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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나단견우 / 1주년 기념 로그

열이 펄펄 끓는 이마를 짚은 채, 견우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겨우 약을 들이키고 온 차라 아직 찌르르한 두통이 자신을 괴롭혀댔다. 그래도 필요한 연락은 전부 남겨뒀고 당장 급한 일정도 없으니 이제 편히 쉬기만 하면 된다.

“끄응, 이것도 오랜만이네….”

천천히 몸을 눕히고 미리 준비해온 물수건을 제 이마에 붙이며 그가 중얼거렸다. 손에 들린 온도계는 선명하게 38.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업무량이 적지 않아서일까. 그는 가끔 이렇게 몸살이 날 때가 있었다. 거의 1년에 한두 번 꼴이라 많다고 할 정돈 아니지만, 계속 멀쩡하다가 갑자기 배터리를 다 쓴 전자기기처럼 틱 꺼지듯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딱히 건강 관리에 소홀했던 적은 없는데 말이지. 꼭 잘 나가다가 한 번씩 삐끗한다. 그렇다고 병원을 다니기엔, 매번 검사 결과가 정상인 데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평소에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 아니어서 애매하고. 하여간 요 며칠 컨디션이 계속 안 좋길래 설마 했는데 결국 시기가 된 건지 터져서 이 모양 이 꼴이다.

‘견우 너 괜찮아?’

‘야, 너 완전 마그마 같은데?’

슬그머니 떠오른 기억에 견우가 조금 미소를 지었다. 지금보다 한참 작은 두 꼬마의 모습과, 그들만큼 작았던 자신이 겹쳐졌다.

아플 때면 가족이 챙겨주었던 어린 날이 되살아나곤 했다. 과거에도 자신은 형제에 비해 잔병치레가 간혹 있었기에 뜻하지 않게 유치원이나 학교를 쉬는 일이 생겼다. 조금 울적해진 기분으로 누워있노라면 하교하고 온 예리 누나는 자신이 빨리 나을 방법을 알려주며 평소 어떻게 해야 아프지 않을 수 있는지 일러주었고, 문우리는 투덜대면서도 그런 건 빨리 털어버리라며 나름대로 응원해주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님은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선 푹 쉴 수 있도록 가만히, 일정한 박자로 그를 재워주셨다.

독립한 후론 어찌저찌 자신이 잘 추스르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들은 안부 묻듯 요즘은 괜찮은지 궁금해한다. 특히 주기적으로 응급실 콜을 받은 문우리는 자신이 대기조라도 된 것마냥 너 요즘은 밥 잘 챙겨먹고 다니냐며 손이 많이 가는 동생 취급을 했다. 그런 그가 이 모습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지.

“일단 좀 더 자야겠다.”

손등으로 살짝 이마를 대어보니 아주 뜨끈뜨끈한 게, 이 위에서 물 끓여도 되겠다. 당장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뭘 바랄까. 이대로는 괜히 객기 부렸다가 진짜 앓아눕는 수가 있다. 실제로 예전에 한 번 방치했다가 감기까지 겹친 적이 있었는데, 그땐 결국 입원한 채로 강제 요양을 해야 했다. 그 경험으로 괜찮을 때 푹 쉬어서 컨디션 회복에 전념하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걸 톡톡히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그는 지금이 휴식해야 할 적기임을 직감했다.

막상 누웠더니 딱히 잠이 부족한 건 아니기도 하고, 오전 시간이라 좀처럼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래도 펄펄 끓는 열과 약 기운 덕에 몸이 나른해서 오래 깨어있을 것 같진 않다.

잠깐 확인할 겸 전화기나 봐야겠다. 협탁에 올려둔 제 소지품에 손을 뻗은 견우가 그 사이에 뜨끈해진 수건을 이마에서 떼어 아무렇게나 놓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등지기 위해 반대로 비스듬히 돌아누운 그가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익숙한 애인의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장갑 한쪽을 입에 문 채 도발하듯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보니 괜스레 설레어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찍어두길 잘했다 생각하며 견우가 새삼 감탄했다.

신기하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를 보기만 해도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어쨌든 연인—나단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바로 나타난 걸 보니 새로 온 답장은 없다. 아직 그가 제 문자를 읽진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일하고 있을 시간이긴 하지. 만약 봤다면 분명 바로 답장했을 테다. 나타니엘은 폰을 자주 들여다보는 성격은 아닌 터라, 아마 푹 자고 일어나도 될 것 같다.

간단히 문자를 추가하고 다시 옆면 버튼을 눌러 화면을 끈 견우가 나른한 기분에 하품했다. 한참 시간을 보내야 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막상 베개에 머리를 대니 눈꺼풀이 감겨왔다.

“보고 싶다….”

평화로운 오전에 이끌려 스르르 잠들며 견우가 나지막히 혼잣말을 뱉었다. 주어 없는 문장이 조용히 방을 맴돌았다.



「나단 형. 지금쯤 한참 일하고 있으려나?
난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샵에 못 나갈 것 같다고 연락했어.」 _10:17


「너무 걱정하진 마. 하루 쉬면서 충분히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_10:27

휴대폰을 켜자마자 보인 두 개의 알림 내용이다.

발송 시각은 대략 2시간 전. 두 메시지는 10분의 간격을 두어 도착했고, 군더더기 없이 상황을 요약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 숨은 고단함을 읽은 나타니엘이 짐짓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아픈가본데….”

얼핏 멀쩡해보이는 말이지만 그는 안다. 이 문자의 발신인이자 제 애인이기도 한 견우가 당일 아침 갑작스럽게 일을 쉬었다는 건, 그만큼 상태가 안 좋다는 의미임을. 게다가 이렇게 간결한 말투는 보통 그가 바쁘거나 피곤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이 와중에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고 덧붙인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답다고 해야 할지. 처음엔 놓쳤다가 뒤늦게 덧붙인 게 아무래도 자신이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하지만 임무에 집중해야 할 자신을 신경 써준 게 무색하게도 그의 말엔 따르기 어려울 것 같다. 걱정을 안 하다니. 평소에도 헤어 디자이너 겸 바텐더로 일하느라 무리하고 있는 연인이 아프기까지 하다는데 마음 쓰이지 않을 리가. 당장 그도 이렇게 문자로 나타니엘을 잔뜩 신경쓰지 않았나.

그나마 방금 임무 보고를 마쳐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다.


「미안해요. 이제야 확인했네요.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12:32_ 제가 사갈게요. 마침 일도 끝났거든요.」

늦은 답장을 보낸 그가 가볍고 여유로웠던 걸음을 한결 재촉하며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 다다랐다. 혹시나 바로 제 문자를 본 그가 다시 연락할까 싶어 화면을 여러 번 힐끗거렸지만 아직 쉬고 있는지 검은 액정은 제 얼굴만을 비출 뿐이었다.

며칠 전에 처음 컨디션이 안 좋다는 얘기를 하고부터 찜찜하다 싶었다. 어제부터 목소리도 가라앉아서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더니, 그냥 지나갈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아무리 괜찮다 해도 혹시 감기 같은 게 옮길지 모르니 당분간 겸사겸사 각자의 생활을 챙기자 할 때 그냥 두지 말 것을. 견우를 떠올린 나타니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약은 이미 먹었겠지. 문자 내용도 그렇고, 아직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건대 급한 연락만 처리해두고 바로 자러 간 것 같았다. 좋은 선택이었다. 이럴 땐 무엇보다 일단 푹 쉬는 게 제일이다. 하지만 꼼짝없이 누워있느라 끼니를 못 챙겼을 텐데. 미리 죽을 주문해서 가져가는 게 좋을까. 직접 가서 해주면 넉넉히 먹일 수 있겠지만, 아무리 가볍게 만든다 한들 바로 먹는 것보단 시간이 걸릴 테니 이 편이 낫지 싶다.

잠깐 고심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탄 나타니엘이 B2—지하주차장이 있는 층— 버튼을 눌렀다. 이어 내려가는 동안 휴대폰으로 2인분의 식사를 주문하고 제 지정석과 같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운전 중이라 문자는 못 볼 수도 있어요.
12:37_ 혹시 이걸 읽게 되면 연락해줘요 견우 씨.」

한 번 더 문자를 남긴 그가 핸들을 잡고 시동을 걸었다. 낮은 진동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는 세단을 돌려 주차장 입구를 빠져나오자 정오임에도 먹구름에 가려 빛 바랜 태양이 보였다. 날씨마저 우중충하네. 속으로 생각하며 나타니엘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지금쯤 혼자 아프고 있을 제 애인을 떠올리니 엑셀을 밟는 그의 발끝에 힘이 살짝 더 실렸다.

여기서 견우 씨의 집까지는 차로 약 15분. 중간에 가게까지 들렀다 가면 보통 20분이 걸린다.

홀더에 비스듬히 끼워둔 휴대폰으로 가는 눈길을 애써 막으며, 나타니엘이 부지런히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견우는,

나타니엘이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답장하지 않았다.


‘—…견우….’

꿈속에서 누군가가 제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따뜻한 목소리. 견우가 반쯤 깬 몽롱한 상태로 앓듯이 상대를 불렀다.

“…나단, 형……?”

—띠리링.

그 순간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현관문 열림음이 울리고, 익숙한 발걸음이 제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였다. 견우가 무심코 보고 싶어했던, 마법처럼 나타난 자신의 애인.

“견우 씨. 나 왔어요. 어디 봐, 괜찮아요?”

방금 자신이 찾았다는 걸 또 어떻게 알고, 마치 자신이 불러서 온 것처럼 나타니엘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식탁에 포장된 죽이 담긴 종이가방을 올려두곤 침대에 걸터앉아 견우의 이마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을 확인하는 동안 푸른 눈이 견우를 빠르게 훑었다.

높은 체온 때문에 상기된 뺨, 식은땀을 흘린 흔적, 이제 막 깨어 아직 반쯤 감긴 눈, 피로가 뚝뚝 묻어나오는 안색과 살짝 잠긴 목소리까지. 누가 봐도 영락 없는 환자였다.

“어… 진짜 형이네.”

시원한 손이 닿자 그제야 진짜임을 실감한 견우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곤 눈이 마주치자 애써 웃으며 물었다.

“일은…, 잘 끝났어?”

내가 몇 시간이나 잔 거지? 눈 뜨자마자 바로 그를 본 거라 시간 감각이 없었다. 어지럽던 아침보단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리고 어제 부실하게 먹은 저녁 이후론 아무것도 못 챙겨서인지 기운이 빠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나타니엘이 가까스로 걱정 서린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잘 끝났죠. 견우 씨는 좀 어때요? 아직 많이 아픈 것 같은데. 뭐라도 좀 먹었으려나.”

“응? 아…, 나 아까보단 괜찮아. 밥은…, 음, 벌써 점심인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견우에게선 정신 없어 보이는 티가 났다. 어째 올라올 때까지도 문자를 확인 안 하더라니. 잠옷 차림인 걸 보면 계속 자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잘 쉬고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여전히 힘들어보여서 마음이 쓰렸다.

애인의 상태를 점검한 나타니엘이 견우의 뺨을 어루만지다 말고 손을 내렸다. 에어컨을 틀고 왔는지 살짝 서늘한 나타니엘의 손이 기분 좋았던 견우가 갑자기 일어나는 그를 의아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견우의 반응에 말로 설명하는 대신 나타니엘이 장난치듯 가볍게 뽀뽀하더니 견우 눈앞에 제 휴대폰을 보여줬다. 정확히는, 중앙에 커다랗게 “01:05”이라는 숫자가 적힌 화면을.

“아침은 건너뛴 거죠? 그럼 점심이라도 챙겨 먹어야겠다. 금방 준비해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어린아이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가 흩어졌다. 견우를 설득하고 일어난 나타니엘을 응시하던 견우가 한 박자 늦게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넘어갈 뻔했다. 나단 형이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는데.

“그보다 형, 나… 감기일 수도 있어.”

“음?”

“그러니까 다음에 오는 게 어때? 죽 사와준 거 너무 고마워. 이젠 내가 차려먹을게.”

사실 뒤늦은 조치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집에 들어와서 자신에게 가까이 왔으니 벌써 옮겼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나타니엘에게 확실히 오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았으니 그가 오게 된 것도 당연했다.

그치만 견우에겐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었다. 일단 나타니엘이 오늘까진 일로 바쁠 거라 일러뒀었고—당연히 자신도 힘내라고 응원한 참이었다— , 나름대로 형이 최대한 신경쓰지 않게끔 쉬고 있다는 점도 꾸준히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잠들기 전 나타니엘이 여기까지 올 가능성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은 채였다. 그야 물론 자신도 나타니엘이 심하게 아프다면 당장 달려왔겠지만… 현재의 자신은 그럭저럭 살 만한 상태 아닌가. 막상 실물을 보니 여기까지 나타니엘이 찾아와준 게 너무 반가워서 타이밍을 놓쳤는데, 이젠 정신을 차리고 그마저 아프기 전에 돌려보내야 할 때였다.

나타니엘은 견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제가 되도록이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뭘?”

그리고 이어진 대꾸는, 견우가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이거 죽이 3인분이에요. 그럴 줄 알고 제 몫도 같이 사왔거든요.”

혹시 견우 씨가 돌아가라고 할까봐 같이 먹으려고 사왔어요. 부족할까봐 넉넉하게. 설마 이걸 그대로 들고 가라고 할 건 아니겠죠? 이미 견우 씨 코 앞에서 뽀뽀까지 다 했는데.

빠르게 쏟아지는 말에 동그래진 견우의 눈을 보며, 나타니엘이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과로로 인한 몸살일 거예요. 다른 감기 증세가 전혀 없어서 저한테 옮기지도 않을 거고요.”

목이 조금 부은 것 같긴 하지만 기침이나 콧물이 없잖아요. 발열이 드는 것치곤 오한을 느끼진 않는다 했고. 설령 감기라 해도 다 옮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내 걱정은 너무 안 해도 돼요. 그보단 지금 아픈 견우 씨 생각부터 해요.

조목조목 근거를 들며 그와 함께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던 나타니엘의 눈이 휘어졌다. 평소보단 조금 완만하게.

“무엇보다 내가 같이 있고 싶은데. 오히려 이럴 때일 수록 애인 말 잘 듣고 얼른 나아야 하지 않을까? 응? 견우 씨.”

예컨대 그의 말을 순순히 들어달라는 의미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호소에 견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왠지 마음이 약해진다. 머리는 당연히 그를 생각해서 보내야 된다고 말하는데… 조금 더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드는 이유가 뭔지. 의연하게 굴고 싶은데, 마음 약해질 때마다 무심코 그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어진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오늘 먼저 두 손을 든 건 견우였다. 대신 그는 조건을 하나 달았다.

“…알았어 그럼. 알았으니까……, 아프면 안 돼?”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군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걸릴까. 당장 자신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닌데.

그치만 옆에 붙어있고 싶긴 하고, 아프진 않았으면 좋겠고. 스스로 어이 없다 생각하면서도 억지를 부려본다.

그럼 나타니엘은… 이 무리한 요구도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만약 그가 아프게 되면 견우도 똑같이 걱정할 것을 알기에. 자신이 원하는 건 얼마든지 해주겠다는 듯 답한다.

“이제 점심 같이 먹을까요?”

원하던 답을 얻은 나타니엘이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방을 빌렸다. 잠시 후 그릇에 담겨온 건 자신이 좋아하는 소고기죽이었다. 여차하면 더 먹어도 된다고, 많이 남았다고 일러주며 나타니엘이 그의 입에 한 숟가락씩 건넸다. 입씨름하느라 식었을 줄 알았던 죽은 의외로 딱 적당했다. 중간에 잠깐 데우는 것 같던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가 마치 그의 배려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견우가 웃었다.


♪ ♬

(테마곡 재생 후 감상 추천)

견우가 다시 깬 건 늦은 저녁이었다. 방은 온통 새까맣고, 드문드문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다.

오늘은 진짜 종일 자는 것 같네. 속으로 반쯤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그가 살짝 뒤척였다.

“일어났어요?”

그러자 침대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타니엘이 견우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이번엔 완전히 잠이 달아난 터라 잠들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까 함께 죽을 잘 먹고, 형의 손에 이끌려 누운 채로 물수건에 냉찜질도 받고, 잠깐 같이 영화를 보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또 꼬박 잠들어버렸지. 마지막 즈음엔 열이 37.6도까지 내려갔는데. 몸이 쑤시거나 뜨겁지 않아서 지금 감각으론 이제 완전히 회복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나타니엘이 그의 귀에 온도계를 대면서 말했다.

“1시간 전에 쟀을 땐 36.8도였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확인해볼게요.”

삐빅.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표기된 숫자는 36.7도. 컨디션도 너무 상쾌해서, 사실상 다 나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빨리 털어낸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일부턴 일 나갈 수 있다고 할 걸. 혹시 몰라 이틀 정도 사정 설명과 대타를 구해뒀는데, 이제 와 무르기도 애매해졌다. 하는 수 없지. 이렇게까지 회복이 빠른 건 예상 밖의 일이니까. 견우는 다음에 사례하기로 하고 컨디션을 완전히 되돌려놓는 데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 나니 나타니엘이 궁금해졌다. 자신이 자는 동안 줄곧 이러고 있었던 걸까. 못해도 2시간은 넘게 잔 것 같은데.

“형은 계속 여기 있었어?”

“저야 뭐, 견우 씨 자는 동안 가볍게 씻고 좀 쉬는 중이었죠.”

슬쩍 책갈피를 꽂고 책을 덮은 나타니엘이 견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곤 일어나려는 그의 등을 짚어 도와주며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았다.

해가 진 시각이라 협탁에 있는 조명이 나타니엘의 얼굴 한 면을 드러냈다. 노르스름한 색이 비쳐 오묘하게 빛 섞인 벽안과, 어둠을 담고 일렁이는 녹안이 그를 향했다.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나기와 나타니엘이 선곡한 피아노 음반이 귀를 간질였다.

“…….”

이럴 때면 견우는 나타니엘이 해를 잡아먹는 바다처럼 느껴진다. 깊고도 넓어 차마 다 규명할 수 없는, 그럼에도 편안함을 주는 자연과도 같이 자신을 품는 것 같다고.

자신은 그런 그를 사랑하고 있다.

누가 먼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감겼다. 견우가 먼저 나타니엘에게 다가가고, 나타니엘도 허리를 튼 자세 그대로 견우의 양 뺨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처음엔 맞닿고도 조용하더니, 이내 침이 섞이며 입술 사이로 얕은 소리가 들렸다.

츄읍—. 쪽, 촉.

“…저 감기 걸릴까봐 거리 두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겨우 달콤한 입술을 떼고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채로 나타니엘이 심술궂게 물었다. 아까 돌아가라고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뒀을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다시 언급하는 걸 보면—놀리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은근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형이 안 걸릴 자신 있다길래.”

견우가 마주 본 채로 웃으며 응수했다. 자긴 뭐 형이 싫어서 먼저 돌아가라 했을까. 농담 속에 제 아쉬움을 적신 그가 다시 키스했다.

이번 키스는 처음보다 길었다. 말캉한 혀가 얽히면서 견우의 숨이 금세 가파왔다. 슬쩍 고개를 비틀자 나타니엘이 일부러 그런 견우의 입술을 도로 잡아먹었다. 머리를 세게 쳐대는 심장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고, 그 시끄러운 궤종 속에서 둘은 서로를 갈구했다.

이제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농밀하게 주고받은 숨이 더워서, 입안에서부터 다시 열이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까 분명 다 내렸을 텐데도.

“…하아, 하…….”

처음보다 젖은 눈가. 나타니엘도 견우도 어느새 동공에서 욕망이 찰랑거렸다. 살짝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는 견우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타니엘도 급해지려는 자신을 다독였다.

순간 휩쓸릴 뻔했지만 그의 소중한 연인은 아직 엄연한 환자였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나타니엘의 손길에서 견우는 어린 시절 가족의 향수를 맛본다. 이것은 애정과 염려, 친절과 사랑을 담은 유대의 표시와도 같아서 괜히 마음을 간지럽혔다. 심지어 두 살 많은 제 애인의 다독임은 보드라운 안락 아래에 애써 가라앉힌 욕심이 숨어있어 왠지 기분을 더 이상하게 했다.

지금 이것만큼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단언컨대 그는 이렇게까지 선명한 사랑의 형상을 난셍 처음으로 겪는다.

서로에게 몰두하느라 잠깐 잦아든 줄 알았던 빗줄기 소리가 다시 귀에 꽂혔다. 다행히 나타니엘이 크게 뻐근해하는 기색은 없어서, 곧 지나갈 비 같기는 했다. 습관적으로 그의 어깨와 팔을 주무르며 견우가 물었다.

“형은 저녁 먹었어?”

“아직요. 견우 씨가 밤까지 잘 것 같으면 슬슬 먹으려고 했어요.”

다시 말해, 되도록 같이 먹고 싶어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 말에 침대에서 일어난 견우가 부엌으로 갔다. 자는 동안 나타니엘이 썼는지 덜 마른 프라이팬과 싱크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식탁을 보니, 멋스럽게 차려진 한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건 혹시 속이 부담스러울까봐. 이왕 한식 만드는 김에 견우 씨가 좋아하는 메뉴로 골랐어요.”

“이걸 혼자 한 거야? 깨우지…, 손 많이 갔겠다.”

“견우 씨가 맛있게 먹어주면 되죠.”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나타니엘이 의자를 꺼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견우가 살짝 머쓱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마워했다. 이젠 면역이 될 법한데도, 나타니엘의 배려에는 가끔 쑥스러워지곤 했다.

“고마워.”

“빨리 나아서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나란히 식탁에 앉아 함께 수저를 들었다. 실컷 자고 일어나서 즐기는 저녁식사는 더없이 환상적이었다. 이젠 나타니엘의 장기가 된 퓨전 한식이 입에서 녹는 것 같았다. 특히 이 수제비. 뇨끼와 결합해 탄생한 이 요리는 견우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음식 중 하나였다.

이후론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배를 채우고 나선 평범하게 시간을 보냈다. 주방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거나, 오후에 같이 보다 잠든 영화 결말을 듣고 소소하게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괜히 플레이리스트를 바꾸어 틀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번에 다녀온 전시회 얘기를 했고, 다음 주 일정을 공유했다.

그저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저녁이 짧았다. 어느새 비가 완전히 그친 건지 창밖은 고요했다.

정신 차리고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이다. 자신이야 오늘 내내 잠만 잤으니 조금 늦장 부려도 된다지만 나타니엘은 슬슬 자러 갈 시각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침실로 들어가 누운 나타니엘과 견우가 또 베개에 머리를 댄 채 잡담하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잘 자요, 견우 씨.”

“응. 형도 잘 자.”

그렇게, 인사를 하고 10분.

잠을 청했지만 견우의 눈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오늘 벌써 6시간은 잤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살짝 눈을 떠 나타니엘을 보니, 그는 스며드는 잠에 몸을 맡긴 듯했다. 보통 시선이 느껴지면 바로 알아차리던 그가 지금은 곤히 눈을 감은 채였다. 호흡도 서서히 가라앉아간다.

평화로운 나타니엘의 얼굴을 바라보던 견우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오늘을 되짚으며, 깊은 밤 제게 찾아온 생각과 마주했다.

새삼 사유思惟한다.

자신은 왜 그를 사랑할까? 형은 왜 자신을 사랑할까?

물음표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나타니엘과 함께한 시간을 곱씹었다. 불현듯 직녀성에 찾아온 수상하고 신비로운 손님이 기억난다. 그는 금세 자신과 친해져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동시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더 궁금해지는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왠지 먼저 멈춰세우긴 어려울 것 같은 기묘한 남자.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언제라도 흩어질 수 있는 안개와 같았다. 마치 언제든 발길을 끊을 수 있는 손님처럼. 바텐더 문견우가 바라본 나타니엘은 그랬다.

하지만 그는 걱정이 무색하게 견우와 친해졌다. 단숨에 단골 중에서도 막역한 지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인 연락처를 건네며 자신은 뚜렷한 설렘응 직감했다. 평소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뚜렷한 문견우에겐 흔치 않은 예외였다.

마치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그 기간 나타니엘과 자신은 서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것은 “왜?”의 답으로는 적절하지 못했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짧게 느껴지고, 작은 정보에 일희일비하고, 그의 빈자리를 눈으로 몇 번씩 되감아보았다. 이게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한다. 견우는 나타니엘의 하루를 궁금해했다. 그가 유독 비 오는 날이면 피곤해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고,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입맛이나 음악 취향은 어떤지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은 기록일 뿐 풀이가 아니다.

끝끝내 이 질문의 꼬리표는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이 나열한 수많은 근거가 사람이 사람에 끌렸음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사랑의 사유事由가 되진 못한다.

그가 아니더라도 직녀성엔 많은 손님이 있었고, 그가 아니더라도 자신 곁엔 무수한 사람이 함께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가까운 관계를 꽤 가졌다. 여러 취향을 아는 친구가 있었으며, 심지어 결혼을 약속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타니엘은 달랐다. 그와 특별하게 사랑하자는 맹세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그와 반드시 친해져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타니엘만이 제 이상형에 부합하는 남자였던 것은 아니다. 하물며 견우는 나타니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남성과 교제하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 이 순간 자신은 오직 그만을 사유私有하고자 한다. 나타니엘 디아스 비센티의 시간과, 숨과, 호의, 배려, 마음까지도. 그의 전부는 아닐지언정, 그의 유일이 되고 싶다.

그를 만날수록 새로운 자신을 알아간다. 나타니엘과의 추억을 통해 이 삶을 채울 꿈을 꾼다.

어쩌면 이 행동과 마음이야말로 최적해가 아닐까. 나타니엘을 사랑하는 이유에는 애당초 간결한 명제도, 장황한 사례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이끄는 충동이 사랑 자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단 형. 나타니엘.”

조용히 속삭여본다. 그가 깨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는 여전했다. 하긴. 제 곁에 있는 나타니엘은 깊이 자는 편이었으니까. 위급함 없는 제 중얼거림은 꿈으로 스며드는 모양이다.

오늘 고마운 일이 너무 많다. 그가 자신을 보살피고 신경써준 것. 긴 시간 지켜봐준 것. 외롭게 아프지 않도록 해준 것.

하지만 제일 먼저 표현하고픈 마음은 사랑이다. 이 모든 행동 기저에 깔린 사랑을 알기에. 자신도 그렇게 나타니엘을 사랑하고 있기에.

이에 문견우는 그저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감히 영원하기를 바라는 제 연인에게 오늘도 한 번 더 고백했다.

“사랑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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