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곰을 좋아하세요?
"컥..."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이정환은 눈을 떴다. 오늘따라 유달리 꽉 끌어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센 것 같은데...
"윽, 조금만..."
"형?"
"그래, 숨 막히니까..."
"정환이 형?"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느낌에 이정환의 눈도 번쩍 뜨였다.
"형,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뭐?"
이정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애초에 내가 허공에 떠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양쪽 겨드랑이 밑에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손은 윤대협의 것이 분명했다. 시선을 약간 내렸더니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윤대협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내가 들려있는 게 맞다고? 고개를 휙 숙이자 보들보들한 갈색 털로 덮인 뭉툭한 솜방망이 두 개가 보였다. 갈색 털? 솜방망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현기증이 일어 왼손을 이마에 짚었다. 그러자 가볍고 작은 손이 톡 하고 얹혔다. 정말이지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정환은 왼손을 내린 다음 양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위아래로 뒤집어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올려도 보았다. 양발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없는 저 갈색 솜방망이 네 개가 제 양손과 양발이 맞는 것 같았다. 사실상 온몸을 버둥대는 이정환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애써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윤대협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푸하하하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하하. 저도 정말 궁금하네요. 어째서 형이 토리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몇 달 전 소속 팀이 큰 사건을 맡게 되면서 이정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자연히 잠복근무로 밤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이 늘어났다. 반면 윤대협은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일정한 회사원이었으므로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말았다. 그런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윤대협이 정환이 형이 없는 밤은 너무 외롭다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회식이 있던 어느 날 밤, 술이 제법 취한 상태로 한쪽 팔에 갈색 테디베어를 끼고 들어온 것이었다. 토리는 바로 그 갈색 테디베어에게 붙여준 애칭이었다.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도토리처럼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뒤로 이정환이 야간 근무로 집을 비운 날에는 꼭 토리를 옆에 두고 자곤 했다. 자기랑 닮아서 그나마 덜 외롭다나 뭐라나. 어떤 부분이 닮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인형을 들고 쫑알쫑알 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몸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부웅하고 떴다. 윤대협이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래."
사실 괜찮지 않아도 어쩌겠는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건지, 떠오르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은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고, 그야말로 개같이 굴러 얻어낸 크리스마스 연휴의 꿀 같은 휴가가 무용지물이 되게 생긴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크리스마스만큼은 꼭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 꼴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실망할 것이 분명한데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정환이 형, 저 일단 씻고 올게요. 좀 더 쉬고 있어요."
"그래."
윤대협은 베개에 자신을 내려놓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꼼꼼히 덮어준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반대편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 초유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이정환은 윤대협의 샤워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형. 일어나요."
"으음..."
"역시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래도 이젠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데이트하러 나가야죠."
데이트라는 세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데이트는 자기가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던 만큼 시간을 쪼개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둔 상태였다. 아까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정환은 자꾸만 새어나오는 한숨에 왼손으로 애꿎은 이마만 벅벅 문질렀다.
"정환이 형."
차분하게 자신을 부르는 윤대협의 목소리에 이정환은 고개를 들었다. 실망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러 가요, 데이트."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윤대협은 자신을 가방에 넣어주었다. 이정환은 윤대협의 가슴팍에 달랑달랑 매달려 가는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게다가 가끔 아이들이 귀엽다며 한마디씩 하고 지나갈 때면 정말이지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것도 데이트로 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계획한 데이트 일정을 소화하자고 제안한 것이 윤대협이었으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형, 여기예요?"
"그래."
가장 먼저 들린 곳은 꽃집이었다. 이정환의 이름을 대고 예약한 꽃다발을 찾았다. 커다랗고 빨간 포인세티아 꽃 사이로 3단 눈사람이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귀여운 꽃다발이었다. 눈사람 뒤에는 자그마한 카드가 꽂혀있었다. 카드를 꺼내어 읽은 윤대협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꽃다발을 들고 거리로 다시 나온 윤대협이 빙긋 웃으며 이정환의 귓가에 작게 고맙다고 속삭였다. 이정환은 목덜미까지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손을 애써 붙들었다.
다음은 백화점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외벽의 화려한 루미나리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백화점을 빨간 선물 상자에 넣어 초록색 리본으로 포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트리에는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혹은 연인들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윤대협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저기요."
"네?"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네."
윤대협은 트리 앞에 가서 선 뒤 이정환을 가방에서 꺼내 한쪽 팔로 안아 들고는 남은 한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사진을 다 찍어주고 휴대폰을 건네는 엄마 뒤에서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그 곰돌이 어디서 샀어요?"
"저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돼요?"
아이들의 말을 듣던 이정환은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평소에는 아무래도 자신의 인상 때문인지 아이들이 잘 다가오지 못하는 편이었다. 얼굴만 보고도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도 있어 난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을 만지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곰인형으로 화젯거리가 되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어디서 샀는지는 아저씨도 기억이 안 나네. 그리고 미안한데 안아보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왜요?"
"이건 아저씨가 소중한 사람한테 선물로 줄 거라서. 예쁜 옷을 입혀서 주려고 옷을 사러 가는 길이었거든."
"그렇구나..."
"대신 곰돌이랑 인사할까?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곰돌이 빠빠이."
"아저씨도 빠빠이."
윤대협이 이정환의 양손을 쥐고 대신 흔들어 주었다. 아이들도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오늘 참 여러 번 얼굴을 붉히게 되는구나. 얼굴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난로고 뭐고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윤대협은 뿌듯한 표정으로 이정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우여곡절 끝에 들어선 백화점의 내부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다. 캐럴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잠시 내부를 둘러본 후 둘은 한 향수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에도 이정환이 예약해둔 선물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잠시 기다렸다 직원이 건네주는 작은 가방을 받아들고 나왔다. 그런데 저쪽 편에 테디베어를 파는 매장이 보였다. 윤대협이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한 말은 지켜야겠죠?"
공교롭게도 그 매장은 테디베어는 물론 테디베어용 옷과 소품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토리의 탈을 쓴 이정환에게 옷과 소품을 이리저리 대어보던 윤대협은 팔짱을 낀 채 엄지와 검지로 턱을 괴고 고민하더니 중앙에 눈사람이 있는 어글리 스웨터를 골랐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친 다음 가격표를 떼어달라고 해 곧바로 스웨터를 입혀주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잠시 서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한장 찰칵 찍고는 이정환을 다시 가방 안에 쏙 넣었다.
"다음은 호텔이랬죠?"
"...그래."
호텔은 백화점과 그렇게 먼 것은 아니었지만 거리가 붐비다 보니 걸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정환이 치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다닌 탓에 더 늦어졌다. 그나마 일찍 나와서 여유로웠던 것이 다행이었다. 레스토랑은 꼭대기 층이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점점 멀어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정환은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즐거워 보이는 것이 다행이긴 했지만 마지막 일정이야말로 함께해야 했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이정환으로 예약했는데요."
"네, 이정환님으로 2분 저녁 8시 맞으실까요?"
"음, 네. 그런데 일행이 사정상 못 올 것 같은데 저 혼자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아...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창가 자리로 안내받은 윤대협은 반대편 의자에 향수와 꽃다발을 내려놓고 가방을 올린 다음 그 위에 이정환을 앉혀주었다. 잠시 기다리자 코스 요리가 차례차례 서빙되어 나왔다. 서걱대는 나이프 소리,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 쪼르륵하고 와인을 따르는 소리가 이정환의 귀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이정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은 여기가 유일했다. 창 밖의 아름다운 야경에 비친 윤대협의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런 이정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대협은 조용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로비로 내려가 체크인을 한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왔다.
"형, 그럼 저는 좀 씻고 올게요."
"그래."
윤대협은 짐을 쇼파 위에 내려놓고 이정환을 침대에 앉혀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과 똑같은 듯 약간 다른 풍경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윤대협이 금방 씻고 나왔다는 점이 달랐다.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베개를 베고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는 이정환을 제 얼굴 앞으로 쓱 끌어당겼다. 이정환은 윤대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아?"
내내 가슴에 걸려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몇 달 동안 바빠서 같이 느긋하게 보낼 시간도 별로 없었고, 그만큼 이번 데이트를 기대했을 텐데, 이런 꼴로 이렇게 보내게 해버리고 말았는데, 정말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거냐고. 그 말이 모두 담긴 세 글자였다. 윤대협은 입술을 오므리고 이정환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안 괜찮을 게 있어요? 같이 사진도 찍었고, 선물도 받았고, 맛있는 식사도 했고, 이렇게 야경이 멋진 호텔에도 왔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제가 형을 언제 품에 넣어서 다녀보겠어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저는 나름대로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아서 좋은데요?"
"뭐?"
"언제였더라...유독 잠이 안 오던 날이 있었어요. 그때 토리를 붙들고 하소연했죠. 형이 없으니까 쓸쓸하다. 형이 딱 너만 하면 아무 데도 못 가게 꼭 안아서 붙들어 놓을 수 있을 텐데 하고요. 뭔가 그게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아서 재미있었어요. 정말-"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윤대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을 끌어안은 탄탄한 두 팔은 이정환의 것이 분명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원래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미안해. 이제는 그래도 사건이 끝났으니까 좀 한가할 거야. 하고 싶었던 거, 미뤄뒀던 거 다 하자."
"으음, 무르기 없기예요."
"...그래."
순간 서늘한 느낌이 이정환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역시 이 모습이 좋네요."
"아니,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하, 어쨌든요."
여느 때보다 조금 특별한 크리스마스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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