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선순환

라크리모사

2024년 8월 넷째 주 드림 60분 전력 제출본 ― 니어 레플리칸트 카이네

타나카 아츠코(1962 - 2024)와 벗(1998 - 2024)에게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데, 뭘 잊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금 다르지. 나한테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고. 잊은 게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게 없다는 소리야.”

세븐은 살짝 혀를 찼다. 의자에 앉은 남자가 공감하는 사람의 표정을 띄지 않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이네는 그가 그녀의 문제에 공감해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지성이지, 감수성이 아니었다. 그는 감수성 면에선 상당히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그 스스로도 살아오면서 감수성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성을 우선시하는 타입의 남자다. 실제로 그 폭과 깊이는 여러 번 눈여겨볼 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출날 구석 하나 없는 감수성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배제할 의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카이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세븐은 틀림없이 “멍청한” 남자였다.

“있었다가 사라진 건 다를 게 없잖아.”

“달라.”

카이네는 언제나처럼 딱 잘라 말했다. 남자도 늘 그렇듯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겐 매사에 ‘기준’이라는 게 있었고, 그게 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제법 거대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명확한 판단이 어려운 경우, 그는 언제나 자신이 정한 순서를 따라 결정을 내리는 편이었다. 정해진 사고체계와 필요한 과정을 착실히 밟으면 거의 모든 경우에서 필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어떤 의미로도 범상치 않아싿.

“어떻게?”

“하여간 달라.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마, [욕설].”

이러고 있어봐야 누구에게도 득 될 대화가 아니었다. 세븐은 카이네의 상스러운 표현에 대해 논평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 정도의 비정제성도 없는 대화는 더 이상 카이네와의 대화라고 여기지 못할 정도로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좋아,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 짐작가는 이유는 있어?”

“[욕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카이네는 어떤 이유에선지 다시금 이를 갈았다.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거칠긴 해도 미성숙한 여자는 아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멈추기 적절한 때를 알곤 했다 - 그 직감을 가끔 묵살한다는 치명적 문제 역시 있긴 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곧장 그가 바라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생각의 다음 단계로 지체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난 지금 어떤 실체를 가진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냐. 내가 아는 건 무엇인가가 내 손에 있었다 없어졌다는 것 뿐이야.”

“즉, 우리는 네가 지금 이야기하는 그 ”상실“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없는 셈이야. 그렇다면 이건 주관의 문제다.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됐지?”

“뭐?”

한 가지, 세븐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는 생각의 흐름을 스스로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서 있던 카이네와 눈이 맞았다.

“선생이 분필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을 때는 분필을 써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다. 양치기가 양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릴 때도 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지. 하지만 넌 아무런 이유 없이, 네가 알지도 못하는 무엇인가가 네게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어. 그 사실을 떠올린 첫 번째 순간이 언제지?”

맞는 말이다. 카이네의 눈동자가 느리게 감겼다. 확실히, 그가 궁금해 할 법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카이네는 그 질문에도 뚜렷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제일 답답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본인일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별다른 평가를 하지 않았다. 대개 부정적 감상은 시간을 들여 가며 기록할 이유가 없었다.

“언젠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누구라 말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쉽게도 서로 같은 이유에서 침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카이네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알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든 벽에 밀어붙이든, 이런 남자에게서 뽑아낼 재미가 있을 턱이 없었다.

“정말이지⋯⋯. 퍽이나 조사에 도움이 되겠군, 카이네.”

“닥쳐. 난 최대한 협조하고 있어.”

“그렇겠지.”

그는 그렇게만 말을 남길 뿐, 해당 주제로는 더 말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오면서 잠에서 한 두번 깨어났을 리는 없잖아. 네가 기억하는 선에서 이야기해주는 걸로 충분하지. 우리에겐 그 ‘언젠가’가 필요하다.”

이번의 질문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은 제시해줄 수 없었다. 애초에 이젠 세븐도 뚜렷한 묘사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엔 하나 명확히 해줄 수 있는 게 있었다. 카이네는 옅게 눈썹을 찡그리다 입을 열었다.

“적어도 오십 일은 넘었어.”

“어떻게 알 수 있지?”

“열흘이 지날 때마다 집 안 벽에다 칼을 꽂곤 했지. 관둔지 오래 됐지만, 벽에 선이 다섯 개 정도는 길게 늘어져 있다. 제대로 들여다보면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도 있겠지.”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떠올린 말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듯 보였다.

“뭐냐. 할 말이 있으면 재깍 해. [욕설] 말고.”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카이네.”

하라고 해서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표정을 대놓고 구겼다. 그녀 스스로가 그에게 속내를 말하라고 반쯤 강요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언제나와 같은 태도였기 때문에 그도 깊게 고려하지 않았다. 카이네는 언제나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여자였다. 단순하고 세련되지 않았다고 여길 사람도 많겠지만,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의 진가를 헤아릴 줄 알았다. 그도 그 중의 한 명이었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냐. 신경 끄고 맡긴 일에나 집중하도록 해, 멍청한 놈.”

잠깐.

“난 내가 언제 멍청해질 지를 결정할 수 있다. 네 의견과는 무관한 일이다.”

세븐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카이네를 아끼는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그 한 명만이 있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분명 그는 지금 그 이외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리라는 건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가 생각한 것보다도 복잡한 내막이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지랄은.”

아까보다는 확실히 말투도, 말내용도 온화해졌다. 그는 다시금 화제를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실’은 네가 스스로 정확한 순간을 떠올려내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불확실한 요소가 많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고 싶은 건가? 아니면, 사라진 것을 되찾고자 하는 건가?”

“네가 준 것 중에 고르자면 두 번째겠지.”

카이네는 잠시 말을 끊었다. 뒤에 이어질 말을 강조하고 싶은 듯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를 내게서 강제로 가져가는 것 자체를, 나는 참을 수 없어.”

세븐은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카이네는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만큼 남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걸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인지는 몰라도(그게 기이한 점이지만) 그녀에게 소중했기 때문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맡기는 것일 테다.

그는 그것을 잘 이해했다. 그녀에겐 합당한 동기가 있었고, 그에겐 그것에 찬동할 적절한 사유가 있었다.

“무언가를 보내야 한다면 손수 보내고 싶어.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면 손수 죽이고 싶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끝내는 건 비겁한 일이다. 비겁한 일엔 관심 없어.”

물론 그것도 사실일 테지. 그는 다시금 턱을 괴었다. 눈동자만 위로 치켜들어 보면, 카이네의 표정에 담긴 게 비통함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생각보다 다양했었다 - 꽤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는 게 세븐으로서는 영 탐탁치 않았다.

“상실은 대개 자의와 무관히 이루어진다. 그걸 극복하는 것을, 보통 성장이라고 부를 텐데.”

“알 게 뭐야, [욕설]라고 해!”

남자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서로의 판단이 내려졌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이야. 다른 무엇도 아냐. 내 인생을 살아본 적 없는 새끼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말 늘어놓는 것에 내가 신경쓸 게 뭐냐고.”

“시기와 질투는 행복에 대한 것이지. 배척과 혐오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언제나 그랬지, 카이네.”

“알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세븐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새 스스로 미소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거울이 없어서 알기 어려웠다. 카이네에게 그것을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결국 묻지 않기로 했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언젠가 알게 될 것이었다.

“달리 선택이 있던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상쾌하다기보단 힘겨워 보였다. 그것은 분명 지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만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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