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하지만 여보, 당신을 사랑하는 건...

Maybe I just___ by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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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앵글로스.

 



 

                                                                                                       사랑을 담아,  _________________

 




이것이 벌써 몇 번째던가. 에이든 앵글로스는 짜증스럽게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정도를 모르는 익명의 장난 편지는 기억에서 잊힐 즈음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그가 이 편지를 받았던 때는 유독 해가 길고 후덥지근하던 여름날이었다. 새하얀 가운을 입어도 팔에 닿는 셔츠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놓은 병원 내부에서 종일 환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뭇 지루했다. 똑같은 얘기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는 여자에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열기로 인해 주차된 하얀 캐딜락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의 말꼬리가 점차 늘어지자 그가 무신경하게 답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세요.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건조하고 텁텁한 공기가 얼굴을 덮쳐 숨통을 확 조여오자 그가 눈가를 찡그렸다. 맞은 편의 대학 건물에서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코린트식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원통형 건물의 내부를 오가던 시절도 있었다. 10년도 넘은 케케묵은 기억을 뒤적이는 와중에도, 방 안에서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사랑, 존엄과 같은 상상적인 가치들은 왜 이렇게나 연약할까요··· . 제가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걸까요··· . 에이든이 자리로 돌아와 처방전에 알아보지 못할 글씨를 거침없이 써 내려가며 말했다. 부인, 이번 약은 함부로 끊으면 안 됩니다. 담당의인 저도 곤란해지니까요···· . 

환자를 내보낸 다음 서류철을 정리하던 그는 이윽고 특이한 편지를 한 장 발견했다. 수신인에 적힌 필체는 단정했으나 낯설었고, 내용과 발신인은 텅 비어있는. 평소라면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으로 치부하고 버릴 수도 있었으나, 왜인지 이번만큼은 그래선 안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참이나 얇은 종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는 결국 이상한 편지를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장난 편지는 다소 뜬금없는 시기에 그에게 날아오곤 했다. 올해는 유독 혹한기가 예상된다며 떠들썩하더니 결국 지난 밤 노숙자가 몇 명 얼어 죽었다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던 어느 겨울, 또는 잠이 들기 어렵던 지난 3월, 다시 무더운 7월...

  그리고 오늘, 9월 22일.

에이든 역시 이 기묘한 편지의 규칙성을 파악해보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날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9월 22일인 오늘을 제외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이자, 

리암의 기일이었다.





*



리암 앵글로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의 장례는 소규모로 빠르게 치러졌고 마침 때 아닌 가을비가 쏟아져 내렸다는 것 뿐이다.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한 메릴슨은 눈물을 훔쳤고, 프린스턴은 난 사실 언젠가 작은 형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으며, 에이든은 검은 우산을 들고 서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도련님이 목을 맸다더라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는 며칠도 가지 않아 수그러들었다. 사용인들 역시 실질적인 소유주가 죽었으니 장남인 에이든 앵글로스가 이 고리타분하고 음산한 저택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취향이 독특한 대부호에게 땅이 팔렸다더라는 둥, 차남을 대신해 이젠 그가 머무를 것이다 와 같은 수많은 추측과 뜬소문은, 에이든이 저택은 계속해서 사유지로 남겨두겠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 낡은 저택을 내놓아보았자 팔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용인들은 모두 정리하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맥없이 끝이 났다. 메릴슨과 테일러는 종종 찾아뵙겠다는 에이든의 당부 끝에 낡은 기차역에서 오래도록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떠나갔다. 바커스 저택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날 밤, 텅 빈 응접실에 남은 단 두 명의 앵글로스는 서로 별다른 감회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고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은하게 켜진 주황색 조명 아래 서 있던 막냇동생은 어땠나. 여전히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채로 천진하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의 기억보다도 훨씬 더 자라 마주하는 시선의 높이가 엇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째서인지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물에 풀어진 잉크처럼 흐려지기만 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한 듯 귓가에 익숙한 대화가 스친다. 프린스턴, 너는 이제 어떡할 거지? 내일 보스턴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고 보니 대학에 입학했다고 했었나? 큰 형은 관심도 없으면서 아는 척은 대체 왜 하는 거야? 난 몇 년 전에 졸업까지 마쳤다고! 그 정도면 비슷한 거 아닌가. 어찌 됐든 이제 저택은 비었으니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엔 가끔 워싱턴에 들르도록 해. 싫어-, 어차피 가봤자 종일 지루한 소리만 들을 텐데····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달려와 안기는 아내를 끌어안고 한 바퀴를 돌고서야 놓아준 뒤, 해바라기와 개망초가 어우러진 샛노란 꽃다발을 그녀의 품에 안겨준다.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손수 채워주고 나면 답지 않게 인상을 풀고 웃는 모습이 영 어색하다.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왜인지 모르는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만, 아내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아끈다. 가정부와 함께 직접 저녁을 차렸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성대한 저녁을 즐긴 다음, 날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가 말한다. 다시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아. 그러면 아내는 못내 서운한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도요?"

에이든이 무심한 듯한 얼굴로 재킷을 걸치며 답했다. 그러게, 매번 이렇게 되는군. 방금 전까지 화목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서늘한 적막만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가정부가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치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아내는 어깨에 두른 숄을 한 번 더 끌어올리더니 배웅을 하겠다며 꽃다발을 든 채로 그를 따라 현관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든..."

"왜?"



"...여름휴가를 가자고 말했던 거, 기억 나요?"

그가 현관문에 손을 올린 순간, 아내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냐고 묻는 듯한 에이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채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실은 엄청 기대했어요."

왜냐면 우린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까, 그 이후로도 당신은 늘 바빠서 이번엔 조금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생각해보니 몇 달 전,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아내에게 여름휴가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비록 앞당겨진 세미나 덕분에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아내는 에이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하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현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뒷모습 뿐이다. 미리 원피스를 샀었는데, 일부러 당신이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골랐거든요. 그녀의 어조는 노기를 띄지도, 서운함이 배어있지도 않았다. 단지 아주 지친 사람과 같아서, 체념이 담긴 작고 가냘픈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신도 알잖아."

"그래요... 당신 탓이 아니죠."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여보, 당신을 사랑하는 건 왜 이렇게 고단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작은 비밀을 그녀의 옷장 안에 숨겨놓았다. 매일 아침 출근하며 옷장을 열어보는 몇 달 동안 무심한 남편이 뒤늦게 단 한 번이라도 알아채 주길 바라며, 가격표가 그대로 붙은 원피스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는 문득 하늘하늘하고 바람이 불면 형태가 뭉개져 버릴 얇은 원피스를 상상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려 바닥에 흘러내릴 것 같은 연약한 아내를 본다. 에이든은 가끔 그녀의 순하게 쳐진 눈을 오래도록 마주하다 보면 우울감이 깊게 자리 잡은 탁한 눈동자의 누군가가 떠오를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먼저 시선을 내리 깐 그가 못 이기듯 사과하자 가느다란 팔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실은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는 모른 척 허리를 더듬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귓가에 더운 숨이 고르게 닿고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면 기다렸다는 듯 눅눅하고 끈적한 그리움이 물 밀 듯 그를 집어삼킨다. 단단하게 어깨를 감싸 쥐던 커다란 손, 볼을 간지럽히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마주 닿은 셔츠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곤란한 듯 에이든, 하며 부르던 목소리. 늘 이맘때가 되면 에이든이 그토록 싫어했던 남자는 무덤에서 되돌아와 마음을 뒤흔들고, 정신을 한바탕 헤집어 놓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곤 하는 것이다. 다시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그가 바라던 얼굴이 아니다. 

노골적인 실망감을 숨기지 못함과 동시에 명치에서부터 본능적인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돌아와... 에이든... 나를 봐야지...  에이든, 당신 괜찮아요? 걱정이 담긴 아내와 낯선 목소리가 겹쳐 먹먹하게 들렸다. 눈앞이 핑 도는 듯한 기분에 그는 도망치듯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몰려오는 헛구역질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길거리에서 벽을 짚고 한참을 구부정하게 서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은 온통 축축하고 얼굴은 식은땀 범벅이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매달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빌어먹을 리암! 그는 여전히 동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매년 아내의 생일이 되면 병원 일을 핑계로 어디론가 도망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정신을 짓눌렀다. 기억의 한 구석에 의도적으로 박아놓았던 장신의 남자가 되돌아와 나를 잊었냐며 현관을 두드리고, 두려움에 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햇빛이 들지 않는 우울한 저택의 복도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진실은, 변명할 여지가 없을 만큼 에이든이 기억 속의 풍경에 지독한 향수를 느끼고 있음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매 해 가을이 다가오면 더욱 분주하게 일을 하고, 피곤함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일련의 자학과도 같은 행위를 그의 아내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배려심 많고 다정한 그녀의 성격상 언젠가 자신의 입으로 이유를 털어놓는 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에이든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입을 다물고 무신경하게 굴었다. 불운하게도 그는 태어나길 그런 종이었다. 다정한 사람들의 얄팍한 껍질을 파고들어 애정을 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겉돌고 밀쳐내 한없이 외롭게 만드는. 하지만 그를 사랑했던 이들 역시 영영 알지 못한 게 있었다. 그렇게 궁금해 마지않던,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담장 너머로 보고자 했던 것은 그저 공허한 폐허였다. 그가 평생을 걸쳐 견고하게 쌓아 올린 완벽한 외벽을 무너뜨리면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바싹 마른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거대한 검은 저택 뿐이라는 것을. 유전적 형질은 쉽게 바뀌지 않고 그녀의 남편은 생각 이상으로 죽은 제 형제와 선대를 닮았기에 몸 안에서 뜨거운 피와 함께 흐르는 것은 불우한 광기다.

어느새 거리에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그저 한적한 도로를 계속해서 걸었다. 당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겐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이 없었고, 점차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밤공기는 안 그래도 비참한 기분을 바닥까지 떨어뜨렸다. 문득 주머니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언제 접어서 쑤셔 넣어둔 것인지 모를, 오늘 자로 그에게 도착한 빈 편지였다. 구겨진 모서리가 어쩐지 신경 쓰여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꾹 밀어 올리던 그는 문득 편지를 뒤집어보았다. 뒷면에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21698 Court St, Petersburg, VA 23803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주택가를 벗어나 어두운 숲길을 향하고 있었다. 문득 에이든은 자신이 옳게 나아가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을 지나가 보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에이든이 마주한 것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무성한 잔디 한가운데에 성인 남자 키보다 조금 높이 솟아있는 붉은 벽돌 기둥이었다. 숲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조형물이라니,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앞에 달린 검은 철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에트릭 묘지. 그러고 보니 리암을 어디에 묻었던가. 아니, 동생의 시신을 보기는 했던가. 애초에 리암이 정말로 죽은 건 맞나? 혹시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 고삐가 풀린 편집증적 사고는 비좁은 머릿속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던 불안과 의심이 그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일순 안개라도 낀 것처럼 기억이 흐려지고 맥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그저 지금, 당장, 자신의 눈으로 제 동생의 무덤을 파헤쳐 관 안을 확인해야 했다. 저 안에 있어. 저택에서부터 그를 지겹도록 따라다닌 환청이 말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이미 녹아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이성 역시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이제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약을 먹고 자야 해, 에이든. 

못이라도 박힌 듯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묘지 안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마침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묘한 긴장감과 더불어 어떤 사명감이 정신을 지배했다. 반드시 이곳에서 리암의 무덤을 찾아내리라. 







넓은 묘지 안은 불규칙하게 나열된 석판이 즐비했다. 바람 소리 한 점 들려오지 않는 땅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문득 이곳이 하나의 거대한 무덤 같다고 생각했다. 뒤늦게서야 오싹한 기분이 든 에이든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워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개중에 리암의 무덤이 없음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묘지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갈수록 도시에서부터 희미하게 빛나던 불빛마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완연한 어둠에 긴장한 몸은 뻣뻣하게 굳고, 비 오듯이 땀이 흘렀다.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울 즈음 에이든은 완전히 무덤들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사방에 각양각색의 석판에 세워져 있고 그 밑으로 누군가의 관이 촘촘하게 묻혀있는 것이 꼭 무덤 옆을 지나가는 살아있는 사람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당장이라도 이 묘지 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애석하게도 그가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누군가 발목을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1피트 정도 되는 깊이의 얕은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고요한 공간에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희뿌연 흙먼지가 올랐다. 엉망이 되었을 차림새나 얼얼한 손바닥을 걱정하는 건 뒷전이었다. 누군가 지긋이 뒤통수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슴팍에 닿는 축축하고 검은 흙이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무덤처럼 느껴졌다. 귓가에서 천진한 웃음소리가 윙윙거리며 그를 조롱했다. 에이든은 문득 이대로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흙무더기가 떨어지고 밀랍을 바른지 얼마 되지 않아 광칠의 시큼한 냄새가 남은 딱딱한 관 안에서 서서히 숨이 막혀오는 상상은 어쩌면 바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 천천히 옆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과 닿자 탁, 하고 맥없는 소리를 내는 물체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무릎을 세웠으나 소리는 이미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후였다. 급히 몸을 일으켜 오른발로 땅을 딛자 알싸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사라진 쪽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임스 에반, 아브라함 카이퍼, 제인 디아즈... 어슴푸레한 새벽, 낯선 이름의 향연 속에서 그는 한 단어만을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지금에 와서 확신할 수 있는, 내지는 그가 영원히 잊지 않을 유일한 이름을. 



리암 앵글로스.



그리고 묘비명 하나 적히지 않은 초라한 석판이 홀로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그가 리암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겼었나? 하지만 이미 고장 난 머리로는 어떤 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던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더니 손으로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을 쓸어내렸다. 새벽 내 이슬을 맞은 풀이 살갗이 까진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쓰라렸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밀려 올라오는 듯하더니 원망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리암, 감히 네가 나에게 그럴 순 없어. 분명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가 떠나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라고는 억누른 신음에 가까운 누군가의 이름 뿐이었다. 기어코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잔디를 헤집어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못해 멈췄다. 마침내 그는 허리를 굽혀 식물의 뿌리가 드러난 차가운 흙에 이마를 마주 댔다. 곧이어 둥글게 말린 등허리가 곧게 펴지나 싶더니 상체를 조금 앞으로 빼 십자가 형태로 깎인 차가운 묘비에 입을 맞춘다. 매일 밤 잠이 들기 전 그의 형제가 자신에게 해주었듯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리암은 죽었다, 완전히.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했던 것들은 늘 그에게 상처 입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 버림을. 태어나길 다정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른 채 누군가 말라 죽어가도 무신경하게 지나쳐가고 마는, 그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면서도 제 기원이 되는 아버지와 똑같은 종인 것이다. 열을 맞춰 세워진 빼곡한 묘비들 사이로 붉은 태양이 오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흙투성이가 된 정장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큰거리는 발목은 얼핏 보아도 심하게 부어 있었다. 그는 동생의 무덤 앞에서 한참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도, 후회의 말들을 쏟아내지도 않은 채. 그리고 깨닫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고향을 찾아 헤매며 짐승처럼 검은 숲을 뛰어다닐 테다.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귓가에 울리는 형제의 목소리를 듣고, 뼛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문득 에이든은 더는 편지가 오지 않으리라고 직감했다. 그것이 질 나쁜 환자의 장난인지, 그리운 저택의 누군가가 보낸 것인지, 차가운 땅에 누워 있는 리암이 보낸 것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손안에서 슬며시 쥐어볼 뿐이었다. 뼈마디가 튀어나온 길쭉한 손가락을 수그리자 얇은 종이는 속절없이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진다. 사랑, 존엄과 같은 상상적인 가치들은 왜 이렇게나 연약한지... 그가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는지... 

완전히 동이 트고 나면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돌아가는 길에는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피붙이를 떠올린다. 햇살을 담은 금발과 한없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그다음엔 마음이 여려 끝끝내 자신을 떠나지 못할 아내를, 메릴슨과 테일러를, 죽은 어머니를, 

그리고 리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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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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