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륜월孤輪月
나단견우 / 호위무사 X 왕
"호위를… 새로 들이겠다고요?"
지난 조회의 기록을 되짚던 우승지의 충언이 끊겼다. 가만히 고개를 든 신하가 다시금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전하. …진심이십니까?"
"그래. 나도 이런 주제로 농담할 생각은 없어, 인섭."
왕이 낮게 덧붙인 이름에 승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명을 부르는 것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자는 그들끼리의 암묵적인 신호다. 신하로서가 아니라, 친우 고인섭의 의견을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호위무사 건은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었던가. 구태여 이 사안을 번복할 까닭이 없다.
"매일 상소가 올라오더라고. 나라에 대한 충심이 깊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통촉해달라는데, 고매하신 선비님들 뜻을 어떻게 꺾겠어?"
우승지의 표정을 읽은 듯 왕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저쪽에서 도통 쉽게 물러나질 않았다는 뜻이다.
약간은 가벼운 투로, 살짝 빈정대듯 미소와 함께 너스레를 떠는 제 군주를 보던 인섭이 한숨을 참았다.
왕의 호위무사 인선은 예전부터 잡음이 잦았던 문제다. 여섯 명의 승지와 함께 왕과 가장 오래 붙어있는 게 호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그만큼 왕의 신임을 얻기 쉬운 자리였고, 왕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제격인 자리. 최근 부쩍 단단해진 왕권을 뒤흔들기엔 더없이 효율적인 위치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전에도 왕의 호위를 교체하자는 탄원은 꾸준히 올라오곤 했다. 특히 현 내금위장은 실종되신 세자께옵서 아끼셨던 까닭에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뿐 자질이 의심스러운 이요, 당장 내금위에도 현왕의 왕자 시절을 함께 지낸 친왕파가 절반이라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무릇 사람은 한 자리에 고이면 흉액이 깃들고, 사사로운 정이 나라의 대소사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던가. 얼핏 보기엔 국본의 안위를 염려한 듯한 충신의 청이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올라온 후보가 죄다 특정 계파의 일원이거나 관련자였기 때문이다.
대치는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인사권자가 명단을 올리면 그대로 다시 내려오길 세 번 반복하고 나니 대전에서 직접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들어주마 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랑과의 지연으로 들어온 양반 가문의 자재들이 과연 제 잇속과 허울뿐인 군신 사이에서 굳건할 수 있을까. 환난을 거친 왕으로선 새 얼굴을 온전히 믿기 어려웠기에, 이미 자신이 신임하는 자들로 구성된 내금위를 갑자기 바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기가 어디 아무나 앉힐 수 있는 자리던가. 결국 제 잇속 이상의 변명이 궁하던 신하들은 반대를 무릅써가며 등용을 강행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최종 임명은 어디까지나 왕의 권한. 자신들이 아무리 밀어붙인들 왕이 재가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필요하다면야 내어줄 수 있겠지만 현재의 왕에겐 그럴 이유 또한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적잖이 시달린 모양이다. 야참 그릇에 간식이 여태 절반이나 남아있는 것도 마지막까지 고민한 탓일 터. 어째 평소보다 석강을 일찍 부르더라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요. 허락하신다면, 전하의 배동이었던 특권 좀 쓰겠습니다."
"환영이야."
인섭의 통보에 웃음이 났다. 배동 시절을 언급하는 건 앞으로 군신의 예를 생략하겠다는 뜻이다. 자신이 먼저 인섭의 이름을 불러 그에게 솔직한 감상과 반응을 요구했으니 그도 편히 말하려면 허례가 필요한 것이다. 왕은 제 오랜 지기의 거침 없는 성정을 아꼈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색 다른 눈동자 한 쌍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인섭은 허락을 받자마자 바로 말을 느슨하게 놓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에게, 왕—문견우가 답했다.
"그들이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자신을 얕본다지만 그들은 지금 터무니없는 요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밀어붙인다는 건, 이번 수가 읽히는 것을 각오할 만큼 중요한 다음 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겠지.
“그치만 이쯤에서 한 발짝 물러나줘야 해, 안 그럼 내가 더 곤란해져. 이대로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고, 알다시피 저 양반들 도움 없이는 이번 구휼책을 밀어붙일 수가 없으니까. 그걸 겨우 감시자 한 명으로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철저히 시비와 실리를 따져 내린 결론이다. 내금위장직을 놓고 벌인 대치가 너무 길어졌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릴 때다.
“게다가 이번 수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내겐 이득이 될 수도 있어.”
“이득이요?”
“그래.”
그들도 바보가 아니니 슬슬 자신이 허수아비 왕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함을 아리라. 그러니 더더욱 눌러대려는 것일 테지. 하지만 본디 인간의 기억이란 야트막하고도 끈질긴 것이어서, 그들 중 대다수는 왕위에 뜻 없어 자유롭던 막내 왕자 문견우 시절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군주이길 피하지 않기로 한 그는 이 간극을 비집어 벌리기로 했다.
여기까지 말한 문견우가 자세한 설명 없이 가만히 웃었다. 인섭은 더 캐묻는 대신 그의 불안한 웃음에 고개를 돌리며 왕의 뜻을 받들었다.
한때 물기로 가득했던 눈가는 이제 메마른지 오래다. 만민의 아버지이자 태양으로 불리게 된 날부터 후퇴할 자격은 없었지 않나. 자신은 그저 늘 그래왔듯 또 한 걸음을 걸을 뿐이다.
그렇게 이른밤, 만월 아래에서.
"친우야, 대신 부탁 좀 하자."
지상의 달은 성공을 기원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아래는 이전에 썼던 썰
겨루문 건국 79년.
고즈넉한 산세와 강이 어우러진 대륙의 동남부 소왕국인 이곳은 최근 왕가에서 벌어진 연이은 흉사로 민심이 어지러웠다.
선왕이던 문재진이 동생 문하성 대군을 모반 혐의로 몰아 참한 후, 정신착란으로 배다른 형제들이 모두 자신을 노린다는 망상에 휩싸여 친·왕족 살해 및 폭정을 일삼다가 문예리 왕녀에 의해 실각하기에 이르렀고, 반정에 성공한 왕녀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행방이 묘연해지며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전대미문의 사태에 궁에 남은 왕족 누군가가 곤룡포를 입어야 했는데, 신하들은 만장일치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하성대군의 차남이자 문예리 왕녀의 동생인 문견우를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으니. 일련의 파국이 벌어지는 동안 민심이 흐트러짐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견우 왕자는 일찍이 세자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왕이 되고자 하는 야욕마저 희미한 자였다. 하나 왕자로서 배운 제왕학을 기본으로 하여 미숙하게나마 왕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초기에 신하들은 유순하고 조금은 부족한 왕 문견우의 존재가 달가웠으나, 머지않아 그 또한 문씨 왕가의 핏줄임을 실감한다. 그는 대비가 된 전 대군비 오진경의 안위 확보와 군신 간 힘겨루기에 차차 익숙해졌다. 관여하지 않았을 뿐 그도 궁에 사는 인간이었으니 궁중 암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세월은 온전히 문견우의 거름이 되어 그를 왕으로 살게 해주었다. 거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이 대략 5년.
왕권이 안정을 되찾자 선왕을 부추겨 환란을 자초했던 배후 세력은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일찍이 선왕이 세자 시절부터 자신의 형제에게 뒤쳐질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알던 자들. 좌의정을 필두로 하여 세도 정치를 계획하였지만 반대 일파에 부딪쳐 그나마 차선책으로 올린 문견우가 사사건건 자신들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세력을 키우니 불안 가실 날 있으랴. 심지어 요즘 궁의 기묘한 소문에 따르면 왕께서 신하들 몰래 찾는 것이 있다 들었다. 만약 그 수색이 왕가의 혈사에 관한 것이라면, 그들은 삼족이 멸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여 결국 그들은 또 한 번 왕을 갈아치우기로 모의하고 이름값 높은 무사를 은밀히 모색한다.
. . .
문견우로썬 이 5년이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왕 자리에 대신 머무르게 된 기분을 던지지 못한 채, 벗어날 수도 없고 느슨해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왕궁에서 칼날 위를 외줄타기 하듯 버틴 시간. 비록 선왕의 핏줄이 아니지만 왕위를 바라였던 누님도 아니고, 왜 하필 자신이 여기에 올라 안 어울리는 감투를 쓰게 되었는지 자조하다가, 그래도 이렇게 무너져 한 줌 재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득바득 살아와야만 했다.
그렇지만 최근엔 좀 희망적이었다.
- 아마도 누님은,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
문견우가 이리 판단을 내린 건 약 1년 전. 왕가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아버지와 누님을 잃고 어머니를 지키고자 왕이 된 지 4년에 접어들 무렵, 신분을 감추고 벌인 야행에서 저잣거리 소문을 접하며 확신하게 되었다. 일전에도 몇 번인가 찾은 단서를 모으자 문예리가 어딘가에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특히 10여년 전 궁을 박차고 나가 타지의 왕녀와 혼인한 형님 문우리의 정보망에 따르면 문예리의 탈출과 생존은 기대할 만했다. 비록 제대로 된 서신 하나 주고 받을 수 없고 생사를 확인한 것 역시 아니지만 문견우는 누님의 방식을 무척 잘 알기에, 때가 될 때까지 버티면 그녀가 머지않아 신호를 줄 것을 믿었다. 어차피 누님이 실제로 어떻든 자신이 할 일은 변하지 않은 셈이었다. 은밀하게 문예리를 찾고, 동시에 그녀가 돌아올 기반을 이 궁에 마련해두는 것.
문견우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왕인 자신에게 섣불리 대서진 못하겠지만, 본래 궁에서 가장 나약한 것 또한 왕이다. 최근 부딪치고 있는 좌의정 무리가 어떻게 나올 지가 관건이었다. 심어둔 귀가 들은 바로는 상당한 실력자를 궁에 불러 제 목을 치려 한다지.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하나 위기는 곧 기회. 문견우는 그 계책을 역이용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올린 타국의 후보 “나단”을 최종 내금위장으로 임명한다.
로 시작하는 궁중물 보고 싶다.
여기서 나단이 견우를 제거하기 위해 접근한 거면 이제 진정한 파국 시작일 듯(그치만 재밌어 이러다가 둘이 눈 맞을 거라서 더더욱).
발단을 대충 이렇게 만들어봤는데 굳이 파국 아니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호위로 들어온 나단을 견우가 포섭하면서 둘이 몰래 밤구경도 나가고, 밤에 버드나무와 매화와 상사화가 가득한 후원을 단 둘이 산책도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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