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EAT

무제 by L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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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 끓는다고 냅다 요리를 시도했다가 망한 경험을 되살리자면, 지금 당장 요리를 시작하기에는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레시피가 적힌 책을 손에 든 채로 냄비에 붙어 있는 온도계를 확인하다가, 적당한 온도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책에 적혀 있는 두 번째 절차를 시작하기로 한다. 잘게 썰어 둔 초콜릿을 물 위에 띄워 둔 접시 안에 놓아 중탕하고, 그동안 버터를 마저 녹이기로 한다. 설탕도 조금 추가하는 것이 좋으려나.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설탕 봉지를 매만지다가……. 어차피 맛의 평가는 자신이 내릴 것이 아니니 레시피북에 적힌 정확한 무게를 계량하여 넣기로 한다.

레시피북이 있기 전에는, 대충 눈대중으로 보고 설탕 한 봉지를 전부 때려 넣었다가 달다 못해 입안이 녹을 것만 같은 기묘한 것을 만들어 버리기도 했었다. 그걸 누군가 의 입에 넣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라……. 어쨌든 혈당 스파이크 같은 게 전혀 오지 않는 신체를 소유한 자신의 입에 냅다 넣었다가 무언가를 잘못 먹은 반려 동물 취급을 당했던 것이 언제였더라. 그것도 참 오래 된 기억인 것 같아.

뜨거운 물에 닿은 초콜릿이 중탕 되어 전부 녹아내린 것을 확인하고, 녹은 버터와 카카오 파우더와 설탕이 들어간 보울 안에 초콜릿을 옮겨 담고는 적당한 채를 들어 재료들을 섞어내기 시작한다. 음, 예전에는 초콜릿 안에 중탕한 물이 들어가서 거하게 망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법 성공적인 듯 싶어 남몰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녹인 초콜릿에 물이 들어가면 다시는 굳지 않는다는 사실을 별로 알고 싶진 않았는데……. 초콜릿을 주고 받으며 챙기는 기념일마다 온통 가게들에서 홍보를 하고 있으니, 안 사기도 좀 그렇고 해서 사 본 초콜릿을 처음 중탕했다가 생긴 대참사를 기억한다. 그 일 이후로 한동안 주방에서 달큰한 초콜릿 향이 없어지지 않아 주방을 방문할 때마다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 그건 조금 즐거운 기억인 것 같아.

집에 구비해둔 럼이 다 떨어져 가기에 새로 사 온 병을 조금 뜯어 향을 맡는다. 의료 약품 등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향과는 조금 다른 결의 알싸한 향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30ml정도 되는 양만 소량 따라 보울 안에 함께 넣고 섞어낸다. 옆에서 새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도 섞어내자 공기 중에 달콤한 향과 쌉싸름한 향이 공존하는 것을 느낀다.

비스킷은 적당히 장을 봐 오던 길에 사 둔 걸로 사용하면 되겠지. 마침 과자 세일을 한다고 홍보하던 가게에서 괜찮은 것을 발견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초콜릿 사이에 박혀 입에 물었을 때 적당한 만족감을 줄 정도로 부숴 진 비스킷을 마지막으로 보울 안에 집어넣어 섞어내면 이제 재료는 전부 다 섞었다.

시도한 요리가 전부 실패하지는 않았다, 바로 옆에 도와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가끔은 같이 장을 보러 가기도 하며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바구니 안에 넣어 두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그가 사는 것을 구경만 하며 따라다니고는 했는데, 언제였지? 그가 아니라 제 기호에 맞을 법한 식품들을 고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에는……. 바구니 안에 늘 들어있던 술병도 많이 줄어들었던가? 이런, 이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븐 용 종이에 모든 재료가 섞인 초콜릿을 부어 두고는 돌돌 말아 모양을 잡는다. 재료가 빠져나오지 않도록 양쪽을 고정하고 나니 거대한 사탕 같이 보이기도 하고. 아직은 미지근한 온도를 가진 초콜릿이 완전히 굳을 수 있게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니 이제는 뒷정리가 남았다.

그들 사이에 섞여서 살게 된 지가 제법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식 문화란 어렵다.

매 번, 매 끼니 음식이라는 것을 준비하는 것도, 준비가 다 된 음식을 먹는 행위도, 할 일을 마친 식기들을 정리하는 것도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닌데. 일련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뒤의 결과물이 항상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런 행위를 할 필요 없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냐 묻노라면…….

흔히 초콜릿 살라미라고 불리는 것이 굳기까지 부엌을 정리하며 적당한 시간을 기다린다. 아직 미지근한 온도가 남은 중탕용 물에 굳은 초콜릿을 넣어 씻어 내고, 흰 색의 가루들이 튄 도마 주변을 닦아 내고, 사용한 비닐과 종이를 잘 갈무리해 안쪽에 넣어 두고, 기타 잡다한 일들을 하다 보면 금방 오후 3시가 되어가는 시간이 된다. 이 시간이면 분명 모처럼 찾아온 휴일에 밀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을 이가 슬슬 집으로 돌아 올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적당히 괜찮은 굳기로 굳은 살라미를 냉장고에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그 위에 슈가 파우더를 뿌려 장식한다. 이대로 먹으면 분명 단 맛의 비중이 클 테니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얼음을 두 잔의 컵 안에 넣어두고는 적당한 원액과 물을 타 연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어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비밀번호가 눌리고, 도어락이 열리겠지.

그러니, 자신은 마땅히 그를 맞이해 주어야 하는 것일 터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것, 일방적으로 공평한 선물이 도착하기 전 까지…….

그 전 까지는,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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