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회랑

시간을 거슬러 4. 교차로

시간: 3년 전

‘나’와 예신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네로의 시장에 도착했다.

출발 전, 예신은 ‘나’의 옷차림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는 따뜻하게 무장한 모습을 본 뒤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절의 밤은 상당히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활기찬 분위기가 추위를 잊게 해주는 듯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예신이 말한대로 젊은 참가자들이 많았다.

인파에 떠밀려가는 16살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겁에 질린 듯 보였다. 마치 길을 잃은 작은 동물처럼.

과거의 나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긴한데…… 어쩐지 ‘나’를 보고있다보면 모르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소리없이 지나갔으니, 이상할 것도 없나. 시간은 본래 연속적으로 흐르고,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3년 전의 나와는 같은 방식으로 비교하기 힘드니까.

그정도로 19세의 나와 16세의 나는 확연히 차이가 드러났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의 나를 가리키며 과거의 ‘나’에게 ‘너는 저렇게 성장할거야.’ 하고 말해도, 아마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예신은 ‘내’가 돌아보면 매번 그곳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

예신: 소화가, 춥지 않니?

16살의 소화가: 응, 괜찮아요.

예신: 손 내밀어 볼래?

‘내’가 손을 내밀자, 예신은 그 손끝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는 손 안의 온도를 확인한 뒤에야 겨우 그것을 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다행이다.

우리가 서있는 곳은 마켓의 한가운데였다. 주위에는 알록달록한 텐트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사람들 틈에서는 한 번씩 호객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주A: 세계 각지의 희귀한 향수가 많이 있습니다! 꼭 한 번 들러 시향해보세요!

점주B: 수제 가죽 공예 제품은 어떠세요? 새해에 어울리는 특별한 선물도 드립니다!

‘나’는 이 행사가 반년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이곳에 도착해서야 알게되었다.

마켓에 부스를 내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하며, 승인 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전도유망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찾으려 세계 각지에서 유명 브랜드의 관계자가 모여들었다. 아티스트들도 필사적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명품을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16살의 소화가: 예신, 저기 봐요!

가슴 설레는 디자인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흥분을 예신에게 전했다.

한편 예신은 진지한 눈빛으로 내가 가리킨 상품을 살펴보며, ‘나’와 그 훌륭함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대부분 조용히 예신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번씩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곤 했다. 그러면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예신은 그것을 수용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러한 대화는 16살의 ‘나’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예신과 대화하다보니 안정을 찾은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경계한 듯 찌푸린 인상을 풀고 어느새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이게 바로 예신이 기대하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예신의 말 뒤에 숨겨진 진의나 감춰진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느낄 수 없었던 신기한 감각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예신은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였다. 16살의 ‘나’는 그를 믿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날 눈을 뜨면 예신이 사라져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예신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예신: 잠시만, 전화 좀 받을게.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가만히 예신을 쳐다봤다. 그가 중간에 ‘나’를 바라보면, ‘나’는 반대로 시선을 돌린다.

……꼭 눈치싸움을 하는 것 같네.

지금의 나와 예신은 확실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어디에 있든, 그는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 시간대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예신: 소화가, 주최측에 연락이 와서… 미안하지만 잠시 다녀와야할 것 같아. 그동안 혼자 둘러볼 수 있겠어?

16살의 소화가: 응, 괜찮아요.

‘나’는 예신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이 시기의 ‘나’는 그의 부담이 되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서 타인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걸, ‘나’는 아직 몰랐다.

예신: 불꽃놀이가 시작하는 건 8시 반부터니까, 30분 전에 역에서 만나서 전망대로 가자.

예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예신의 말에 ‘나’는 그대로 혼자 걷기 시작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예신은 움직임 없이 묵묵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 안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유유히 빛나는 별처럼.

내가 떠난 후의 그의 표정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가 몰랐던, 결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던 감정이 예신 안에 많을 것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만 16살의 ‘나’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하늘의 황혼과 도시의 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유화같은 풍경이 ‘나’의 눈동자에 비친다.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모르는 사이 어느새 교차로에 도착해 있었다.

시장은 이곳에서부터 동서남북으로 길이 나뉘어져 있다.

???: 거기 꼬마 아가씨, 잠깐 괜찮을까?

본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차로의 한가운데, 작은 텐트가 눈에 띄었다. 목소리는 아마도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16살의 소화가: ……음, 뭐죠?

대답을 하자 텐트 안에서 불쑥 손이 뻗어나왔다.

???: 천 번째로 이 교차로를 지나가고 있는 것을 축하합니다. 그러니 꼬마 아가씨에게 작은 선물을 줄게!

어떻게봐도 수상하지만, ‘나’는 어쩐지 궁금해하며 그가 건네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팜플렛을 받았다. 그것을 펼치자 그 안에는 각 페이지마다 다양한 기념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16살의 소화가: 어…… 마켓 직원인가요?

???: 아니? 나는 대충 산타클로스 형제…… 그러니까, 새해의 산타같은 거랄까.

???: 사실 나는 지금 ‘자유여행’ 중인데, 우연히 이 도시에 들르게 됐거든.

???: 그 기념 스탬프는 숨겨진 이벤트까지 전부 완수되어 있으니까, 운영 부스에 가져가면 특별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거야.

16살의 ‘나’는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만화 속에서 무공을 전해주는 ‘기연’을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

16살의 소화가: 이거, 모으기 힘들지 않아요? 왜 직접 선물을 받으러가지 않아요?

???: 방금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는데 오늘 마지막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안되거든.

???: 마침 비행기 표를 끊었을 때 네가 지나가던 중이었어. 이런 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지!

16살의 소화가: ……좀 전에는 내가 이곳을 지나간 천 번째 사람이라고 안했어요?

???: 선물을 받은 행운의 아가씨, 실컷 즐기도록 해! 이건 새해 산타의 축복이야, 그럼!

16살의 소화가: 어? 아, 그, 잠깐ㅡㅡ

‘새해의 산타’가 도대체 뭔지 ‘나’는 알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대답도, 기척도 없었다.

그제서야 텐트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반대편 출구를 통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과연. ‘그 사람’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이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었구나.

16살의 소화가: 이상한 사람이네…….

‘나’는 건네받은 팜플렛을 넘겨보며 ‘새해 산타’가 하루동안 얻어낸 결과물을 작은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16살의 소화가: 도넛 10개 먹기, 공연 감상 후 울기, 유령의 집에서 10명에게 길 안내하기, 눈 감고 과녁 정중앙 맞추기…….

16살의 소화가: ……일부러 이런 일에 도전한거야!?

지금은 이 때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팜플렛과 교환한 선물은 어떻게 된 거지…….

확실히…… 이후 예신과 만나기 전까지 적당히 돌아다니며 시간을 버렸던 것 같다.

이 과거의 시간에는 도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점점 더 궁금해진다. 오르골이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걸까?

ㅡㅡ그렇다면 이 교차로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 동쪽으로 가는 길목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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