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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

#Cerumillion

다락방 by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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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탁자의 화분이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분노를 삼켰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나는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발겼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종일관 미소를 띄고 있었다.

탁, 탁.

벽에 나열된 세탁기에서는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렸고, 손님이 없는 세탁소에서는 음산한 기운마저 돌았다. 나는 얼핏 무기질적으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1.

"자네는 왜 경찰이 됐나?"

연쇄살인 건을 해결하고 서에 돌아오는 길에 수사반장이 내게 물었다. 그 때 나는 굵직한 사건들을 연이어 해결하며 관할구역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너는 친구가 슬퍼하는데 그게 할 짓이야?’

‘미, 미안..난 네가 저번에 그렇게 말해서..좋아할 줄 알았어.’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을 기억한다. 항상 남을 꿰뚫어 보지것을 좋아했던 아이. 착하고 예의바르지만 어딘가 싸하다는 평을 받던 아이. 나는 일찍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나 사회에 녹아드는 법을 익혔고, 남들의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추는 법을 학습했다.

내가 수사반장의 말에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내 대답을 들은 반장은 허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을 뿐이다.

확실한건 이 직업은 나를 위한 천직이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

.

"네, 강력1팀 소속 베르 버밀리온입니다."

그 사건을 맡게 된건 일주일 전 이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사건. 시신들은 하나같이 왼손약지가 없었고 같은 사람의 소행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범인을 검거하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웠고, 결국 나에게까지 사건이 들어온것이다.

"그, 이게 용의자 특정이 쉽지가 않아요. 마침 그때 하필 비가 내려서 족적도 쓸려내려간 상태입니다."

"과학 수사팀에서는 별말 없어요?"

"그게...가해자가 장갑을 끼고 있던 것인지 지문 채취가 어렵다고만..."

서류를 내미는 형사의 낯에는 골치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범인에 대해 밝혀진 것이라고는 20대 남자로 추정된다는 점뿐이었다.

"저희 팀도 총력을 기울여서 수사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그래도 형사님 덕분에 든든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잭 다니엘 부탁합니다, 온더락으로."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연쇄살인사건으로 꼬박 삼일을 철야한 뒤 드디어 집에 돌아가게 된날, 나는 자주 가는 바에 들러 좋아하는 위스키를 주문했다. 이곳은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하면서도 마스터가 친절한 편이라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오늘 일이 많이 힘드셨나봐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이번에 새로 이사를 왔다던 사람인데, 몇번 마주쳐서 인사를 하다보니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친근하게 굴면서도 선을 넘지는 않는 그가 싫지는 않아 나도 그와 종종 어울리곤 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나와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뭐, 이쪽 업계가 다 그렇죠. 그보다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저보다 형이시면서."

"...익숙해지면."

우리는 천천히 잔을 비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표현했지만 주로 우리의 만남은 남자의 말을 내가 조용히 들어주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그도 이 점에 대해 개의치않아 했다.

"우리, 체스나 한판 둘까요?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처럼."

"뭐...못할 건 없지."

잔을 비우던 그가 불쑥 말했다. 나는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거절하려 했으나 이내 피식 웃고는 그의 장단에 어울리기로 했다. 하기야 그도 필시 직장에서 시달렸으리라.

.

.

"재밌어요?"

"네?"

그는 비숍을 옮기며 말했다.

"아니, 형사시라니까, 그러면 피 많이 보시지 않나 하고요. 저는 그런거는 못할것 같아서."

"..재밌고 말고가 어디있어요. 그냥 사람들 도우려고 하는거죠."

나는 남자의 질문에 멈칫했다가 이내 태연히 폰으로 남자의 말을 잡으며 말했다.

정의감..글쎄, 그런건..

"거짓말."

"...예?"

"아, 형이 너무 잘 두셔서요. 진짜 거짓말 같다는 그런 의미였어요."

남자는 사람좋게 웃어보이며 다시 체스에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일순 남자의 목소리가 서늘해진 것을 눈치챘다. 승부는 팽팽했다. 승기를 잡았나 싶으면 남자가 곧바로 허를 찔러 공격해왔고, 나는 남자가 내 말을 잡도록 적절히 유도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체스를 둘때 알 수없는 고양감에 휩싸이곤 했다. 내 통제 아래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쾌감, 상대의 수를 간파하고 하나하나 파괴할 때의 짜릿함, 서로 쫒고 쫒기는 추격전.

체스를 둘 때면 나는 온전히 '나'에만 몰입할 수 있었고, 그런 감각을 즐겼다. 그리고 그건, 눈 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눈을 한 그 남자는 어딘가 앳되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싸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렸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그도 이런 나를 알아차렸으나 모른척 했다.

"형은 체스를 엄청 좋아하시나봐요."

남자가 퀸을 옮기며 말했다.

"네, 그냥 어렸을 때 종종.. 그런데 그쪽도 체스를 두시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신데요. 이건 자랑은 아니지만, 실은 저랑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웠었거든요. 이렇게 재밌는 경기가 될 줄이야.."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침 남자의 룩이 내 나이트에게 잡힌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곧 남자의 퀸이 잡힐 상황인데도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덤덤해 보였다.

"체스를 두다보면, 꼭 내가 신이 된거 같지 않아요?"

"...."

남자는 내 침묵에도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내 마음대로, 생각대로 움직이는 말들. 누가 먹고 먹히느냐를 건 치열한 두뇌싸움. 상대에게 말을 먹혀도 그것마저 계획의 일부죠. 승리라는 더 큰 계획을 위해.

그렇게 온전히 체스에 몰입하게 되면, 미친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꼭 내가 모든걸 좌지우지 할수 있을것만 같아서, 눈 앞에 앉은 상대도 잡아서 내 마음대로 흔들고 싶어."

"..."

그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은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고 나는 순간 할 말을 찾지못하고 남자를 응시하기만 했다.

이 남자는 나와 동류다.

나의 감이 사이렌을 울리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것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흥분으로 인한 두근거림인지, 경고의 두근거림인지는 모르는 채로.

"..그거 정말..흥미로운 의견이네요."

남자는 퀸을 들며 말했다.

"에이, 모르는 척 할 필요없어."

남자의 퀸이 내 쪽의 퀸을 가볍게 쳐 떨구어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서로 닮았으니까."

'자네는 왜 경찰이 됐나?'

'그냥, 누구를 쫓는게 재밌어서요.'

2.

"형사님, 여기 전화.."

서는 연쇄살인건으로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일을 하면서도 그 날 밤의 남자를 잊을 수 없었다. 어딘가 위험해 보였던 그 눈빛. 어떤 이유에선지 내 형사의 감이 그 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로 닮기는 무슨. 체스를 좋아하는 점이 비슷하면 몰라도...

"..사님, 형사님?"

그제서야 나는 상념에서 깨어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수사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주변은 이미 폴리스라인이 쳐져있었고 수사관들이 바삐 움직이며 사진을 찍거나 시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디 아프신건 아니죠?"

"아, 죄송합니다. 별일 아닙니다. 그보다 어디까지 얘기 했었죠?"

"그게..방 전체에 루미놀 용액을 뿌려봤는데요, 방 전체가 혈흔 자국이 흩뿌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피로 무언가 그림이 그려져 있는거 같아서요. 혹시 아실까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반색하며 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벽에는 왠 네모난 판이 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피로 칠한 흔적이 보였다.

"이게 뭘까요? 무언가 암호인걸까요? 체스판 같기도 하고...뭐가 됐든 방에 흩뿌려진 피의 양도 생각하면 이 그림을 남기기엔 한 사람 가지고는 턱도 없을텐데, 남의 피로 그린걸까요, 정말....

형사님? 형사님!"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벽에 있는 혈흔 dna검사해서 제 방으로 올려주세요."

나는 서둘러 현장을 뛰쳐나가며 이를 악물었다.

체스판. 남자. 퀸.

벽에 그려진 단서는 뿐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나는 남자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심했다. 조금이라도 쎄한 기색을 눈치채자마자 주시했어야 했는데.

'상대에게 말을 먹혀도, 그것마저 계획의 일부죠.'

그동안 사람좋고 어리숙한 연기를 고집했던 것도, 일부러 나에게 접근해 경계심을 허문 것도 이때문이었나.

"302호사는 사람? 글쎄...저번에 출장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그런데 무슨 일 있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원룸관리인은 다급한 나의 질문에 떨떠름해보이면서도 순순히 답해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덧붙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에 대해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 만큼 많이 알지 않았다. 그가 출장을 다니는 것이 잦다는 것 뿐. 그러나 그 출장도 살인할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한번 물꼬를 튼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언제부터? 그의 계획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이곳에 이사온 날 부터? 살인은 어떻게 저질렀지? 트릭은?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를 헤집으며 생각에 잠겼다. 차갑게 식은 머리와는 반대로 심장은 요란하게 쿵쿵대고 있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는 거지.

탁자에는 와인이 놓여져 있었다.

턴테이블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의자에 기대앉은 남자는 방금 씻고 나왔는지 샤워가운만을 입은 상태였다.

"아..오늘 머리 스타일링 예뻤는데..헝클어 뜨리지 말지."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태블릿으로 한 남자가 나오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극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었다.

트릭.살인.피.사건.

그는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숨기고 사회에 녹아드는 법을 배웠다.

세상은 그에게 게임 같았고 또래 아이들에게 호감을 얻기란 그에게 아주 쉬운일이었다.

"목소리가 많이 피곤해보이네. 일이 많은거야?"

"좀...미안, 우리 곧 2주년인데."

"아니야, 나는 괜찮아. 자기 일때문에 그런건데, 뭘. 근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아휴, 이걸 따라다니면서 도시락 싸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냥 이참에 같이 살까?“

멍하니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던 나는 그만 마지막 말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 지금은 좀 그런데."

"뭐가 그래? 이미 볼거 안 볼거 다 본 사이인데. 아니면..이제와서 내외라도 하는거야?"

여자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고 나는 어떻게 둘러대야할지 난감해졌다. 연쇄살인범이 알고보니 이웃집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살인범이 내 집을 알고 있다고?

"...그냥 지금 일이 진짜 바빠서 그래. 오히려 그렇게 제안해줘서 고마워. 정말 기뻐. 그렇지만 다음에, 다음에 하자."

"뭐..네가 그렇게 말한다니 알았어. 밥 항상 잘 챙겨먹고, 끼니 거르지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다른사람한테 넘기고 쉬어. 자기만 경찰인가. 내가 지켜볼거예요, 버밀리온씨. 사랑해!"

"...나도 사랑해. 보고싶어."

나는 통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들고 차로 향했다. 놈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한 참이라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신고는 오늘 아침,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한 외곽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신고한 여성의 말로는, 동네에 분명 폐업한 세탁소가 있는데 얼마 전부터 밤마다 그곳의 불이 켜져있다고 한다. 누군가의 실루엣을 본 것 같기도 하다고.

당시 담당 관할서는 신고를 받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관련 목격담이 점차 많아지자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변동이 없어야할 가스 사용량이 늘어난것을 확인했다.

여기까지만 봤을때는 무슨 연관이 있나 싶지만 놈의 자동차가 인근 CCTV에 찍힌것을 보고 혹여나 싶어 우리쪽으로 연락을 준 것이다.

그 놈은 이미 도망가고 없겠지. 이렇게 알려준것을 보면 이미 은신처를 바꾸었을 것이다. 놈은 이 게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게임의 재미를 위해 힌트를 준것에 불과하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테니까.

그러니 내가 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는 압도적으로 정보면에서 불리했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재료가 없으면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 게임의 판도를 뒤집기 위해, 나는 기어이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세탁소 안은 다 스러져가는 외관과 달리 멀끔했다. 안에는 턴테이블과 의자 따위가 놓여져 있었고, 다 마신듯 와인병이 올려져 있었다.

"..역시 누가 직전까지 머물렀던게 맞는거 같습니다. 저희 예상대로 그 범인일까요?"

같이 온 형사 한명이 와인병을 챙기며 물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연신 주위를 살폈다.

방안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으나 그와 달리 벽면에는 여러 사진들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형사님, 이거.."

"그래, 아주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네."

그것들은 범행현장과 피해자들의 사진들이었다. 놈은 우리를 여기로 불러내놓고 마치 보란듯이 사진을 붙여놓은 것이다. 순간 짜증이 솟구쳣으나 이내 삼키고는 사진들을 찬찬히 살폈다.

시체에 새겨진 표식, 사라진 왼손 약지들..모두 연쇄살인범의 소행과 일치하여 추리가 맞았다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단서가 없다는 허탈감만 들었다.

그런 내 눈에 탁자 근처에 떨어진 usb와 구겨진 사진이 보였다. 같이온 형사는 벽면에 정신이 팔려 아직 못 본듯 했다. 나는 몸을 숙여 usb를 주워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사진을 주워 주먹으로 말아쥐었다.

"형사님? 거기에 뭐라도 있습니까?"

"아..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구겨진 사진은 나와 내 연인이 같이 있는 사진이었고 연인의 얼굴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

.

나는 서둘러 서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위에 놓여져있는 노트북을 열었다. usb안에 무엇이 담겨있을지 당장 확인해야만 했다.

노트북으로 영상을 확인한 나는 이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찔해졌다.

화면에서는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놈이 언제부터 복도의 CCTV 까지 손을 뻗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오랜시간전부터 영상을 손에 넣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놈이 내 연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X발....'

머리가 팽팽돌아가는 것과 별개로 몸은 솜이 물을 머금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일단 수사가 어디까지 진척이 되었는지 확인을..

"아유, 이게 누구야, 형수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무슨 형수님이예요..그, 마,마실거 좀 사왔는데 좀 드시면서 하세요."

"아, 무거우실 텐데 그거 저 주세요, 감사합니다. 형사님! 여자친구분 오셨어요!"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든 나는 한 손에 도시락든 채 손을 흔들고 있는 여자를 마주했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는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여기는 왜 온거야?"

여자는 초조해보이는 내 얼굴을 보고는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어..어? 나는 너 밥도 못 먹고 있을까봐..지금 내가 온게 방해가 됐을까..? 그렇다면 미안.."

"아, 아니야. 미안해..큰 소리 쳐서. 조금 답지않게 흥분했었나봐. 와줘서 고마워, 도시락 네가 싼거야? 맛있겠네."

나는 일순 싸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서둘러 말했다. 그까짓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고 내색을 한 내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는 떨떠름해보이면서도 대화주제를 돌리려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이거 도시락을 형수님이 싸셨다고요? 와, 두분 진짜 서로 아끼시나 봅니다. 부럽네요. 형수님, 박카스 잘 먹겠습니다!"

"야, 우리는 하는 일이 너무 험해서 안돼. 누구한테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엑, 그럼 베르 형사님은요."

"얼굴."

우리 둘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떠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동료 경찰관들과도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이곤 이내 그런 나 자신에 멈칫했다.

"어, 좀 더 얘기하다 가셔도 되는데요, 저희 지금 휴식시간이라."

"아니예요, 오늘은 베르가 걱정이 되서 도시락 전달차 온거라. 곧 저도 직장에 들어가 봐야 하고요."

그때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건너편을 응시했다.

그것은 얼어버릴 정도로 시린 눈동자였다.

틀림없었다, 그놈이었다. 날 힐끗 본 그 남자는 맞은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찰나였으나 나는 그놈의 무기질적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살인마의 눈이었다.

"..르? 베르! 갑자기 어디가는 거야?"

그 방은 증거보관실이다. 놈이 그 방에서 무언가 빼돌리기라도 하면..! 아니, 애초에 서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그러나 서둘러 뛰쳐들어간 그 방은 잠겨있었고, 급기야 내 팔을 누군가가 잡았다.

"형사님! 갑자기 뭐라도 생각이 나신겁니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셨어요!"

"아니..방, 방금전에 이 방으로 향한 사람, 못 봤어?

"형사님, 농담하시는 거죠? 이 방, 평소에는 잠겨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보관실 열쇠는 서장님만 가지고 있고요. 사람이 어떻게 문을 통과해요."

따라온 형사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하게 말했고 나는 그 음성을 듣자 찬물을 뒤집어 쓴듯 정신이 들었다.

"그래...그랬었지, 참."

"그래도 불안하시다면 제가 한번 경찰서 cctv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요."

"자기야! 괜찮아? 너무 과로한거 아니야?"

그때 뒤따라온 여자가 뒤늦게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야."

나는 내 손을 잡은 두 손을 감싸쥐며 짐짓 평온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철문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굳게 잠겨있었다.

사람들이 가고, 나는 멍하니 cctv를 보며 usb을 만지작거렸다. cctv에는 직원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찍혀있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하루 증거보관실 앞에는 중간에 뛰어온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usb뒷면에 적힌 글씨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쪽이 주변사람들로 협박을 한다면 기꺼이 그 손을 물어뜯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오늘 오후 10시, XX세탁소, 혼자.'

3.

찌르르-

멀리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남자의 말대로 혼자 세탁소로 향했다. 만약을 대비해 권총도 가지고 온 상태였다.

세탁소는 폐업한 지 꽤 되었다는게 거짓말은 아닌듯 가는 길목마다 풀이 길게 자라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중의 풀숲은 아까부터 들리는 까마귀 소리와 어우러져 음산함을 자아냈다.

풀숲을 헤치며 세탁소에 도착한 나는 들어가는 대신 외관을 살폈다. 낮에 왔을때도 느낀거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허름한 세탁소가 내부는 멀끔하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환영인사가 너무 짜릿한거 아니야? 좋긴한데, 난 은근 몸의 대화는 천천히 하자는 주의라."

그때 나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듯한 쎄한 감각에 몸을 돌려 권총을 겨누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어색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 남자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남자의 미소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짜릿하기는 X랄.

남자가 몸으로 가린 벽 옆면에는 꽤 큰 제설용 삽이 세워져 있었다.

.

.

"뭐, 마실 거라도 줘? 안타깝게도 물 밖에 없긴 해."

남자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투로 탁자에 앉으며 손짓했다. 남자를 만난 직후부터, 내 심장은 요란하게 쿵쿵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세탁기에서는 무언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무엇이 돌아가고 있는건지 별로 알고싶지 않았다.

"..."

"하아...경찰들은 원래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거야, 아니면 네가 의심이 많은거야? 하긴, 의심이 많지 않으면 벌써 넌 뒈지고 없겠네. 이해했어."

그는 탁자위의 물병을 집어 내 잔에 물을 따라 주었는데, 내가 그것을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자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잔에도 물을 따라마셨다.

"자, 봐. 뭐 든거 없어. X나 철저하시네요, 형."

"..잔 바꿔. 이 잔에만 뭐를 발랐을지 어떻게 알아."

"오, 간접키스?"

나는 대답대신 눈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서워서 농담도 못 하겠네. 그래요, 뭐. 중요한건 네가 물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가 아니니까. 그나저나 여기 온 걸 보면 나랑 할 말이 있다는 거겠고.“

나는 순간 일어나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의자가 밀쳐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남자는 무슨 생각인건지 시종일관 초연했다.

"..너, 뭐하자는 거야."

"뭐긴 뭐야. 그냥 서로 동질감 느끼는 사이끼리 놀면 좋잖아. 안 그래도 세상과 동떨어진게 우린데."

나는 당장이라도 남자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짓씹듯 말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에도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게임, 좋지. 근데 그 사진 뭐야, 주변사람들까지 끌어들이겠다는거야?"

"..."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한참을 대꾸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앞에 있던 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지금 머리에 열이 많이 오른거 같은데, 조금 식히지?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얘기나 하자고. 그 여자가 너에게 그리 소중한 사람같지는 않아서 나름 배려해 고른건데. 우리는 사랑 같은거 이해하고 싶지도 않잖아."

"..."

"뭐, 아니라면 유감이야. 그래도 네가 적극적으로 임할 기미가 보여서 다행인건가."

나는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남자는 개의치 않는듯이 말을 이었다.

"베르 버밀리온. 28세. XX경찰서에서 3년째 근무. 어머니가 죽은 사건을 계기로 현재는 강력반으로 옮김."

"...너, 뭐하자는 거야."

"OO오피스텔에서 거주중. 2년째 교제중인 연인이 있음. 좋아하는 건 계란말이. 최근 정신과에 방문한 기록이 있음. 오, 이건 좀 신선한데. 병명이 뭐였어?"

"뭐하자는 거냐고! 이 새X야!"

"뭐냐니, 내가 너에게 이만큼이나 관심이 많다는 뜻이지."

"미친 새X..."

남자는 갑자기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중요한 얘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나랑 같이 살래? 이렇게 누구를 가지고 싶은건 네가 처음이야. 나 돈 많은데."

"이러는 의도가 뭔데, X발. 너 같으면 하겠냐?"

나는 진절머리 난다는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유리잔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남자는 내 대답을 듣고는 도리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 머리 모양 아깝게 자꾸 헝클어뜨리지 마. 물론 침대위에서 헝클어지면 더 예쁠거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냥,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와 닮은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하잖아? 결혼, 출산...뭐 그런것들 말이야. 나도 인생의 반려라는거, 한번 찾아보고 싶어졌어. 얼마나 대단한것이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구는지...혹시 알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수 있을지."

"..아니?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걸. 이 악마 새X."

"하기야, 너도 이해하는 척만 하는걸. 언제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만 할꺼야?"

"...."

"뭐..네가 말하지 않겠다면. 그래, 게임을 하나 해보는건 어떨까?"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의 방에서 어떤 상자를 꺼냈다. 그것은 리볼버 두 자루였다.

"여기에 실탄을 하나만 넣고...이렇게 탄창을 돌리면, 나조차도 실탄이 어디에 들어있는지 몰라. 그리고 번갈아 가며 자신에게 쏘는거지, 어때?"

"..이딴 정신나간 짓을 하자고 하다니. 정말 미쳤네."

"하하! 그래도 해야할 걸. 지금 경찰서랑, 그 여자 집 전부 폭탄을 설치하고 오는 길이니까. 그리고 그 스위치는 나한테 있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스위치패널을 보여주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

"거짓말같아? 그럼 누를까?"

그 말을 하는 남자는 웃는 기색하나 없이 표정을 굳히고 있어서, 더 도발하다가는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그 스위치, 네가 룰렛 도중에 막 누르지는 않겠지?"

"전혀. 나는 그런 비겁한 종자들과는 달라. 못 믿겠으면 혈서라도 써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진짜로 자신의 손을 칼로 찌를 작정이라, 나는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됐어. 그냥 빨리 시작해."

.

.

탁,드르륵

"그런데 말이야, 너는 어떤 기분이지?"

"..뭐가."

"자신과 다른 누구를 항상 연기하며 살아가는 기분은."

"..적어도 너같은 위험종자로 분류되는 것보다는 낫지."

"하하! 진짜 웃긴다. 늑대새X가 양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니는거. 게다가 경찰! 이래서 사람들이 멍청하다니까. 죽을 때가 오니까 솔직해 지는건가?"

"..."

나는 다시 대꾸하지 않고 총구를 머리에 가져다 댔다.

탁-

방아쇠를 당기자 빈 약실이었는지 소리말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네 얘기를 해봐. 그 사람들은 왜 죽였어? 연쇄살인은 언제부터 저지른거야?"

"음, 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날도 전시회에 낼 작업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문득 피로 만든 물감은 캔버스에서 어떤 색을 낼까 궁금해졌어. 빨간색 일건 당연한 얘기겠지만. 뭐, 역사적으로 보면 물감의 종류는 많았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를 준게 더 큰 요소였지. 계획을 짜고, 실행하고, 은폐하고. 그 모든게 나에게는 큰 의미가 됐어. 이전에는 나 자신을..잘 몰랐었거든."

"만약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 여자에게도 손을 댈 건가?"

"아니, 다른 사람들은 죽여도 그 여자만큼은 안 건들게. 약속이야. 나랑 놀아준 보답. 그런데 너는 진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믿나보지?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

"그냥 반복적으로 말하면 됀다고 믿는건 아니지? 그 여자도 참 불쌍해."

"헛소리 하지말고 방아쇠나 당겨."

남자는 투덜거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역시나 빈 약실이었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말을 마치고는 서로 번갈아 방아쇠를 당겼다. 방 안에는 한참동안 틱틱거리는 소리만 들렸고, 어느덧 우리앞에는 두발만이 남았다.

"이제 이것도 슬슬 끝이 보이네. 확률은 너랑 나 똑같이 50대 50. 둘다 빈 약실이 나오면 먼저 상대를 쏜 사람이 이기는걸로. 미리 작별인사라도 해둘까? 소감은?"

"...다신 보지 말자, 개새X야."

"너무하네, 그래도 나는 오랜만에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서 재밌었는데."

"약속지켜."

"알았다니까. 그래도 만나서 즐거웠어. 또 보자고."

탕-

한밤중, 고요한 한 동네에서 때 아닌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에 놀란 까마귀 한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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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세르 세루리안

소견: 반사회적 인격장애 (psychopath)

자기애성 인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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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베르 버밀리온

소견: 반사회적 인격장애(sociopath)

조현성 성격장애

-술래(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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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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