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혜성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어.

***

“누구 있느냐?”

낯선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명하십시오.”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가 답을 했다.

“불을 올려라. 어둡구나.”

“예.”

이런 말투를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혜성은 스스로 원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차가운 말투에도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은 혜성의 말을 듣고 방 안을 밝혀 주었다.

점점 걷어지는 어둠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칠흑빛의 긴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검은 눈동자. 그 왼편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인상적인, 곱상한 외모의 사내였다.

곱상한 외모의 사내는 천마의 호법이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직급의 우호법이라는 자리를 꿰고있는 유능한 인재.

그는 늘 천마의 뒤만을 따라 곁을 지켰다.

천마의 몸에 갇혀있는 강혜성은 천마, 그러니까 사택청화람이 그의 존재를 쓸모없고 성가신 존재라 여기고 있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택청화람은 이 불편감을 당사자에게 요만큼도 숨기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마교의 호법이란 호위의 호 자도 포함되지만 기본적으로 교 내의 체계 질서를 감시하고 유지하는 조직이다. 이는 천마 또한 예외가 되지 않으며, 강자존이 지배하는 패도적인 천마신교가 지금껏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핵심이기도 하다.

사택청화람은 이런 부분에서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우호법을 불편해하고 있는 것일 터. 이는 자신이 교의 질서를 지키지 않다는 걸 티내는 일일 뿐이라 강혜성은 생각했다.

더해, 사람에게 노골적인 감정털이는 옳지 않다 생각하는 가치관에 강혜성은 사택청화람의 감정를 최대한 억누르기로 했다. 호법 본인은 갑자기 눈에 띄게 온건해진 천마의 태도에 오히려 더 경계하는 모양새였으나 강혜성은 오히려 이게 더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

“선발조를 내보내라. 짐 또한 나서겠니라.”

천마의 직접 움직이겠다는 선포에 교도들이 움츠린다. 그의 악질적인 패도적 성향을 알고 앞날이 그려진 것일테다.

강혜성은 그저 이 전장에서 죽게 될 자신의 운명을 뒤집기 위해 발버둥칠 뿐이었지만 말이다.

청화람의 호법이 뒤를 따라 나선다.

강혜성은 멈춰서 호법을 바라보았다.

“우호법, 그댄 오지 않아도 된다.”

“신, 지존의 안위를 수호하는 것이 직무입니다. 사명에 대해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호법은 강혜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법 건방진 말을 지껄이지 않느냐. 어차피 곧 죽을 녀석, 내 친히….’

‘닥쳐 화람아.’

강혜성은 눈앞의 호법에게 말했다. 물론 청화람 덕에 그의 의도와는 조금 비뚤어진 말이 나갔다.

“네놈의 경지로 건방진 소리를 잘도 뱉는구나. 짐에게 방해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받아들여주마. 그전에 이미 휘말려 명을 다 한 뒤일테지만.”

‘새우등 터질까 안전하게 기다려달란 말이 이딴식으로 나가도 되는거임? 화람아 장난해?’

강혜성이 속으로 이마를 몇 번이고 내리치는 발언이었다.

“…….”

둘 사이의 잠시간의 고요가 지나간다.

“죽지말거라.”

부드럽고 어딘가 애틋한 한마디였다.

“…?”

강혜성은 한마디를 내어주고 뒤돌아 나갔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자상한 말투에 벙찐 얼굴로 고개를 든 채 나간 천마의 뒤를 바라보는 우호법이었다.

***

전장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느 전장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마교가 엮인 전장은 유독 더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손속이 없는 마교들의 전세와 이에 치열이 맞부딫히는 무림인들.

뒤로 밀려도 제 목숨 아끼지 않고 밀려들어오는 광신도하며, 그 사이로 말도 되지 않는 무위로 넓은 범위를 초토화 시키는 마교도들의 수장 천마의 무위가 넘실거리다 못해 넘쳐흐른다.

원작의 흐름에 따라 마교의 전황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전개를 알고 있는 강혜성만이 전투를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뿐이었다.

“…….”

우호법은 천마의 옆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천마는 초반 적진의 기세를 꺽을 때 외엔 후방에서 전술을 지휘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그 답지 않았다.

직접 나선다는 말에 처절한 혈전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으나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아군이고 적군이고 쓰러져 나갈때마다 비통하단 눈빛을 지었다.

오로지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우호법만이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함이었으나 확실했다.

우호법은 의아함을 가졌다.

마치 인격이라도 뒤집힌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였다.

“불경하구나, 우호법.”

그의 낌새를 알아차린듯 천마가 시선도 주지않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에 우호법은 곧바로 고개를 내렸다.

이후 천마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우호법은 확신했다.

자신의 지금 천마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당장 뛰어나가 자신의 목이고, 아군이고 적군이고. 신경하나 쓰지 않고 혈자를 흩뿌리고서 한결스러운 권태한 얼굴로 돌아와야만 하건만. 나서지 않고 지휘라니, 더해 교도로써 불경한 발언이나 그 지휘는 패도적인 성격에 답지 않게 훌륭했다.

정말이지 주화입마라도 들었나 싶은 심정이었다.

“가자구나.”

우호법이 의뭉스러움만을 가득히 품은채 찝찝함을 느끼고 있던 때, 천마가 한발짝 내딛였다.

평범한 걸음걸이였다. 산책이라도 하듯 전장 사이를 조용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느것도 아닌 풍경인 것처럼 신경하나 주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이 되려 위화감을 만들어냈다.

그가 걸어가 닿은 곳은 소교주가 전투하고 있는 자리였다.

척봐도 지학에도 오르지 못한 앳된 모습의 소교주는 지학을 방금 막 넘긴듯한 정도의 무인과 대치 중이었다.

긴 시간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하나 이리 어린이들 조차도 전장에 나와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꼴이었다.

천마는 이 둘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우호법 또한 천마의 어떠한 언질도 없었기에 주변을 경계하며 둘을 지켜보았다.

소교주가 상대하고 있는 자는 무위가 상당했다. 지학을 갓 넘겼을거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어느 고수가 환골탈태했다 하는 게 더 신빙성 있어어보일만큼이었다.

천마는 그 모습이 내키지 않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동백한.”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교주를 부르자 전투 중이던 소교주가 멈칫한다. 이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상대가 검을 찔러온다.

하나 검은 소교주를 노리지 못했다.

어느샌가 앞으로 나선 천마가 상대의 검을 쳐냈다.

“…무슨.”

소교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제 앞에 선 천마를 올려

다보았다.

천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아까 전투를 지켜볼때처럼 안타깝다는, 슬픔에 찬 얼굴로 상대를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마는 어느것도 하고 있지 않았으나, 그의 기세로 그 누구도 주변에 다가오지 않았다.

“명을 어겼구나.”

천마의 한마디였다.

“당신이 참견할 바는 아닌거 같은데.”

소교주가 대꾸했다.

“물러나라. 방해구나.”

소교주의 앞에 선 천마는 어린 무인과의 공방을 시작했다. 천마는 어째서인지 상대에게 살수를 날리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초식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천마가 밀리는 듯한 우스운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천하제일의 악이자 강자존의 최고 권위자. 정점의 무위의 상징이자 그 자체인 존재가 아닌가? 고작 후기지수 따위에게 밀리는 꼬낙서니는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상대의 검을 두어번 쳐낸 천마는 검에 베인 소매자락을 보았다.

“형편없군.”

천마는 그리 중얼거렸다. 자신의 꼴에 이야기하는 것인지 상대에게 대한 평을 남기는 것인지 의뭉스러운 마디였다.

“천하만인의 원수이자, 악인! 네 녀석을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겠다!”

뒤로 물러서 검을 고쳐쥔 어린 무인이 호기롭게 외쳤다.

곧바로 천마에게로 검을 쥐고 뛰어드는 무인에게로 소교주가 끼어들었다.

“어딜 또 맘대로 판을 지어내려고. 네 놈만 특혜를 볼 줄 안다 착각하지 마.”

“소교주…. 네 녀석과의 악연은 몇 번을 반복해도 끊어지지 않는구나.”

어린 무인과 소교주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를 이었다.

소교주의 공격에 물러난 어린 무인이 기세를 가다듬는다.

“좋다, 이 자리에서 너와의 악연까지도 정리하겠다!”

“누구맘대로…!”

천마를 뒤로하고 새로운 공방이 펼쳐졌다.

소교주의 내기가 검에 모인다. 그의 기가 사납게 울려퍼지자 반대편의 어린무인 또한 기를 끌어올려 검기를 만들어낸다.

날카로웠던 시선 사이로 둘의 신형이 시선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지면, 이내 검기가 담긴 도신이 부딫히며 열을 보인다.

몇 번의 수가 오간다.

겉으로만 보아도 확연하게 차이나는 둘의 나이였으나 실력은 비등했다. 진정 후기지수의 무위인가 싶을만큼 교묘하고 심도있는 초식이 맞부딫혔다.

하나, 몇 번의 수가 더 오가고. 신체적 한계로 인한 틈이 생겨났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소교주 쪽에서 완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소교주 또한 벌어지는 체격차에 이를 물었다.

어린 무인은 이 틈을 놓치 않았다.

“이제 끝이다!”

어린 무인이 소교주에게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때였다.

숨죽은 듯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천마가 어느샌가 어린 무인의 앞으로 와, 그의 손목을 낚아채려하였다.

“!!”

어린 무인은 시야에 갑자기 나타난 천마의 손아귀를 피해 뒤로 두발짝 뛰었다.

돌파구를 발견한 소교주는 어린 무인을 공격하려하였으나 천마에 의해 막혔다. 어린 무인은 지금 밖에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어린 무인에겐 이 자리에 오는 순간부터 몇 번이고 바라고 생각해온 상황이었이 때문에.

어린 무인의 움직임을 간파한 천마가 소교주를 자신의 품 안으로 옮기고 돌아섰다. 마치 그를 보호하려는 모양새였다.

어린 무인은 쥐고있는 검에 최대한 짙은 기를 담으려 집중했다. 무림의 악적을 정말로 끝내줄 시간이었다.

푸욱.

어린 무인이 바란 완벽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결코 득이 없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림 역사상 가장 말도 되지 않을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천마를 찌르려는 순간, 그의 호법이 끼어들었다.

아슬한 거리에서 무리해서라도 어린 무인의 검을 쳐내려는 듯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검은 닿지 못하였다.

자리에 있는 이들이 상황을 파악한 건 일이 이미 벌어지고 난 뒤였다.

호법이 끼어드는 순간 어린 무인은 실패를 직감하였다. 악의 중심이 아닌 그의 광신도 하나를 줄이는 일에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검 끝에 감각이 닿고 일어난 상황을 살피자 오히려 그가 바라는 쪽에 가깝게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마를 관통한 도신으로부터 그의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천마의 양팔에는 각각 다른 이들이 있었다. 한 쪽은 앞서 천마가 보호한 소교주가, 다른 한 쪽은 결정적인 순간 끼어든 그의 호법이.

“교주…님?”

호법 또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그를 잡아챈 이를 큰 눈으로 바라보았다. 벙찜과 동시에 경악으로 들어찬 얼굴 갈 길을 잃은 그의 검 끝이 허공에 서 있었다.

소교주 또한 뒤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천마의 뒤를 넘어온 붉어진 검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륙의 숙적, 인간의 도리를 잊은 천하제일의 악.

그가 희생의 길을 선택했다.

천마는 놀란 얼굴을 한 자신의 교도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언뜻 옅은 미소가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죽지말거라.”

***

유아교육과를 전공 중인 평범한 대학생.

…이었던 나는 지금 읽었던 소설의 천마, 사택청화람에게 빙의 당해 스토리 상의 첫 전장에 섰다.

원작의 흐름이라면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난전이 벌어지는 전장. 누구 하나가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곳이다.

복잡한 시선 끝에 전장에 나선 소교주가 눈에 계속 밟혔다.

소교주, 그러니까 동백한은 이 소설의 내 최애이자 소설의 시점상 고작 12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정말 미친 천마다. 저런 어린아이를 힘이 전부인 사이비 교단의 소교주로 삼은 것도 모자라 전장에 내보내다니…. 참고로 빙의하고 곧바로 소교주에게 전장에 나가지 말 것을 명했으나 소교주가 거부하고 나왔다.

애를 어떻게 키운거냐.

청화람 이자식은 내가 꼭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 그거 지금 나지? 스읍….

여하튼 이런 이마만 짚게 되는 상황이 나에게 벌어진 참이다만 여기서 더 미친 점이 있다.

바로 나의 빙의 상태다.

“소란스럽군.”

소름돋게도 청화람의 자의식이 살아있다.

한마디로 1육신 2영혼.

보통 빙의라면 내게 완전한 주도권이 주어져야하지 않나? 이 미친 천마는 고집도 어찌나 센지 말도 행동도 내 맘대로 나가지 않는다.

이 미친쓰레기가 계속 살아 숨쉴거라니.

어쩌면 그냥 죽는게 세상에 더 이로울거 같다는 생각이 스치는 참이다.

전장의 지휘는 내가 했다.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유리한 지휘를 벌일 수 있었다. 청화람 또한 납득했는지 내 의견에 순순히 어울려주었다.

별개로 갈려나가는 교도들과 상대 진영의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청화람의 다른 점을 느꼈는지 우호법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불경하구나, 우호법.”

청화람이 멋대로 입을 열어 경고한다.

네가 더 불경해 화람아. 우리 조용히 있자? 응? 조용히.

뒤에서 교도들에게 지휘를 내리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소교주를 그냥 지켜만 볼 수 없었다. 현대인의 발상으로, 아니 이건 무림인의 발상으로도 비윤리적일 것이다.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저 상황을 저지해야만했다.

“가자구나.”

자리에서 일어나자 뒤로 우호법이 따라왔다.

과묵하고 참 성실한 사람이다. 소설에선 그닥 서술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 호법 상당한 미남이었다.

이름은… 아직 못 들었지? 돌아가면 꼭 물어봐야지.

이런 설정의 캐릭터를 엑스트라로, 등장하자마자 죽음으로 퇴장하는 장면에 썼다니 작가가 맛알못인게 분명하다.

“동백한.”

백한에게로 걸음한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백한이 주춤하자, 상대가 그 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나는 어떤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급히 손을 움직였다.

검은 생각보다 더 쉽게 내쳐졌다. 아무 상처도 없이 말이다.

맨손으로 칼을 쳐내다니 무림인이란 뭘까? 일단 내 심장에 좋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본능적으로 막은거지만 뒤늦게 ‘아차 이거 칼이었지.’ 하고 떠올라 간담이 서늘해진 참이다.

“명을 어겼구나.”

“당신이 참견할 바는 아닌거 같은데.”

내 말을 들은 백한이 차갑게 날 노려본다.

마음이 박박 찢어진다.

가까이서 본 백한은 더 어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실이었어봐라 태권도 도복입고 피카츄 돈가스나 사먹을 나이라고.

내 참견할 바? 그래 청화람이 참견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나는 아니다.

유교과를 전공 중인 현대인으로써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이건 심각한 아동학대라고!

내게 불신과 경계만을 내보이는 백한에게 내 영혼를 꺼내다 보여줄 수도 없고, 행동도 자유롭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다.

난 백한을 더 이상 전투하게 둘 수 없었다.

“물러나거라, 방해구나.”

…화람아 진짜 뒤질래? 그딴게 애한테 할 말이야?

청화람 입만 뽑아도 반은 갈 것 같다. 어쩜 이렇게 못되처먹은 말만 내뱉지?

말을 다시 고쳐 말할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해명 해보려 해봤자 청화람 필터 거친 망언만 나가겠지. 앞으로 대화는 최소한으로 줄이겠다.

내 맨손에 검이 막힌 상대가 다시 뛰어들어왔다.

상대도 백한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상대 진영의 어린 무인은 이 소설의 소교주 외의 반대 진영 주인공인 천도진 밖에 없었다.

내가 천마임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저 범상찮은 기개. 이 세상에 그 말고 더 없을 것이다.

나와 마주하고 선, 갈색 머리칼에 올곧은 눈빛 그리고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얼굴. 그리고 내 옆엔 검은 머리에 날선 눈매를 가진 어린 소교주.

그리고 이 둘은 소설의 주인공.

…그냥 세계관 자체가 잘못된 건가?

이런 어린아이에게 세상이 구해지고 운명이 갈린다고? 뭔가 좀 잘못 되지 않았나? 여기 있는 어른들은 다 죽었나요?

기세차게 나에게 덤벼오는 천도진에게로 나는 감히 공격할 수 없어 그저 손으로만 방어했다.

청화람은 내 행동이 맘에들지 않은 기색인지 움직임이 불편했다. 몸이 무겁다 해야하나, 무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옥죄는 느낌이라해야하나.

덕분에 천마의 무위는 무슨 형편없는 칼날 쳐내기로 소매만 너덜해졌다.

청화람이 한마디 한다.

“형편없군.”

니 인성만 하겠냐?

너의 글러먹은 성정에 비하면 아주 아름다운 움직임이었어.

청화람은 맘에들지 않는지 얼굴을 구겼다.

뭐, 어쩌라고.

쫓아내지도 못하잖아? 널 한 대 치지 못하는게 내 천추의 한이 되었다.

개노답쓰레기. 쓰레기도 상종 안할 놈. 너무 쓰레기라 이름을 자체를 최고 악질 비속어 고유 명사로 등록해야할 놈.

천도진은 쉬지 않고 다시 덤벼들었다.

그리고 백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의 검이 맞붙는다.

애들아 싸우지말자 제발….

둘의 공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 어린 백한이 금세 밀리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더 위험해질 것이 뻔하기에 천도진의 검을 제지하려 팔을 뻗었다.

내가 다가가 팔을 뻗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천도진이었다. 청화람의 움직임도 그렇지만 정말 경이로운 민첩함이었다.

무림인들은 다 이런가?

내 행동에 천도진이 물러나자 백한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려했으나 나는 그를 잡아채 저지했다.

이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손에서 검을 내려놓게 해야만했다.

하나, 어려서 그런가 기운이 참 넘치고 날렵했다.

내가 백한을 저지하자, 이번엔 반대로 천도진이 내게로 뛰어들었다.

왠지 울고싶어지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참 고집이 강하다. 애들 돌보러 봉사 갔을때도 비슷하지 않았나? 그래도 그땐 검 같은 건 없었는데….

난 백한을 뒤로 가렸다. 청화람의 몸이라면 피하고도 남았겠지만 그건 무인으로 살아온 청화람이고. 나는 아니다. 그렇게 움직일줄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건 본능적으로 아이를 감싸는 일뿐.

그리고 검이 가까워지는 찰나에 어느샌가 뒤에있던 우호법이 천마를 보호하기 위해 검을 들고 끼어들었다.

확실히 그가 끼어들면 검로를 비틀 수는 있겠으나, 비틀기만 할 뿐 공격을 멈출 순 없다. 그리고 멈추지 못한 공격은….

나는 호법을 잡아 바깥으로 밀었다.

그리고, 푸욱.

아. 좋지 않은 소리와 서늘한 감각이 나를 지나친다.

“교주…님?”

호법이 경악에 찬 얼굴로 날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파 기절했을텐데, 이 자존심 강한 천마는 내가 의식을 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정도는 아무렇지 않아하는거 같기도 하고…?

물론 요만큼도 괜찮지 않다. 지금 검에 관통당했다고, 통각도 감각도 제대로 있어!

심정과 달리 지독하게 무표정인 얼굴. 나보다 더 충격에 쌓인 주변의 얼굴을 보자니 괜히 무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서 청화람이 어떤 얼굴을 했을진 모르겠지만 버릇처럼 나는 웃어보였다.

하하, 저 괜찮아요. 아마도요.

당신들이 멀쩡하면 된거야, 그치?

“죽지말거라.”

청화람의 필터를 거쳐 말이 나간다.

그 말이 왜 저렇게 되는건진 모르겠지만, 뭐… 이번만큼은 같은 생각이다.

우리, 죽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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