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3. 달은 돌고 돈다
시간: 3년 전
‘올해의 마지막 게시글’ 포스팅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창 밖을 확인하자 하늘은 짙은 구름에 뒤덮여 회색을 띄었다.
이런 겨울날에는 포근하게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야지. 나비는 이미 내 무릎에 기대어 잠들어있었다.
나 역시 잠을 자야할 시간이지만, 어쩐지 자고싶지가 않았다. 아, 그래. 재한 선배가 말한 어플 테스트를 해볼까?
선배가 보낸 링크에서 앱을 다운하고, 기능을 확인한 뒤 검색창에 임의의 숫자를 입력한다. 하지만 어떤 숫자를 입력하건 상대방은 오프라인이라고 표시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앱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인기가 없는 모양…….
나비: 먀~
그 때, 어느새 일어난 나비가 핑크색의 작은 육구로 내 손을 건드리더니, 침대 옆에 둔 오르골을 툭툭 건드리며 나를 쳐다봤다. 최근 나비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소화가: 그 오르골로 놀고 싶어? 하지만 그건 털뭉치가 아니니 장난치면 안돼.
나비는 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냐?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태엽을 감으려 오르골에 손을 뻗었다.
태엽을 감는다 [선택]
오르골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어슬렁 거리던 나비가 얌전히 앉아 몸을 웅크렸다.
은은한 스탠드 조명이 비추는 침실 안, 시계의 바늘이 째깍이면 빛을 받은 오르골 소녀의 그림자가 벽에 비쳐 춤을 춘다.
나비: 우냐…….
나비는 그림자의 움직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앞발을 움찔거리며 먹잇감을 발견한 마냥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비의 움직임보다, 오르골의 움직임에 더 시선이 갔다. 이 오르골… 지금까지 봐온 오르골과는 돌아가는 방식이 반대였다.
받침대의 무늬가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고, 소녀는 가장자리에 있는 궤도를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춤을 춘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시계바늘의 똑딱이는 소리에 가려져…….
똑, 딱, 똑, 딱…….
어느 곳보다도 익숙했던 눈 앞의 공간이, 갑자기 압축되고, 비틀어지고, 변형되더니……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주위는 온통 낯선 풍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곳은 넓은 공간이었다. 눈 앞에는 거대한 나선형 계단이 위아래로 길게 뻗어 있고, 아래쪽에서는 희미하게 하얀 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그쪽을 들여다보니, 꿈의 나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단처럼 보였다.
나는 난간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하얀 빛을 향해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면 살짝 열린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셀레인 섬으로 오기 전에 살던 집의 방이 보였다.
꿈, 일까. 이건 언제쯤의 광경인 걸까…… 나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확인했다.
……3년 전이었다.
그리운 책상 앞에 이쪽에서 등을 돌린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연필로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것은…… 16살의 나였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책상으로 향하는 소녀는 변함없이 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다. 마치 시간도 피곤도 잊어버린 것처럼.
그러고보니 그랬다. 그 무렵의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밖에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손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예신 이외에는 이야기 상대조차 없었나보다.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저쪽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지금의 나와 16살의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시공을 넘는 여행에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왜 이 과거로 돌아온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 3년 전 이때……
뭔가 내가 잊고있는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예신이었다.
방문객의 기척에, 16살의 나는 몇 초간 멈칫했다. 하지만 곧 눈 앞의 그림에 다시 빠져들었다.
예신: 소화가, 설 연휴 동안 하고싶은 것이 있니?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예신: 방학이 되고 계속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잖아. 네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어.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멋진 일이지.
예신: 하지만 바깥 세상을 접하지 않고 지금 가진 시야만 고집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창의성이 사라져버릴거야.
예신의 어조는 무척 부드러웠고, 나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그는 나에게 여러가지를 보여주려고 참을성 있게 대해주고 있었다. 억지로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6살의 소화가: 도서관에서 화집을 잔뜩 빌려왔어요. 방학동안 전부 훑어볼 거예요.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불만을, 내가 놓칠리가 없었다. ‘나도 창작을 위해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유치하고 귀여운, 그야말로 아이의 답변이었다. 아마 예신도 나랑 똑같이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런 지적을 하지 않고, 그저 책상 위의 그림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예신: 그린 걸 좀 봐도 될까?
‘나’의 얼굴이 불안으로 감싸였다. 이 무렵의 나는 이미 예술가의 고독이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힘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의 조언을 받고싶은 마음이 상충했다.
16살의 소화가: 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예신은 책상으로 다가가 놓여 있던 그림을 집어들었다.
이 그림은……!!
그래, 이 오르골,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 내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예신: 여기까진 잘 그렸는데…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네.
‘나’는 감동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예신이 한눈에 ‘나’의 고뇌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16살의 소화가: 이 공간에 무언가를 덧붙이고 싶어요. 하지만…… 이것저것 시도해봐도, 이거다 하는 게 없어요. 분위기랑 안어울리거나 못그리겠어서…….
예신: 그렇구나. 그렇다면 실제로 정교하게 디자인한 아트웍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신은 네로(던 시티)에서 새해를 맞이하자고 제안했다.
네로는 바다를 끼고있는 대도시로, 시장에는 항상 새로운 물건들이 줄지어 쏟아져 나온다. 개중에는 핸드메이드 제품을 테마로 한 마켓레이드도 있다고, 예신은 말했다.
그곳에는 회화는 물론,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가지고 온다고.
그는 주최자가 보낸 초대장을 받고, 이미 팜플렛을 통해 꼼꼼히 살펴본 모양이었다. 그중에는 그가 눈여겨 본 작품도 몇 개 실려있었다고 한다.
마켓레이드는 하루종일 개최되며, 밤에는 신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도 있을 예정이었다.
예신: 어때? 가볼래?
나는 동정에 가까운 마음으로 16살의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예상대로 16살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작게 웃었다.
16살의 소화가: 예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같이 갈게요.
예신이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나까지 미소 지었다. 그의 능숙한 ‘수법’에 말려들었다는 기분보다는, 감동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닫은 나를 끈질기게 지켜봐주고, 항상 곁에 있어준 사람은 예신 뿐이었다.
반복되는 나날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ㅡㅡ
그는 굳게 닫혀있던 내 마음의 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려주었다.
예신: 그럼, 그렇게 하자. 따뜻한 옷을 많이 가지고 가는 편이 좋을거야. 네로는 남쪽 도시지만, 이 시기에는 밤에 추워지니까.
4. 교차로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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