 키우더라. 파란 꽃잎이 인상적인…….”
“파란 꽃잎?”
잠깐 끔찍한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헤이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어 확신할 수는 없는지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내쫓고는.
“……세상에 파란 꽃은 많으니까. 네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네. 어쩌다가 그 저택에 머물게 된 거야? 네가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잖아.”
“이쪽으로 오던 도중에 차가 펑크가 났거든. 완전히 타이어가 터져서 오갈 방도가 없었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리길래. 그걸 따라갔더니, 저택이 있더라고.”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고? 다친 곳은 없어?”
“없어. 보다시피.”
“그건 다행이지만…… 대체 어쩌다가 타이어가 터진 거야?”
“동물을 잡을 용도랍시고 쇳조각을 깔아뒀더라고. 이상하지?”
아무렇잖게 말하곤 웃는 이안과 달리 헤이든의 표정이 잠깐 사나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굳이 네게 그 말을 한 사람의 험담을 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그 사람의 집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러면 난 어디 머물러야 해? 네 집에 갈 수 있어? 하하.”
“으음, 사실 난 갈라테이아들 사이에 받아들여진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를 데려가는 건 힘들 것 같아. 넌 물속에서 살기에는 너무 약하기도 하고……. ……그래도 방법을 찾아볼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겠다.”
곰곰이 고민하다 결국 생각을 거두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헤이든은 미소 지었다.
“돌아가기 전에, 요즘 고민되는 일은 딱히 없어? 사소한 일이라도 좋아. 난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안고 잘 사람이 없어서 잠이 안 와.”
“하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그럼 네가 가기 전에 안아줄까? 같이 나갈 수는 없으니까. 대신 내가 안았던 감각을 기억할 수 있도록…….”
“……좋아.”
그럼 해사하게 웃음이 피었다. 일순 헤이든에게서 나오는 빛이 조금 더 환해진 것도 같았다. 최소한 이안의 시선에선 그렇게 보였다. 심해 속 빛에 잠깐 멍해진 그를 품 안에 한아름 끌어안고 헤이든은 속살거린다.
“좋아. 그럼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 이러고 있자.”
“그러면 영영 돌아가지 않으려 할지도 몰라.”
그제야 이안도 웃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그 행간을 헤이든의 목소리가 잠깐 메웠다.
“나도 영원히 널 놓아주지 않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다시 주변은 조용해진다. 누구도 울진 않았다. 다만 조용할 뿐. 서로의 맥박이 고동치는 소리마저 엿들을 정도로 고요한 채, 꽤 오랫동안 그들은 서로를 안고 있었다. 안고 있는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결국 이안은 헤이든의 어깨에 눈가를 가만 묻었다. 이안이 저를 안은 팔에 힘을 풀 때까지, 헤이든은 얌전히 그에게 안겨선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깨에 눈가를 묻은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며 한참을 기다리다가, 먼저 이 애틋한 침묵을 깼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곤란하겠지?”
“……몰라.”
속눈썹이 그의 어깨에 눌리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비참한 것도, 혹은 한없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같은 얼굴로.
“안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 그게 네가 <너> 같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 없이 돌아가는 게 싫어서인 것 같다.”
그 말에 헤이든은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이어 그를 어르듯 다정히 웃곤, 그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아직 살아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물 밖에 나갈 수 없지만, 얼른 방법을 찾아 볼게. 어쩌면 물 밖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고, 너와 함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모두 실패한다고 해도…… 네가 날 찾아온다면 가끔은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네가 내일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날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난 오늘 널 만나서 기뻤어. 네 목소리를 들어서 좋았고, 네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서 좋았어.”
“차라리 안 찾아올 거면 화낼 거라고 말하지. 그러면 무서워서라도 올 텐데 말이야.”
이안은 힘없이 웃으며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술을 포갰다. 느릿한 숨, 그리고.
“날 육지로 데려다줘. ……다시 올게. 반드시.”
“……좋아, 기다릴게.”
헤이든이 갑작스레 이안의 등 뒤로 손을 길게 뻗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 산호 가지에 매달려 있던 동그란 무언가를 하나 따냈다. 마치 작은 과실과 같은 생김새에 옅은 빛을 내는 그것은, 자세히 보니 이안의 등 뒤와 발밑으로 우거진 산호초를 둘러 수백 개가 달려 있었다. 거대한 산호가 내는 빛의 근원인 셈이었다. 헤이든은 그것을 이안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눈을 휘어 웃었다.
“자, 아, 해봐.”
그는 꼭 어린애를 대하는 것처럼 굴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걸 먹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맛없는 건 아니지? 맛없으면 다음에 올 때 짜증 낼 거야.”
엄포를 놓듯 말하곤, 이안은 씩 웃으며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동그랗고 딱딱한 겉면에 혀를 대면 달콤한 맛이 사르르 배어 나왔다. 그대로 잇새로 굴려 씹으면, 아삭거리는 식감과 함께 입 안에 청량한 느낌이 감도는 것이, 까다로운 이안에게도 맛있는 경험이었다.
“맛이 나쁘진 않지?”
“자주 올까 봐.”
이안이 입 안에 머금은 것을 오물거리며 어눌하니 대답하는 것을 듣곤 잠시 웃던 헤이든은, 이내 그것을 입 안에 머금은 이안을 보며 턱을 괴고선 어딘가 아련하고 그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곧 다시 보자, 이안.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길.”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아침이었다. 이안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당연하게도, 그는 손에 처음 보는 열매를 쥐고 있지도 않았고, 물속에 여전히 빠져 있지도 않았다. 그저 이불만을 바르게 덮고선 씻고 막 잠들었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밝은 햇살이 그의 눈가를 환히 비추어, 빛을 받은 보라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어딘가 개운한 느낌마저 드는 아침. 아주 오래간만에, 숙면을 취한 듯한 기분이 들어 이안은 두어 번 눈을 깜박거렸다. 이 낯선 현실을 잡아채기 위해서. 밤 사이의 모든 일들은 결국, 저 스스로가 간절히 원해서 꾼 백일몽이었을 뿐이었나, 싶었다. 문득 저택의 사람들과, 지난 밤 조우한 헤이든이 같은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길. 정말 그 말이 찻물과 맞물려 어떤 이미지를 끌어낸 것뿐이었는지도 몰랐다.
문득,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두 번 정갈히 울렸다. 이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깥에서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 에리카였다.
“안녕하세요, 이안 씨. 아침입니다. 일어나셨나요? 아침 준비가 다 되어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식당은 1층 왼쪽 복도의 큰 문이니 준비를 마치시면 아침을 드시러 오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 밖의 인기척은 사라졌다. 담박하기 짝이 없는 안내였다. 남의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기 위해선 그래도 간단히 채비를 해야 했고, 이안은 그런 예의엔 소홀한 이가 아니었으므로 제 몸을 이끌어 욕실로 향했다. 등이 축축했다. 식은땀이었을까? 나이트 가운에서는 미묘하게 비릿하고 짭쪼름한, 바다 특유의 냄새가 감돌았다. 짠내에 절은 나이트 가운을 목욕 바구니에 던져버리곤, 이안은 욕실로 들어섰다.
간단히 몸을 씻으려 욕조에 들어가면, 문득 제 머리카락도 평소와 달라, 어딘가 뻣뻣함을 알아챘다. 머리카락을 문질러 비벼보면, 문지른 자리서부터 희미하게 짠내가 풍겨왔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바닷속이 아니라 뭍에 있었다. 옷가지도 달랐다. 잠들기 전에 걸쳤던 나이트 가운과 달리, 지난밤 자신이 걸치고 나갔던 옷은 당연히 외출복이었다. 머리 회전이 둔했다. 어젯밤의 기억은 악몽처럼 생생하기도, 혹은 전생처럼 아득하기도 했다. 바디 워셔 향에 새삼 머리가 어찔해지는 것도 같았다. 지난밤 꿈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탓이다. 어찌 되었든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건 같았으므로, 그는 재빨리 제 몸을 추스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집사가 일러준 대로 1층으로 내려가 왼쪽 복도의 큰 문을 열면,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품들이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방이 보였다. 코발트 블루 톤의 벽지에 아이보리 색으로 엷게 로코코 풍의 패턴 장식이 들어간 것이 고급스러웠다. 또한 벽에는 무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장식들이 점점이 박혀서는 샹들리에 불빛과 햇빛을 받아 자잘하게 반짝였다. 커튼조차 쳐져 있지 않은 크고 너른 창 여럿으로부터 일제히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방 안은 어둔 곳 하나 없었다.
한쪽 벽면에는 역시나 바다를 연상시키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듯한 산호 그리고 물고기 장식품들이 장식장 곳곳에 올려져 있었다. 이 방의 모든 것이 명백히 바다를 연상시키지만, 그럼에도 어젯밤 꿈에서 이안이 목격했던 심해의 아름다움에 비견하자면 이곳은 조잡한 모조품의 장일 뿐이었다.
아침부터 여전히 어두운 색의 옷가지로 온몸을 친친 감아 가린 주인이 긴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친한 이를 부르듯 자연스레 이안에게 손짓해 보였다. 그의 맞은편엔 이안을 위해 비워둔 듯한 안락의자가 하나 있었다. 여전히 살가운 얼굴로 목례하곤, 이안은 사양도 없이 그의 앞에 착석했다.
“좋은 아침이네요. 정말 잘 자고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 침대가 불편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얼굴이 한결 좋아보여요. 꽃차의 효력이 제법 좋았던 모양이지요?”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나폴레옹은 눈앞의 찻잔을 가볍게 손끝으로 퉁겼다. 깨진 곳 하나 없는 잔 귀퉁이로부터 맑은 울림이 났다.
“네, 가능하다면 구매라도 하고 싶은 정도였어요.”
이안은 너스레를 가볍게 떨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물론 그 뒤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것을 대화에 끄집어낼 정도로 눈앞의 그가 막역한 상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안은 자신의 심적 고민을 쉬이 토로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불면증에 도움이 되는 꽃을 재배하는 마을이 목적지라고 했었지요? 그러니까, 갈라테이아 지엽 근처 말입니다. 마침 그에 관해 할 말이 있는데, 당신이 오기 전, 에리카, 그러니까 이쪽 집사가 좋은 제안을 하나 가져왔답니다. 들어보지 않겠어요?”
“네, 어떤 제안인가요?”
“사실 당신이 가려는 그 마을에 있는 꽃은 우리 저택에서 가져가 재배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하청 업체인 셈인데…… 즉슨 이쪽이 오리지널이라는 이야기지요.”
나폴레옹은 느긋하니 검지를 들어 비어있는 찻잔을 가리켰다. 그렇게 하면 그 안에 금세 찻물이 차오를 것처럼.
“혹시 어젯밤에 마신 차가 불면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굳이 마을로 갈 것 없이 차가 수리되는 동안 우리 저택에서 머무르는 것은 어떠할까 물어보고 싶은데…… 어떤가요?”
그건 이상했다. 이안 본인은 불면증을 겪는 중이라고만 했지, 불면증을 고치러 왔다고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지도 갈라테이아 지엽을 보러 온 것이라고만 간단히 밝혀 두었을 뿐이었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혹은 그저 후한 이 특유의 오지랖인지. 이안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곤 웃어보였다.
“제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죠. 그건 그렇고, 제가 이 저택에서 머무르며 달리 하게 될 일이 있는가요? 차의 시음?”
요컨대, 후하게 구는 이유를 고하란 말이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혹은 모르고 넘긴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 할 일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이 저택은 손님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곳이 아니랍니다. 길 잃은 사람에게 쉴 곳을 제공하는 곳이야말로 이곳의 쓸모이지요. 당신은 그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쉬다가 돌아가면 됩니다. 어째, 간밤에는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었습니까? 기원 받은 대로 말입니다.”
그 말에 이안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눈꼬리를 휘어 환히 웃어보였다. 마치 뒤집어 놓은 카드를 마술사가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니까 결국 제게 차를 권하신 것도 다 이런, 좋은 결과를 예상하신 데서 나온 거지요? 사람의 낯을 읽는 데에 탁월하시네요.”
“이 나이쯤 되면 묘한 재주들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이곳에는 항상…… 방황하고 잠 못 드는 영혼들이 곧잘 모이기 때문입니다. 멀잖은 곳에서 바다가 노래하고 있으니까요.”
나폴레옹이 검지 끝으로 퉁겼던 찻잔에는 어느새 찻물이 차 있었다. 지난밤 들었던 것과 달리 붉은 찻물이었지만. 이안 앞에 놓인 찻잔에도 같은 찻물이 담겼다. 영국인이 습관처럼 아침으로 곁들이는 평범한 홍차, 향으로 추측컨대 마리아쥬 프레르 사의 웨딩 임페리얼인 듯했다. 그 흔해 빠진 관습은 타지에서 온 이의 동석으로부터 오는 위화감을 지우는 데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
“식전에 말이 길었군요, 미안합니다. 늙으면 말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배가 고플텐데, 식사를 들면서 마저 이야기할까요.”
“네, 좋습니다.”
인자한 미소에 서글서글한 태도를 유지하며 이안은 식기를 집어들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식사 매너는 어느 한쪽도 뒤져지는 쪽이 없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즈니스 테이블이라고 약간은 오해할 법도 한 풍경이었다. 식탁 위에는 막 만들어 김이 올라오는, 새우 베이컨 오믈렛과 단호박 크림 스프, 그밖에 간단한 조미료와 후추 등이 놓여 있었다. 단출한 듯 섬세한 테이블 세팅은, 아침 홍차는 물론이요 물이 든 잔 또한 잊지 않았다. 에리카는 시종일관 나폴레옹 곁에 서서 자리를 지켰다. 식기를 드는 나폴레옹의 손끝에는 흔들림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차의 위치를 알려주러 같이 나가지 않겠어요? 날씨가 아주 좋아요. 나가는 겸 내 저택의 화원도 구경시켜 주고 싶고요.”
“좋아요. 이 음식도 정말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주인은 이안의 말에 웃으며 화답하곤 품위 있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호의적인 분위기 안에서 식사가 끝나면, 나폴레옹의 뒤에 에리카가 섰다. 휠체어를 미는 동작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약간 크고 단단한 휠체어의 바퀴는, 다소 변덕스런 길 위도 가뿐히 굴러갈 듯했다. 과연 바깥 날씨는 좋았다.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고, 흰 구름이 군데군데 부드러이 뭉쳐 떠다녔다. 해가 환한 덕에 뺨으로 옅게 스치는 찬 공기마저 개운한 정도로 느껴졌다. 나폴레옹은 평온한 목소리로 운을 떼며 저택의 왼편 부지를 턱짓했다.
“이쪽이 화원이랍니다. 아주 작게 조성해 두었지만……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자부하지요.”
어젯밤에는 급하게 지나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예의 푸른빛 꽃들이 주를 이루는 아름다운 화원에는 군데군데 작달만한 가로등과 봉들이 세워져 울타리를 이루었다. 눈으로 훑기만 해도 자그맣고 여린 꽃잎들은 금방이라도 물이 통하는 모세관이 비칠 것처럼 얇았다. 바람이 분다. 일제히 푸른 꽃잎들이 한 방향으로 기우는 모습이 사뭇 장관이었다. 겨울 바람에 물 흐르듯 일렁이는 그 모양새는 포말이 일지 않는 밀물과 썰물을 연상시켰다. 마침 화원을 구경하는 사람들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 덕에. 이안은 꽃에서 풍겨 나온 향취 또한 만끽할 수 있었다. 앞선 감상 탓인지, 달콤한 향 사이로 미묘하게 바다 냄새가 짭쪼름하니 나는 듯도 했다.
“어젯밤 드셨던 차도 이 꽃잎을 말려 우린 겁니다. 불면증에 특히 효과가 좋지요. 기묘하게도, 특별히 이 지역에서만 잘 자라는 품종입니다. 우리는 이 꽃차가 황홀한 바다의 꿈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답니다.”
“……이 꽃은 이름이 무엇인가요? 처음 보는 꽃이네요. 저도 나름대로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 자부하는데……, 이런 꽃은 처음 봅니다.”
“<마르가리타 라크리마>라는 식물입니다. 진주 눈물이라는 뜻이지요. 이 근방에서는 갈라테이아라는 종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니, 인어의 눈물이 진주로 변한다는 전설처럼 그들의 눈물도 진주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은 이름인데, 어떤가요?”
“직접 교배해서 만드신 식물이신가요? 대단하시네요.”
순수히 감탄하는 어조로 말하며 꽃을 자세히 살피던 이안이 문득 고개를 들어 나폴레옹을 바라보았다.
“……갈라테이아라는 종은 무엇인가요?”
“인간들이 인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존재들이지요. 창백하고 차가운 피부와 심해에서 물결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해수면을 투과해 닿은 햇살을 받으면 별처럼 반짝이는 비늘.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태를 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안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제법 유쾌한 농담이라도 하는 양.
“그래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갈라테이아는 아닐지 생각했지 뭡니까. 이런, 젊은 사람에게 하기엔 적절치 않은 농담이었나요? 아마 근처 도서관에 그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무척 위험한 존재라는 건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 근방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이니까요.”
“안 그래도 침실에 인어 태피스트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걸 가리키는 것이었군요. 그것에 이미 매료되신 건 아닙니까? 저도 그럴 것 같고요. 도서관의 위치를 알려주시면 저녁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워섬길 것도 같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안의 농담에 마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매료되기엔 지나치게 사악한 존재들이지요. 마침 저번에 하루 묵고 갔던 관광객이 두고 간 관광 안내서가 응접실에 있을 거예요. 무료하다면 그걸 보면서 이 주위를 둘러보아도 좋겠군요. 다행히 오늘은 날이 그다지 춥지 않으니…….”
그렇게 나폴레옹과 함께 자그만 화원을 가로질러 나올 즈음이었다. 집사와 주인이 잠시 등을 돌린 찰나, 이안의 발밑에 뭔가 거친 소리를 내며 밟히는 것이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 조각이었다.
“그럼 이제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직접 가시려고요? 가는 길이 꽤 험합니다.”
“하지만 손님을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죠. 에리카가 있으니 잘 이끌어 줄 겁니다.”
나폴레옹이 웃으며 집사를 가리키자, 이안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먼저 앞장섰다.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약간의 나뭇잎과 성에로 덮인 차량에 도착했다. 차의 상태는 여전했다. 헤드라이트가 훤히 켜져 있고, 한쪽 바퀴가 완전히 터져 내려앉았다. 간밤에 공기가 더 빠진 것도 같았다. 이안이 리모컨을 들어 헤드라이트를 껐다. 나폴레옹의 휠체어를 밀며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에리카는, 차 가까이 도착하자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곤란한 눈치로 말했다.
“이런…… 수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데에 하루 내지 이틀 정도 걸리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럴 때 필요한 종류의 물픔은 저번 조난자를 구조할 때 썼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하지만 이안 씨는 저택에 조금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으니 다행이군요. 차 수리가 끝날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폴레옹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지나치게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내게 뭘 바라는 것일까? 그런 은근한 의심과 함께. 이안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었다. 친근한 손자처럼 구는 모양새는 여전하다.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쉬고 가라 있는 곳이라 하셨으니 마음껏 쉬고 놀고 먹고 하려고요,”
“좋습니다. 마음껏 편히 쉬다 가십시오.”
나폴레옹이 먼저 가보라는 듯 손짓해 보였다. 그대로 집사와 주인을 뒤로 한 채 저택으로 돌아온 이안은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오늘은 벽난로에 불을 때지 않았던 모양인지 방 안에는 약간 냉한 공기가 감돌았다. 피아노 소리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지난 밤 맡았던 차의 단내는 여전히 공기 중을 부유하다 방문자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잘 관리되어 광이 나는 그랜드 피아노를 뒤로 하고 이안은 시선을 내렸다. 지난 밤 그가 나폴레옹과 독대했던 커피 테이블 구석엔 3단 브로슈어 하나가 단정하게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예의 그 관광 안내서인 듯했다.
이안은 제 것인양 그것을 집어들어 펼쳤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브로슈어는 미감으로 판단하기엔 나쁘지 않았으나, 어필하는 내용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인근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하는 곳이라곤 이 지역의 명물이라는 해안 도서관 정도였고, 그 외에는 바다 지형에 대해 소소한 설명이 들어 있는 정도였다. 도심에서 매우 떨어진 지역이었으니, 별달리 개발되어 만든 건물이 없을 만도 했다. 그렇게 브로슈어를 읽고 있자니, 한 이름 모를 사용인이 청소 도구를 들고 문을 열었다. 그는 방 안의 이안을 보고선 찔끔 놀라 고개를 숙였다. 뒤돌아 나서려는 그를 이안이 붙들어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이 지역에 사시는 분이지요?”
이안은 특유의 살가운 톤으로 말을 붙이며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이 <해안 도서관>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해안 도서관이라면…… 이 저택에서 꽤 가까워요. 뒤쪽 길로 돌아서 나무 사이로 난 길을 쭉 따라 내려가다 보면 절벽이 나오거든요. 그 절벽을 따라 걷다 보면 금세 도착한답니다.”
의외로 깔끔한 설명이었다. 이안은 감사를 표하곤 브로슈어를 든 채 방을 나섰다.
고용인이 알려준 길을 따라, 나무 사이로 난 길을 쭉 따라 내려가고 있으면 금세 바닷가가 나왔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한 무더기의 바다 냄새를 이끌고 왔다. 문득 이안은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젯밤, 그가 잠 못 이루고 들었던 그 파도 소리와 꼭 같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아득하게 흩어지는 소리가 이안의 두 귀를 먹먹하게 메웠다. 문득 고개를 숙이면, 그가 걷는 방향 앞으로 거친 모래 위에 단단히 찍힌 발자국이 있었다. 향하는 발자국은 한 줄, 돌아오는 발자국이 없었다. 어쩐지 제 발자국과 꼭 닮았다 싶어 이안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해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래, 이곳은 자신이 어제 방문했던 그곳이었다. 자신이 헤이든의 유골을 뿌려준 곳이자…… 어제 새벽, 잠결인지 환상인지 모를, 인어 모습을 한 헤이든, 혹은 헤이든의 모습을 한 인어를 만났던 곳. 그 낮은 절벽이었다. 파랑은 그 꿈같은 새벽과 다를 바 없이 절벽가로 밀려들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이안은 바닷가 바위를 짚으며 잠시 휘청였다. 그게 정말 꿈이 아니라면. 그 물결은 한없이 아득하고 신비로워서, 꼭 다시 헤이든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이안에게 안겨 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헤이든의 얼굴을 한 인어가 저 물결 사이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사랑하던 것이 되살아나 그를 사랑해주는 꿈. 조금 형태가 달라졌고 삶의 방식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자신 그대로인 제 짝이 저를 사랑해주는 꿈.
눈을 깜빡이자, 이안은 어쩐지 제 고개가 완곡히 바다 쪽으로 틀어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순간 저 파도에 홀릴 뻔 했던 것도 같았다. 어젯밤에 이곳에 왔던 게 그저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혼란스러움에 걸음을 마저 옮기다 보면, 인적 드문 절벽 해안가로부터 그리 멀잖은 암석 지대 위에 덩그러니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건물의 왼쪽으로는 겨울을 맞아 한껏 마른 나무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본래는 푸른 잎이 무성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도 공원인 모양이었다. 그 앞에 자리한 건물, 아마도 도서관일 그곳은, 희고 거대한 조개껍데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채도 없이 말끔한 흰색이었던 탓일까, 그 모양새는 새파랗게 청명한 겨울 하늘과 그만큼 푸르른 바닷가에 사뭇 어울렸다.
그리고 이안은 생각한다. 이상하지, 너와 관련된 일은 모두 지나치게 현실 같고, 그래서 지나치게 꿈 같기도 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처럼,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영원한 불가해이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고, 공기처럼 내 주변을 감돌아 너의 부재를 상상하기조차 어렵게 만드는.
그는 느릿하게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겨울을 맞아 을씨년스럽게 마른 나뭇가지들은 서로 몸을 부빌 적마다 스산한 소음을 냈다. 마치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이안은 다시 생각한다. 내가 너의 부재에 괴로워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 네가 죽었다고 해서 네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네가 있던 몇 년, 네가 없던 6개월, 너의 부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너를 더욱 선연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비록 나의 머릿속에 감도는 허상과도 같았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감미롭고 사랑스러웠노라고.
어느 날은 드물게 자책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널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라서 사랑했던 건 아닐까? 내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그 진정성이라는 것은 결국 허상일 뿐인데도. 그걸 알면서도, 이따금 내가 네게 닿은 적 없다는 가정이 머릿속에 스칠 적마다 끔찍할 정도의 괴리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곤 했다. 그리고 네 죽음으로 인한 너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그 괴리감은 조금씩 옅어졌다. 애당초 의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가 날 바꿨어. 네가 내게 새겨졌지, 마치 거대한 반석에 대고 정으로 쳐서 새겨진 글귀처럼.
너를 사랑해서 세상에 더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웠다. 너를 사랑해서 약한 것들을 보듬는 방법을 배웠고, 너를 사랑해서 사람에 관심을 두는 법을 배웠다. 문득 지난 밤 꿈결 같은 물 속에서 네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었던 너라는 값이 들어와 내게 있던 사랑이라는 수식이 완성된 거라고.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것만 같고. 실제로 그럴 것이고. 우리는 완벽하게 맞물리길 원한 적 없었고. 그럼에도 나는 널 사랑하고.
이안은 거대한 도서관 앞에 섰다. 숨을 한번 몰아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크고 흰 정문을 밀고 들어가면, 널찍한 홀이 보였다. 안의 구조는 단순했다. 홀의 정중앙에 엘리베이터가 한 기 설치되어 있고, 조개 껍데기를 닮은 외관 탓인지 위층까지 차차 층이 넓어지는 구조였다. 그리고 모든 층의 가운데로는 로비를 향해 구멍이 뚫려 있어, 로비에서 모든 층을 올려다 볼 수 있고, 모든 층에서 로비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크게 트여 있었고, 그 너머로 무수한 자갈이 굴러다니는 해안이 보였다. 이안은 정문의 바로 옆 데스크에 비치된 도서관 팜플렛을 집어들었다.
이안은 아래부터 차례대로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 하나에 관광적 기능을 모두 몰아넣기로 작정한 것인지, 건물 안은 세련된 신식에 눈이 닿는 모든 곳이 깨끗했다. 1층에는 디지털 열람실, 복합 상영관, 미디어 센터, 노트북 이용실, 다국어 정보실, 전시실 등 미디어를 열람하고 이용할 수 있는 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복합 상영관>에서 무언가 상영 중인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문 앞에 달린 이름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인어의 저주> 상영 중. 애니메이션, 12세 이상 관람가. 그 아래로는 자그마하게 “쉿! 상영 중이니 조심조심 들어와서 함께 상영해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딱 그 정도의 안내가 전부였다. 아마도 아동용인 듯했다.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가면, 몇 명의 아이들이 나무 그루터기 모양의 쿠션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뒤쪽에 빈 쿠션이 많았으므로, 이안은 개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듯했던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기엔 다소 괴상한 내용이었다.
한 바닷가 마을에,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던 한 연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시기한 인어의 저주로 인해 한쪽의 몸은 흉측하게 변하고 말았다. 연인이 흉측하게 변했어도 남은 한쪽은 여전히 사랑을 잃지 않았지만, 인어는 끝내 그것마저 시기하여 연인을 죽이고 자신이 연인의 행세를 하며 남은 한쪽의 앞에 나섰다.
[이것 봐, 나, 네 연인과 똑같이 생겼잖아. 나도 사랑해줘.]
인어가 자신들의 사랑을 시기하여 자신의 연인을 살해했음을 깨달은 남은 한쪽은, 연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인어의 앞에서 절벽으로 투신자살하였다. 그 장면을 줌아웃하며 애니메이션은 끝났다. 그림체 자체는 아기자기한 동화 분위기였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아이들은 저마다 연인에게 저주를 내린 인어를 욕하며 상영관을 나섰다. 이안은 재상영 전 휴식 시간을 30분 갖겠다고 안내문을 띄운 화면을 멀거니 바라보다 일어나서는 전시실로 향했다.
미디어 아트를 전시 중인 전시실은, 대부분 바다에 관련된 예술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복도의 양옆으로 바다를 찍은 사진이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복도의 맨 끝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밤바다를 세심히 묘사한 붓터치가 윤곽에서 더없이 과감해지는 것이 인상적인 화풍이었다. 색감 또한 뛰어나서, 물감들이 두텁게 발라진 거대한 캔버스는 물결치는 파도가 금세 캔버스 바깥으로 흘러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아니, 정말로 물결치고 있었다. 이안은 곧장 그림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디스플레이에 재생되고 있는 작품이었다.
화면 안으로는 물결치는 바다가 달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었다. 어쩐지, 이것과 완전히 같은 풍경을 어제 새벽에 봤던 것만 같아 이안은 그림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한동안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나타난 소년이 파도 물결에 다가갔다. 그리고, 파도 물결 사이에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머리를 내밀었다. 파도 사이로, 파랑보다도 반짝이는 비늘을 덮은 물고기의 꼬리가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소년을 붙잡았다. 꼭, 간밤에 보았던 헤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소녀는 소년을 잡아당겼고, 소년은 소녀와 함께 물속으로 빠졌다. 소년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고…… 밤바다는 고요하고. 영상은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된다. 이안은 시선을 내렸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의 작품이었다. 작품을 보고 있던 그때, 곁에 추레한 노인 한 명이 다가와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갈라테이아들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처럼 그려지지 않았는데, 다 사냥꾼들이 늘어서 그래, 사냥꾼들이… 갈라테이아를 인간과 이간질 시키려고. 천하의 몹쓸 놈들…….”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이 소리 내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갈라테이아에게 홀렸다!”라고 놀리는 소리도. 노인은 하염없이 그리운 것을 좇듯 작품 속의 인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갈라테이아에 대해 잘 아십니까?”
불쑥 이안이 질문하자, 노인은 그제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자네에게서 갈라테이아의 향이 나는군. 사냥꾼을 조심하게나. 자네는 갈라테이아를 놓치지 않으려다 아예 빼앗기지 말아.”
“그러면 놓아주어야 합니까?”
노인은 이안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을 더듬어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더 그 키스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도 좋아…….”
이안은 고개를 가로젓곤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향했다. 해양 전문 서적관이었다. 이곳에는 해양에 대한 전공 서적부터 논문집, 신화서, 심지어는 동화책까지 다수 비치되어 있엇다. 벽지는 남색으로 리모델링 되어 물거품 모양의 장식이 이곳저곳에 달려 있어 꼭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안이 입구로 들어서면 근처에 비치된 도서 검색대가 보였다. 그는 그 앞에서 바로 떠오르는 글자를 입력했다. 갈라테이아.
수백 건의 자료가 화면에 떴다. 스크롤바를 내려보고 있자니, <갈라테이아 지협: 갈라테이아의 기원>과 <갈라테이아 사냥>이라는 책이 읽어볼 만해 보였다. 이안은 서가에서 그 두 책을 찾아서는 구석의 적당한 벤치에 앉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책은 사람의 손이 한참 닿았는지 유독 너덜너덜했다.
[… 하지만 무엇보다도, 갈라테이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네레이스들 중 하나의 이름이다. 네레이스는 바다에서 길을 잃은 뱃사공의 뱃머리를 돌려주고 바다에서 곤란에 빠진 영웅들을 돕는 바다의 님프를 말한다. 갈라테이아 지협은 사방이 깎아지른 해식애인 탓에 배가 정박할 곳이 마땅치 않아 무역이 발달하지 못한 비운의 지형인데, 그러므로 이곳에 배가 오는 일은 길을 잃은 경우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지협에만 접어들면 길을 잃었던 배가 저절로 뱃머리를 돌려 제 갈 길을 제대로 간다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곤 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지협이 갈라테이아, 바다의 님프, 네레이스의 수호를 받는 곳이라는 소문이 생긴 것이다. 지협의 이름도 그때 붙여졌다. 갈라테이아 지협.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바다의 님프들이 인간을 돕는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도, 세이렌과 같이 인간을 홀린다는 여론이 급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 인간을 바다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
두 번째 책은 아주 짧은 수필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인간이 심해까지 내려가는 데에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젖은 숨결의 모독적인 지배자들의 힘을 빌려서 ■■■■ ■■■. 혹은 인간이 아니거나. 갈라테이아는 꼬리를 제압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 꼬리 지느러미를 잘라서 뭍까지 끌어올린 뒤, 수조에 가두면 된다. 건강 상태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것들은 영원히 재생하므로. ■■■■ ■■■■■■고, ■■■■■ ■■■■한 뒤에 그것이 역린을 가지고 있다면 파괴하라. 대부분 잡혀 올라오며 역린을 바닷속에 버리기 때문에, 역린을 ■■■■ 확률은 극히 적지만.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갈라테이아들은 죽지 않는다. ■■■…]
악의적인 소문을 만드는 건 여론을 합리화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이안은 책을 덮고는 다른 키워드를 더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심해, 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나온 책을 붙들고는 또 열심히 읽었다.
[… 심해는 한 때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지역이라 불리우던 때가 있었다. 산소와 빛의 부족, 그리고 수압 탓이었다. 그러나 생명체가 산소와 빛의 부재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심해 속의 생명체들은 다수 뭍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몇몇 몰지각한 연구자들 탓이었다. 그들은 심해의 생물들에게 뭍의 생물들에게는 없을 지고한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며 그 형태학을 탐구하는 연구를 시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심해의 생명체들은 대체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심해에 생명체가 산다는 것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생충이며 치명적인 세균을 보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심해 생물을 섭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 심해 평원이 죽음의 해저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보아라, 심해의 생명체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종을 가지고서 그 제각각의 방식으로 심해에서 생존하는지. 확실한 것은, 심해 아래의 존재들은 이 뭍 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리란 사실이다.]
단편적인 정보들은 머릿속에서 곧잘 맞춰지지 않고 따로 놀며 상식을 희롱했다. 어느 부분은 아는 것이고, 어느 부분은 예상한 적 없는 것이었고. 자신의 범인스러움에 자못 한숨을 쉬며 이안은 책을 내려놓았다.
6층은 일반 서가였다. 가장 최상층이자 가장 넓은 층이었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갈 해안의 경치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맞은편으로는 잎사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나무들이 가득한 공원도 보였다. 공원의 정중앙에 자리한 화단 안에는 푸른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안이 저택에서 보았던 그 꽃의 종류인 듯했다. <마르가리타 라크리마>: 기부 식물 이라는 팻말이 화단의 앞에 꽂혀 있었다. 약간 짭쪼름한 바다 냄새와 달콤한 향.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그런지, 겨울 바다 여행을 온 관광객들이 조금 보였다. 그들은 마른 겨울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주변 풍경을 이리저리 살피곤 했다.
화단을 바라보고 있자니, 화단을 가운데 두고 이안의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흰 머리카락을 산발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수상쩍은데, 말하는 내용도 만만치 않았다.
“아… 아아, 올리버, 에이미… 아아. 너희들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어째서… 흑흑, 어째서… 왜 여기.”
울부짖는 목소리가 소름 끼칠 만큼 선명했다. 여자는 진심으로 통곡하며, 바다에 끊임없이 가라앉는 듯 흐느꼈다. 비탄에 젖은 어깨는 연고 없는 이가 보기에도 가엾어 보일 만큼 잘게 떨렸다. 꽃밭을 바라보는 눈빛이 슬픔과, 애정과, 증오로 가득 찼다. 문득 여성이 번뜩 든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당신….”
여자의 눈에 광기가 선득하니 빛났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화단의 울타리를 넘더니, 여자는 발바닥에 닿는 꽃들을 되는대로 짓밟으며 이안 쪽으로 일직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걸음이 동물처럼 재빨랐다. 이안은 그를 설득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대신 몸을 돌려 그대로 달렸다. 뒤에서 무언가가 사납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재바른 걸음이라 해도 성인 남성의 보폭을 작달만한 여성이 따라잡긴 어려운 법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공원 밖으로 벗어나 숨을 가볍게 고르고 있자니, 저 멀리서 끔찍이 울부짖는 여자의 괴성이 들렸다. 사정을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늦은 것이어서, 이안은 생각을 비울 겸 자갈 해안으로 잠자코 향했다.
겨울 해안 위로 광활한 하늘이 트여있었다. 바다 향이 물씬 풍기고, 파도 소리가 밀려왔다 물러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로 이루어진 해안이었으므로, 파도가 들이닥쳤다 빠질 적마다 자갈이 우수수 굴러가는 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햇볕에 적당히 달은 겨울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이며 귓가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이안은 해안을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구두굽이 자갈 사이로 미끄러져 걸음걸이가 불안할 만한 지형인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문득 그의 시선 안에, 자갈 사이로 유달리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아주 작은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구깃거리는 종이가 한 장 돌돌 말려 있었고, 입구는 누군가가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봉해 놓았다. 이 병을 만든 이가 누구인진 몰라도, 그는 병목에 코르크 오프너를 거친 끈으로 묶어 놓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바다에 던지는 메시지치고 지나치게 친절한 감이 있었다.
안을 열어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보였다. 습기 탓인지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올■버, 에이■, 너희가 돌아■지 않아■ 다들 걱정이 많아. 내가 조만간 찾으러 인간의 ■를 먹고 올■갈게. 메시지를 본다면 ■을 적어서 다시 ■도 사이로 던져줘. -키■으로부터-]
수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느새 밀려닥친 석양이 해수면을 빨갛게 물들였다.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날이 어두워져 길을 잃으면 곤란하니까. 이안은 감흥 없는 얼굴로 유리병 메시지를 다시 읽다가 고이 접어서는, 코르크 마개로 뚜껑을 닫고 파도 사이로 던졌다. 풍덩, 이라기보단 퐁당, 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문득 그는 꽃을 짓이기며 제 쪽으로 걸어오던 여자의 분노를 떠올렸다. 발바닥 아래서 짓이겨지는 진주의 눈물은, 되새겨 생각해보면 꽤 상징적이었다. 어렵잖게 이안은 여자의 입에서 불리웠던 이름이 그가 방금 찾은 쪽지에 적힌 이름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유추해낸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자신에게는 그의 행보에 간섭할 이유가 없었고, 그의 행보를 위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바다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저택으로의 길을 찾아 되돌아간다.
어렴풋 하늘의 붉은 기가 가실 즈음에 이안은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 꼭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화원을 가꾸던 어느 사용인이 그를 불러서는 ‘어르신이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라고 말했다. 이렇다 할 특이사항도 없는 호출이었으므로, 이안은 잠자코 거기에 응하기로 했다. 벽지의 선명한 남빛을 배경으로 빛나는 장식물들이 즐비한 식당은 전날과 다를 바 없이 여전했으나, 그것을 보는 이안의 감상은 조금 달라졌다. 햇빛 대신 방을 환히 밝히는 샹들리에와 벽에 걸린 랜턴들이 바닷속에서 물고기를 현혹하기 위해 어선이 불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나친 감상이야. 이안은 눈을 깜빡여 감상을 덜어내곤 저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향했다. 긴 식탁 끝에 앉은 주인이 그를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지난번처럼 그의 맞은편에는 이안을 위해 비워둔 듯한 안락의자가 하나 있었다.
“이 주변에 볼만한 건 찾으셨나요?”
나폴레옹은 가벼운 어조로 말문을 텄다.
“네, 꽤 흥미로운 전설들이 많더군요. 특히 도서관은 정말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다들 갈라테이아 이야기를 참으로 좋아하더군요.”
“아무래도 이 지역은 바다와 가깝다보니 다들 바다에 관련된 전설에 흥미가 많은 편입니다. 게다가, 종종 어부들에게서도 갈라테이아에 대한 목격담이 나오는 탓에 다들 어느 정도는 갈라테이아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지요. 물론, 터무니 없는 전설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오늘의 메인 메뉴는 랍스터인 모양이었다. 담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요리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랍스터 꼬리 구이에서 피어오르는 갑각류 특유의 향이 향긋하고 짭짜름했다. 랍스터 껍데기를 잘라 슬릿을 만들어, 흰 살을 탱글탱글하게 드러내곤 레몬조각과 백리향으로 장식한 것이 주방장이 꽤 솜씨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가리비 껍데기에 담아 장식한 내장 비스크 소스가 있었다. 그 외에도 날치알 쉬림프 파스타, 수란 샐러드 등, 바닷가 근처임을 상기시키는 메뉴들이 테이블 위로 즐비했다. 색 없이 투명한 와인 글라스에는 식사와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이 담겨 있었다. 산도와 탄닌이 적당한 게 매력적이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갈라테이아가 사람이 되기도 하나요?”
“글쎄요.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모습을 흉내낼 수는 있다고들 합니다. 도로의 쇳덩어리들도 그래서 깔아둔 것이고요.”
“아하. 그것들이. 선생님께서 깔아두신 거라서 입막음을 하시려고 이렇게 절 대접하시는 건가요?”
“이런, 당신은 남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방금 그 말에 마음이 서운해질 뻔했으니까요. 하하, 물론…… 차를 본의 아니게 망가뜨린 것에 대한 사과도 약간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대접하는 것이 스스로의 행동으로 파생된 피해를 중화시키기 위함은 아니랍니다. 무엇보다도, 그 쇳덩어리를 철거할 생각도 없고요. 저 또한 사냥을 하니까요.”
“그 즉슨, 갈라테이아를 사냥하신단 뜻인가요?”
“상상력이 뛰어나거나, 재치가 빛나는 질문이었습니다만, 아니에요. 난 그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짐승들을 사냥할 따름입니다. 이 근처에는 유해 조수가 상당히 많아서요.”
“그렇군요. 보통 사냥꾼들은 트로피를 삼을 겸 자기가 잡은 것들을 전시해두곤 하는데. 여긴 그런 게 없어서 체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거실에 들여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짐승의 고기나 털처럼 도움이 되는 부분이라면 모를까. 피와 내장 따위를 전시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런 악취미는 없습니다.”
“뭘 잡으시는지 굉장히 궁금해집니다만…… 이쯤까지 말씀을 안 하시는 거로 보아 말씀해주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가끔 그런 분들이 있으시죠. 드러내놓고 선행을 하지 않으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이안은 랍스터 꼬릿살을 작게 잘라 먹었다. 나폴레옹은 사람 좋게 웃으며 나이프로 랍스터 꼬리를 헤집었다. 그러고선 꼬리 한 점을 베어 삼킨 뒤 흡족하게 웃었다.
“들어도 못 믿으실 겁니다. 오늘따라 꼬리 구이가 제법 맛있게 잘 되었군요. 많이 드시길 바랍니다.”
영감님 의뭉스러우시긴. 이안은 그리 생각하곤 웃으며 랍스터 꼬릿살을 삼켰다. 찜찜하기 그지없는 식사였다. 입가를 닦고 있자니, 나폴레옹이 다시 말을 붙여왔다.
“아, 그러고 보니 이안 씨의 차 문제 말인데…… 내일 점심 쯤이면 수리가 끝날 것 같다더군요. 어떻게, 돌아가실 때 차를 조금 챙겨드릴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인사를 마치고선 나폴레옹은 그를 놓아주었다. 영 이상한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식사 탓인지 이안의 기분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맛있었지. 이 주변에서 잡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을 둘러보고 있으면, 마주치는 사용인들마다 그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걸어왔다. 복도 군데군데에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하나같이 심해를 연상시키는 풍경들이었다. 머리 위의 조명에도 말린 산호나 뿔소라 껍데기 같은 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안은 복도 벽에 걸린 액자의 먼지를 터는 사용인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나폴레옹 씨는 바다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그렇죠?”
“어머, 안녕하세요. 방문객이시죠? 집사님께 들었는데, 어르신이 바다를 그리워하신다고 하셔서 저택을 이렇게 꾸미셨다네요. 예쁘죠? 관리하기는 조금 힘들지만…”
“바다를 그리워하신다고요? 이렇게 가까이서 사시는데도.”
“글쎄요. 바닷속에서라도 살고 싶기라도 하신 모양이죠.”
복도를 조금 더 살피고 있자니, 벽 군데군데에 날카로운 작살이나 무거운 닻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마도 이 저택의 주인은 바다 낚시나 사냥에도 꽤나 소질이 있거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거 선장이었던 걸까? 이런저런 가설을 굴려보며 이안은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선 저택을 더 구경하고 싶다는 가벼운 부탁 몇 마디로 수집용 방의 열쇠를 받아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했던 것보단 큰 수확이었다. 이 저택 주인의 취미를 알아내는 탐정 놀이를 하는 데에는 나쁘지 않을.
수집용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옅은 알코올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가 공기 중에 뒤섞여 있었다. 방향제가 이곳저곳 비치되어 그렇게까지 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방의 양 벽에는 액자가 빼곡히 걸려 있고, 가운데에 커다란 유리 진열대가 있었다. 또 방 한 켠의 모서리에는 접이식 사다리가 기대져 있었다. 이안은 방을 거닐며 보이는 것들을 느릿하게 살폈다.
오른쪽 벽에는 조그마한 물고기들을 해부하여 박제해 놓은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종들이었다. 아무래도 심해어인지, 아가미가 기괴한 모양으로 벌어졌거나, 비늘이 아주 반짝거리거나, 지느러미가 지나치게 좁고 가느다란 종들이 여럿 있었다. 왼쪽 벽에는 아름다운 산호, 소라, 조개 껍데기 따위가 아름답게 박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박제의 행렬 끝으로, 어쩐지 익숙한 쪼글쪼글한 작은 열매 하나가 액자 안에 갇혀 있었다. 어젯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만났던, 헤이든의 모습을 한 갈라테이아가 그에게 먹여주었던 열매와 꼭 닮은 것이었다.
방 중앙에 비치된, 꽤 큰 유리 진열대의 안에는… 종 모를 어느 물고기의 꼬리 부분이 박제되어 있었다. 1m 정도의 길이의 그것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이 빛깔이 생생했다. 진열대의 앞에 음각으로 패인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23번째의 갈라테이아].
그리고, 눈 깜짝할 찰나,
“…….”
분명 박제되어 있을 꼬리가 작게 요동치는 것도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박제일 뿐이었다. 전등에 반사된 빛에 잘못 본 것인지도 몰랐다.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렇게 얼추 방 안을 다 둘러봤을 무렵,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 몇 개가 흘러내렸다. 이안은 그것을 고개를 기울여 운 좋게 피했다. 돌이 떨어진 쪽의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장에 작은 네모 형태의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영감님 비밀도 많으시지.”
이안은 구석에 놓여 있던 접이식 사다리를 펼쳤다. 조심스럽게 그 끝으로 빗금이 그어진 부분을 밀어보자, 사람 한 명이 충분히 기어서 지나갈 수 있을법한 통로가 드러났다. 아무래도 위쪽 방과 이어져 있는 비밀 통로인 것 같았다. 이안은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통로 안에 둔 뒤, 들어온 자리로 덮개를 닫아 흔적을 지웠다. 어두운 비밀 통로를 기어서 지나다 보면 그 안에는 짭짜름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어디선가 작게 물소리가 들려와, 좁은 통로 안으로 웅웅대며 음산하게도 울려 퍼졌다. 통로는 한 방향으로 쭉 이어졌고, 그대로 얼마나 기어갔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쯤. 이안은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
어두컴컴한 막다른 벽에는 작은 손잡이가 튀어나와 있고, 그 손잡이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수집방을 연 열쇠는 맞지 않을 듯했다.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왔던 길을 다시 돌아나왔다. 이제는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 그도 그럴게, 벌써 그가 가진 핸드폰의 전자 시계가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비슷비슷한 손님 방들 사이로 문이 열린 제 방을 찾아 이안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제와 비슷했다. 벽난로 안으로 불길이 작은 장작을 살라 먹으며 방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고, 침대의 이불과 베개가 모두 처음 온 날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집사 에리카, 혹은 사용인의 솜씨인 듯했다. 축축했던 침대 시트도 깨끗하게 마른 것으로 갈아치워졌고, 옷걸이에는 보드라운 극세사 샤워 가운이 새로 걸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 테이블에 천이 덮인 작은 바구니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직 따뜻해 보이는 흰 빵과 발라먹을 용도의 작은 버터 한 덩이, 그리고 우유 한 병이 들어있었다. 이안은 그 안에 단정히 접혀 있는 쪽지를 들어올렸다.
[간식입니다. 편히 드셔주세요. 욕실에 좋은 입욕제가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이용해 주세요.]
이안은 빵을 우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비누와 입욕제 향이 은은히 풍기는 욕실 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하나 차이라면, 가림막 앞에 작은 항아리가 하나 새로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박하사탕 모양의 작은 입욕제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향취를 맡아보면 달콤하면서도 상쾌한 숲 내음이 났다. 그 안에도 매한가지로 쪽지가 들어 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고 한 개 내지 두 개를 넣으면 된다는 간단한 안내 사항이었다. 이안은 짧게 휘파람을 불며 종이쪽지를 내려두곤 잡히는 대로 입욕제를 세 개 끄집어냈다.
“너무 친절하신데.”
이안은 욕조 마개를 막고 더운 물을 틀었다. 욕조는 꽤 크기가 컸으므로, 물이 다 차는 데엔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문득 노크 소리가 났다. 이안이 방문을 열었다. 집사였다.
“전해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럼요.”
집사는 예리한 칼을 하나 들고 멀뚱하니 서 있었다. 다시 보니, 끝이 날카로운 버터 나이프였다. 그는 그것을 이안에게 내밀었다.
“버터 나이프를 바구니에 같이 넣는 걸 그만 잊어버려서……, 참, 혹시 12시까지 주무시지 못한다면 꽃차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때 노크해도 괜찮을까요?”
“칼만 들고 계시니까 무섭잖아요……. 네, 편하실 대로요.”
“이런, 죄송합니다. 전 이 집의 집사니까요. 제가 일찍 잠들면 어르신께서 적적하실 테니 조금 늦게 자는 것뿐입니다.”
마침 단둘이 남은 겸, 이안은 석연찮았던 점을 집사에게 간단히 캐보기로 했다.
“나폴레옹 선생님은…… 바다를 참 사랑하시는 것 같더군요. 에리카 씨도 사냥을 도우시나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물론입니다. 어르신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니까요. 물론 어르신께서는 훌륭한 사냥꾼이시니 제 도움은 별로 필요치 않으시긴 하지만……. 집사로서 모시는 분을 보필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직업 정신 굉장히 투철하시네요. 칭찬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렇다 할 수확 없이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짧은 인사와 함께 집사가 문을 닫고 돌아가자, 문이 닫히는 찰칵, 소리 뒤로 첨벙, 하고 부피가 큰 무언가가 물 안으로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욕실인 듯했다. 그득히 찬 욕조에서 물이 비어져 쏟아지는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꼭 누가 욕조 안에서 물장구라도 치듯, 물이 튀는 소리. 그 소리는 몇 번 더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마치 여기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안은 지체없이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들어서면, 욕조 가림막 위로 물고기 꼬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부드럽게 휘어져 욕조에 차오른 물 위를 때릴 적마다 가림막으로 온통 물방울이 튀었다. 이안은 가림막을 젖혔다. 바다 냄새가 선명하게 코 끝을 스쳤다. 욕조 안은 달빛으로부터 어룽져 내린 물고기 비늘 모양의 빛무리가 한창 일렁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헤이든이 욕조 안에 기대앉아 제 꼬리를 살랑대고 있었다.
인어의 형상을 한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마주한 그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난 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무엇보다도 확연한 증거.
“좋은 저녁이야, 이안.”
“……. 너…….”
헤이든은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쩌려고 여기 올라온 거야, 응?”
이안은 헤이든의 뺨을 감싸쥐었다가 꼬집어 쭉 늘였다.
“아, 아니, 난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길을 피하지 않고 순순히 제 뺨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네가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으니까…… 그걸 해결할만한 방법을 알아왔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볼이 꼬집힌 채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헤이든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너 저번에 파란 꽃 이야기 했을 때 싫어했잖아. 그걸 재배하는 사람의 거처에 네가 지금 들어왔다고. 어?”
“글쎄, 하지만 파란색 꽃은 흔한걸…….”
몇 번 쪽쪽대며 입 맞춰주다 심각한 얼굴로 이안은 재차 헤이든의 뺨을 꼬집었다. 헤이든은 이안이 입 맞춰 주는 게 좋은 양 푸스스 웃기만 했다. 심각성을 영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혹은 신경을 안 쓰거나.
“철회야. 나 단일로서는 믿을 수 있는데 너랑 엮어서는 믿을 수 없는 인간이야. 네가 저번에 얘기하고 찡그렸던 그 파란색 꽃 얘기 좀 해 봐. 정보 교환 좀 하자.”
“단일로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라고.”
“꽃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갈라테이아의 꼬리를 꽃의 비료로 주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 꽃잎이 파란색이고, 죽은 갈라테이아의 생명력을 이어받아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수면에 효과가 있다고 들었어.”
“미치겠네.”
“…아, 혹시 내가 꽃을 먹으라고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더 괜찮은 방법을 찾았어.”
“이 저택의 주인은 갈라테이아 사냥에 돌았어. 갈라테이아를 전시도 해 두고, 네가 먹인… 그 열매. 그것도 수집해 두고. 휠체어를 타는 나이임에도 사냥을 한다고. 너는 그리고 지금! 그런 집에! 들어왔다고!”
이안은 목소리를 죽여 소근거렸다. 그리곤 콩, 소리가 날 정도로 헤이든에게 이마를 맞댄다.
“돌아갈 방법 알지? 내가 곧장 바다로 갈게. 그러니까 너는 있던 곳으로 돌아가. 여긴 너무 위험해.”
“아야. 잠깐만, 정보가 너무 많아. 그래도 그 사람들이 네게는 상식적으로 군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 네 방 욕실에 들어오지는 않겠지. 일단 지금은 밤이고, 그들은 네가 잠들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마 사냥을 나간다면 지금쯤 나가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 나가는 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너 어차피 그… 뭔지 모를 열매를 이용해서 이동한 거 아니야? 널 들고 옮길 생각은 당연히 없지. 여기까지 왔으니까 돌아갈 방도도 당연히 생각했을 거라고 봐서 한 말이었고.”
이안은 한숨을 쉬며 욕조 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욕조 턱을 잡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12시에 집사가 방에 한 번 더 들어온다고 했어.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해.”
“이번에는 열매를 이용해서 온 게 아니야. 다른 갈라테이아들이 마력을 모아서 주문을 사용해 준 거라서… 12시 전까지는 못 돌아갈 것 같은데. 알았어. 조용히 있을게. 쫓아내지 마…….”
“쫓아내려는 게 아니라……,”
헤이든은 멋쩍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잇다가 시선이 맞으면 애교를 부리듯 이안의 눈가 아래 가볍게 입 맞추었다. 이안은 한숨을 쉬며 입맞춤을 받다 곧 떨어지는 얼굴에 마주 입 맞추었다.
“네가 날 보러 왔다가 죽는 건 정말 싫거든. 어쨌든…… 12시 즈음엔 다시 돌아간다는 거지? 신데렐라네.”
“하하. 집사가 오기 직전에 갈 수 있을테니 다행이네.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큰일날 뻔했다. 하지만 난 죽지 않아. 우리는 역린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죽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하거든.”
“안 죽으니까 널 가둬두고 이상한 짓을 할까 이러는 거지.”
“이상한 짓이라면, 어떤 짓?”
“계속 네 꼬리를 잘라서 꽃에 먹이기.”
“그 꽃이 충분히 예쁘다면 그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야.”
“하지만 꼬리를 자르는 정도야 교통 사고보다는 덜 아프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통의 기준치를 가늠하는 제 짝을 바라보다 이안은 한숨을 푹 쉬곤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픈 게 문제야? 아픈 게 문제냐고. 물론 생명체는 모든 생명체를 소비하고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인간은 그런 종의 대표군이지, 그런 지점에서 무한 재생하는 자원을 주기적으로 활용하는 건 꽤 경제적이고 효율적일지 몰라, 하지만 그냥 내가 싫어.”
헤이든이 작게 키득거렸다. 이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싫다고. 어? 어느 호로 잡놈 개자식이 널 주기적으로 잘라다가 갈아서 꽃 비료로 써먹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놈 머리에 석판을 내려치고 싶어지니까 그럴 일 만들게 하지 마. 내가 인간으로서 너의 소유권을 주장해야만 네 안전이 보장된다면 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라는 거 알잖아. 누가 널 <써먹는다>는 가정만 해도 치가 떨리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난 그냥… 내가 살아있을 때 손가락이나 사지가 잘릴까봐 무서워했던 건 그게 다시는 고쳐지지 않고 내가 그대로 죽어버릴까봐 그랬던 거니까. 지금은 그게 별로 두렵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알았어. 미안해. 그런 말 안 할게. 나도 자기 욕심을 위해 살생을 일삼는 사람한테 '써먹히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내가 안전할 수 있다면 내가 네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래.”
헤이든은 놀리듯 이안을 쓰다듬었다. 부루퉁하게 이안이 답하자, 헤이든은 더욱 장난기 어린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연습해 보자. 어떻게 말할 건데?”
“걔 제 거니까 손대지 마세요. 재물손괴죄로 50년 형 받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사냥꾼은 네가 내게 홀려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할 걸.”
“아니, 내 거라는데 홀리든 말든 뭔 상관이겠냐고. 꺼지라고 해. 너는 내 거고, 내 개인 소유니까, 손 대면 쏴버릴 거라고 할 거야.”
“하지만 총 안 가져왔잖아.”
“법으로 쏜다. 너 지금 몸에 내장칩이라도 넣을래? 대충 반려동물 법에 비벼서 감방에 처넣어 버릴 거야.”
헤이든은 작게 웃어대며 욕조에 상체를 늘어뜨렸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등줄기를 따라 늘어지며 욕조 속 물까지 금빛 폭포수처럼 잠겨 들었다.
“글쎄, 갈라테이아도 반려동물 기준에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음, 하지만 역시 사냥당해서 죽기는 싫은데……, 아, 좋은 방법이 있어. 마침 내가 가져온 네 불면증 해결책과도 결이 맞을 것 같은데…… 들어볼래?”
“응.”
“일단 네 불면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알아 온 방법은 이거야.
1. 내가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잠깐 인간이 된다.
2. 인간의 모습이 되면 갈라테이아의 역린이 드러난다. 그 역린을 파낸다.
3. 파낸 역린을 네 몸 어딘가 심는다.
일단 역린을 떼어낸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거든. 완전히 찢어지거나 가루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걸 심는 게 왜 내 불면증에 도움이 돼?”
“갈라테이아의 꼬리는 수면에 좋거든. 그래서 꼬리를 비료로 쓰는 꽃도 그런 성질을 갖게 되는 거고. 조절할 수 있는 수면독을 네 몸에 직접 꽂는 셈이니까. 네가 마신 꽃보다 효과가 좋을 거야. 게다가 그들이 널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네가 역린을 갖고 있는다면 만약 그들이 날 사냥해도 난 죽지 않을 수 있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인간의 피를 마시면……. 얼마나 마셔야 하는데?”
“조금만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역린을 떼어내는 동안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될 테니까.”
“내가 피를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 글쎄… 한 방울?”
“너랑 같이 일상생활 하려면 얼마쯤 피를 먹이며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거였는데. 좋아. 말 나온 겸 바로 하자.”
“좋아, 그럼…… 어떻게 피를 낼까?”
이안은 잠자코 일어나 옆 방으로 갔다. 예리한 버터 나이프를 가져와 제 손바닥에 댔다. 손바닥에 나이프를 쥐고 꾹 힘을 주면, 피부가 베이며 생채기가 나고, 금세 피가 나기 시작했다. 이안은 제 손바닥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시면 되는 거지?”
헤이든은 입을 맞출 때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안에 입술을 파묻었다. 입술 틈이 약하게 벌어지고, 이따금 그의 상태를 살피듯 곁눈질하며 피를 빨아 삼키는 소리가 욕실을 채웠다. 손바닥이 따가웠다. 그러나 이안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잠시 헤이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어 잘게 두어 모금 마셨을 즈음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타액인지 혈흔인지 모를 자국으로 젖은 제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미, 미안, 너무 많이 마셨지…….”
“아니, 상관없어. 맛이 나쁘게 느껴지진 않는 모양이네.”
이안은 무던하게 대답하곤 변화를 살폈다. 물속에 잠겨 있던 헤이든의 하반신이 조금씩 인간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인간의 다리로 변했을 즈음, 그의 벌어진 허벅지 안쪽으로 반짝이는 비늘 하나가 보였다. 헤이든은 비늘 위치를 찾듯 다리 이곳저곳을 훑어보다가, 역린을 발견하자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식사 중 소금을 건네달라는 듯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아까 그 나이프 좀 빌려줄래?”
이안이 나이프를 내밀자, 헤이든은 역린 근처에 칼을 댔다. 가늠하듯 그 근처를 칼등으로 눌러보다가, 살갗과 비늘 틈새로 가볍게 칼끝을 눌러 역린을 떼어낸다. 피가 조금 흐르긴 했지만, 상처는 금세 아물어 사라졌다. 그의 피 또한, 물에 희석되어 사라져 버렸다.
“어디에 달아줄까?”
헤이든은 역린을 손에 쥔 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감정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 좋아, 아니면 절대 못 찾을 곳이 좋아?”
“네가 날 자주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곳이 제일 좋고.”
이안은 단추를 풀고 가슴팍을 헤쳐 드러냈다. 그는 시계 시침 끝처럼 손끝을 세워 제 심장 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키득거리며 헤이든의 손을 끌어다 제 몸에 닿게 한다.
“안전한 걸 따지려면야 사타구니가 제일 안전하겠지만.”
“아래에 그런 걸 다는 게 취향이었어?”
헤이든은 의외라는 듯 장난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마주 키득거리며 순순히 끌려왔다. 이안의 손이 닿으면 조금 얼굴을 붉히면서도 능숙하게 그의 심장 위에 제 역린을 내려놓았다. 역린은 원래 이안의 신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절로 달라붙었다. 곧 그의 가슴팍은 몸에 비늘 하나가 생겼을 뿐인 모양새가 되었다.
“취향이겠냐고.”
이안은 가슴에 들러붙은 비늘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 옷을 여몄다. 헤이든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비늘을 아쉽다는 듯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너도 알겠지만, 사냥꾼이 이걸 부수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알았지?”
“역시 사타구니에 박을걸 그랬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헤이든은 투정 부리듯 이안의 어깨에 툭 기대었다가 떨어졌다.
“……간만에 인간이 되니까 정말 기분이 이상하네. 걸을 수도 있을까?”
헤이든은 욕조 안에서 제 다리를 쭉 폈다가 반쯤 접어보았다.
“아마도? 서 볼래?”
“그…….”
이안은 자연스레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헤이든은 긍정의 대답을 내어놓으려다가 낯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재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반신에 옷을 안 입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다.
“아니. 지금 못 일어나.”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같이 목욕이라도 할래?”
“그래도. 어차피 다시 바닷가로 돌아가면 씻은 것도 의미가 없어질텐데… 아쉬우면 내가 씻겨줄까?”
“응.”
“좋아, 그럼…….”
헤이든은 욕조 테두리를 잡고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걸음 딛기 무섭게 첨벙, 하고 한쪽 무릎을 접으며 물 속으로 넘어졌다. 말없이 시선을 피하는 얼굴이 새붉었다.
“……바디워셔 좀 가져다줄래?”
이안은 키득대며 느긋하게 옷을 벗고는 옷가지를 던져둔 채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바디워셔를 집어 그에게 쥐여주곤 느른히 몸을 겹쳐 욕조 안에 누웠다. 두 명 분의 성인을 담은 욕조 물은 금세 쑥 차올라 바깥으로 넘치고, 욕조 귀퉁이까지 그득히 차선 넘실거렸다. 욕조 안으로 바디워셔 향이 차올랐다. 비눗물이 몸에 달라붙는 감촉 탓에 어쩐지 세탁기 속 빨래가 된 것 같다 생각하며 헤이든은 작게 키득거렸다. 그는 샤워볼에 비눗물을 적셔 가볍게 이안의 피부를 문질러주며 소근거렸다.
“간만에 따뜻한 물에 들어오니까 기분 좋다.”
“배우자랑 같이 목욕해서 기분 좋다고 해야 할 타이밍 아니야?”
이안은 짓궂게 웃으며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샤워볼이 제몸을 가볍게 쓸고 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폈다. 한결 풀어진 얼굴로 눈 앞의 헤이든이 자기를 돌보는 모양새를 바라보았다.
“우리 결혼을 했었나? 되살아난 뒤로는 기억이 엉망이야. 직접 비슷한 일을 경험해 보거나 비슷한 일을 하면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기억을 건드려 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했지. 무려 3년 차였어. 알아? 영국은 어느 지역에서든 동성혼이 가능하니까. 물론 너희 집안이든 우리 집안이든 결혼에 썩 긍정적이진 않았어도… 일단 와서 참석은 했지. 꽤 규모가 컸어. 5월의 신랑들이었지. 네가 부케를 들고 내가 면사포를 썼는데, 그걸 보고 네 동생들이 소름 끼쳐 했던 게 생각나네. 어쩔 수 없었어. 티아라는 내가 더 어울린다고 네가 강력하게 주장했었으니까.
……네 결혼반지, 6피트 아래 묻혀 있어. 그래서 나랑 다시 살게 된다면……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 미안.”
헤이든은 나직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다. 키득대는 제 짝의 모습에 마주 웃으며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기억이 물결처럼 넘실거리며 떠올랐다.
“기억나. 그래도 내 말이 맞았지? 정말 잘 어울렸잖아. 티아라를 쓴 모습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면사포를 걷어내고 키스할 때 정말 좋았어. 아, 이건 좀 징그러운 말이었나……. 사과할 일이 아냐. 그 때 나는 죽어 있었는걸. 결혼 반지는 내가 죽은 뒤에 따로 묻은 거야?”
“왜 징그러워? 네가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를 모르겠다. 응. 뼛가루를 뿌리고 나서도 찾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으면 했거든. 여긴…… 런던에서 너무 머니까.”
“지나치게…… 소유욕을 부리는 거 같아서. 반지가 없는 건 아쉽지만, 그보다는 네가 날 그만큼 생각하고 싶어했다는 게 마음에 들어. 욕심이지만…… 시간이 지나도 네가 날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했거든.”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헤이든의 얼굴이 잠깐 붉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리깔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선은 온화하고도 조심스럽다.
“방금 내가 했던 말들에 비하면 그건 애교지. 그건 언제의 생각인 거야? 되살아나고 나서? 아니면 계속 가지고 있던 건가.”
“죽기 직전이랑 살아난 직후의 생각을 합친 거야. 이러고 있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죽기 전이고, 죽은 뒤인지 헷갈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야. ……넌 날 데려가고 싶은 거야?”
“……응, 같이 있고 싶어. 과욕이지만.”
“……나도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러니까, 그건 과욕이 아니지. 그러고 보니, 갈라테이아들 중 몇몇이 널 보고 시어해. 뭔가 더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그들이? 나는 지금 당장 만나러 가도 상관은 없어. 12시가 지난 후라면.”
“지금은 힘들지, 너도 밤에 잠은 자야 하잖아. 대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어젯밤의 절벽으로 찾아와 줘. 그렇게 해 줄래?”
“응, 그럴게.”
작게 웃는 헤이든의 뺨에 뺨을 마주 비비며 이안이 소근거렸다. 그렇게 서로의 몸이 다 씻겨질 즈음이면, 저택 전체에 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 12번, 어느샌가 까마득히 어두운 밤 12시였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예의 집사인 모양이었다. 헤이든은 급하게 갈라테이아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안의 입술에 서늘한 입맞춤을 남기고 속삭였다.
“네가 곤란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일 보자. 황홀한 바다의 꿈을 꾸기를.”
그리곤 헤이든은 욕조 속으로 뛰어들어, 마치 포말처럼, 물에 녹아 흩어지듯 사라졌다. 욕조 안에 감돌던 그의 체온은 온데간데없이, 이안의 곁으로는 이리저리 튄 물자국과 아직 아물지 못한 손바닥의 상처만이 남아있었다. 이안은 잠깐 황망히 그가 녹아 흩어진 욕조 물 안을 손바닥으로 훑다가, 아물지 않은 상처에 거품이 들어가 따가운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몸을 빠르게 씻어내고 목욕 가운을 걸친 뒤, 상처를 가볍게 제 손수건으로 싸매고서야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집사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아직 못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아서, 꽃차를 가져왔습니다.”
집사가 든 트레이 위에는 무늬 없는 흰 찻잔이 올라앉아 있었다. 안에 담긴 푸른 찻물에서는 여전히 김이 오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가져가서 마실게요.”
“어쩐지 방 안에서 바닷물 냄새가 나는군요.”
“창문을 열어둬서 그런 거겠죠?”
“그런가요? 그렇다기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 같습니다만……. 오래 목욕을 즐기셨네요.”
“네, 몸에 훈기가 돌았으면 해서요.”
“입욕제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그런 셈이죠.”
“원하신다면 저택에 조금 더 머무셔도 좋을 텐데요.”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니……, 너무 오래 머물러도 폐가 되지 않겠어요.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을지 모르죠.”
방 안을 훑는 시선에 이안이 트레이를 받아들고 방 안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며 문고리를 잡았다. 집사는 그가 문고리를 잡는 모양새를 보고 나직히 웃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손님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진 않습니다. 실례했군요. 모쪼록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집사는 몸을 돌려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이안은 방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찻물을 가만 노려보다가, 이안은 그것을 세면대에 부어버렸다. 그리곤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 꽃차를 마셨을 때처럼, 굳었던 등줄기의 긴장이 탁 풀리고, 몸이 노곤해져 왔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이자 눈꺼풀이 절로 내려가고, 수마가 밀려왔다. 심장께가 살짝 욱신거리는 듯도 했다.
이안은 눈꺼풀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저 환한 햇살에 눈을 떴다. 부드러운 이불이 제 몸짓을 따라 사각거렸다. 창틈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옅은 한기가 그의 뺨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늘 들려오던 이름 모를 소음은 밤새 전혀 들리지 않았다. 푹 잔 덕인지, 몸이 상쾌하고 눈앞이 환히 밝았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창문 밖에 문득 시선이 미쳤다. 이제 막 지평선 너머로 해가 가물거리며 떠오르는 참이었다. 노크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노크를 하기 위해 올 사람도, 이 시간엔 없었다. 이안은 옷을 바로 챙겨 입고 문밖으로 나섰다. 어렵지 않게 길을 되짚어 절벽으로 향하고 있자면, 햇살에 덜 데워진 아침 공기가 유독 시렸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눈이 아릴 정도로 환했다. 이안은 절벽 근처로 다가서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절벽 아래, 짧게 펼쳐진 자갈 해안 사이로, 축 늘어져 잠든 인어가 있었다. 헤이든이었다. 절벽 쪽에 난 나무 계단을 따라 바닷가 연안으로 내려가면, 절벽에 몸을 기대고 잠든 헤이든이 환히 보였다. 물기가 어려 창백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몸은 아침 햇살 아래서 진주처럼 창백하고 아름다웠다. 고요하게 이어지던 호흡이 멎고, 물기 어려 젖은 속눈썹이 느릿하게 들려 올라간다. 아침 햇살을 받아 유독 동공이 작아져 평소보다 훨씬 더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좋은 아침, 이안.”
“좋은 아침, 헤이든.”
아침 인사를 건네는 헤이든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나직히 웃었다.
“이런, 네가 언제 올지 모르겠어서 일찍 올라온다는 게, 너무 일찍 와서 잠들어 버렸네.”
“춥진 않았고?”
“물 안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밖에 나오니까 조금 춥긴 하다.”
이안의 손이 닿자 헤이든이 미소지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엄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럼, 들어가자.”
“좋아, 물 속에 들어갈 준비는 됐어?”
“응.”
축축한 손이 이안의 옷깃을 잡고 바닷물 속으로 끌어당겼다. 참 쉽게도 시야가 기울어졌다. 소금내를 풍기는 차가운 바닷물이 그를 덮치듯 집어삼키고, 이내 그 위를 파도가 덮어 모든 흔적을 지웠다. 그 세찬 파도조차 처음의 조우와 비교하면 유순한 물살처럼 느껴져 이안은 짧게 미소지었다. 겨울 바다의 물살은 헤이든의 키스 덕분인지 시리도록 차가울텐데도 적당히 버틸 법하게 느껴졌다. 물살에 휘감긴 옷자락은 물결을 따라 멋대로 떠오르고 감겨들었다. 수면 아래로 투과되는 햇살이 물살을 따라 어그러지는 모양새가 꼭,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비쳐 드는 햇살처럼 아름다웠다. 헤이든이 눈을 휘어 웃으며 그에게 말을 붙였다.
“어때, 바다는 좀 익숙해진 거 같아?”
“덕분에……. 신기하네. 바닷물 속인데도 눈이 시리지 않고, 숨도 쉴 수 있다는 거.”
“다행이네. 첫날 네가 너무 놀란 거 같아서…… 물속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했어.”
“안 놀라는 게 이상한 거아냐? 널 밀치지 않고 끝까지 내려간 게 용하지.”
“밀치고 싶었어?”
“그건 아니고.”
아쉽다는 듯 이안을 끌어안았던 헤이든의 낯에 즐거움이 번졌다. 이안의 뺨에 연신 입술을 누르며 응석을 부려대는 모양새가 소년 같았다.
“이 모습은 어때.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아?”
“응. 꽤나 많이. 그리고 지금도 예뻐.”
“네 예쁘다는 기준을 잘 모르겠어……. …그래도 기쁘네. 고마워, 너도 여전히 예뻐.”
헤이든은 뺨을 옅게 붉히곤 인사하듯 이안의 눈가에 입맞추었다. 곧 심해보다도 차디찬 손가락이 이안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빠른 유속이 둘을 감싸고, 헤이든이 몇 번이고 제 긴 꼬리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해수면 안으로 스미던 햇빛은 시야에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사방이 남빛 어둠으로 물결쳤다. 그리고 태양 아래 살지 않는 것들이 해저 속 희미한 빛들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광활한 해저 암석층, 기이하게 흐르는 물살, 빛나며 날래게 움직이는 물고기들, 보통의 수 배에 이르는 거대하고 푸른 산호. 그리고, 그 산호의 숲을 지나, 그들은 거대한 물고기들의 뼈며, 난파선들의 잔재들이 즐비하니 쌓여 탑을 여럿 이룬 곳이 보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저곳이 갈라테이아의 도시야.”
헤이든이 속삭였다. 도시의 건물인지 탑인지 무덤인지 모를 건축물의 둘레를 따라 희끄무레한 빛이 물살 무늬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갈라테이아 여럿이 그 주변을 헤엄치다 둘을 발견하곤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다가왔다.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들이 수중에서 물결처럼 흘렀다. 각각 다른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갈라테이아들은 헤이든처럼 옅게 빛을 내며 제각각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둘의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이안의 코 앞에서 멈춰 섰다.
“네가 이안이구나?”
“갈라테이아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해!”
“네가 헤이든이 그리워한다던 그 인간이야?”
상어 지느러미를 가진 갈라테이아, 문어와 같은 하반신을 꿈틀거리는 갈라테이아…… 종류는 여럿이었으나, 공통적으로 그들은 상반신이 모두 인간이었으며,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어느 갈라테이아는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으로 이안의 볼을 콕콕 찌르기도 했다.
“엄청난 환대 고맙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뺨을 찔러대던 갈라테이아가 키득대며 손을 떼어냈다.
“성격이 엄청나네.”
“그러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럴 거 같던데, 뭘.”
이안이 제 쪽을 훑어보는 갈라테이아를 포함해 마주 그들을 훑어보고 있으면. 헤이든이 하나씩 그들을 짚으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금 네 볼을 찌른 애가 바카리스. 그 옆이 순서대로 아스니스, 엠브로시아야. 아스니스는 내게 갈라테이아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줬고, 엠브로시아는 내가 널 찾아가는 걸 도와줬어.”
“뭐가 됐든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고마워, 얠 도와줘서.”
“고맙긴, 이거 선물이다. 여기 처음 온 기념이야.”
엠브로시아가 이안에게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쥐여주었다. 안에는 아주 커다란 진주, 조금 부식된 금화, 저 혼자 빛을 내는 산호, 금으로 만들어진 회중시계 등…… 난파선이나 이 주변에서 주워온 듯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왠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유리 구슬을 선물 받은 듯한 기분에 이안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물론 그보다야 값이 한참 나갈 것이었지만, 이런 물건을 단박에 내어놓는단 점에서 그들에게 이것들은 그만한 가치밖에 되지 않겠구나, 싶었다.
“고마워.”
“그건 그렇고, 요즘 인간 세상은 좀 어때? 나도 선물 모으는 거 도와줬으니까 이 정도는 물어도 되잖아. 인간들은 뭐하고 사는지 알려줘. 난 인간들이 화살로 전쟁하면서 물이란 물은 슬슬 피해다니던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인데, 아스니스 쟤는 요즘 인간들은 스쿠버 다이빙이란 걸 한다잖아. 요즘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해? 요즘은 넝마를 입은 사람이 예쁜 옷 입은 사람한테 절하는 일이 드물어?”
“인간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지. 인간은 그저 그런데, 기술과 문명과 법과 윤리가 발달했어. 그렇지만 요즘에도 넝마를 입은 사람은 예쁜 옷 입은 사람에게 절을 해.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작태의 인간 세계는 백만 명 중 한 명에게 온갖 부가 편중되어 있거든. 예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단지 지금은 국가가 돈을 좀 걷어서 넝마를 입은 이들에게 숨통을 조금 틔워주는 정도.
먹고 살 걱정이 줄어드는 나라와, 먹고 살 걱정에 시달리는 나라와, 걱정조차 사치인 나라가 있지. 여전히 문명 아래에선 인간들이 야만이라 경멸하는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야만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 자만하는 이들이 짠 규칙으로 세계는 조금씩 정돈되어 가곤 해. 그게 좋은 것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그럼 내 차례지? 갈라테이아의 도시는 이 곳 한 곳 뿐이야? 다른 곳도 더 있어? 인간의 나라처럼.”
“글쎄, 다른 곳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마 없을 거야. 원래는 이 근처에도 도시가 여러 곳에 쪼개져 있었는데 우리를 노리는 존재들이 많아져서 다들 지금 이 도시로 옮겨온 걸로 알고 있거든. 물론 노덴스님이 이 근처가 아닌 다른 장소에도 우리와 같은 존재를 만드셨다면 모르겠지만…… 그 분은 온화하시니까. 우리 같은 존재를 다른 곳에 더 만들어 낸다면 다른 존재들과 분란이 생길 수도 있으니, 아마 이곳에 있는 게 우리 종족의 전부일 거야. 우리 도시는 생각보다 넓거든. 심해는 넓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너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데?”
“우리는 노덴스님이 만드시지.”
한창 떠들어 대던 바카리스의 시선이 가늘어지더니,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하, 네 애인이 진짜 네 애인일지 궁금하구나?”
“너무 놀리지 마…….”
아스니스가 곁에서 소근거렸다. 이안도 바카리스도 둘 다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지만. 이안이 별 동요 없는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 <진짜>이냐의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인간의 피를 소량 섭취했을 뿐인데 금세 인간의 형태로 돌아오는 점이라든가, 신체의 변이가 그토록 자유롭고 재생도 뛰어난데 심해에 있는 이유라든가, 왜 <죽은 사람>과 동질된 성질을 가진 개체를 만드는가, 정도가 궁금한 거지. 모든 갈라테이아는 원형이 되는 인간이 있는 거야? 신화 속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머릿속 아프로디테를 모사하여 만들었듯이.”
“피를 섭취했는데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다니 무슨 소리야? 우리가 피를 먹으면 인간의 형태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외형으로 변하게 돼. 그리고 죽은 사람과 동질된 성질을 가진 개체라니, 실례거든? 우리는 죽은 사람 따위와 같은 성질을 가지지 않아. 우린 노덴스님이 각각 하나씩 만들어낸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들이라고. 그러니까, 원형이 되는 인간 따위는 없어! 예의 없기는…….”
“뭐? 하지만…….”
이안이 헤이든을 돌아보았다. 짜증스런 표정의 바카리스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왜 쟤를 봐? 흐음, 그러고 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쟤는 조금 다르다고 엠브로시아가 그랬어.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랬나? 무슨 소린지 참.”
“설명해줄 수 있어?”
이안이 묻자 엠브로시아가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애인을 앞에 두고 애인의 정체를 남에게 묻는 놈한테 뭘 대답하라고? 뭐, 저 놈한테 물어봤자 본인도 모르니 별 대답이야 안 나오긴 하겠다만.”
“앞에 두고 있으니 물어보는 거란 생각은 안 해? 이런 건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뭣하면 날 빼고 말하든가. 그리고 아까 네가 지적한 점 말인데, 나는 너희가 동질된 개체이고,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추측했어. 그래서 궁금해졌지. 왜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번성할 수 있는 개체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인지. 그런데 방금 죽은 개체 따윈 본뜨지 않는다며 나더러 무례하다고 입을 나불거린 건 쟤야.”
이안은 짜증스러운 말투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너희의 개체군이라곤 지금 직전까지 헤이든 하나 뿐이었는데, 걔를 바탕으로 생각을 확장하는 게 당연하단 생각은 안 들어? 내가 너희 사정을 어떻게 알아? 헤이든이 유별난 개체인 것도 어떻게 알았겠으며. 그런데 봐. 지금 여기까지 대화가 흘러왔는데, 정보가 너무 편중되어 있잖아. 너희들이지?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 날 도와주고 싶다고 한 갈라테이아들이. 이게 날 돕는 거야. 내가 이 답 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거.
날 도와주겠다고 자처한 건 감사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무슨 연유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전후 사정이 공유가 안 되면 나로서는 너희가 무슨 연유로 날 돕는지, 아니, 그 연유는 차치하고 너희가 내게 시혜적으로 구는 거라 쳐도. 최소한 누굴 돕고 싶다면 무얼 도울 것이며 너는 지금 이런 상황이니 이런 대처를 해라, 정도의 말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게. 괜히 놀린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이안의 말을 들은 엠브로시아가 바카리스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물론 바카리스는 조금도 기가 죽어보이지 않았다.
“너 말이다. 우리가 전부 널 돕겠다고 했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애초에 널 돕겠다고 한 건 저놈들이거든? 쟤들은 재밌을 것 같으니 도와주자고 한 거고. 난 끌려온 것뿐이란 말이다. 그리고 말이야, 본인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문제라면 진작 말을 했겠지. 아직 ‘덜 된’ 놈한테 말해봐야 괜한 혼란만 줄 거란 생각은 안 드냐? 단순한 혼란으로 끝나기만 하면 나도 넘어가지. 괜히 말 한마디 잘못 하고 문제 생겨서 아직 살아있는 놈 병신 만드는 취미는 적어도 내겐 없다.”
“그거 참 감사하고 친절한 설명이네.”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 눈꼬리를 다시 내리곤 근처에서 설전을 재미나게 구경하던 갈라테이아들과 엠브로시아를 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뭐야? 문자 그대로야. 뭘 도와주려고?”
“그건 저놈들한테 물어봐야지. 저놈 선물 만드는 것도 내가 도와줬는데 그런 것까지 내가 설명해야 하나? 안 그래도 키팅이 제 시간까지 안 들어와서 심란한데…….”
키팅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근처에서 구경을 하던 갈라테이아들이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서 뭐라고 말하는지는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얼추 키팅이라는 발음은 말마디에 섞인 것 같았다. 엠브로시아가 성질을 부릴 즈음 아스니스가 그의 상체를 끌어당겨 뒤로 물렸다.
“자, 그만. 그만. 너도 그만 화내고. 인간 손님도 미안해요. 다들 손님이 와서 기분이 너무 들떴네. 얘가 이렇게 성질이 더러워보이기는 해도 헤이든이 당신을 만나러 가는 건 제일 많이 도와줬어요.”
아스니스가 엠브로시아의 볼을 꼬집어 늘였다. 엠브로시아가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모로 굴렸다. 아스니스는 웃으며 엠브로시아의 볼을 살살 다독이곤 이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내가 답할 수 있는 한에서라면 내가 대신 답해줄게요. 뭐가 궁금해요?”
“앞서 있던 질문들은 지금 말해선 안 되는 거라 하니 차치하고, 뭘 도와주려고 날 부른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도와주고 싶다기보다는 구경하고 싶어서 부른 거죠. 도와줄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도와준다고 해봤자 당신에게 조금 더 자주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거나, 당신과 데이트를 더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그런 정도였을 거예요. 오히려 전자의 질문에는 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전에, 당신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믿는 인간인가요?”
“아뇨. 알 바 아니다, 의 축입니다.”
아스니스가 깔깔거렸다.
“그렇다면 기생 식물을 본 적은 있나요?”
“그렇죠.”
“사람을 잡아먹고 그 사람의 행세를 하는 기생 생명체에 관한 영화를 본 적도 있고요?”
“…….”
“대답은?”
“네.”
아스니스가 이안의 반응에 작게 키득거렸다.
“인간들이란 주로 자신들이 기생당할 줄만 아는 존재라고 착각하는 법이죠. 기생을 당하고 정신을 잡아먹히는 것은 자신들과 같은 존재뿐일 거라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있을지 모르나…… 인간에겐 기생할 능력이 없을 텐데요.”
“그게 당신의 대답이라면 어쩔 수 없죠. 첫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까지. 다른 질문은 없나요?”
“좋아요. 그러면 모종의 사유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기생을 했다 가정하고. 당신들은 그 기생체도 일원으로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네들을 완벽히 인간으로 바꾸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저 평범한 기생체는 아니죠. 그 기생체가 살아있는 존재를 죽인 것도 아니고, 취한 것은 그저 시체일 뿐이니까. 게다가…… 당신은 신이 생명을 주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했으니 할 말이 없군요.”
“당신 정말 성격이 나쁘네요. 게다가…… 나는 안 믿는 게 아니라, 알 바 아니라고 했는데.”
“어머, 이 중에선 제일 친절하지 않나요? 그 전에. 아뇨, 라면서요.”
“말장난하지 마시고. 그를 일원으로 받아들일 겁니까?”
“오해가 있는데 우린 집단이 아니에요. 그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건 개개인의 문제죠. 당신은 그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도시가 있다는 건 체계가 있다는 뜻이고, 개인의 집합체는 공동체로 직결되진 않을지언정 상호 공존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규칙 정도는 있는 법이잖아요?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기보단, 이딴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다가 다 불어버릴 정도의 의리라면 차라리 나랑 같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묻잖아요.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데려갈 수 있는지를.”
“하지만 인간들도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인간이라면 순순히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자신과 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한 상대가 <진짜>인간일 지 따위를 걱정해 가며 사람을 사귀지는 않잖아요? 당신 말대로 이딴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다 다 불어버리는 정도의 의리, 라는 건 개개인의 성격이죠. 인간으로 데려간다는 건 그의 종족을 인간이라는 종으로 바꾸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가 원한다면요.”
빙글거리는 아스니스를 앞에 두고 이안은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화하는 것도 작작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도 즐겁게 듣고 있는 걸요? 물론 당신을 조금 걱정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당신이 많이 가련해 보이나 봐요. 답을 하기 전에 잠깐 질문을 하고 싶은데. 당신은 인간의 종을 다른 종으로 바꾸거나, 다른 종을 인간으로 바꾸어 본 경험이 있나요?”
“있겠어요?”
“이미 답이 나왔군요. 되겠어요?”
이안이 재차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밀어 아스니스의 뺨을 꾹 움키고 쭉 늘렸다.
“이 성질머리 더럽고 말뽄새도 깐죽거리고 도움은 별로 안 되는……, 동족 혐오 생길 거 같으니까 작작 해요. 요는 그겁니까? 내가 <마법사> 같은, 그런 것에 준하는 존재여야 시도라도 가능할 거란?”
“그렇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스니스가 작게 하품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뺨을 놓아주었다.
“주문은 압니까? 아니면 노덴스라는, 당신들의 지도자에게 가야 하는지?”
“그 분은 지도자가 아니라 저희의 신이시죠. 당신이 신을 보고도 살아있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주문 따위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건 저주 따위가 아닌걸요.”
“좋아요. 그러면 애인의 존재 탐구는 이쯤 해 두고. 누가 당신들을 사냥하고 있습니까? 왜 사냥당하기 시작한 거죠. 아니…… 뭐, 쓸만해 보이니까 사냥하는 거겠지. 누가 사냥하는지도 뻔하고.”
“뻔한 질문에 굳이 답을 할 이유는 없죠. 사냥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고. 갈라테이아들은 온순한 종족이라서 자주 위험에 처하거든요. 그나마 꼬리에 수면 독이 달려 있어서 다행이지. 그러니까 당신도 그가 죽기 전까지 자주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거예요.”
아스니스는 웃으며 물러나다가 이안의 입가를 검지로 톡, 쳤다.
“이렇게 피비린내가 나는데. 용케 그가 당신을 참아줬네요.”
“하……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을 먹었다, 이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우리의 피로 키운 꽃을 마시기는 했죠. 우리는 예민해서 가까이에만 가도 동족의 피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거든요. 피 냄새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순순히 입을 맞추다니 어지간히도 당신이 좋은 모양이네요.”
그러고서야 그는 생긋 웃으며 물러났다. 이안은 귀찮은 것 쫓듯 손짓으로 앞을 휘적였다.
“당신네들 진짜 성가시고 짜증나고 귀엽네요. 자, 인간 구경 재밌었죠? 오늘치 구경 끝. 다음에 또 구경하고 싶으시면 선물을 내세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갈라테이아들은 흩어졌다. 헤이든은 방금 쏟아진 정보들을 세어보듯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돌아볼 찰나, 아스니스가 이안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불면증도 그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제는 상관없겠죠? 이미 해결했으니까. 어쩌면 당신이 그를 살려낸 셈이기도 하니. 나였다면 그가 태어날 적의 소리를 듣는 걸 더 즐겼을 텐데. 검소하네요.”
아스니스는 이안을 비웃듯 짧게 미소 짓곤 남빛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이든이 정신을 차리고 이안의 근처로 다가왔다.
“……괜찮아?”
“응. 정보를 끄집어내다 보니 별소리가 다 나왔네. 너는. 괜찮아?”
“나야 괜찮지. 오히려 덕분에 못 들었던 말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 ……내게는 저런 설명을 해 주지 않았거든.”
“무슨 변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 어쨌든 간에. 네가 여기 남아 있으면 사냥당할 위험이 있다는 건 싫어.”
“하지만 바다를 완전히 떠나는 건 힘들 거야. 만약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다고는 해도, 가끔은 이 모습으로 바다에 들어가야 할 테니까.”
“도버 해협 쪽에 집을 살까봐. 별장이랍시고 내놓은 걸 집으로 사서 살면서…… 너는 종종 바다로 가면 되고, 나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갈라테이아의 서식지가 여기라고 밝혀져 있는 한 여기 머무는 건 위험해. 표적이 되기 쉽잖아.”
외진 곳까지 사냥꾼이 따라붙을 위험도를 헤아리듯 헤이든은 잠깐 말이 없었다. 물론 0퍼센트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나야 나쁘지 않지. 네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널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밖에 못 보는 것보단 나아. 뻔질나게 외부인이 들락거리면 어떻게든 시선이 끌리겠지. 네가 괜찮다면…… 난 그러고 싶어.”
“그렇게 하면 매일 널 볼 수 있어? 그렇다면 좋아. 나도 널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못 보는 건 싫어…….”
어리광을 피우듯 헤이든이 이안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안은 작게 웃으며 그를 마주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발 밑에서 드문드문 피어오르는 물거품들이 부글대며 그들을 스쳐 위로 올라갔다.
“인적 드문 섬에 들어가서 살까 봐. 거주민이라고는 나랑 너밖에 없는. ……네 묻혀 있는 결혼 반지도 다시 꺼내고, 그렇게…….”
“그랬다간 우리 둘 다 우리 외의 사람 만나는 법을 잊어버려서 큰일일 걸…… 게다가 인적이 지나치게 드문 곳은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적당히 사람들이 사는, 바닷가 지역으로 고르자. 난 네가 날 위해서 그런 불편을 감수하는 게 싫어.”
“자그마한 마을 전설이 생기겠네.”
한참을 끌어안겨 침묵하던 헤이든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말 이상하게 들릴 건 아는데.”
“응?”
“……혹시 아까 그 애가 마음에 들었어?”
“아니. 널 좀 닮아서 빤질거리는 구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마음에 드는 건 아냐. 네 속성과 흡사한 구석이 있어서 좋게 보이는 거지.”
“……나 그 정도로 성질 더러운 편이었어?”
“응.”
“……그래도 내가 더 좋지?”
“그럼.”
이안이 헤이든에게 마구 입맞추기 시작했다. 헤이든은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입맞춤을 받더니, 이따금 틈이 나면 역으로 그의 얼굴에 입맞추기도 하며 말갛게 웃었다. 곧 한숨처럼 입맞춤 끝에 말마디를 덧붙였다.
“간지러워.”
“하지만 좋으면서.”
“그건 그래. ……너도 좋지? 나한테만 좋다고 해줘…….”
“안 보는 사이에 엄청 응석받이가 됐네. ……피비린내가 난다고 해서, 키스는 안 하려고 했는데.”
“죽으면 널 볼 수 없을 거라는 건 살아있을 때도 알고 있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서도 네가 눈앞에 없을 줄은 몰랐단 말야……. 피 냄새 같은 건 상관없어. ……그냥 키스해 주면 안 될까?”
헤이든이 이안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안은 어리광을 부리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겼다. 이 어둔 심해에서, 유일하고 분명하게 환한 것. 그는 가만히 입술을 포갰다. 헤이든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에 순순히 따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곤 포개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눌렀다. 마치 그를 잊지 않으려는 양 제법 오랫동안.
어두컴컴한 암석 사이로 진주 알갱이들이 박혀 희미하게 빛을 발한다. 거대한 조개들은 뻐끔대며 공기 방울을 내뱉어 댔다. 밤하늘의 중심이 이 해저에 흐르고 있었다. 아득하니 아름다워, 보면서도 그리울 정도로 짙게. 반투명한 듯 윤기가 흐르는 피부 아래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갈라테이아의 피부에 이안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인간은 이런 피부가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새삼 두려워질 것도 없었다. 헤이든은 언제나 헤이든이었고, 이안도 언제나 이안이었으므로. 앞서 서로 말한 바 있듯,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길 원하고 서로를 서로라고 정의하는 한, 이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영영 이어질 터였다. 입술이 떨어질 즈음 헤이든이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피비린내 탓인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네게 줄 게 있었는데. 지금 꺼내기는 분위기가 조금 그런가?”
“뭐길래 그래. 괜찮아. 보여줘.”
“별 건 아니고, 선물을 하나 준비했거든…….”
헤이든이 근처 암석 사이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 들어 이안에게 건넸다. 은으로 빚어낸 작은 오르골이었다. 자그마한 진주와 산호로 장식되어 있고, 섬세한 물결 무늬 세공을 따라 빛이 흐르는.
“있잖아, 이안.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나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왔다는 게 꿈만 같아서. 이 바다가 겨울 바람을 집어삼키고 또 파도로 내보내길 반복하는 동안, 나는 너를 꿈꿨어. 황홀한 바다의 꿈처럼. 이건 널 생각하며 만든 선물이야.”
이안은 조심스럽게 오르골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고, 헤이든의 양 뺨을 감싸 엄지로 천천히 어르다가 양 뺨에 번갈아 입술을 천천히 눌렀다. 아주 천천히.
“행복했어, 가 아니야. 행복해, 지.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도록 난 노력할 거야. 최선을 다해서…….”
헤이든이 입술을 마주 누르며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벌린 그 순간이었다.
어디에서부터 거센 진동이 밀려왔다. 갑작스레 몸을 감싸던 물살이 사나워졌다. 갈라테이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위험을 감지한 새 떼처럼 날카롭게 외쳐댔다.
“갈라테이아 사냥꾼이야! 갈라테이아 사냥꾼이야!”
헤이든 또한 그 불안감에 동요하여 긴장한 표정으로 이안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막을 울리게 할 정도로 묵직한 물의 무게와 숨소리가 이안에게로 밀려들었다. 살짝 벌려 두었던 입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와 이안은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짭짤하고 역한 바닷물이 혀 위로 퍼져 그 무른 근육 덩어리를 차갑게 붙들었다. 그를 지키고 있던 바다의 허락이, 그 안온한 손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안은 기침을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심해의 수압은 그를 가차없이 눌러오며 온갖 틈을 비집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맨몸으로 마주한 해저의 수온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인간에게 허락된 적 없는 장소가 그를 삼켜 짓뭉개 버릴 것처럼 굴어왔다. 이안은 그 거대한 적의에 두려움을 느꼈다. 일순 머리가 흐려질 정도로.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마침내 눈이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주변이 어두워지고, 머리가 쪼개지는 것만 같은 고통과 물살에 휩쓸려 이안은 정신을 잃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즈음, 이안은 어딘지 모를 바닥에 제 뺨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중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수압에 시달렸던 고막은 찢어지기라도 한 양 먹먹하기만 했다. 이안은 손끝을 움직여 바닥을 짚었다. 거칠고 딱딱한 시멘트 결이 그의 손끝에서 바스라졌다. 일순 그의 등이 둥글게 굽어들며 안에 고여 있던 바닷물을 위액과 함께 쏟아냈다. 기침과 구토가 뒤섞여 기도가 쓰라릴 정도였지만, 이안은 계속해서 제 안에 고인 바닷물들을 토해냈다. 축축하게 젖은 겉옷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아마 제 몸 또한 성한 데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한참 기침을 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면, 그의 눈앞에 약간 젖은 구두코가 보였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시나요?”
정갈하게 차려입은 정장과 달리, 막일이라도 하다 온 양 와이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린 여자였다. 집사 에리카.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 라텍스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면서, 물 흐르듯 한쪽 무릎을 꿇고 이안과 시선을 맞춰왔다.
“바닷가에 쓰러져 계신 것을 어르신이 발견하시고 구조하셨습니다. 반나절 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갈라테이아에게 홀리신 탓입니다. 미리 경고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르신이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이곳은 지하실인 모양이었다. 집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어둔 공간 안을 울렸다. 그의 등 뒤로는 계단이 보였다. 저것을 따라 오르면 위층으로 갈 수 있을 터였다. 축축한 시멘트 벽에는 소금기 가득한 습기가 가득 서려 있었고, 장식 없는 백열전구 몇 개가 흐릿하게 안을 밝히고 있었다. 집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다 보면, 무언가 거대한 기계가 가동하며 웅웅대는 소리가 이안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이윽고 집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안은 그 앞을 살폈다. 거대한 수조 탱크가 수십 개 늘어선 방이었다. 얼핏 보아도 두꺼운 유리 수조 너머에서는 물이 무겁게 출렁이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던 그 소리는 수조 펌프가 돌아가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이안은 잔기침을 하며 폐에 고인 바닷물을 마저 토해내곤 약간 비틀거리다가, 눈앞에 보이는 수조들을 하나씩 시선으로 훑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조 안은 희뿌연 물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분명 물고기의 꼬리였다. 바짝 마른 인간의 손이 유리 벽면을 짚고 있었다. 눈이 멀기라도 한 듯 온통 눈자위가 흰 갈라테이아가 수조 안에서 온몸을 뒤틀며 경련하고 있었다. 두 번째 수조 안에 갇힌 갈라테이아의 상태는 더욱 처참했다. 허리께가 반쯤 잘려나가 수조 안은 온통 핏물이 뒤섞여 검붉었다. 갈라테이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가라앉은 채 벽면을 손톱으로 긁어댔다. 세 번째 수조 안의 갈라테이아는 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다른 갈라테이아들보다 단단히 구속되어 있었다. 몸에 난 잔 상처는 아무는 도중인지 피부 곳곳이 어그러져 있었다. 생기를 잃은 백발이 공기 주입장치가 뱉는 기포를 따라 이리저리 흩어졌다. 공원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그리고, 네 번째 수조에 다다랐을 때. 이안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수조 탱크 앞에는 나폴레옹이 있었다. 평소처럼, 휠체어에 앉은 그는 수조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갓 물을 채운 듯 깨끗한 수조 안은 그 내용물이 훤히 보였다. 헤이든이었다. 맹견에게 채울 법한 입마개를 찬 헤이든이 수조에 손을 짚고 눈을 연신 깜빡이고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이쪽에 앉으세요.”
“…….”
수조를 바라보다 이안 쪽을 향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거칠었지만 말투는 변함없이 인자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작은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 앞에는 매한가지로 자그만 탁자 하나가 있었고, 탁자의 모서리엔 자그만 은 열쇠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안은 눈을 굴려 열쇠를 바라보았다. 나폴레옹이 인자하게 웃었다.
“함부로 눈독 들이시면 곤란합니다. 곧 써야 하거든요. 몸은 좀 괜찮은가요?”
“네, 아마도.”
“다행입니다. 갈라테이아에게 완전히 홀리셨더군요. 이 괴물들은 인간을 홀려서 바닷속 깊은 곳까지 끌어들이고 잡아먹지요.”
나폴레옹이 수조 안을 바라보며 제 말에 취한 사이, 이안은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은 열쇠를 슬쩍해 제 옷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빠른 행동에 근처에 서 있던 집사도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해보세요, 이안 씨. 그 괴물이 자꾸만 당신을 바다 깊은 곳까지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나요? 정식으로 나를 다시 소개해야겠군요. 나는 인간들이 더 이상 이 괴물에게 당하지 않도록 이 괴물들을 사냥하는, 갈라테이아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갈라테이아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이안 씨를 내가 구하게 되었네요. 몸은 어쩔 수 없겠으나, 어째, 마음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인자한 투로 말을 잇던 나폴레옹이 이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을 이런 곳으로 모셔서야 예의가 아닙니다만, 여의치 않게 이곳으로 당신을 모시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안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
“이 심해 괴물의 역린을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의뭉스럽기만 하던 저택의 주인은 그동안 꽁꽁 저를 싸매고 있던 목도리며 겉옷을 벗었다. 두꺼운 천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나면, 인간의 두상을 하고 있으나, 코는 납작하여 콧구멍만이 뚫려 있고, 눈의 눈꺼풀은 거의 없다시피 휑하며 피부까지 푸르죽죽한, 머리숱마저 드문드문 빠진 추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심해 괴물의 살점을 먹으면 흉한 겉모습을 벗을 수 있게 된답니다. 이 겉모습도 다 이 괴물의 저주 때문이에요. 하지만 심해 괴물이 계속해서 재생하는 이상, 괴물의 살점을 먹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부탁입니다, 그 역린을 부숴 주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이 심해 괴물의 꼬리를 주지요. 이 괴물의 꼬리가 불면증에 아주 좋거든요. 영구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찻잎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
옷소매 안이 묵직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있었던 일은 함구할 테니, 나가게 해 주십시오. 이 공간에 더 남아 맴도는 것이 끔찍이도 싫습니다.”
“……이안 씨의 선택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어쩔 수 없지요. 아쉽지만 이만 작별하는 수밖에. 점심 시간은 벌써 지났으니, 이안 씨의 차는 이미 고쳐져 있을 겁니다. 아쉽지만, 안녕히 가십시오.”
마지막까지 다정하고 정중한 투로 대답한 나폴레옹은 다시 고개를 돌려 수조 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집사 또한. 이안은 허둥대며 계단을 따라 지하실 밖으로 나왔다. 지하실의 계단은 저택의 홀로 이어져 있었다. 이안은 옷소매를 내려 안에 있던 열쇠를 꺼내 꽉 쥐었다. 손바닥 안은 땀과 소금물이 뒤섞여 척척했다. 선택. 사실 선택을 할 것도 없었다. 답은 명확했으니까. 이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을 움직여 보며 제 컨디션을 가볍게 체크했다. 평소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지를 적당히 운용할 정도는 되었다. 성인 남성 하나 정도는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영웅 심리는 그 자신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지금은, 어줍잖은 영웅 놀이를 해서 기회를 날릴 때도 아니었다. 제 목숨만이 걸린 게 아니었으니까. 입마개를 하고 있던 헤이든을 떠올리면 손바닥 안이 재차 땀으로 젖어드는 것이 느껴져 이안은 미간에 약하게 힘을 주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할 일도 명확했다. 그러니, 이제는 올바르게 수행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수집관으로 향했다. 저택의 내부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저택 안을 헤맬 적마다 드문드문 보이던 사용인들은 어디로 빠졌는지 죄 보이지 않았고, 집사와 주인의 부재를 증명하듯 피아노 소리, 사람 발자국 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저택은 막 저물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그림자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홀의 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켰다.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뒤로 하고, 이안은 방문을 열었다.
문 안은 여전히 옅은 알코올 향과 포르말린 냄새가 혼재해 탁하고 건조했다. 방 한 켠의 모서리에는 여전히 접이식 사다리가 기대어져 있었다. 지난번 들키지 않았던 덕에 집사도 크게 경계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사다리를 써서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사다리를 그대로 내려둔 채로. 천장의 네모 형태의 빗금을 밀면 예의 비밀 통로가 나왔다. 그 어둡고 비좁은 통로를 기어서 지나가다 보면 코끝이 짭짜름하고 비릿한 냄새로 아려왔다. 좁은 통로 안으로 갈라테이아들의 처절한 비명, 혹은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은 채 통로를 따라 계속해서 포복 자세로 기어 이동했다. 얼마쯤 기어가니 전처럼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 열쇠가 필요한 문이었다. 열쇠는 맞춘 것처럼 들어갔다. 찰칵, 하고 문이 열리면, 이안은 건조한 표정을 하고 그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안은 서재였다. 도서관만큼 방대한 크기는 아니지만, 책장이 여럿 비치되어 있고 연구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실험 장치들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널려 있었다. 양쪽 측면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벽난로는 꺼져 있었지만, 방풍이 잘 되는 곳이라 그런지 그렇게 서늘하진 않았다. 입구 반대편 벽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창이 없었지만, 그 방 안은 어둡지 않았다. 심해에서 익히 보았던, 스스로 빛을 내는 산호들이 이곳저곳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꼭 심해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방의 한쪽 구석 바닥에는 문이 하나 더 나 있었다.
이안은 책장을 먼저 살폈다. 책장에는 전부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제목으로 적힌 양장본들이 즐비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책들 위에 가로로 올려져 있는 얇은 책이 한 권 보였다. 이안은 그 얇은 책을 집어 펼쳤다. 제대로 제본이 안 된 것인지, 펼치자마자 바닥으로 두꺼운 종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 중 두 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종이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하나는 살아있는 살점을 녹이는 주문, 하나는 대상을 작게 줄이는 주문인 듯했다. 마력이니 뭐니 하는 수치가 나와 있었지만 알아들을리 만무했으므로, 일단 그는 그것을 접어 제 주머니에 챙겼다.
테이블 위에는 거대한 실험 장치를 제외하고도, 어지러운 글씨로 쓰여져 있는 종이 뭉치나 실험 일지로 추측되는 것들이 널려 있었다. 붉은 액체가 든 비커, 핀셋, 얇은 유리판, 빈 어항 같은 것들이 그득했다. 종이 뭉치에 쓰인 단어는 알 수 없었으므로, 이안은 실험 일지를 들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다 쓸 적마다 뒤에 새 종이를 추가한 듯, 뒤로 갈수록 종이가 빳빳했다.
[18XX.XX.XX
…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역린을 파괴하지 않은 갈라테이아는 쓸모가 없어. 아무리 먹어도 재생하고, 배만 찰 뿐. 내가 완벽한 심해인이 되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성과 지성의 허기에 굶주렸다. … … 역린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갈라테이아를 완전히 소생 불가능하게 만들 방법은 없단 말인가? 우선 갈라테이아 자체도 흔하지 않으니, 갈라테이아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내륙 말고, 바닷가로. … ]
[18XX.XX.XX
… 갈라테이아 지협이라는 곳을 찾았다. 심해인의 향기도 난다. 아, 지고하고도 얼음처럼 차가운 심해의 어버이여. 자식이 곧 완전하고 완벽한 심해인이 되어 심해인의 도시로 가겠나이다.]
[19XX.XX.XX
… 예상대로다, 네레이스라는 바다 요정의 전설에 깃든 갈라테이아들이 이 지협에 살고 있었으며, 동시에 심해인들도 존재했다. 심해인을 대대로 따른 충직한 신도 집안을 찾았다. 이들에게 내가 온전한 심해인이 되는 것을 도울 것을 약속받았다.]
[19XX.XX.XX
… 갈라테이아들은 결코 죽지 않는 것 같다. 갈라테이아의 세포를 완전히 파괴시킬 방법을 과학과 주술에 접목해 찾기로 했다. 녹아내리는 살 주문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데, 개량할 수 없을까? 더 많은 갈라테이아들을 포획해야 한다.]
[200X.XX.XX
… 갈라테이아의 꼬리에는 수면 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번에 당했을 때는 꽤 놀랐지만, 결국 온순한 종족인 그들에게는 나를 해칠 생각이 없다. 미련한 미물들. 마을 전체에 갈라테이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뿌려놓는 것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덕에 성공했다.]
[201X.XX.XX
… 갈라테이아의 꼬리를 잘라내 꽃의 비료로 사용해 보았더니, 수면에 도움이 되는 꽃의 품종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갈라테이아들은 얼마든지 재생하니, 갈라테이아 들의 재생을 멈추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꽃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완전한 심해인이 되고 싶다.]
이안은 별 동요 없이 실험 일지를 덮었다. 별달리 놀라울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그저 또 하나의 인간이 지극히 제 욕망을 추구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대응해도 상관없겠지. 주변에서 빛나는 산호들은, 자세히 보니 모두 흐릿하고 인공적인 조형물임이 눈에 띄었다. 야광체를 덧입혀 만든 인공 산호인 듯했다. 결국, 이 심해저 같은 분위기도 모조품일 뿐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 벽으로 다가가 커튼을 들추었다. 그 너머에는, 커다란 욕조가 있었다. 욕조 안에는, 더러운 물이 가득 차 일렁이고 있었다. 이따금 두툼한 살점들도 떠다니는 게 보였다. 손으로 집어내면 소리가 요란할 듯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은 확실할 터였다. 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일 뿐.
이안은 방금 읽고 외워버린 주문을 머릿속으로 정확히 굴리며, 입속말로 조용하게 떠다니는 살점들을 가리켰다. 마법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는 친절하게도 한 마디 설명이 전부였다. ‘발음할 때 쓰일 주문 단어와 표기에 쓰인 주문 기호를 머릿속으로 정확히 떠올리며 대상에 대해 취하고 싶은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라.’
“■■■■■■■■.”
욕조 안을 반쯤 메우고 있던 살덩어리가 작아지더니, 곧 세 개 정도만 보일 만큼 줄어들었다. 이안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어항으로 살점을 하나씩 퍼냈다. 그리곤, 마개를 당겨 욕조 안의 더러운 물을 전부 버리고, 깨끗한 물을 가득 받았다. 그리고 이안은 제 재킷 주머니 안을 더듬어 내용물을 꺼냈다. 이 난리통 속에서도 헤이든이 준 오르골은 멀쩡했다. 섬세하게 세공된 은 장식과 진주 사이로 빛이 잔무늬를 따라 물결처럼 흘렀다. 잡자마자 알았다. 이것이 그를 부를 수 있는, 일종의 마법 주문 기능을 한다는 것을.
선택은 했다. 주사위는 이미 다 던져졌고, 자신의 몫을 가져갈 일만이 남았다. 이안은 오르골을 돌렸다. 안에서는 천천히, 이안이 좋아하는 쇼팽의 왈츠가 흘러나왔다. 이 어두침침한 분위기 안에서도 긴장을 풀어버릴 정도로, 맑고 투명한 선율이었다. 이안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제 짝이 제게로 오길 기다렸다. 머잖아 깨끗한 물 안에서 기포가 보글대며 솟더니, 파도가 샘솟는 듯한 냄새가 욕조 안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생명의 향이었다. 이내 물거품 사이에서 천천히 헤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식은 없어 보였으나, 살아 있었다. 이안은 욕조 안으로 팔을 밀어 넣어 그를 반쯤 끌어안았다. 자신의 꿈이 여기 있었다. 황홀한, 바다의 꿈.
저 바닥에서부터 분노에 가득 찬 고함소리가 올라왔다. 이안은 앞서 썼던 마법 주문을 한 번 더 썼다. 대상을 작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깨끗한 욕조 물을 어항에 가득 담아, 헤이든을 그 안에 담았다. 그리고, 방바닥에 나 있는 문을 더듬어 열었다. 계단은 아래로 쭉 이어져 있었다. 비상탈출구이길 간절히 빌며,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이안은 어항을 품 안에 감싸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헤이든이 담긴 어항 속 물이 연신 출렁거렸다. 기도에서 피 맛이 차오를 즈음, 이안의 눈앞으로 탁 트인 암석 절벽이 펼쳐졌다. 이안은 그와 함께 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와 바다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희생하는 삶은, 그들의 욕심엔 차지 않았으므로. 이안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력으로 자신의 짝을 보호할 수 있는 선택을.
이안은 그와 함께 차에 탔다. 옆 좌석에 조심스레 어항을 두고, 엑셀을 밟아 지긋지긋한 마을을 빠져나왔다. 뒤에 남아 있는 수십 수백의 갈라테이아들. 그들의 고통은 간단히 의식 뒤로 밀어버렸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라는 이유 하나로. 너와 함께 도버 해협에 집을 구할 거야. 한동안은 욕조 생활을 면치 못하겠지만. 네게 이따금 피를 주어서 걷는 연습도 같이 할 거고, 빨리 이사를 해서 네가 다시 바닷물을 머금을 수 있게 할게. 네가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어느 날의 내가 늙어 죽거든, ……다시 네가 그 머나먼 길을 헤쳐 너의 엇비슷한 동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록. 네게 내 모든 걸 남길게.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제 심장이 덜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이안은 운전대를 더욱 세게 붙들었다. 아무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잠깐 너를 놓아주는 건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한다. 네가 죽음을 거슬러 내게 돌아왔으니, 나는 널 바다로 돌려보낼 의무가 마땅히 있다. 그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두 번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소망한다. 네가 먼 훗날에, 나를 잊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차는 끊임없이 이어진 도로를 따라 달렸다. 바다는 스쳐 지나갈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그들의 곁을 우직하게 지켰다. 바닷가에 밀려드는 흰 포말은 여전히 자갈에 먹혀 사라지고, 쌀쌀한 바람은 그들의 코끝을 엘 듯이 스쳐오지만, 그래도 차는 달렸다.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파랗던 하늘을 붉게 살라 먹으며 번지는 노을이 차창 안으로 드리울 때, 이안은 잠자코 블라인드를 내렸다.
이안의 집 욕조에 손님이 생겼다. 그의 연인, 그의 짝, 그의 단 하나뿐인 황홀한 바다의 꿈. 조금씩 메말라가는 자신의 연인의 손을 감싸 쥐며 이안은 한시도 낭비하지 않고 움직여 간다. 그와 제 연인이 안온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같이 해내기 위해서. 그들은 어항 속에 갇히지 않았다. 그리고 갇히지 않을 것이다. 바다와 땅, 창공과 수면이 만나는 그곳에, 그들은 집을 짓고 기거하며 서로의 생명에 맞닿아 호흡하게 될 것이다. 피부 너머에 있음에도 자신인 것처럼 귀히 여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게 영원히 자신과는 다를 것을 알면서도.
+ 애프터,
새벽녘,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가르며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이 안온하게 품었던 대지가 제 민낯을 드러내고, 아침을 알리는 생물들의 소리 없는, 혹은 새된 소리가 울타리 너머 멀잖은 곳에 자리한 숲에서부터 저택 안방까지 퍼져 왔다. 앞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올라간 턱선 옆으로 채 묶이지 못한 백금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기다랗게 흘러내렸다. 오늘은 눈이 오지 않을 모양이지. 이 지협은 유독 겨울이면 바람이 모질고 거세어서, 기력이 쇠하고도 새벽 공기를 쐬길 좋아하는 제 연인에게는 독이 될 터였다.
청년은 눈을 깜빡여 상념을 털어내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흰 페인트로 칠해둔 저택 벽에 대고 산산이 부서지는 저 여명이 눈부셨다. 2층, 진녹색으로 칠해진 문 앞에 서서 청년은 금빛 문고리를 잡았다. 집 안으로 훈기가 충분히 돌지 않아 집안 공기는 시렸고 따라서 금속성을 가진 물체는 더욱 차가울 터인데도,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우아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방 안, 원목으로 만든 침대 위로는 부드럽고 묵직한 재질의 천으로 이루어진 솜이불을 덮고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안.”
청년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반응하듯 노쇠한 기력이 역력한 눈꺼풀이 힘겹게 들렸다. 늙은 사람, 혹은 병든 사람 특유의 힘 없고 끝이 뭉그러진 목소리가 그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헤이든.”
“아침인데 먼저 일어나 있을 줄 알았어. 다행이다, 오늘 바깥 날씨가 추웠거든. 밤새 눈이 내려서. 창문을 열었으면 감기에 걸렸을지도 몰라.”
“눈이 왔어?”
“응, 제법 쌓일 정도로, 이만큼.”
청년은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 간격을 벌려 보이며 노인에게 웃어 보였다.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검지 끝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 좀 열어줄래. 맑은 공기가 마시고 싶어.”
“방금 얘기했잖아. 감기 걸리기 좋을 온도라니까. 왜, 찬 바람은 얼굴에 쐬고 싶지만 따뜻하게 데운 이불 안에서는 나오기 싫어졌어?”
노인은 희게 센 눈썹을 늘어뜨리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어서.”
이안이 나폴레옹의 저주에 걸린 지, 60일째 되는 날이었다.
*
사냥감이 사냥꾼에게 맞서는 수준을 넘어, 사냥꾼을 사냥하는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 이안 로즈몬드 칼릭스는 제 연인 헤이든 멀 하브를 품에 안은 채 허겁지겁 갈라테이아 지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는 과속 딱지에도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차를 난폭하게 몰아 작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제 아우디를 헐값에 중고차 딜러에게 팔아치웠다. 헤쭉하니 귀에 입꼬리가 걸린 중고차 딜러는 싼값에 다른 차를 내어 주었고, 이안은 시간을 내 잠깐 모텔에 들러서는 온 몸을 샅샅이 훑어가며 샤워를 한 뒤 새로운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욕실 밖으로 나와 근처 옷 가게에서 산 싸구려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추적기를 온몸으로 따돌리고서야, 그는 제 연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폴레옹은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한번 놓친 사냥감을 쉽게 놓아줄 리 없다고 이안은 판단했다. 상대는 200년이 넘게 산 괴물이었고, 자산 또한 썩어 넘치게 많았으며, 지역의 유지였고, 무엇보다 그에겐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지지해 줄 세력과 지식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냥의 역설이란, 사냥하는 이는 자신이 사냥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기 마련이며, 사냥은 호사스러움을 만끽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생존의 방편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도버 해협 쪽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이안은 근처 바다에 헤이든을 풀어주고 미국 영주권을 따는 데에 집중했다. 이주는 어렵잖게 진행되었다. 신분을 숨기고 어느 시골의 촌부로 사느니, 대도시의 중심으로 들어가 사람 속에 숨는 것이 그의 적성에 더없이 맞았으므로, 이안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 쪽으로 이주한 후에, 그는 한 새 어선을 구매해서 2층짜리 집으로 개조했다. 아래의 생선 저장고는 몰래 방처럼 꾸며 헤이든이 거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3년. 3년의 세월 동안 이안은 육지와 바다, 도심과 해변을 오가며 나폴레옹에게 맞설 수단을 연구했다. 이 연구에는 그때 저택에서 훔쳐 온 종이 두 장이 큰 기여를 했다. 살을 녹이는 주문과 물체를 작게 만드는 주문. 고작 두 개밖에 안 되는 스펠을 잘게 쪼개고 분석하여, 이안은 그것을 딥웹에 검색해 마법사들과의 접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어깨 너머로 배운 마법과 다져진 사격 실력, 여타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지고서야 그는, 다시 제 연인과 함께 갈라테이아 지협으로 되돌아갔다.
노덴스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개인적 성향이 다분한 갈라테이아들에게도 동족에 대한 애착은 끈끈한 것이어서, 이안이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한 진실들은 그들에게 큰 분노와 동기를 안겨주었다. 이안은 가지고 온 혈액 팩을 나누어 주어 다수의 갈라테이아들과 함께 심해인의 저택을 습격했다. 사정 모를 이들에게는 폭도들이 어느 한 부유한 저택을 점거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 야밤에, 불길 하나 치솟지 않고 비명 하나 새어나가지 않는 저택 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위인이 있었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대신 그 밤에는, 진노에 찬 나폴레옹의 주문이 이안의 가슴을 꿰뚫었다.
“■■■■■■■!”
인간이 들어본 적도, 발음하는 것도 어려울 주문을 왼 나폴레옹, 그 심해인은 손끝으로 이안을 명확하게 가리켰다. 이안은 마법에 정통으로 맞아 몇 미터를 날아간 끝에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난리통을 헤치고 헤이든이 뛰어와 그를 부축했다.
“이안!”
심장 소리. 그의 언제나 건강하고 열띠던 심장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것에 헤이든의 마음 또한 요동치고야 말았다. 그때 저쪽 맞은편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길다란 사냥용 작살을 기어이 심해인의 목에 꽂아 넣은 갈라테이아가 피칠갑을 한 채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혼란 속에서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환호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사냥감과 사냥꾼의 관계는, 결국 언제든지 전복할 수 있었던 셈이었다. 그렇게 사냥꾼의 사냥은 맥없이 막을 내렸다.
*
빈 저택은 시간을 두고 이안이 인수하여 갈라테이아들의 거처로 쓰기로 하였으나, 문제는 일주일 뒤, 이안이 제 머리에서 급격하게 늘어나는 새치를 발견하면서부터 일어났다. 그가 정통으로 맞았으나 정체를 차마 알지 못했던 마법, 아마도 저주일 그것의 정체는 바로, 신체 나이를 급격히 빠르게 먹도록 만드는 마법이었다. 마법, 아니, 저주의 정체를 가늠하기 무섭게 이안은 직장에 퇴사 통보를 하고 갈라테이아 해협 근처에서 쓸만한 2층집을 샀다. 자그마하니, 사람 둘이나 셋 정도 살기에 적당한 크기인 벽돌집은 흰 페인트를 칠해 낮에도 밤에도 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50일 남짓을 함께 붙어 보냈다. 헤이든은 남아 있는 혈액팩을 하루에 하나씩 까 마시며 이안의 곁을 부단히 지켰고, 이안은 갑작스레 목전에 닥쳐온 죽음을 무던히 받아들이고는 제 재산을 처분하는 데에 자신이 가진 시간 일부를, 그 외의 나머지는 죄다 헤이든에게 썼다. 그만큼 가치 있는 낭비도 없었다.
머리가 희게 세고, 주름이 하나씩 늘어가며, 체온이 나날이 조금씩 떨어져 가는 제 짝을 보다듬으며 헤이든은 시간이 타들어가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되뇌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끝은 자신이 예상하고 기대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더 비참하고 슬픈 몰골로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헤이든, 청년이 잠긴 목소리로 이안, 백발이 성성해도 아름다운 노인에게 물었다.
“그럼 네게 남은 시간은, 오늘뿐인 거야?”
“그래,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뭘 하고 싶어?”
“……네가 뭘 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너의 죽음인걸.”
노인은 미소 지었다.
“난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자, 그는 다시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고, 제 연인의 요청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으며…… 다가올 끝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겨우 청년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 늘 하던 일을 하자. 산책을 가는 거야. 우리가 좋아하는 장소를 돌아보자. 그리고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별을 보는 거야. 우리가 늘 가는 절벽에서.”
요청보다는 차라리 소원을 비는 투에 가까웠다. 노인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날 안아서 옮겨줄래. 사 놓고 쓸 날만 기다리고 있던 휠체어를 게시할 시간이야. 나폴레옹이 이 사실을 알면 저승에서도 웃겠네.”
“말이 독해.”
“그러니까 남은 시간을 더 꽁냥대며 보내면 되잖아. 나폴레옹이 저승에서도 이를 벅벅 갈도록.”
청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가뿐히 제 연인을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나날이 바싹 말라가고 여위었던 몸은 성인 남성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의 골격이 원래 가늘고 섬세한 편임을 새삼 느끼며, 청년은 노인을 휠체어에 앉혔다. 노인은 두어 번 휠체어 바퀴를 굴려 방향을 틀어보더니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제법 재밌는데? 뻐기지 말고 진작 앉을 걸 그랬어.”
그제야 청년도 살풋 제 뺨에 미소를 띄웠다.
*
언제나처럼 스킨 케어 루틴을 하려고 욕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세면대는 휠체어에 앉은 노인에겐 터무니없이 높았으므로, 이번에도 청년이 나서야 했다. 청년은 손수건에 물을 적셔 노인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노인이 요일마다 꼭꼭 지켜 바르곤 했던 스킨 케어 제품들을 하나씩 그의 뺨과 이마께에 찍어 바르곤 문질러 주었다. 아침은 감자 크림 수프였다. 핸드 믹서기를 써서 곱게 간 수프는 노인이 떠먹기에도 어렵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은 스푼을 들었다 내리는 노인의 손끝과 팔뚝이 잘게 떨렸다.
“먹여줄까?”
“괜찮아.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노인은 고집스럽게 말하며 수프를 마저 떠먹었다. 정확히는, 떠먹으려고 했다. 결국 스푼을 놓치며 제 잠옷에 수프를 조금 흘리기 전까지는. 노인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줄곧 노인만 보고 있던 청년은 그 순간의 어그러짐조차 놓치지 않았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노인은 뻔뻔스런 표정을 가장하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할 수 없나 봐. 흘린 거, 닦아줄 수 있어? 턱받이를 다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고집 피우지 말라니까……. 데이진 않았고?”
“네가 분유 먹이듯 온도를 맞춰준 덕에 괜찮아.”
청년은 실없이 웃다가 노인의 곁에 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기 이안.”
“남편이 아기가 되는 게 좋아?”
“하지만 귀여운걸.”
“상상이?”
“지금도.”
“너도 정말 취향 이상해.”
청년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노인의 옷에 묻은 수프를 냅킨으로 정성스레 닦아냈다.
“아침 먹고는 어딜 가고 싶어?”
“음, 도서관에 갈까?”
“거기가 좋아?”
“이제 아기니까 아동용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을 것도 같거든.”
“농담은…….”
“진심인데. 아무튼, 난 거기 걸린 그림 작품들이 좋아. 그 건물의 모양새도. 안에 있는 자료들은 여전히 악의적으로 윤색된 것들이 많지만, 뭐……. 차차 바꿔나가겠지.”
바꿔나갈 이의 주어가 빠져 있다는 것을 둘 다 알았지만, 둘 다 그에 대해 되묻거나 내색하지 않았다. 머나먼 미래의 일을 논하기엔 현실이 목 끝까지 차올라선 끝끝내 얼굴을 덮칠 정도로 밀어닥쳤다.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청년은 바삐 상념을 떨치고 일어나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아기 이안 님.”
“부탁해요, 어른 헤이든 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매달고 두 사람은 주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
바깥은 코가 시리도록 추워서, 겨울 옷을 몇 겹 입고 목도리를 둘둘 두른 노인의 모습은 꽤나 그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청년은 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노인은 있는 힘껏 눈을 흘겨댔다. 둘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도서관 쪽을, 해안가 쪽을, 숲 쪽을 향했다.
휠체어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뒤따르는 청년의 발자국 소리를 덮었다. 튀어나온 돌조각을 마주칠 때마다 정직하게 덜걱거리는 저 휠체어 아래 바구니에는, 노인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부리나케 싸 온 수프와 빵이 보온 가방에 담겨 있었다. 그들은 실내와 실외를 느릿하게 오가며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를 하나씩 둘러보았다. 사서의 특별 배려에 힘입어 도서관의 모든 층을 둘러보았고, 자갈이 깔린 해안가 대신 해안가 쪽에 난 산책로를 따라 자갈이 포말을 마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숲 곳곳에 자그만 생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든 둥지를 보았다.
정말로 산책이나 소풍이라도 나가는 듯한 행보에, 처음에는 자연스레 어울리던 청년도 오후쯤 이르러서는 야트막한 의문이 생기고야 말았다. 그래서 청년은 막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제 입가를 핥고 있는 노인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하나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왜 무섭다고 하지 않아?”
노인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접어 웃었다. 눈가 주름이 깊게 몇 골로 패여도 주름이 패이기 전과 꼭 같은 미소였다.
“내가 말한 적 없었지? 내가 죽을 때 가장 바라던 거.”
“응.”
“너랑 같이 있는 거였어.”
“…….”
“네가 내 죽음의 머리맡을 지켜주는 거. 살아서든, 죽어서든.”
노인은 마치 오늘의 날씨를 이야기하듯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영혼을 믿지 않고 천국을 믿지 않아. 세례도 받지 않았지. 내 아버지는 무신론자였으니까. 어머니는 천주교도셨으니 세례를 받길 원하셨지만, 아버지는 그게 내 몫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셨어. 출생은 선택이 아니지만 축성을 받아 신의 이름을 받는 것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을 전해 들은 날 아버지의 이름을 수없이 일기장에 썼어. 너무 인상 깊었거든.”
바람이 불 적마다 노인의 길고 흰 속눈썹이 고양잇과 동물의 수염처럼 흔들렸다. 쇠락한 몸 안에는 여전히 젊고 생동하는 영혼이 맥박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자색 눈동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 우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게 이 세상에 연장될 수 있다면, 너는 반드시 내게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이토록 촘촘하게 생을 맞물려 왔다면, 그래서 이 세계도 우리가 맞물리는 것이 법칙에 합당하다고 여겨 그렇게 우릴 이 세상에 새기고 말았다면,”
노인이 나직하지만 제법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가 되어서든, 어느 시간에 다시 맞물리게 될 거라고.”
감탄할 틈도 없이 시간은 흘렀다. 지체 없이, 여지 없이. 저만치 보이는 수평선 너머로 해가 차츰 저물어 갔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곱아드는 노인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청년은 집에 돌아가자고 애원하듯 말했으나, 노인은 가벼운 도리질로 그 애원을 물리치고는 고집스럽게 절벽 쪽을 향해 바퀴를 굴렸다. 그러니 청년도 그것을 좇을 수밖에. 저만치서 해가 떨어진 만큼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드러난 백발이 바람을 따라 가냘프게 흩날렸다. 청년은 자신이 태어난 날 내렸다는 진눈깨비를 생각했다. 그도 진눈깨비처럼 물에 젖으면 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
노인이 검지 끝을 들어 밤하늘을 가리켰다.
“자, 별이 태어나는 시간이야.”
“별이 태어나는 걸 어떻게 알아?”
“은유라고 대답하면 틀린 말이 아니게 되겠지만, 나는 신 대신 시간의 연속과 세계의 존속, 그리고 확장을 믿어서. 내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디선가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네.”
청년이 실없이 웃었다. 그는 어리광을 피우듯 노인의 손바닥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어 제 귓가에 그의 손바닥을 댔다. 인간의 피부 너머는 물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지. 그러면 자신은 그의 안에서도 살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은 익사하지 않으니까.
“이제껏 줄곧 난 네가 날 채웠다고 생각했거든.”
“생각이 바뀌었어?”
“응.”
“어떻게.”
“돌이켜 보면, 우린 한 번도 서로를 온전히 메운 적 없었어. 서로에게 맞춰주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늘 물어야 했지. ‘이안, 무슨 생각 해?’”
“듣고 있어.”
“그러니까…… 사실은 네가 내 빈 자리를 채워준 게 아니었던 거야. 내가 나 스스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거지. 너와 함께 걸으려고.”
“응.”
“갈라테이아로 살아나는 동안, 널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어. 내가 그 육신에 완전히 <나>를 덧씌울 수 있었던 건, 너와의 기억 덕분이야. 난 기억해, 전부는 아니라도, 아주 선명하게. 널 잊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너와 나눈 대화 전부를 곱씹던 그 시간들을.”
“응.”
“그리고 이젠 알 것 같아. 그게 결국 나였던 거야. 사랑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존재. 부재에 버림받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소망하는 존재.”
“…….”
“언젠가부터 난 네가 없어도 차 있을 수가 있었던 거지.”
노인이 청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청년의 귓가 안에 사박거리는 소리가 맴돌았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아 미끄러지는 소리가.
“널 사랑했어.”
노인이 말했다.
“응.”
“널 사랑해.”
“……응.”
“널 사랑할 거야.”
“…….”
노인의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은 청년에게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애처로이 흘러나왔다.
“있잖아, 아주 만약에, ……네가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기적이 내 생에 찾아온다면…….”
“응.”
“그걸 거머쥐어도 될까?”
청년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이제껏 살며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제 연인에게도 갈구하며 빌어본 적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 그는 허공에 대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누구라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된다고 허락해 줘.”
노인이 잔기침 섞인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려고 했다. 약간 자세가 곧아지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거로도 족했다. 배에 힘이 좀 더 들어갈 수 있는 자세가 되었을 때, 노인은 오늘 낸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명료한 톤으로 말했다.
“그렇게 해.”
청년이 흐느낌조차 없이 그의 무릎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저 머나먼 파랑 위로 빛나는 은하수를 보고 있었다. 심해에서는 보지 못할 풍경.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계를 건너고 나면 다시 보지 못할 풍경을 오래도록, 그는 눈에 담았다.
*
생명이 떠나가고, 낙엽처럼 말라 누렇게 뜬 피부를 내려다보며 청년은 침묵했다. 매정할 정도로 청년 그 자신의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투명했으며 희미하게 빛까지 나고 있었기에. 이 생기로움을 나누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을 쬘 이가 없어 벽난로 하나 켜지 않은 방 안은 얼음장처럼 시리고 차가웠다. 벌레 하나 날아다니지 않는 그곳에서, 청년은 나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한 쌍의 새를 생각했다. 결심은 섰다. 목표는 확고했고, 방법은 명료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가늠할 수 없을 뿐. 그러니 남은 건 시행하는 것뿐이었다. 청년은 제 연인의 몸을 얇은 무명천에 고이 감쌌다. 그리고는 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걸어, 방 밖으로 나섰다.
그는 지체없이 절벽으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바닷가 앞에 서서, 청년은 자신이 안고 온 보물을 소중히 곁에 내려놓은 뒤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전부 벗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둔 옷가지를 뒤로 하고, 나신이 된 청년은 제 보물을 안은 채, 시릴 정도로 새파란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로 들어가는 발자국만이 깊게 패여, 이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조차 하룻밤 바람이 지나가면 사라질 흔적이었으나.
“이 사람을 살려주세요. 제 영혼이 여기에 있어요.”
눈이 시릴 정도로 명료한 빛 앞에서. 청년은 끊임없이 빌고 또 빌었다. 이번은 달랐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명확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했다. 그리고 그 죽지 않고 닳지 않는 목소리가 쉬고 깨지고 갈라져 피가 흐를 정도가 되었을 때, 신은 손끝을 내밀었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
햇빛 한 가닥조차 들지 않는 저 심해 속 어두운 파랑 속에서 한 쌍의 빛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한쪽의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새카매서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한쪽의 머리카락은 눈이 쌓인 밀밭처럼 환하니 창백해서 적은 빛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빛들은 저 심해저 깊은 곳으로 나선을 그리며 내려간다. 그들에게는 상승일지 몰랐다. 무엇이든 좋았다. 서로가 함께라면. 이 작고 쉼 없는 삶이 순환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무엇이든.
어느 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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