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염
새로운 길목 앞에서
※프로메어 스포일러가 다수 있습니다! 일단 갈로 리오 메인의 논컾상정 글입니다.
본 연성은 날조 및 적폐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있잖아 리오, 외로워?
모든 게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대한 축약하면 프로메폴리스의 사정관, 클레이 포사이트. 버닝 레스큐의 갈로 티모스. 이 두 사람을 만난것이 사건의 끝이자 시작일 것이다. 그건 악연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터무니없는 우연이기도 하겠지.
여러 일이 겹쳐져 지금의 결과로 나타났다. 한 행성의 재탄생, 그로 인한 수많은 버니시들의 해방. 내게는 복잡미묘한 결별이었지만 그들에겐 잘 된 일이었다. 억압해야 할 힘, 그 자체가 소멸했다고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을 축복하고 싶다. 지금껏 잘 버텨낸 그들이라면 분명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이다.
재탄생한 도시의 시민을 케어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일은 갈로 티모스나 혹은 그 누구든 적임자가 나타나 서둘러 처리해야 할 것이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응당 저지른 일에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은 절대 정의의 사도는 되지 못할 테니까. 그 정도의 낯짝은 있다.
매드 버니시의 수장, 리오 포티아. 이제는 그 이름으로 활동할 일은 없겠지. 게라와 메이스에겐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거리를 둘 것이다. 두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는 게 타당하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서로 길을 잃지 않는다면 분명 다시 만날 테니.
내가 그렇게 차분히 마음 정리를 하고 있던 차였다.
퍽!
두터운 장갑이 등을 툭 친다. 리오 포티아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찌푸리고 돌아봤다.
"...갈로 티모스."
이젠 지겨울 정도의 해맑은 미소. 그정도의 일을 겪었는데도 표정에 군더더기가 없다. 딱히 무언갈 감추는 성격이 아닌 걸 보면 저게 그의 본성이겠지. 정말 무서우리만치 회복탄성력이 좋은 녀석이다.
갈로 티모스가 던진 소방대원의 겉옷은 낯설기만 하다. 붉고 반짝거리는 화려한 옷. 그런 것치고는 두텁고 거친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새것이 아닌지 군데군데 헤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왜, 입는 법을 모르겠냐?"
바로 입지 않자 갈로 티모스가 빤한 시선을 보낸다. 나는 그저 콧소릴 내며 고갤 저었다. 그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진 알 수 없다. 내뱉은 말은 전부 진심일 것이다. 그러니 내게도 서슴지 않고 순수한 배려를 보이는 거겠지.
어설프게 걸친 옷은 상당히 펑퍼짐해 품이 한참 남는데도 리오 포티아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았다.
"옷을 빌린 값 정도는 일해주지."
"오우, 부탁한다!"
그때까진 이 옷을 두 번씩이나 입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설마 갈로 티모스가 이토록 집요하고 끈질긴 놈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간단히 입진 않았을 텐데. 퉁명스럽게 앞머릴 쓸어넘기던 리오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자연스럽게 떠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리오 포티아는 간만에 당황이란 감정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생면부지였던 날 진짜로 책임지려 하는 것 같다. 그것도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연관된 이들 모두. 터무니없지 않나? 그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지. 리오의 시선이 조용히 내려갔다. 하지만 버니시가 아닌 갈로 티모스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분명히 있었다. 비록 큰 권리는 없을지라도 시민들은 그를 지지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인명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신망이 큰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과연 전 테러범이었던 내가 레스큐 대원이 되어도 그럴까?
리오 포티아는 간단히 결론 내리지 못했다. 득과 실, 명예와 실추. 그것들을 가늠해보다 결국엔 눈을 감는다.
사람이 이렇게 고민을 하는데 정작 버닝 레스큐란 놈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진 인상으로 "좋은데!", "바보는 둘이든 하나든 상관없지 않나?", "좋은걸~ 좋은 실.. 동료가 는다는 거!", "음, 어려운 일도 아니지." ...하고 태평하게 엄지를 추켜세우던 광경은 꽤 인상에 남았다. 이렇게 골이 아픈 적은 오랜만이다.
실로 갈로 티모스가 속할 법한 곳이구나.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등을 갈로 티모스가 떠민 덕에 리오 포티아는 버닝 레스큐 임시 대원이 되었다. 정식으로 임명되는 건 제대로 시험을 치르고 그들에게 실력을 인정 받을 때겠지. 모든 걸 불태우며 살아가던 그 시절론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새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것 즘은 이해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전 버니시들의 주민은 외지에 마을을 꾸려 다시 예전의 삶을 천천히 되찾아갈 생각인 것 같다. 부하였던 두 사람도 당분간은 마을재건에 힘쓸 예정이다. 멀리서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소 아쉽다.
이젠 리더도 뭣도 아닌 나는 봉급 대부분을 기부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지만, 그들을 위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영혼으로 이어진 동포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직 먼 길이긴 하지만... 기다릴 수 있다. 이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들을 새롭게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진 나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지.
'그래, 난 괜찮아. 지켜봐 줘 게라, 메이스. 버니시였던 모두들.'
새로운 시작을 내딛는 리오 포티아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경건한 낯빛으로 얼굴을 한차례 씻어내고서야 욕실을 떠났다.
기쁨을 만끽할 순간은 단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갑자기 들어온 만큼 리오 포티아는 소방대원으로서 기본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처음엔 한참 애를 먹었다. 특히 버닝 레스큐 대원들의 호전적인 성향에 적응하느라 배로 고생했을 것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리오 포티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버니시였던 내 신체 정보를 은근히 탐내 하던 루치아, 곧잘 나를 챙겨주려 들지만 조금만 한눈팔면 그새 갈로와 치고박는 아이나. 그를 말릴 생각도 않고 배팅이나 하는 레미, 배리스... 그나마 대장인 이그니스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지켜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때론 말없이 다른 대원들이나 비니를 빤히 바라볼 때도 많아서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대원에 대한 정이 남다른 사람 같다.
'이젠 여기도 그리 소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나도 적응이란 걸 했나 보군.'
그런 그들의 중심에 서서 마구 휘두르는 남자도 있고 말이지. 건물의 옥상에 선 리오 포티아는 홀로 커피잔을 홀짝였다. 날씨는 그리 서늘하지 않고 구름이 적당히 껴있어 전경이 보기 좋았다. 그렇기에 홀로 만끽하고 있었으나, 뒤에서 불쑥 불청객이 나타났다.
"여어- 이런 데서 사색 중이신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제게 어깨를 걸친 갈로 티모스를 보고도 리오 포티아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갈로 티모스가 예고를 하고 나타난 적은 없었으니까. 그저 귀찮다는 듯이 그를 걸친 채 한쪽 팔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한마디 내뱉는다.
"뒤에서 나타나지 말라 했을 텐데, 갈로 티모스. 머그를 놓치면 책임질 건가?"
"무슨 섭섭한 소릴! 이럴 땐 만나서 반갑다고 말해야지! 어차피 놀라지도 않았으면서. 그리고! 넌 동료보다 머그컵이 더 중요하냐. 이 인정없는 놈."
반응이 일일이 시끄럽다. 귀가 아프군. 얼굴도 왠지 따갑다. 이 모히칸 바보는 자기 머리가 얼마나 성가신지 모르는 건가? 슬쩍 짜증이 치밀자 리오 포티아는 얼굴을 꾹 누르고 그 품에서 벗어난다. 하여간 일일히 답답하게 구는 남자다.
한동안 사소한 투닥거림이 이어지고 얼마 안 가 두사람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갈로 티모스는 항상 시끄럽지만, 예외인 상황도 있다. 리오 포티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그는 혼자 생각을 정리할 때, 그리고 무언가 전할 게 있을 땐 이렇게 슬그머니 뜸을 들이곤 한다.
이윽고 난간에 어깨를 기댄 갈로 티모스가 서두를 꺼냈다.
"있잖아, 리오. 여기선 그렇게 딱딱하게 서 있을 필요 없어. 다들 네가 나쁜 녀석이라곤 생각 안 해.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는것도 알고 있거든."
"나도 알고 있다. 모른척하기 힘들만큼 배려하는 게 느껴지더군.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야."
흠잡을데 없이 깔끔한 대답. 그러나 갈로 티모스는 그런걸 바란 게 아니었다. 지금도 선명히 느껴질 만큼 리오 포티아는 자신의 영역과 경계가 확고한 사람이다. 버니시로서 숱하게 배척받고 고립되어 지낸 영향도 있겠지. 그 깊이는 갈로 티모스가 헤아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갈로 티모스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까칠하게 굴거야? 가끔은 어깨에 힘을 빼줘야 몸이 버텨준다고."
"지금까지 쭉 이렇게 지내왔다만."
"이거 봐! 이런 태도를 보이니까 다들 눈을 못 떼는 거라니까."
"마치 어린애 보듯 하는군. 처음에도 그랬지만 넌 생각이 너무 가벼워. 연령으로 사람을 판단 하지 마라."
심드렁한 눈치의 리오 포티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갈로 티모스를 바라봤다. 맑고 푸른 눈빛 속에서 은근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붉은 동공이 잠시 가늘어지는 걸 본다.
"....너 외톨이였지? 아니, 친구가 없는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자 예상치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리오 포티아는 그제서야 조금 동요한다.
"그건 꽤 모욕적이게 들리는군. 무슨 뜻이냐."
바로 리오 포티아의 눈매가 매서워지는 걸 본 갈로 티모스는 워워, 하고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니 아니, 진지하게 말이야. 너 친구 사귀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고."
"게라와 메이스. 이 두 사람은 충분히 벗이라 부를만한 이들이다. 게다가 프로메어와도 충분히 깊은 교류를..."
"그 녀석들은 뭐냐... 네 직속 부하 같은 거잖아? 상하관계가 있는 이상 보통의 친구랑은 다르지! 그리고 프로메어는 외계생명체니 논외로 치자고."
이녀석은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거지. 리오 포티아는 탐탁찮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쓸데없는 오지랖이 넓다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갈로 티모스가 하는 행동의 의미는 무엇인지 리오 포티아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가 자세히 표출하기 전까진.
"아~ 진짜 귀찮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거다. 이 갈로 티모스님이 리오 포티아의 첫 친구가 돼주겠단 거지!!"
자랑스럽게 엄지를 치켜든 갈로 티모스를 리오 포티아는 허탈하게 바라본다. 뭘 잘했다고 으스대는 거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아 입을 떼려고 할 때, 갈로 티모스는 먼저 선수를 친다.
갑자기 번쩍, 몸이 들렸다. 머그잔이 기울어졌지만 진작 비워진 커피잔에선 물 한 방울도 갈로의 머리 위로 쏟아지진 않았다. 바보 자식, 위험하잖나! 리오 포티아가 성을 내는 것도 잠시. 척척척 리오를 치켜든 자세 그대로 일사불란하게 걸어나가던 갈로 티모스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여유롭다. 다른 이들은 갈로가 또 일을 치나 보군. 싶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을 보내준다.
'이 녀석들에겐 이런 일이 일상이란 건가?'
리오 포티아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대로 자신을 바이크에 태우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갈로 티모스의 모습에 반문하는걸 포기했다. 바보에게 뭘 말하겠는가. 적어도 목적지는 있겠지 싶어 자세를 똑바로 한 리오는 주변에 이따금 시선을 돌리며 그와 한밤중의 바이크를 탔다.
"어딜 가나 했더니..."
바이크를 타고 내린 곳은 익숙한 장소다. 처음 만났던 동굴 근처의 얼음호수. 지금은 다 녹아내려 끝자락엔 이끼가 자라나고 있었다. 조만간 저 커다란 구멍도 녹음으로 뒤덮이게 되는 걸까. 잡생각이 들 즈음에 갈로 티모스가 큰소릴 냈다.
"후후훗. 친구란 게 뭔지 알려주려면 역시 이곳만 한 곳이 없지."
"무슨 논리냐 그건. 하여간 앞뒤가 안 맞는 말투는 여전하군."
이전에 한번 그가 생각을 정리하던 곳이란 얘긴 들었지만 둘이서 같이 와 본 적은 그때 이후로 없었다. 굳이 찾아볼 만한 곳도 아니었고 리오 포티아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임시 거처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진 않았다.
갈로 티모스의 첫인상은 확실히 특이했다. 태연하게 버니시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가 싶더니 한번 주의를 줬다고 정말 사과를 하는 녀석은 처음 봤다. 단순히 겁을 먹어서라기엔 그의 말투가, 눈빛이 올곧았기에 리오 포티아는 잠시 그의 평가를 고쳤다. 편협한 민간인에서 조금은 생각할 줄 아는 녀석으로.
그때는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잘 몰랐지.
"무슨 생각을 그리해?"
지금이라고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리오 포티아는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얘기를 이어나가면~ 여기서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구를 구했었잖아?"
"이것저것 많이 생략됐다만, 그렇지."
"그래! 그리고 중간에 합체를 했을 때 아주 조금이지만 네 마음이나 생각 같은 걸 읽을 수 있었어."
"호오..."
가만 떠올려보면 자신도 그랬던 것 같다. 정신적, 신체적 일체화를 꽤나 비논리적인 형태로 이루어냈으니 무슨 부작용이 뒤따라도 대강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도 갈로 티모스에 대해 가끔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마냥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 남들만큼 약하고 무른 부분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능숙하게 그 감정을 덮어씌우고 상충해나가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리오 포티아가 처음부터 두터운 외피를 쓰고 사람들을 위협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상당히 치기 어린 시기였다. 그러는 도중에 갈로 티모스는 이야길 이어갔다.
"그때 느낀 게 있단 말씀. 미리 말하는데 화내지 말고 잘~ 들어! 내가 표현하자면... 네 마음은~ 음, 뭐랄까... 넓으면서 좁아! 남자로서의 그릇은 부족하지 않은데 그 외에 것들은 하나같이 쬐그맣거나 수가 너무 적으니까 쓸데없이 더 그래."
"...좀 더 알아듣게 설명해주지 않겠나."
"정말~! 제대로 들으라니깐."
내가 잘못한 건가? 잠시 눈매가 뾰족해졌으나 리오 포티아는 한 수 접어준다.
"넌 너무 체면을 신경 쓰고 산 것 같다고. 버니시인 동안은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지금은 마음껏 하고 싶은걸 하면 될 텐데 낮이나~ 밤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기나 하고 말이야. 아아, 청춘이 아깝다 아까워!"
역시 때릴까.
"폭력 반대!!!"
흥, 짧게 숨을 내쉰 리오 포티아가 팔짱을 바꿔 꼈다. 이럴땐 묘하게 눈치가 좋다. 갈로 티모스는 타고난 낙관론자처럼 보였다가도 막상 일이 터지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행동하곤 했다. 누군갈 눈여겨본다는 것 자체가 시야가 넓다는 방증이다. 그건 그가 구조원이기 때문에 생겨난 눈썰미일 수도 있지만...
반쯤은 그냥 바보니까 그런 거겠지. 감이 좋은 바보는 생각보다 성가시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평가에 리오 포티아는 뜸을 들였다.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반론해봤자 또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몰아붙일 게 뻔했다. 이럴땐 화제를 조금 비트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나도 한마디 하지. 갈로 티모스. 네게도 외로움이 있다는걸 인정하나?"
"음. 그 정도는 뭐~ 가지고 있으려나. 그야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보드게임도 뭣도 못한다고."
"나는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프로메어가 있던 시절에는 말이야."
과거형으로 말하는 그의 눈은 묘하게 우수에 차 있었다. 밤하늘에 견줄만한 그리움이. 갈로 티모스는 놓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 모습을 처음 봤기에 다소 호기심이 서린 눈초리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유아기 때부터 프로메어와 만났다. 보통은 인내심과 윤리관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니 그런 아이들은 쉽게 불을 냈고... 금방 프리즈 포스에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어린 버니시는 살아남기 힘들었지. 그러나 나는 특이한 케이스였어. 왜인지 처음부터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냐."
"그것은 나와 소통을 시도했다. 들렸던 목소리는 맑고 순수한 5~6세의 어린아이 같았지. 어이 갈로, 넌 프로메어가 내게 무슨 말을 했을 것 같나?"
"으~음....... 빨리 태워줘! 같은거?"
"하핫, 너답군. 유감스럽지만 내가 들었던 건 외롭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로 물었지. '그렇담 나와 친구가 되자.' 라고 어디 사는 바보처럼 말이야."
"아니, 여기선 이름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끄응~ 하고 못마땅한 신음을 내던 갈로 티모스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래도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파악한 채로 리오에게 되묻는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신경 쓰인단 티가 팍팍 묻어나는 얼굴이 조금 재밌다.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녀석. 그게 리오 포티아가 보는 갈로 티모스였다.
"너는 나와 친구가 되겠다고 했지. 하지만 첫 친구자리는 역시 내줄 수 없어. 나는 그들을 잊고 싶지 않다."
"...그래도 두 번째는 비어 있는 거지?"
"...흠. 게라, 메이스, 투모스, 힐리, 세타, 세실리, 다이아, 진, 그리고..."
"잠깐, 잠깐, 잠깐~!!! 뭐가 그렇게 많아?"
천연덕스럽게 손가락을 세는 리오 포티아에게 갈로 티모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는 듯한 얼빠진 표정에 리오 포티아는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농담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연다.
"버니시의 모두는 친구이자 영혼을 나눈 동지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말하는 친구의 개념하고는 조금 다르단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다 하여 함부로 친구를 사귈 생각은 없다. 네놈에게 프로메어에 준하는 의리와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 있나?"
웃음기를 뺀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프로메어라는건 버니시에게 있어 평생을 떼어낼 수 없는 것. 리오의 외로움을 잊게 해주던 불꽃. 그 이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갈로 티모스를 향하는 보랏빛 눈동자에 작은 별 무리가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걸 보고 갈로는 활짝 웃었다.
"오우,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 갈로 티모스님이 아니면 누가 친구가 되겠어?"
"...그래, 그렇군. 잘 알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갈로. 그렇게 말하는 리오의 눈매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를 마주 본 갈로 또한 더없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답한다.
"언제든지 부탁하라고 리오!"
별빛 아래에서 두 주먹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부딪혔다. 그 사이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을 닮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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