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인

백세 (1)

민화인X비소 NO.16AU

- 008 rec.

인지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바라봄으로써 인지된다.

공간, 소리, 감각. 인지하는 만큼이 당신의 세계다.

당신은 인지 밖의 세상을 알 수 없다.

그것의 존재조차 발상할 수 없다.

인지의 밖이란 그런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이란 그런 것이다.


 - 009 rec.

인류는 우주 이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인지의 한계 때문이다. 

때문에 세상에는 우주 이상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지의 영역에 대해 한단계 더 파고들어 보자.

우리는 태어나 세상을 바라본다.

마을을 알고 도시를 본다.

도시를 보고 지역을 바라보며 나라를 알고.

세계를 안다.

학습 이전까지 당신은 당신이 인지한 세상만이 유일하다 생각하고,

그 이상은 사고 할 수 없다.

 - 010 rec.

그럼 정말 세상은 우주가 최대 단위일까?

당신은 인지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당신이 듣고 보고 배운 모든 것을 근거로 하여 가설을 내는 것 또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인지다.

인류는 수많은 가설과 가설을 입증하려는 노력으로 세상을 넓혔다.

이는 위대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린 아이도 가능한 아주 간단한 일이다.

당신은 이따금 퍼지는 미스터리 현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기이한 생명체들에 대한 흔적은?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물리적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가?

나는 질문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떤 바보 같은 생각이더라도 상상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은 이제 이에 대해 가설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당신이 인지의 영역을 넓히려 인지 외의 것을 생각하는 순간. 

이 또한 인지에 포함된다.

축하한다.

위 과정을 통해 지금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넓혔다.

당신은 이제 탐구를 통해 한가지의 미지에 대해 알아 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 011 rec.

인지로 세상을 넓힐 수 있다면, 반대로 좁힐 수도 있다 생각하는가?

나는 가능하다 생각한다.

간단한 이론이다.

인지로 인지를 덮으면 된다.

복잡한가?

그럼 더 간단한 이론을 제시해주겠다.

인지를 비인지로 바꾸면 된다.

내가 당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순간,

당신의 사고에서 사라진 순간,

나는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당신이 나를 다시 인지한다면,

나는 다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한가지 가정을 주겠다.

만약 당신이 세상 모든 인지에서 벗어났다고 해보자.

당신은 이곳에 서 있지만 이 순간부터 자신을 인지할 수 없으며 타인 또한 당신을 인지할 수 없다.

그럼 이때도 당신은 존재할 수 있다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존재하는가?


 - 012 rec.

이것이 의미 없는 질문 같다 느껴지면 그대로 넘어가도 좋다.

인지는 내 호기심으로 탐구 하고 있을 뿐이니.

다만 이것을 보고 인지 밖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설이 있다면,

꼭 내게 전달해주길 바란다.

당신은 존재하는가?


**

달칵.

돌아가던 기록 테이프가 멈춘다.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한숨을 뱉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인지.

이것은 그가 이 땅으로 불려오면서 탐구하게 된 지식이다.

어느 외딴곳에서 혼자 존재하던 그는 이 땅에 불려오며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라는 존재에겐 남다른 특이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생명의 인지에 관여 받지 않는다.

모든 인지에 자유로우며, 모든 인지에 어울릴 수 없다.

생명이지만 다른 생명과 섞일 수 없었다.

인지에 자유롭기에 동족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동족이 존재한다 해도 이들은 서로를 인지할 수 없기에 영원히 만날 수 없다.

홀로 인지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 조차 긴 시간이 필요했다.

타 생명의 인지에 관여하는 것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었으나 모든 인지에 간섭해야만 비로소 그들에게 존재할 수 있었기에 많은 수고가 필요했다.

그렇게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탐구하며 살아간 지 수십 년.

그는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상대를 마주했다.

정확히는 인지에 간섭 중인 자신을 정확한 형태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게 어딘가?

그는 말동무를 찾았다 생각했다.

상대는 딱히 그렇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다지 제 상관이 아니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일어나 하나의 파일을 들곤 그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들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공감대를 만들 수 있게 건드려보았다.

음. 그리 긍정적인 결과는 얻지 못했다.

좋은 방법이 아니었나?

그는 그리 생각했다.

그는 상대와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른다.

애초에 타인과 대화를 자주 즐기지도 않았다.

늘 친근의 표시가 불쾌감으로 끝을 맺었다.

그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작은 장난을 생각해보았다.

"■_,;□."

조금 색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뭐… 뭐야…? 방금? 네가 한 거야? 방금…"

상대에게 약한 패닉을 주었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귀를 틀어막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매우 기분 나쁜 미소였다.

"아-. 이건 이해 밖인가 봅니다."

미소를 짓던 그는 작게 웃음 짓다가 나른하게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걸 인지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압니까? 내가 방금 당신과 가까워지기 위해 성의를 표했다는 겁니다."

그의 말에 상대는 어이없다는 듯 성을 냈다.

"허?! 이게 뭐라는 거야? 성의가 아니라 살의겠지! 방금 뇌가 흘러내리는 줄 알았다고!"

"설마요. 내가 소중한 나의 말 친구를 해치겠습니까."

상대가 소름 끼친다는 듯 노려본다.

그는 그의 얇고 긴 손가락을 몇 번 굴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체와 상호작용이 있음에도 무게감이 하나 없는 동작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연구 일정이 있어서요."

"네가 여기서 뭘 연구하는데? 그냥 끼어들어 있던 거 아녔어?"

"오… 그럴 리가. 전 꽤 유능한 인재라서 말이죠."

그는 이전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린다.

"아, 참. 제가 방금 말했던 거요. 그건 당신의 이름입니다."

"안 물어봤거든? 얼른 꺼져!"

성내는 상대의 모습에 그는 괜스레 더 눈웃음을 지어줬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비소."

홀로 남겨진 비소는 테이블 위의 자신의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늘어진 뿔에 건조한 소리를 내는 발굽. 그리고 새하얗다 못해 빛을 반사해 눈을 절로 찌푸리게 하는 전신.

무엇보다 눈 마주칠 때마다 길게 눈웃음 짓는 미소와 붉은 분홍빛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생긴 것도 그렇지만 역시 불쾌함 가득한 존재라 생각했다.

비소는 파일 사이에 섞인 섞인 몇 가지 물건들로 시선을 옮겼다.

"이건…. 그 녀석이 두고 간 건가?"

여러 연구 일지와 경과 서류들 사이에 녹음 기록이 있었다.

"...이런 구식 녹음 테이프라니. …이런 게 취향인가?"

연식 있어 보이는 플레이어 사이로 꽂혀있는 녹음 파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록. 003'

특별한 이름은 아니었다.

다르게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닌. 깔끔하게 번호만 적힌 기록이었다.

오래된 테이프의 버튼을 누르니 기계가 돌아가며 나쁜 음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 003 rec.

…하. 이건 의미 없는 짓입니다.


몇 번의 간섭을 통해 이 녹음기에 접근하게 되었는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이곳의 생명들은 아직 날 인지하지 못합니다.

아니, 앞으로도 인지 할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올 것 같습니까?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을 남깁니다.

당신들이 날 데려왔으니, 돌려보내는 법도 당신들이 알 겁니다.


이걸 듣고.


날 돌려보내.


.

.

미지를 볼 수 조차 없으면서 미지를 탐구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

짧은 녹음 기록이 끝났다.

녹음테잎 너머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며, 방금 전 봤던 그와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뭐랄까.

"혼란스러워 보이네."

무척 날 서 있고, 지쳐 보이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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