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
리오의 궤적
※본 글은 프로메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오 포티아와 갈로 티모스가 나오지만 연인은 아닙니다.
위이잉, 위잉. 요란스러운 경적음이 거리를 꽉 채운다. 그러나 누구하나 눈살 찌푸리는 이는 없다. 아니, 한 둘은 있을지도 모른다. 실은 잔뜩 널려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소방차가 달리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으니까.
쨍쨍 고막에 꽂히는 확성기 소리조차 즐겁다. 새롭다. 인명구조 활동을 재미로 하고 있다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실제로 마음이 들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맹세컨데 나는 삶을 살아가는 내내 쓸데없는 것에 한눈을 판 적이 없다.
리오 포티아로서 맹세한다.
그런데 지금은 스쳐지나가는 풍경에도 눈을 떼지 못하겠다. 나란히 걸어가는 정다운 부부가, 철없이 무구하게 뛰노는 아이들이 생기있게 거니는 거리 어딘가엔 버니시였던 이들이 있을거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간지럽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쭉 내 영혼의 일부이다.
비록 지금은 반쪽짜리 인간취급을 받을지라도 상관없다. 그들도 인정하게 만들면 될 문제다.
떠들썩한 소방차 내부 속에서 리오는 그들과 한데 섞여 자신있게 웃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되어. 증명받기 위해 영혼을 불태우던 그 남자는 이젠 거리에 흔한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남들과 거리를 걷고 쇼핑을 하며 요리도 한다. 쇼윈도에 비친 주변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일 따윈 이제 없다.
허나 모든것이 완전하진 않다. 자유란 늘 그렇듯 손에 쥘 듯하면 빠져나가는 것이라.
처음부터 모든걸 가질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얻은 것. 그것은 매우 값졌으며 그 이상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처음 날 끌어당긴 사람, 갈로. 그는 시작의 불꽃이라 칭해도 좋겠지. 바보같을 정도로 우직하고 똑바른 그는 책임지겠다는 그 말을 지켰다.
소방관련 시험은 처음엔 어려워 도움을 받았지. 내게 이런 자격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일에 가까워진다는 두근거림이 또 반. 상반되는 마음을 안고서 매일 밤 문제지와 씨름하던 날이 이젠 그립다. 그런건 괴로운 축에도 끼지 못했으니까.
내 앞길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을때가 되서야 주변을 보기 시작했다. 더는 만나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모두가 나를 반겨주었다. 아주 어릴적부터 봐온 지미, 베티같은 아이들이 자란 모습이나 아직 날 낯설어했던 헨지, 세실리, 호코나 같은 어른들도 이젠 편히 대한다. 내가 더는 예전의 직책이 아님에도, 혹은 그런 직책이 아니기에 반긴 것일까?
반가운 재회는 물론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고 이는 한번에 불태워 해결할 수 없으니. 그리 짧지않은 시간동안 내가 그들과 의논하여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우린 우리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기로. 과거의 핍박, 상처, 도취감, 해방감. 무엇이 됐든 그들은 우리와 하나였음을 모두 인정한다.
그로인해 어떤 결과를 불러들이게 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
서로의 안부와 안녕을 전한 뒤엔 미련없이 거리를 걸었다. 하염없이, 쭉. 그들이 보이지 않고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도착해서야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날은 아직 쌀쌀했고 시간은 아침이라 입김이 조금 나온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걸까?
나는 과연 옳은 길을 택한것일까.
두 손을 내밀어 본다. 허공에 반듯하게 뻗은 손가락 관절에 힘을 준다. 들려오는 소리도, 뜨거움도 더는 없다. 리오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 바닥을 질질 끌며 크락션을 울려대는 바이크, 당장이라도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릴것만 같은 기분.
그러자 거짓말같이 툭, 무언가 손에 닿는다. 흠칫하며 떼어내기 전에 꽉하고 양손을 감아온 큼직한 장갑. 그 재질을 나는 익히 만져보았다.
"갈로!"
"여어-"
나를 본 사람이 있길래 그대로 쫒아와봤다며 활기차게 웃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팔을 휘적였다. 어이,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몇번 신경질을 내도 애처럼 나를 질질 끌고가기에 슬슬 한방 먹여줄까 싶었으나...
"아침밥이나 먹자.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암."
"너, 또 피자얘길 꺼내면 버리고 갈거다."
"빵이랑은 다르니까! 빵이랑은!"
"넌 토스트에 원한이라도 있는거냐."
어느샌가 그럴 기분도 사라져 등이나 몇번 두드리곤 말았다. 아침메뉴에 대한 논쟁은 그 뒤로도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걸어온 길을 지나갈때까지.
"그러니까 매번 배웅은 필요 없데도."
"신입은 조용히 해."
"신분에 따른 차별대우는 법에 저촉된다만."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파바박, 거칠게 리오의 머리를 헤집은 갈로는 바이크에 올랐다. 자신이 응당 타야한다는 듯한 그 얼굴을 보면 열받다가도 금새 타협하고 만다. 두어번 머리를 정리한 리오는 마지못해 바이크에 올랐다. 이로써 그의 뒤에 탄게 몇번째더라. 슬슬 익숙해져가는 패턴이지만 매번 못마땅한 티를 내고 만다. 쓸데없이 정이 많기는.
갈로 티모시.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처음에 많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우롱하는 이들도 있었고 적극적으로 그의 행위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갈로는 그 모든걸 받아냈다. 정면에서 마주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질 않는다. 그것이 그의, 그리고 나의 방식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앞서가던 쪽에서 뒤쫒는 이로 변해있었다.
내겐 예전만큼의 명성과 힘이 없다. 그것은 즉 약함이고 쉽게 원망의 표적이 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각오한 일이다. 처음엔 그들도 혼란스러워하느라 신경쓰지 않았지만 거리가 안정화된 이후는 달랐다. 묻어뒀던 해묵은 감정. 그것이 내 머리위에서 폭발한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됐다. 처음은 사과, 바나나. 그뒤로 종이뭉치와 신발. 이후로는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묵직한 것이 하늘에서 쏟아내렸을때의 기분은 천재지변을 보는 느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아니 그래선 안되는 재해.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소리가 멀어져간다. 통증은 간간히 뼛속까지 울려왔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내가 만든 고통에서 도망치는건 얼마나 꼴사나울까? 내게는 도망칠 명분이 없다. 그건 처음 사과를 맞았을때 내뱉은 말과 일맥상통 했다.
"내가 저지른 죄는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법망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난 범죄자이자 테러리스트 였으니까. 정식 재판 뒤에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전에 사회적 응징이 더 빨리 찾아왔을뿐. 내가 모든걸 체념한 그때 내 앞에 선 것도 그 사내였다. 갈로 티모스. 산만한 덩치로 그야말로 산정상까지 울려퍼질만큼 소리를 지르며 등장했던가. 아아, 어쩜이리 경박하고 시끄러운 사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미칠즈음에 난 쓰게 웃고 말았다.
"이제 그만해 갈로."
"이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이야."
결국 그뒤로도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애초에 그리 많지도 않던 인파는 그사이 텅 비어버렸다. 신발은 돌려주지 못할테니 버리게 되려나. 아깝게 못쓰게 된 식자재에 탄식을 하고 있을때쯤 갈로는 한가지 선언했다. '이제 혼자 귀가 금지!' 라는 일방적 선언을.
부우웅ㅡ
잡념이 곧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꽉 닫히지 않은 재킷. 단정히 정리한 셔츠. 꼭 착용하는 검은 장갑. 어느하나 그날과 달라진 것은 없지만 보이게 된 풍경은 꽤 달랐다. 눈앞의 체온이 뜨거운 소방관이나 행동이 방정맞은 소방관. 꽤나 깐깐해 보이는 소방관... 그외에도 왁자지껄한 여러 소방관들. 그들 사이에 내가 있다. 새로운 내가 되어서.
"도착ㅡ!"
"수고했다 갈로."
"마치 네가 상관같은 말투구만."
"앞으론 인사도 필요없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난 선배니까. 단호하게 손을 흔들던 녀석은 등장했을때처럼 몇분은 더 부산스럽게 배웅을하고 갔다. 한번도 선배라고 불러온 적은 없다만 그 호칭이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가끔은 질려서 적당히 져주기도 했지만 그런건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며 화를 냈던가. 상대하기 귀찮은 녀석 같으니라고. 바나나같은 형상은 신기하게도 멀리서 더 눈에 띄는 모습이다. 그래선지 늘 그 모습이 없어질쯤에야 집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저 바보의 목소리가 또 집앞에 울리기 전에 제대로 저녁밥을 먹고 자야겠지. 냉장고에 반찬이 얼마나 남았더라. 익숙한 정적속에 홀로 차분히 요리를 하고 있으면 조금, 아주 약간은 저녁식사에 초대할걸 그랬나. 작은 후회가 남았다.
처음부터 홀로였던 사람은 없다. 혼자가 익숙하게 될 뿐. 내가 언제 어느순간부터 리오 포티아였는지는 아마 프로메어도 모를 것이다. 신생아 시절의 울음소릴 기억하는 사람이 없듯 나는 나의 탄생에 의문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저 기저에 새겨진 뿌리만을 확실히 움켜쥔다. 그것이 나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지탱해준 프로메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리오 포티아의 일부는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
그 위화감에, 허무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순 없다.
그럼에도 나는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나의 근원이 지워지고 난 뒤에 남은 잿더미는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나는 무엇을 나라고 생각해왔던 거지? 나는 누구고, 너는 누구지. 대답해줘. 들려줘. 뜨겁게 타올라줘. 제발. 혼자가 아니라고 해 줘. 아무렇게나 외치고 싶었던 그런 감정들은 여전히 내 안에 갇혀있다. 그걸 토하는 순간은 아마 의식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순간 뿐이겠지.
그래, 그런 고민을 하는 순간조차도 아직 내가 리오 포티아라는 증명이다. 나는 리오 포티아. 한때 프로메어를 품고 테러를 조장하고 종국엔 사람조차 불태우려한 리오 포티아다. ㅡ그야말로 불같이 타오르던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일렁이는 화마가 된 일순, 타인과 하나가 된 감각을 기억한다. 같은 감정, 똑같은 목소리로 나는 누군가와 함께했다. 그건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아마도 그 순간 리오 포티아는 변하고 만 거겠지. 프로메어가 휩쓸고간 그 자리에 새로운 불이 붙고 말았으니까. 그 불이 꺼지기 전까지 지켜볼 바보같은 녀석도 있고. 여전히 불꽃이고자 하는 나와 함께 불타오르는 이들도 여전하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바람을 몰고온다. 지금의 삶이 과도기에 놓여진 것처럼. 내 불은 그대로 누군가에게 옮겨가는 것이겠지. 그렇게 리오 포티아는 유지될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그을림을 남기고 그리움을 새긴다. 그런 삶 또한 괜찮지 않은가.
응, 분명 나쁘지 않을거야.
그것이 리오 포티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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