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양 아래에서 춤추고
네온 사인 하나가 꺼져 'OTEL' 로 읽히는 싸구려 모텔은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 한가운데 뜬금없이 세워져 있었다. 오래도록 방치돼 차창에 싯누런 모래가 낀 차들이 건물 앞에 줄과 열을 맞춰 마치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건물의 절반은 철골이 보일 정도로 무너져내린 채 바람이 불 때마다 낡은 철재 계단이 삐걱거리며 힘겹게 신음하는 살벌한 풍경은 당장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체스터는 정말로, 도저히, 죽어도 이곳에 단 5분조차 머물고 싶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잠자리를 투정할 만큼 그들의 사정이 좋진 못했다. 아오, 씨발... 이건 또 뭐야? 한쪽 벽면에 가득히 튄 핏자국을 애써 무시하며 카운터에서 키를 한 움큼 쥐고 돌아오자 베하드가 이미 열린 객실 문을 붙잡고서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열려 있던데? 젠장, 빨리 말했어야지! 괜한 짓 했잖아. 당신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운동하겠어?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지는 재수 없는 자식... 할 수만 있다면 앞장서는 동거인의 뒤통수에 한가득 욕을 박아넣고 싶다는 불순한 욕망을 애써 구겨 넣으며 그 역시 어둠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습관적으로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위태롭게 깜빡이더니 이내 창백한 빛 아래에 조촐하게 놓인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시기에도 전기가 들어오다니... 호화롭네."
체스터가 중얼거리자 베하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자다가 무너져내리지만 않는다면요.
그들은 꼭 부동산이라도 보러 온 사람들처럼 방이란 방은 모두 돌았으나 무너져내리지 않은 객실 중에서도 누울 만한 사정이 되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얼마 되지 않는 방 안에서조차 치명적인 문제-특히 불룩하게 솟아오른 침대 시트 속에서 반쯤 썩어 부풀어 오른 시체를 발견했을 때 체스터는 비명을 질렀다.-가 발생한 덕분에 선택지라고는 단 한 곳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평균 성인 남성의 신장을 훨씬 웃도는 남자 둘이 한 방을 써야 한다는 결과에 도달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체스터는 잠금장치마저 고장 난 음침한 모텔에서 홀로 잠드는 것이 웬 시커먼 남자를 끌어안고 자는 것보다 더 공포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과거의 자신에게 한 마디를 해줄 수 있다면 그는 당장 꽃밭이 한가득 펼쳐진 자신의 머리통을 잡아 뜯으며 속삭일 것이다. 이 새끼야, 겪어보질 않았으면 닥쳐...
무엇이 더 낫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막 씻고 나와, 한껏 촉촉해진 길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와 비좁은 방에서 어정쩡한 대치 상태로 놓여있음을 체감하는 순간 차라리 대차게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결국 성질머리를 참지 못한 체스터가 이게 최선이냐며 온갖 짜증을 내자 베하드는 친절하게 웃으며 그에게 바닥을 권유했다. 얼핏 바라본 검붉은 색의 도톰한 카펫이 본래는 맑은 체리 빛을 띄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에 체스터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빈틈없이 맞닿은 등 덕분에 그의 파트너가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것을 여실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체스터는 그제야 하염없이 밤이 길다던 누군가의 한탄을 이해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이는 빈약한 유리창, 규칙적인 숨소리, 서늘한 10월의 공기와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엇비슷한 체온. 등대에서 나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근 몇 년간 그는 누군가를 옆에 두고 잠을 자기는 커녕 일할 때를 제외하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빚쟁이-현재 그의 등 뒤에서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는- 뿐이었다. 함께 지내던 노인네의 장례를 치른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고 보니 그 노망난 영감이 죽은 것도 가을 즈음이었는데... 땅이 얼지 않아 비교적 쉽게 무덤을 팔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시트로 감싼 마른 몸이 너무나 가벼워서 그는 문득 어린 시절 숲에서 친구들과 종종 몸을 숨기던, 속이 빈 채로 죽어가던 늙은 물푸레나무를 떠올렸다.
*
완전히 약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전후의 사정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눈을 떴을 때 보이던 낮은 천장이 낯설었고, 사람이 오래 머물지 않은 방 특유의 먼지 냄새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나 싶더니 척 보아도 여든을 한참 넘긴 바싹 마른 고목을 닮은 노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반갑게 말했다.
"테오! 드디어 일어난 게냐."
눈 앞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해 머릿속을 뒤져보아도 떠오르는 이가 없었으나, 당돌하게 그쪽은 누구세요? 라고 묻기엔 당장 몸을 누일 곳 조차 없던 처량한 신세였던 그는 모른 척 반가움을 표하는 쪽을 택했다. 사실은 이 영감이 노망이 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인데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수십 년 전 행방불명된 젊은 아들의 이름 역시 테오였음을 알게 된 것은 이날로부터 한참이 지나, 체스터가 장식장 안에서 엎어진 채로 방치된 액자를 발견하고 난 뒤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정신을 차린 노인은 뻔뻔하게 남는 방 하나를 꿰차고 앉은 체스터를 쫓아내는 대신 자신의 업장에 끌고 가 온갖 잡다한 일을 맡겼다. 늙은 남자의 정체는 뉴저지 슬럼가 일대의 단 하나 뿐이자 의외로 멀쩡한 의사 면허까지 소지한 돌팔이였고 마침 비슷한 계열의 대학원을 다니다 도망쳐 나온 체스터가 할 일이라고는 솜이 꺼진 의자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인, 허름한 의원의 모든 일을 담당하게 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자리를 꿰찬 뻐꾸기 새끼의 인생극장은 피곤하다며 일찍 잠이 든 노인이 다시 눈을 뜨지 못하게 되면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체스터는 그때 처음으로 죽은 것의 체온이 제 상상보다 차갑지 않음을 알았다. 고집스럽게 눈을 감은 얼굴은 분명히 아는 이의 것이었는데도 피부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 나쁜 서늘함이 낯설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봤자 그는 고작 스물 셋이었다. 제대로 된 순서도 몰라 암매장에 가까운 장례를 치르고, 이불을 통째로 세탁기에 넣고 돌려도 묘한 죽음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이 죽은 이후로도 그의 일상은 크게 변함없이 반복적으로 흘러갔다. 스무 평 남짓한 의원이라는 이름의 허름한 건물 안에서 졸며 자리를 지키거나, 이따금씩 문을 잠가둔 채로 약에 절여져 있거나. 그날도 평소처럼 제조사가 적혀 있지 않은 수상한 약병을 환자의 손에 쥐여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싸다고 쳐줄 수 있을 만한 물건조차 없는 덕택에 굳이 잠금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활짝 열린 현관문을 본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리둥절해 있는 것도 잠시 안에서 튀어나온 검은 남자가 멱살을 잡았다. 발끝에 힘을 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몸뚱이가 쉽게 딸려나갔다. 불이 꺼져 어둑한 골목 안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샛노란 금안이 엇비슷한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제야 체스터는 자신을 잡아당긴 남자의 덩치를 체감했다.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그와 비슷한 체격, 아니 잡아당기는 힘을 보면 그보다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한쪽 눈을 감은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 돌팔이 노인네의 아들인가? 생각보다 좀 어린데요."
차가운 가죽 장갑이 볼을 감싸는가 싶더니 잘못 배달 온 물건의 번지수라도 확인하듯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로소 이 남자가 찾고 있는 것이 제가 아님을 눈치챈 체스터가 짜증스럽게 손을 쳐내며 눈을 흘겼다. 그 노인네를 왜 나한테서 찾아.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몇 걸음 비틀거리다 얇은 철제문에 부딪치자 큰 소리가 났다. 체스터는 간신히 창살 하나를 붙잡은 채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골이 울려서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어딜 잘못 맞은 건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입술이 터졌음은 굳이 손을 들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눈앞의 미친놈이 거칠게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정도 이상으로 꺾인 고개 탓에 자연스럽게 턱이 벌어졌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 어린 새끼가 한 대 처맞고도 부릴 만한 성질이 있나 궁금해서."
그래도 봐줘서 주먹으론 안 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특유의 느긋한 표정으로 반대쪽 손을 들어 흔들어주는 폼이 재수 없었다. 하지만 체스터의 쥐꼬리만 한 자존심은 고작 그런 원초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싸가지 없는 태도를 고수해 나가기에는 지나가는 바람에도 꺾일 정도로 연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기도 했다. 그는 웬만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해준 시간만큼은 꽉 채우고 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약 덕분에 반 토막이 난 수명을 제 손으로 쓸데없이 단축시키다 못해 코앞으로 끌어 당기고 싶진 않다는 소리다.
"그, 그쪽이 찾는 사람 진작 죽었어!"
"죽었다고?"
그래! 씨... 일주일도 더 지났거든. 저기 뒤에 있는 공원에 가져다 묻어뒀으니까 파헤쳐 가든가. 혹시나 불똥이 튈까 슬금슬금 말끝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잘못은 아니지. 자연사를 어떻게 막아? 그러나 이 바닥 놈들은 원체 상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언제든 네가 죽지 않게 잘 감시했어야지 않느냐-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그를 원인으로 몰아 길거리에 매달아둘지 모를 일이었다.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손에 힘이 좀 빠지는가 싶더니 가죽장갑이 여전히 물기가 남은 눈가를 쓸었다. 아, 그런 거였어? 미리 말을 해줬어야죠.
"괜히 서로 오해만 쌓이고."
말을 안 하긴 뭘 안해. 듣지도 않고 처팬 건 본인이면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체스터의 이성은 아직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덕에 날 선 불평이 끝끝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맞은 편의 남자는 갑작스럽게 전해 들은 부고 덕택에 일이 무척 곤란해진 모양이었다. 돌팔이 노인네가 돈이라도 빌린 건가? 수많은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도 잠시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아니라고, 씨발! 어디가 닮았는데!"
가죽장갑을 낀 손이 다시 얼굴 이곳저곳을 들춰보았다. 마치 그런 게 직업이라도 되는 듯, 상품 가치가 있는지, 흠집이 될 만한 건 없는지, 가격을 가늠해보기 위해 집요하게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눈빛이 달가울 리 없었다. 체스터가 미간을 확 찌푸리자 맞은 편의 남자가 다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린 양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뭐, 주워온 자식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 빚은 자식이 갚아야지."
"너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거 맞아?"
그러나 상대방은 체스터가 욕을 하든 화를 내든 하물며 칼춤을 추며 뛰어다니든 말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혼자만의 결론을 내린 듯 양손을 가볍게 맞부딪치더니 간단하게 해결돼서 좋은데- 라며 휘파람을 불고는 몸을 일으켰다. 체스터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을 끌고 힘겹게 일어나자 어느새 비좁은 골목의 초입까지 멀어진 검은 남자는 뒤를 돌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음 달에 또 봐요. 야, 이 미친 새끼야!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어-!!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해봐도 남자는 금세 작은 점처럼 멀어져 버리고 그저 사나운 목소리만이 텅 빈 골목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다.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쉰 것 같았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섞인 침을 뱉은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열린 엉망진창의 집안 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거울 앞에 서자 어느덧 욱신거리던 얼굴은 손만 닿아도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어있었다. 벌써 시퍼런 기가 올라오는 피부에 화보단 황당함이 앞섰다. 무식하게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체스터는 세면대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했다. 애초부터 홀몸으로 이곳까지 굴러들어온 것이니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테다. 그 남자는 대체 뭘 믿고 나를 내버려 두고 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왜인지 자꾸만 머릿속에 마주치기만 했다 하면 구박을 퍼붓던 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목에 걸려 있던 열쇠를 쥐자 바깥바람을 한껏 맞아 차가워진 쇠의 감촉이 손안을 파고들었다.
*
커튼을 닫아 어둑한 방 안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철제 난간에 빗방울이 부딪쳤다 튀어 오르는 소리가 무질서하게 들려오고 목뒤에 더운 숨이 규칙적으로 닿았다. 며칠간 차 안에서 몸을 구기며 잠든 덕분에 온갖 불평불만을 다 늘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뭔가 기분 나쁜 꿈을 꿨던 것 같긴 한데... 흐릿하게 잔상만 남은 수면의 찌꺼기는 금방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손을 들어 확인해보자 단단한 팔뚝이 잡혔다. 잠에 취한 머리가 일하기를 거부한 덕분에 그는 별 탈 없이 다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렇게 푹 잠든 게 얼마 만인지.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도 잠시, 귓가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나더니 몸이 뒤로 확 끌어당겨졌다. 목덜미에 이목구비의 조형이 느껴지는 살덩이가 직접적으로 맞닿자 뒤늦게 따뜻한 체온이 확 끼쳤다. 한 템포 늦게 상황을 파악한 체스터가 눈을 번쩍 떴다. 이, 이 새끼 잠버릇이 왜 이래? 제아무리 몸을 비틀어 은근슬쩍 품 안을 빠져나가려고 해도 그의 재수 없는 동거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스터는 애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여러 가지 선택지를 떠올려보았으나, 한편으로는 간만의 호사스러운 잠자리를 누리며 몇 시간은 더 뭉그적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저를 바디 필로우처럼 쓰고 있는 동거인을 굳이 발로 차서 깨운 뒤, 이상한 잠버릇을 확인시켜주고 서로 머쓱한 상태로 다시 침대에 눕는 선택지 역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슬슬 게으른 몸뚱이가 적당히 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구태여 더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그가 모른 척 잠이나 더 자자며 결론을 내리고 푹신한 베개에 다시 얼굴을 박고,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을 애써 밀어 올리는 것을 그만두자 순식간에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그때, 무척이나 불쾌하고 작은 소음이 들렸다. 잠귀가 그렇게 밝은 편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신경을 긁고 지나가며 선명하게 느껴지는 소리의 근원지를 체스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철제 난간에 빗방울이 아주 느리게 부딪쳤다 튀어 오르고, 멀리서 거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문득 지나오던 길에 모텔의 근방에서 조그마한 만(灣)을 보았던 거 같다.
똑똑-,
누군가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이가 굳이 제 이름을 뱉지 않아도 그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밤으로부터의 초대였다. 전파가 제대로 터지지 않아 끓어오르는 잡음 사이로 한 글자씩 들려오던 악의 가득한 울음이 생생했다.
"그가 온다. 부름에 답하라."
현관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속삭이는 것 같은 쇳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키자 허리께를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물기 어린 손은 마디 사이마다 반투명한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불현듯 맥이 튀어 오르고 젖은 천이 얼굴을 틀어막은 듯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마치 파도에 휩쓸려 뭍으로 떠밀려 나온 물고기처럼 침대에 엎어진 채로 헐떡거릴 뿐이었다.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눈앞이 어지러웠다. 바닷물에 흠뻑 젖어 짠 내가 올라오는 이불을 쥔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 아득해져 가는 시야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쓰러져 있는 것은 푸르스름한 어깨와 흉측하게 생긴 굵은 비늘이 잔뜩 올라온-
누군가 그를 거칠게 잡아 당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커튼 사이로 비추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따라 나풀거리는 먼지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식은땀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꽉 맞물린 눈꺼풀과 무감하게 내려앉은 입꼬리, 혈색 좋은 피부, 전체적으로 남자다움이 밴 얼굴이 코앞에서 그를 반겨주었다. 그제야 몸의 긴장을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쉰 체스터가 짜증스럽게 베개에 얼굴을 비빈다. 비는 언제 그친 건지 고요한 방 안은 주기적으로 잘못 끼워진 유리창이 덜컹이는 것이 전부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자꾸만 악에 받친 저주가 파고들었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죽는 순간까지 혼자일 거라고.
그는 몽롱한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랑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것은 진화하지 못한 인간에게나 남은 어리석음의 산물이라고 굳게 믿어왔으나 어째서인지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생판 모를 타인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그리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또 전화해… 문득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까지 전화선을 타고 넘어오던 가냘픈 숨을 생각한다. 귓가에 닿는 고른 숨이 살아있는 자의 체온을 머금고 있었다. 곧이어 시체처럼 창백한 손이 평소에는 장갑에 가려져 있을 살을 훑는다. 손끝에 걸리는 흉터를 힘을 주어 누르며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상흔이 기억하는 가장 처음의 살점이 손에 닿고, 그 찰나에는 제 옆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역시 한낱 인간임을 깨닫는다. 여린 살 밑으로 약하게 펄떡이는 맥박이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면 멎어버릴 것처럼 가녀렸다. 침대 끝자락에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어렴풋이 간판이 삐걱이는 소음과 함께 아주 먼 곳에서부터 파도 소리가 밀려왔다. 끝없는 수평선 너머로 빛무리를 흘려보내는,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빛을 반사해 새하얀 진줏빛으로 쪼개지는 포말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아래 잠든 밤이 여전히 동포가 될 이를 부르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모른 척 눈을 감는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오고, 태양 아래서는 감히 두려울 것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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