𝟏

판도라 전투 공격 로그

2021. 02. 04

판 오너님 공격 로그

호아이움의 성을 마주하고 선다. 이렇게까지 멀리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곳에서 벗어난 적은 인간계에 있을 때밖에 없으니까. 이제는 기사단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오글로 이 전쟁에 존재한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눈을 감는다.

미련이 남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추억들, 가족, 친구. 그들을 적으로서 다시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슬프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꼿꼿이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그 경험들이 만들어준 나의 결심.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예전처럼 주변에 모든 걸 맡기며 흘러가던 도로시아는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야. 지금까지 이어져 온 불합리한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서. 이러한 신념은 오글 모두가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은 하나하나 차가운 공기가 되어 피부에 닿았다. 마치 나를 일깨워주는 듯 했다. 꿈에서 깬 것 마냥 눈을 비빈다. 이 손에는 더 이상 따스함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은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곧 긴 스틱을 쥐고 휘두르며 낮은 목소리로 발음을 내면 밤하늘을 액체처럼 만든 것 같은 무언가가 적을 뒤덮는다. 채도가 점점 옅어지면서 사라지니 쓰러진 상대만이 보인다. 꿈에선 전쟁이 없기를. 잠든 그에게 속삭인 뒤, 나는 앞으로 더욱 나아갔다.

·

전쟁의 시작은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웅장은 커녕 비참함만 가득하다. 장대한 서사시의 끝 따위의 서술이 붙자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끔찍했다. 치열한 만큼 더욱. 원래는 물소리만 들렸던 폐허가 비명에 묻힌다. 낭자한 유혈은 이곳을 전쟁터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만들지 않았다. 각자가 쌓아온 길이 명확히 보이는 장소가,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이미 멀리 걸어온 것 또한.

두 곳에서 지내왔으니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지나오면서 이미 몇을 마주했다. 그들 중 일부는 호아이움을 저버렸다며 공격부터 쏘아부었고, 또 일부는 다시 돌아오라고 회유했다.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 결정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 배신자!"

그러다 마침 전자의 부류가 나타난다. 뻗쳐온 칼날은 간신히 옆을 스쳐 금발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리본이 찢겨졌다. 순간적으로 휘청였으나 바로 발을 뒤로 뻗어 버틴다. 그리곤 도움닫기 삼아 그에게 달려들었다. 상대가 당황했을 사이, 호아이움 기사단에 있을 때에도 훈련 시 늘 최고의 결과를 보이는 내가 마법을 사용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건 호아이움의 검사 뿐. 움직이지 못 하게 발을 묶어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적은 그런 와중에도 우리를 배반했다는 말은 멈추지 않는다. 왜일까, 먼저 배신한 건 호아이움인데. 그의 입도 닫아주기로 했다.

·

이렇게까지 열심인 적이 있던가. 평생 돌아봐도 없을 것 같다. 성실이란 말은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 특히 판이라거나. 나는 조금만 귀찮아도 미루기 일상이었다. 인간계에서의 숙제도 몰아서 하곤 했지. 집안일도, 내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마계에서는 애초에 할 필요가 없으니 청소를 어떻게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넓은 집에서 물건을 스스로 제자리에 갖다 놓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나는 남에게 맡기는 게 당연했으니까. 무엇보다 바스커빌 씩이나 되는 귀족이었고…….

생각 없이 누려왔던 것들이 종종 죄책감을 부른다. 모든 걸 버렸대도 여전히 귀족의 피는 흐르고 있다. 나를 뜯어 고치지 않는 이상,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반겨준다 하더라도 꺼리는 오글도 분명 있겠지. 호아이움에서는 죄인에 가까울 터. 아무리 홀로 서 있는다 하더라도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건, 무섭다. 누아르 하트가 욱신거린다. 그만큼 나아가는 걸음의 보폭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는 건, 공격당하기 쉬운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팔을 스친다. 운이 좋게 찔리지는 않았으나 끔찍하리만큼 심한 고통에 부여잡는다. 호아이움에 있을 때엔 방어를 완벽하게 해내서 내 피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일어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당혹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곤 급하게 마법으로 막을 친다. 그렇게 저를 감싸듯이 생긴 별하늘은 손가락으로 한 번 건드리면 사방으로 퍼졌다. 늪처럼 번져 주변의 적을 묶는다.

약한 마음을 지우기로 한다.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라고. 계속 흐를 것 같던 피는 어느샌가 멈춘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

판 오너님 공격 로그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나를 도라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고 그 중에서도 이렇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 한 명이다. 판 트라우 바스커빌. 예상은 했었다. 충분히 생각해본 일이다. 바스커빌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그것도 특히 너를. 편지에 적은대로 좋은 세상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보길 바랐지만 역시 이루어지진 않네. 어딘가에서 듣기를, 희망은 상자 안에만 있다고들 한다. 그걸 무어라 불렀는지는 까먹었다. 인간계에서 보았던 걸 하나하나 기억하진 못 했다. 결국 우리는 밖으로 나온 고난과 고통만 겪는 것이지.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네가 날 찾은 이상 그냥은 보내주지 않겠지. 나는 너를 잘 알아. 설득이 통하지 않으리란 사실 역시도. 아까의 상처가 유독 따갑게 느껴졌다.

"넌, 나와 함께 태어난 이상 함께 짊어질 것이 분명히 있어."

"판……."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판."

"돌아와, 도라."

우리가 짊어질 것이란 뭘까? 가족이기 때문에, 쌍둥이라서,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하는 걸까? 벗어날 수 없는 이유란 과연 뭘지. 이 난리통에서도 네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다. 주변의 빛 때문에 누구보다 반짝였고, 소설에서 흔히들 쓰는 문장을 빌리자면 그 자체로 구원의 손길 같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아."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상자에 있던 것과 같았다. 나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이미 버린, 과거의 허물이었다. 나는 날아갈 거야, 판. 나는 더 가야 해.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검처럼 스틱을 들고선 작게 읊조린다. 곧 검게 나타난 형태는 네 손과 발을 묶는다. 통하지 않을지, 금방 빠져나올지, 확실치 않았지만. 바로 너를 뒤로 하고 아까처럼 나아갔다. 이러면 도주나 다름이 없을까.

카테고리
#오리지널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