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콜록, 콜록.”
E의 기관지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숨은 버겁고, 머리는 어지럽고. 아, 시야는 흔들거렸던가. E의 몸 상태는 오늘, 상당히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붉게 변한 E의 뺨은 가련했다. 애달픈 얼굴이 무척이나 처연했다. E은 숨을 색색 쉬며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P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어딜 가기로 했더라? 머리가 안개 낀 것처럼 멍한 E은 기억 속을 헤맸다. 떠오르는 것은 P의 들뜬 모습과 그걸 바라보던 자신.
“기대했을 텐데. 어떡하지.”
처음의 싸늘한 E과는 사뭇 달라진 그였다. P와 사귀는 동안, E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인은 조금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분명히 알았다. P의 이름을 잠꼬대로 부르기까지 할 정도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연애를 하고 있음을.
띵동, 현관에서 E을 부르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E은 아픈 몸을 이끌고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찾는 것은 분명히 P일 터였다. 일어서서 움직이면 무거운 몸이 밑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중력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몸뚱이였다. E의 가냘픈 몸에서 느껴질 감각은 아니었다. 이질적이었다.
“감기가, 콜록, 으. 심한데. 옮기진 않겠지?”
E의 걱정은 자신의 몸보다는 P에게 있었다. 워낙에 건강한 체질인 그가 쉽게 감기에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나… 적어도 스킨십만큼은 금지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열어줘야겠다.”
문이 열리는 순간, 화색으로 빛나는 남성의 얼굴이 E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_
“선배! 감기 걸렸다면서요.”
“응. 일단, 콜록. 나한테 너무 들러붙지 말고.”
“제가 감기 옮으면 선배가 나을 텐데도요?”
“내가 그런 걸 원하겠어?”
“왜요. 제가 걱정돼요?”
당연히 걱정되지. 라며 그는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P는 뭐가 그리도 감동인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E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콜록, 이번 감기는 좀 심하단 말야.”
“선배는 원래 가녀린 존재라서 감기에 잘 걸리잖아요.”
“가녀리다는 건 또 뭐야.”“헤헤. 아니에요? 선배 엄청 귀엽고 가녀린…, 아.”
P는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낯으로 E을 바라봤다.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화를 낼까봐 걱정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나, E은 그저 한숨 한 번을 푹 내쉴 뿐이었다. 그 후에 E은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기침으로 이어졌다. 쿨럭, 쿨럭. 제법 묵직한 기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선배! 괜찮아요?”
“괜찮아. 네 말대로 감기가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그런 말씀 마세요. 전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몸이 약한 건 어쩔 수가 없잖아.”
“네. 그렇죠….”
E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P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카락이 살짝씩 손에 따라붙으면 부드럽게 쓸며 정돈해 주었다. 살짝 웃어 보이는 E은 가련한 한 떨기의 꽃 한 송이와 같았다. P는 멍하니 아름다운 E의 미소를 보며 넋 놓았다.
“선배, 진짜 예뻐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러면 저희 이렇게 된 김에, 어떻게 할까요?”
“그냥 쉬어야지. 너도 기껏 와줘서 고맙지만 이만 돌아가. 계속 있다가 감기 옮아.”
“제가 옮아봤자 얼마나 심하게 앓겠어요.”
“내 말 안 듣지.”
“아니에요. 선배,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P는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쿨팩이었다.
“오늘은 제가 간호 해드릴게요.”
“뭐, 무슨. 간호라니, 그게 무슨, 콜록.”
“자. 우선 누워요. 누워 있으시면 제가 다 해드릴게요.”
“아니, 난…”
“E 선배. 제발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서 누워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너무 무력해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셨으면 누우세요!”
“하아, 감기 옮아가지나 마.”
“저만큼 튼튼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안 그래요?”
맞는 말이긴 했다. P는 보기 드물게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는 인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철인은 아니겠지만, 그런 철인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감기에 걸려 헤매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P 주변인들은 그렇게 평가했다.
“자, 그럼. 선배 밥은 먹었어요?”
“아니. 아직인데…”
“그러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네요.”
“설마…”
“애정으로 죽을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 장염도 아닌데 죽을 먹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제가 만들어도 정말 안 드실 건가요?”
“……오늘은 네 말에 따르기로 했으니까, 먹을게. 대신 1인분만 만들어줘.”
“알겠어요, 선배. 걱정 마세요. 오기 전에 집에서 죽 만드는 연습 했거든요.”
P가 들고 온 죽은 하얗고 부드러운 것이, 겉보기에는 성공적인 듯했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P가 기본적으로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심지어 연습까지 해왔다면 절대 죽에 실패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 자신이 E의 간호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낀 P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요리에는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E은 죽이 어떤 상태일지 고민하지 않았다. E은 직접 숟가락을 들려고 했다.
“그럼, 한 입 먹어볼게.”
“잠깐만요, 선배.”“왜 그래?”
“제가 먼저 먹어볼게요.”
“…알았어.”
조금은 걱정되는 얼굴로 P를 바라보는 E. 하지만 P는 당당히 한 입 떠먹고서 오케이 사인을 손으로 표했다.
“괜찮아요. 밍밍하긴 하지만.”
“죽은 원래 밍밍하게 먹잖아. 감기라 간을 해줘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럼 소금이라도 뿌릴까요?”
“됐어. 그냥 먹을게. 죽이니까.”
“알았어요. 그럼, 선배. 아~”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쳐다보는 E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P는 꿋꿋하게 숟가락으로 뜬 죽을 내밀어 보였다. 입가에 가져다주는 P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벌렸다.
“아.”
“선배, 조금 야한 거 같아요.”
“…너.”
“아, 아니에요. 아픈 사람 상대로 그럴 생각은 전혀…!”“입 맞춰줘.”
E의 입에서 나온 말은 P가 귀를 의심하게 하였다. E의 얼굴을 보니, 제법 붉었다. 열 기운이 올라와서 그런 거였을까. E은 자신이 하는 말에 이상한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기를 옮기기 싫다면서 입을 맞춰달라니. 모순적이지만 E에게는 그 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 괜찮아요?”
“왜. 나랑 키스하기 싫어?”
“아니요. 전, 너무… 좋은데. 선배가 싫어할까 봐.”
“내가 먼저 요구했는데도?”
P는 뭐가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이런 모습의 E을 보는 것도 새로운 기분이었다. 아직 둘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E은 그렇게까지 P에게 의지하거나 애정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구는 것이 P에게는 귀한 일이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대신, 나중 가서 딴말 하기 없기.”
그래도 혹시 감기를 옮아버린다면 정말로 E이 속상해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뽀뽀만을 남기는 P였다. P는 E에게는 정말로 다정했다. 그가 이렇게나 다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 E이었다. E이 아니었다면 이러지 못했을 테니까. E만이 P를 이만큼 순정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 순애보였다.
“뺨에다가 해달란 말이 아니었는데.”
“다 나으면 더 진하게 해요, 우리. 데이트도 가고.”
“알았어. 근데, 나 좀 졸려.”
“주무세요. 자는 것만 보고 갈게요.”
“알겠어…. …아니, 그럴 필요 없으니까 이만 가도 돼.”
“제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P는 싱글벙글 웃었다. E은 뭐가 그를 그렇게 웃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렇지만 E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잠들지 않고 P와 더 대화하고 싶었다. 물론 몸은 따라주지 않았지만. 몰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 없었다.
“아, 자기 전에 약만 먹고 자요.”
“알았어.”
순순히 따르는 E을 보며 P는 웃었다. E이 아픈 것은 싫지만, 이런 E은 자주 보고 싶다는 욕심이 삐쭉 솟았다. 약을 먹고 자리에 누운 E을 보고서, P는 돌아가려 했다.
“으응…, P.”
_
눈을 뜬 E은 휑하니 비어버린 자신의 방을 바라보았다. 분명 P가 왔던 거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그의 온기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가 자리를 뜬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속으로 가늠하고 있자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P였다.
“선배, 지금은 좀 괜찮아요?”
“으응, 그러니까. 난 괜찮아. 한숨 자고 일어나니 좀 개운한 것 같아.”
“……”
“P?”
“아!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혹시 깨운 건 아니죠?”
“아니, 일어나자마자 받았어.”
“그래도 좀 더 푹 쉬세요.”
“알았어.”
“그럼 이만 끊을게요.”
평소보다 간략하게 통화하는 P를 보며 E은 의문이 들었다. 평소에 통화할 때는 되도 않는 주접을 부리며 온갖 말들로 사람의 진을 빼놓는데, 그가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아주 얌전하고 정돈된 용무를 마치고 끊은 것이었다.
약간의 서운함이 들었다. E은 이 감정이 서운함인지는 몰랐지만, 조금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E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잠결에 어떤 일을 했는지.
_
“으응…, P.”
“…선배? 깼어요?”
“보고 싶어…, 좋아해.”
“서, 선배!?”
“으응, P.”
“자, 잠꼬대하시는 건가?”
P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말은 E의 입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자신과 사귀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었던 선배의 직접 고백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붉게 물든 얼굴이 지나치게 예뻤다. E의 긴 속눈썹을 괜히 건드려봤다.
“흐음.”
P는 가녀린 숨을 내쉬는 E이 너무 아름다워서, 손을 대면 부서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P는 조용히 “잘 자요, 선배. 저도 좋아해요.”라는 말을 남기고서 급히 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자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P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멋대로 키스를 한다거나, 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P가 그렇게 인내심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E은 제법 멀쩡한 상태로 등교했다. P는 E을 보며 활짝 웃었다. E이 멀쩡해진 것이 기뻐서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콜록, 선배.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감기를 옮아버린 것도 기쁘다면, 중증일까? P는 그런 생각을 했다. E은 “그러니까 간호하러 안 와도 됐었는데. 감기 심해?” 하면서 걱정하기 일쑤였다. 그런 걱정을 받는 것도 기분이 좋아서, P는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감기를 도로 옮길까 걱정이 된 P는 E에게 조금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다.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은 어제의 E이 이해됐다.
“그래도 전 재채기는 안 하는… 에. 엣취.”
“…하아.”
“저 그래도 감기는 걸렸지만 멀쩡해요. 기침이나 재채기 좀 하는 것 빼고는요.”
“머리에 열은 안 나? 얼굴 이리 줘봐.”
E은 P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열이 따끈따끈한 것이, 미열보다는 높은 듯했다. 그것보다도 P는 E과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P는 급히 멀어졌다.
“가, 감기 옮아요!”
“이미 나았으면 바로는 잘 안 걸려.”
“그런 거에요?”
“감기를 정말 안 걸려봤구나.”
E은 픽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P를 데리고 보건실로 향했다.
“너, 약 아직 안 먹었지. 약부터 먹자.”
익숙하게 P를 돌보는 E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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