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키온 산의 수수께끼

Maybe I just___ by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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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앞이 온통 새하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폭설 속 길바닥에서 잠이라도 들었나 싶어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그저 볼에 종이가 붙은 것이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시야를 확보한 그가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뒤늦게 천장까지 쌓인 서류뭉치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어 보이는 엉망진창의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피터가 퇴근한 이후로도 조금만 더 수사 기록을 살펴본다는 것이 그대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도 나이를 먹긴 했군."

슬슬 체력이 부족한 것 같단 말이야. 여전히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빗소리만이 울리는 공간의 정적을 깼다. 불편한 자세로 잠든 탓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무의식중에 한숨을 내쉬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종이 뭉치가 크게 휘청였다. 어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오스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불현듯 제발 청소 좀 하라며 등짝을 풀스윙으로 내리치던 조수에게 이번 사건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달라며 빌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피터가 출근하기 전까지는 정리해둬야겠군. 사명감 이라기보단 생존 본능에 가까운 어떤 결심을 다지며 어깨를 가볍게 떤 그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정신 없이 서류를 줍던 와중 문득 눈에 띄는 문서가 있었다. 운 좋게도 수많은 종이의 탑과 쓰레기들 덕분에 그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오늘 자 팩스-그것도 꽤나 중요한-였다. 오, 이번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는 걸. 귓가에 팡파레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과 더불어 드디어 사무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에 발랄한 걸음걸이로 자리를 향해 돌아오던 참이었다. 우연히 커다란 창밖으로 검은 머리를 반쯤 넘긴 남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제야 그는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새벽이었다. 하필 깨어나도 이 시간이라니. 한 번 몸에 밴 습관은 쉬이 없어지지 않아 오스틴은 산장에서 내려온 이후로도 한동안 밤이 깊어지면 눈을 뜨고 창밖이 푸르스름할 시간대가 오기까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젠 그럴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초조해지는 마음에 그는 손에 든 서류 뭉치를 책상에 올려두고서는 입술을 씹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늙은 고양이와 따뜻한 벽난로가 켜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운전은 커녕 택시 한 대조차 잡기 어려울 테다. 안개가 짙은 탓에 흘러내린 빗물 자국만이 남은 새카만 창은 마치 거울처럼 밖을 내다보려는 사람의 전신만을 비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비가 내렸지.

 

 

*

 

 

밤을 넘어 새벽에 가까웠을 무렵 오스틴의 대학 동문이자 절친한 친구 페드로는 평소보다 배로는 흥분해 끝없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요컨대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오스틴의 이중인격을 굉장히 파격적인 방법으로 없애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내가 죽는 거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페드로는 엄청나게 격양된 얼굴로 무려 삿대질까지 하며 긍정했다.

"바로 그거야! 정확히는 죽었다 살아나는 것에 가깝지."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내 목을 부러뜨리고 싶다고 말해도 말하는 건 어떤가."

"뭐, 실제로 죽는 건 아니니까."

"...."

"너무 노려보진 마. 그래서 네가 할아버지의 다락방까지 뒤져가면서 구해온 게 있잖아."

그렇게 싫다던 할머니께 아양까지 부려가면서 말이야. 페드로가 실실 웃으며 덧붙이자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급격히 낯빛이 어두워진 오스틴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이자벨은 아직도 나를 7살짜리 애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네. 사용인들 앞에서 덩치 큰 남자가 어린 애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데. 비슷한 패턴의 농담 따먹기에 가까운 대화가 오가다 보면 헛소리에 가까웠던 계획도 어느새 나름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슬슬 거스를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고장 난 기계처럼 한 템포씩 늦어지는 답에 시계를 힐끔 쳐다본 페드로가 그의 손을 잡아 사무실 구석의 침대로 이끌었다. 흐릿해지는 시야가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막바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야. 손등을 덮은 타인의 살이 뜨거웠다. 페드로가 부드럽게 웃는 순간, 오스틴은 불현듯 이 계획의 가장 커다란 오류를 깨달았다. 아니야, 이런 방법으로는 안 돼. 그러나 안간힘을 써도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것을 단순한 기우로 여긴 친우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걱정 마, 친구.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있을 거야."

너는 그저 놀라지 말고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오스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목이 꺾인 채로 차갑게 식어 있는 페드로의 시체였다.

 

 

 

감히 예상치 못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인적이 드문 피키온 산의 별장을 콕 찝어 장소로 정한 것도 혹시나 그들 중 누군가 목숨을 잃을 경우 서로가 곤란해질 상황을 막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비극이라고 해서 어떻게 참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스틴이 물 밖으로 끌려 나온 것처럼 막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의 정체를 알면서도 처음으로 자신의 추리가 빗나가길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발치에 갈색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불안함이 전신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으나 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정신을 밀어내는 악의는 오스틴에게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마저 주지 않았다. 그는 최근 들어 페드로가 크게 염려할 정도로 깨어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지.‘ 며칠 전 농담처럼 친우에게 던진 말의 한꺼풀 밑에는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오스틴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다. 이것은 탐정으로서의 직감이었다. 그는 곧 외통수를 목전에 둔 장기말이었고, 피키온 별장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손에 쥐여진 선택지라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친우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내 모든 것을 정상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바닥에서 낡은 코트를 덮고 자는 낯선 얼굴은 예상보다 더 앳되어 보여, 그는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둥근 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아야 했다. 

 

밖으로 나와 마주한 시신들은 그의 바람보다 더 잔혹한 형태로 놓여 있었다. 경악과 공포에 차올라 굳어있는 표정이 낯설어 분명히 아는 얼굴임에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쓰라리기 시작한 손을 펼치자 뼈마디가 굵게 튀어나온 자리가 무언가에 눌린 듯 붉어져 있었다. 제대로 씻기지 않아 손톱 사이마다 말라 엉겨 붙은 붉은 덩어리와 팔뚝에 선명하게 남은 손톱자국. 새롭게 생겨난 자아라고는 하지만 결국 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몸뚱이는 자신의 것이다. 무엇보다 오스틴은 알고 있었다. 악의라는 것은 무에서 자라나지 않음을. 페드로, 너는 나를 너무 신뢰하고 있어. 그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해선 안되네. 그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핏기가 가신 허연 귓가에 대고 속삭였으나 눈을 까뒤집은 채로 쓰러져 있는 오랜 친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났다. 오스틴이 습관적으로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정확히 그가 예상한 시간에 맞춰 튀어나온 외부인은 복도의 기둥 뒤에 숨어 저를 관찰하고 있을 테다. 문득 오스틴은 잠이 덜 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받은 듯 밝은 녹색 눈동자 안에 담긴 선함을 떠올렸다. 어리숙해 보이는 이 어린 애는 자신의 가장 완벽한 조수가 되어줄 것이다. 단언컨대 그의 추리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

 

 

빗줄기의 굵기로 미루어보아 오늘도 집에 가기는 글렀음을 깨달은 오스틴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이라도 많이 자야겠군. 결코 작은 체구가 아님에도, 그는 마치 곡예사처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바로 무너져내릴 듯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룬 채 쌓인 물건들 사이를 느긋하게 빠져나갔다. 목을 조이던 넥타이 풀며 사무실에 딸린 조그만 방으로 들어서자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누워서 잠들만한 크기의 침대와 나무 협탁이 보였다. 나름 안락한 분위기를 내겠다는 의지로 걸어둔 유행 지난 태피스트리가 한껏 비뚤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어떻게 있든, 하물며 엎어져 있어도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 눈에 한 번 들자 균형을 맞춰두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오스틴이 짧게 혀를 차며 양쪽으로 나무대를 잡자 바스락거리는 얇은 것이 손에 닿았다. 

"종이?"

꺼내보니 손바닥보다 조금 작게 잘라둔 종잇조각으로, 대학 시절, 추리 소설이나 수수께끼를 워낙에 좋아하던 페드로와 강의가 지루할 때마다 오락 식으로 문제를 내고 답을 적어내던 쪽지였다. 하필 심리학을 가르치던 그레이엄 교수에게 들켜 한 학기 동안 얼마나 많은 비아냥거림을 들었는지. 그때 과제로 내간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대한 어설픈 대학생의 레포트는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한 자 한 자를 기억할 정도였다. 뜬금없는 곳에서 발견된 옛 추억에 의문보다는 본능적인 반가움이 더 컸다. 한쪽에만 꽂혀 있던 종이의 무게가 사라지자 다시금 균형을 찾은 태피스트리를 내버려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색이 바랜 쪽지를 넘기다 보면 필체가 다른 글씨가 돌아가며 답을 맞히고, 수수께끼를 내고, 터무니없는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강단에 서 있는 교수에 관한 역겨운 농담을 치는둥 온갖 얘기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이름의 주인들을 곱씹으며 그는 계속해서 쪽지를 읽어나갔다. 다른 종이들에 비해 비교적 깨끗한 가장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참다운 의미의 '존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의식이기에 인간에게는 거룩하고 무거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거역한 인간은 사라져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고대 로마에서는...' 필체를 보아하니 페드로가 쓴 것이 틀림 없었다. 중간에 급하게 끊겨 잉크 자국이 길게 번진 것이 이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록 만들다 만 문제였지만 오스틴은 그 답을 쉽게 알았다.

"간단하군. <이름>이잖아?"

갓 대학에 들어온 귀여운 풋내기들이 주고받던 쪽지였던 만큼 문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이 대다수였다. 내심 무언갈 기대했던 건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어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운 오스틴이 눈을 감았다. 끈적한 사탕이라도 삼킨 것처럼 입 안이 찝찝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마치 무언갈 놓치고 넘어간 듯한.......

 

 


 

"페드로라고 했나? 이름이 굉장히 특이하군."

"그런 소릴 자주 들어. 내 어머니가 포르투갈인이거든."

"오?"

"사실은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네. 오히려 흔하지."

"영국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본 건 자네가 처음인데."

"아, 그게 말이야..."

영미권식으로 부르면 피터라고 했던가. 피터 브라운이요. 됐죠? 왜 자꾸 물어봐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오스틴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했다. 페드로는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의 친우는 죽음을 예견하고 그에게 또 다른 자신을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방금 막 탄생시킨 조악한 가설을 뒷받침해줄 증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지만 오스틴은 왜인지 이것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몸을 둥글게 말고 숨이 찰 때까지 한참을 더 웃어 재꼈다. 혹사당한 허파가 마침내 한계를 고하자 눈가를 쓸어 닦으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낡은 쪽지를 날인이라도 찍 듯 거칠게 협탁 위에 올려둔다. 쿵- 소리와 동시에 충격에 허술하게 꿰맞춰진 서랍이 튀어나왔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파이프를 입에 문 채로 반쯤 열린 서랍장 안에 손을 넣고 휘젓자,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를 성냥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페드로, 나는 가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오스틴은 문득 생기 있던 갈색 눈 안에 담긴 선함을 떠올렸다. 마냥 유약해 보이고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 나가곤 하지.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오스틴에게 있어 결코 풀 수 없는 난제가 되었다. 어느새 조그마하게 트인 창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바깥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죄, 죄송합니다-! 하는 짤막한 사과가 따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제 조수가 담배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것도 같았다. 탐정은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당긴 채로 불도 붙이지 않은 파이프를 다시금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뒤,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이 열리고 작은 소란이 들이닥친다. 탐정님! 사무실 꼴이 이게 뭐예요!! 그의 새로운 난제를 맞이하러 갈 시간이었다. 

 

 *

 “페드로, 테세우스의 배를 알고 있겠지.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고,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논제 말이야. 나는 그와 비슷하면서도 역전된 상황에 놓여 있네. 내 겉모습은 똑같더라도, 더 이상 그 안에 든 것이 내가 아니게 된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인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영혼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규칙적으로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치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촛불이 흔들리면서 맞은편에 앉은 친우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글쎄…. 과학적으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 종이 뭉치를 들고 알 수 없는 수식을 빠르게 써 내려가던 페드로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렇게 절망스러운 일은 아니겠군. 그 역시 나라면. 자아의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완전히 살아나는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오스틴이 빙긋 웃으며 입에 파이프를 물었다. 거 참, 위로가 되네. 누구 덕에 이 시간까지 고생 하고 있는데…. 그가 헛웃음을 치며 시비조로 비아냥거렸다.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불그스름한 그림자에 묻혀 속 편한 얼굴로 책장에 기대 앉은 친우가 무척이나 얄미웠으나, 페드로는 그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조적인 농담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짧은 적막 속에서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페드로였다. 그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자아가 있기에 선 의지가 실현되는 것처럼, 반대로 네게 있는 의지가 네 존재를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해. 그것이 들어있지 않은 채 남은 껍데기는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는 오스틴 하트가 아니지.”

“오? 그런 단호한 말도 할 줄 알았다니.” 오스틴이 재밌다는 듯 짙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페드로가 뜸을 들이듯 망설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죽지 말아.”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가 일렁이는 촛불에 맞춰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치고, 먼저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오스틴이다. “하지만 나는 여태 자네에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데.“ 가라앉은 목소리가 따라붙는 것은 덤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내기나 할까.”

대학 시절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둘만의 승부에서만큼은 늘 패배를 전전하던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는 체스판 위에 오스틴을 올리고서야, 음울한 승리의 보상을 거머쥐고는 보란 듯이 친우의 앞에 쓰러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탐정은 관성처럼 늘 이길 테고, 그렇기 때문에 내게 진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스틴에게 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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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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