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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자

2021. 02. 04

https://www.youtube.com/watch?v=rPuvSCxkUcM

King's Raid - The Right (KOR Ver.)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정해본, 몇 안 되는 자기 자신만의 결정.

나는 수동적이고, 타인을 따라가며, 누군가를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달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고 싶고, 구부정하게 걷고 싶고, 더 놀고 싶었는데, 그러면 혼이 났다. 바스커빌 가문의 마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레 포기했다. 결국 원하는 게 없으면 해결되는 문제였으니. 반대로 판은, 투덜대긴 했어도 부모님이 시키는 모든 것에 성실히 임했다. 억지가 익숙해졌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나와는 달랐다. 나는 그런 판을 당연하게 따랐다. 그럴수록 내게는 판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특히 인간계에서는, 깨워준 덕분에 지각을 면하거나, 잠들어서 노트하지 못 한 내용을 판이 보여준다거나, 챙겨야 할 것을 한 번 더 알려준다거나……. 삶의 일부분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기사단도 가문의 사람들을 따라 들어온 것처럼 나는 여전히 주변인의 의견만을 좇았다. 본디 기사란, 따르는 게 제일이라지만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겠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바람, 욕망, 방향성……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더라도 일시적이었다. 대화를 하는 상대에 맞추었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흘러가는 것에 모든 걸 맡기며. 그래도 나름 이성적으로 봐야 하는 것에는 침착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휘둘리진 않는다고 느꼈다. 유일한 착오였다.

·

휘황찬란한 무도회. 이 모순적인 합작에선 마냥 복잡하기만 했다. 충격이 큰 만큼 거부감부터 들었다. 그리고 많이 흔들렸다.

판에게 물었지. 오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렇다 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글들이 함께하는 무도회였기에 말하기 곤란했을 수도 있으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겠지. 우리는 '오글들은 천성이 나쁘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같은 교육을 듣고 지냈으니까. 그렇지만, 대화가 통하는 오글도 있었잖아.

애나가 부러웠다. 호아이움의 기사단으로서, 친구였던 너를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나에 비해 아무런 망설임이 없어서. 우리의, 나의 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너와는 계속 친구이고 싶었으니까. 오히려 애나는 내가 그쪽으로 넘어가면 환영해줄 거라 했는데. 가족을 놓을 순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면, 무서워.

화이트가 해준 이야기. 어느 영화에서 말하길,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고 한다. 무엇을 고를진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그래서 본인의 초콜릿 상자는 오글이었던 것뿐이라고. 이에 "버리면 되는 거 아냐?", "네가 원해서 그 상자를 갖고 있는 거기도 하잖아." 따위의 답을 했으나, 이 상자를 버린다고 무엇이 달라지진 않다고 했다. 원해서든 아니든 이 상자를 열어버린 이상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 한다고. 그 말에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초콜릿 상자도 그저 호아이움이었던 것뿐일까. 조금은 틀린 것 같다.

·

여왕 후보를 잃은 것을 호아이움이 평화롭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급습이 시작됐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아는 사람을 마주할까 두려웠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감이었다. 차라리 전부 꿈이었으면 했다. 이 긴 꿈에서 깨어났으면, 부디 누군가 깨워줬으면. 공격은 전혀 하지 못 하고 수비에만 급급했다.

어둠이 걷어지고 나니 창문 밖의 햇빛이 나를 비추었다. 어느샌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래간만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짹짹, 이어서 들리는 똑똑. 판의 노크 소리다. 내게 다가와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학교에 늦을 거라고 알려준다. 그리운 날들이었다. 이것이 꿈이라 알아차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을 뜨면 어디를 막론하고 황폐했다. 일어나는 사람은 오글뿐. 호아이움 기사단의 패배다.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들면 늙은 남성이 낮은 목소리로 떠벌린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검은색 하트를 든 게 보였다. 그리고──

부서져 내리는 하트와 동시에 슈니발렌의 비명이 울린다. 남성의 손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와 위로 일렁거리는 검은 기운은 호아이움과 오글 모두에게 혼란을 퍼뜨렸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가 나에게도 닿았다. 그저 발 끝에 묻기만 했었는데,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불쾌감은 죄악감이 되어 가득해진다. 슈니발렌을 죽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괴로운 감정은 성을 향한 게 아니었다. 나는 허무한 표정으로 오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호아이움은 진실을 숨겼지?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교육받은 거지? 기사단은 무얼 위해……?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나뉠수록 조금이라도 남은 충성심이 점점 바스러졌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바스커빌의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이런 일이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왔으리라 생각하면 더욱.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이 호아이움의 귀족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그 피가 흐른다. 아니, 자기 자신이었다.

제 살을 뜯고 싶을 정도였다. 혐오스러웠다. 구토감이 일었다. 작은 목소리마저도 내뱉지 못 했지만. 말을 잃은 폐허에는 종소리만이 들렸다. 이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인가?

·

스스로 일어나기로 했다. 도로시아 바스커빌이 아닌, 나로서.

나의 방. 나의 옷. 나의 이름. 나의 가족. 지금까지 누려온 것들을 버린다. 모두 상자 속에 담았다. 떠날 것이다.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더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서. 이렇게까지 다짐한 적이 있던가. 자신의 의견을 낸 적 또한 있던가. 판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내가 없어도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혼자서도 빛나는 아이였으니까. 작별 인사로 상자 옆에 짧게 편지를 남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담긴 상자를 보고 있자니, 인생에 비해 작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건 초콜릿 상자일까. 열어버린 이상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 할 건 아닌 것 같고, 버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기엔 이미 변했으니 '나의 상자'가 더 맞게 느껴졌다. 방도 같이 둘러본다.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던 것을. 문득, 인간계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느 영화가 생각나 하나하나에 말을 건다. 안녕, 침대. 안녕, 책상. 안녕, 인형. …… 안녕, 바스커빌. 안녕, 호아이움.

안녕, 나의 상자.

초콜릿 상자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내용, 마지막 서술은 영화 <룸(2016)>의 내용 및 오마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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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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