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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me, Darling

랜샨 역할 반전 AU + 오메가버스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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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기 짝이 없는 연회. 샨은 이런 것들이 지겨웠다. 중상류층 알파들의 친목이니 사교니 하는 것들은 샨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차라리 오메가들을 샨의 거처로 남녀노소 따지지 않고 불러 들여 노는게 더 즐거웠을 테다. 샨은 딘이 이해가지 않았다. 어차피 알파들이란 자기 잇속밖에 생각하지 않던가. 친목을 다지고 교류를 한다고 한들 여기 모인 대부분은 미어가가 가진 힘이 약해지면 물어뜯으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짓거리들이 다 의미 없는게 아닌가… 딘에게 샨은 골칫거리 동생이었다. 오메가였다면 진즉에 다른 알파 집 자제에게 홀랑 시집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순순히 갈 샨은 아니었지만. 샨은 몰려오는 하품을 참지도 않고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딘은 뭘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웃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지? 그런 시시콜콜한 감상을 하며 두리번거리다 처음보는 낯을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친 이는 시선을 피할 법도 한데 되려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옆자리가 비었다면 앉아도 되겠는가?" 

훤칠한 키와 단정한 용모. 어느정도 나이가 지긋하게 든 듯 하얗게 센 백발. 호박과 같이 빛나는 금빛 눈.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와 흠잡을데 없는 넥타이 매듭. 흑갈색 중절모와 단장. 그리고… 두툼한 아래까지. 그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본 샨이 작게 휘파람을 불며 예쁘게 웃었다.

"그럼요, 신사님."

샨은 처음으로 이 연회장에서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상대를 찾았다. 

Kill me, Darling

브랜든은 왜 자신이 이 상황에 처했는지 차분히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미어가의 둘째 도련님과 안면을 튼건 좋았다. 어차피 이 분야의 일을 맡다보면 수도없이 보는 것이 엘리트 가문들의 자제다. 미리 얼굴을 알아두면 의심을 사는 일은 덜할테니 그 편이 더 안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수한게 있다면 그 둘째 도련님이 브랜든에게 큰 호의를 가졌다는 점일까. 물론 브랜든은 어떻게 하면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샨이 브랜든에게 보이는건 호의라기보다는 이성적인 호감에 가까웠다. 짧은 티타임으로 끝날 수 있었던 대화는 샨의 끝없는 질문으로 계속 늘어졌고 어딜 가든 따라와 말을 걸어댔다. 자신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임무를 미룰 수는 없어 적당한 핑계를 대며 그를 떨어뜨려놓은 뒤 타겟을 찾아 방으로 들어갔다. 불청객에 화난 타겟과 짧은 실랑이를 벌인 뒤 제압해 타겟의 입에는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게 천으로 제갈을 물려 뒤에서 꽉 잡아냈다. 그리고 소음기를 단 총구가 타겟의 이마 한 가운데에 위치했다. 이제 방아쇠를 당기고 자신의 흔적을 지운 뒤 소란스러운 틈을 타 인파에 섞여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샨이 방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저 애송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사님?"

탕! 샨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브랜든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브랜든이 잡고 있던 천을 놓자 거의 들려있던 타겟은 피를 흘리며 털썩 쓰러졌다. 이게 무슨…! 생리적인 공포감에 뒷걸음질친 샨의 움직임을 놓칠 브랜든이 아니었다. 타겟을 놓자마자 샨의 멱살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 잠갔다. 퇴로를 차단한 브랜든은 총구를 이번에는 샨의 정수리에 겨누었다. 

샨은 억센 손으로 잡혀 거의 내동댕이쳐진 탓에 피아노에 머리를 부딪혔다. 시큰하게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끙끙대다 바닥에 보이는 피웅덩이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잠깐이면 자신의 매력에 넘어와 지금쯤이면 맨살을 맞대야하는게 정상이었다. 상대가 알파라고 해도 말이다. 정상이라면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니면 아예 성욕이 없든가. 브랜든이 다정한 듯 하면서도 제 수작질들 전부 쳐내기에 악이 바쳐 비장의 무기인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꼬셔보려고 했던 것이다. 샨은 무언가가 제 머리에 닿았다는걸 깨닫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검은 총신이 제 앞에 선명하다. 총구를 마주하고 있으니 침 한번 삼키기도 힘들었다. 총구 너머로 보이는 브랜든의 시선은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웃음기 하나도 없이 감정이 내비치지 않는 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신사님. 이렇게까지 내 마음에 들 필요는 없는데. 샨은…… 아까보다 더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무 말도 안할게요." 

브랜든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 자를 죽이면 미어 딘까지 죽여야한다. 그랬다가는 위험부담이 커진다. 미어 딘은 자신의 피붙이를 끔찍히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것치고 표현을 안하는 탓인지 이 둘째 도련님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브랜든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했다. 그렇다고 샨을 죽이지 않으면 목격자가 생긴다. 완벽한 처리를 자부심으로 삼는 브랜든에게 목격자가 남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종 변수로 인해 목격자가 생겼을 때 반응은 전부 같았다. 덜덜 떨면서 자비를 빈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것은 샨의 떨리는 목소리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희열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신사님, 내가… 도와줄게요."

브랜든은 결정했는지 겨눴던 총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게 브랜든이 느낀 샨에 대한 감상이었다. 


브랜든은 샨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이 철없는 도련님은 그 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시체를 숨기기까지 했다. 두려움을 아예 못 느끼는 부류인가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서지 않으면 그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겨누었던 총구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건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브랜든이 자신만은 해치지 않을거라는 믿음. 그래, 믿음에 더 가까웠다. 브랜든은 샨의 고백을 다섯번이나 거절했다. 처음에는 돌려말했고 그 다음에는 설득했다. 세번째부터는 매정하게 거절했다. 이러면 알아서 거리를 둘만 한데도 그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브랜든의 환심을 사기위해 샨이 벌인 행동은 브랜든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 뿐이었다. 품에 한아름 안길 정도로의 꽃다발과 그가 나름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캣콜링, 딱보기에도 비싸보이는 명품 시계와 같은 선물 세례가 쏟아졌다. 누가보더라도 미어가의 둘째 도련님이 자신에게 꽂혀있다는 걸 면면히 드러내는 꼴 아닌가. 그 탓에 별로 눈에 들고 싶지 않았던 미어 딘의 시선까지 받았다. 샨은 몰라도 딘의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 과감히 행동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브랜든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숭아 페로몬 향수를 뿌리고 온 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시치미를 뚝 뗀 채로 찻잔을 홀짝였다. 분명 어제 좋아하는 향이 뭐냐는 말에 복숭아라고 대답했었다. 포기를 모르는 건가.

샨은 자신이 오메가가 아닌 걸 통탄스러워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고지식한 신사님은 어떻게 해도 꼬셔지지 않았다. 물론 일반 오메가였어도 그의 환심을 사는건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켜본그는 오메가의 페로몬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브랜든과 만난 오메가는 페로몬이 진했는데도 말이다. 그건 일반 오메가의 얘기고. 오메가들 중에는 간혹 자신의 페로몬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이가 있다. 그런 이들은 오히려 알파를 휘어잡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샨은 자신이 오메가였다면 당연히 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다면 저 신사님을 그대로 자빠뜨릴 수 있는건데! 겸사겸사 각인도 해버린다면 내뺄 생각은 하지 않겠지. 알파란 각인된 오메가를 아껴주는 법이다. … 종종 그렇지 않은 알파도 있지만 어느정도 지위가 있는 알파라면 자신의 오메가를 챙겼다. 그게 체면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신사도 체면을 꽤 생각하는 것 같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향이 좋구만."

"복숭아향을 좋아한다면서요.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 신사님?"

드문 칭찬에 샨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게 눈에 띤다. 브랜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찻잔을 홀짝였다. 

"내 전부인이 그 향을 가지고 있었다네. 이제는 사별했지만 말일세."

샨은 찻잔을 놓칠 뻔 했다. 지금까지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브랜든은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확실한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도 못하면 지금까지 뭘 배웠냐고 딘이 길길이 날뛸게 분명했다. 이미 각인한 상대가 있었으니 더이상 수작부리지 말라는 완고한 뜻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거다. 그것도 가장 강한 수로 틀어막혔다. 샨은 주먹으로 한 대 뒤통수를 맞은 것 마냥 얼얼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는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순간 브랜든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당연했다. 그는 킬러니까 여기에 온 이유도 타겟을 처리하러 온 걸테다. 겸사겸사 자신과 미리 어울리고 있으면 의심을 덜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어울려준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브랜든은 타겟의 도착과 함께 죽상인 샨의 얼굴을 마주해야했다. 너무 강하게 거절했나. 팍 기가 죽은걸 보니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브랜든은 그 안타까움도 잠시 타겟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번 타겟은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만큼 좋은게 없지. 브랜든은 샨에게 손을 내밀며 살짝 상체를 숙였다.

"함께 춤 추지, 샨."

샨은 천연덕스러운 그가 미웠다. 선을 넘지 않을테니 넘보지도 말라고 매몰차게 거절했으면서 자신이 가진 지위와 이미지만큼은 유용하게 이용하는 그가 얄미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게 사랑이라고 하던가. 결국 샨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랜든은 익숙한듯 홀의 중앙으로 샨을 이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부드러운 스텝이 샨을 리드했다. 샨이 이런 춤에는 서툴다는 걸 아는지 망신을 사지 않게 스텝을 제대로 밟도록 이끌어주면서 샨 너머를 힐긋인다. 아마도 타겟의 움직임을 살피는 거겠지. 샨은 홀의 중앙에서 누군가와 발맞추어 춤을 춘 적이 없었다. 기회가 있더라도 부러 상대에게 무안을 주는 것을 즐겼던 성격탓에 딘이 여는 연회에서는 하지도 못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춤신청을 하려고 하면 딘이 상대를 채가곤 했던 탓이다. 샨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그를 바라봤다. 가까운데, 멀다. 닿는데, 닿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마주 바라오는 날이 오긴 할까? 그를 고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확고한 이의 마음을 바꾸는 것도 더 이상은 못할 짓이다. 포기할까. 더없이 익숙한 왈츠가 끝나자마자 고지식한 신사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을 바라봤다. 당황한 제 시선이 흩어지려는 찰나 그가 입을 맞추었다. 샨은 알고 있었다. 이런 행동마저 그에게는 타겟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수단이라는 것을. 이렇게 다정히 입맞춰준다고 한들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샨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이내 떨어지는 입술에 브랜든의 목에 팔을 둘러 다시한번 입맞춘다. 이럴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잠깐은 주춤하던 그가 제 허리에 팔을 감아온다. 벌려진 입 틈 사이로 축축한 살덩이가 서로 얽힌다. 아무렴 어때, 나는 이 사람이 죽을 만큼 좋았다. 맞댄 입술이 떨어지면서 감은 눈을 뜨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한 그가 샨을 동정한다.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죄책감? 아니면 안타까움. 어쩌면… 애정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한껏 담은 그가 샨을 바라봤다. 샨은 그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신사님." 

"……."

"내가 정말로 랜에게 방해가 되고… 거슬린다면 날 죽여요." 

"…자네."

"아프지 않게 해줄 수 있죠?" 

브랜든은 한참 말이 없다가 샨의 이마에 짧게 입맞추고 놓아주었다. 그는 대답을 회피하듯이 타겟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간다. 샨은 홀 중앙에 서서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붙잡아봤자 그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화끈한 귀를 매만진다. 분명 사별한 전부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 곁은 비어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각인은 꼭 한번만 해야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게 꼭 오메가에게만 해야한다는 법도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그리고 샨은 그 기회를 놓칠 생각따윈 추호도 없었다. 당신이 내 감정을 그저 어린 날의 치기로만 본다면 그러지 않게 만들어주겠노라고. 

브랜든에게 진한 복숭아 향이 베었다. 아주 짙고 달달한 복숭아 향이. 


딘은 골치가 아팠다. 사교계에서는 연이은 살인 사건으로 난리가 났다. 미어가의 저택에서도 한 번 있었던 것도 한 몫했지만 그보다 더 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든 것은 범인이 샨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짙은 복숭아 향이 벴고 그 날 복숭아 향을 풍겼던 것은 샨 밖에 없었다는 이유였다. 우스운 이유다. 왜 그 향때문에 샨이 범인으로 몰리는가? 샨의 페로몬은 복숭아 향이 아니었다. 향수를 뿌리고 나갔다고 한들 오히려 그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한 꼼수라고 생각하는게 더 타당했다. 대체 얼마나 강한 향수를 쓴 거냐고 샨을 타박했지만 샨은 묵묵부답이었다. 문제는 범행을 부인하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최대한 자신이 막아내고는 있다지만 본인이 저리 입을 다물어버리면… 샨은 구속될 것이다. 피해자들이 모두 우성 알파이기에 가중 처벌을 받아 사형까지 내려질 확률이 높았다. 입술을 까득 문다. 대체 왜 동생은 입을 열지 않는 거지? 딘의 속은 어느 때보다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샨은 어리석기보다는 영민한 아이였다. 다만 조금 성격이 엇나가 있어 예쁨을 받기보다는 미움을 샀을 뿐. 그에 비해 딘은 영민하기보다는 우직했고 정도를 알았다. 어른들에게 숙일 줄 알았으며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샨은 그런 딘의 비호 아래 제멋대로인 동생으로 컸다. 딘의 그늘이 아니었다면 샨도 딘처럼 굴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의 어른들에게 허리를 숙이고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사교계에 나서 시덥잖은 알파들과 교류하는 그런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샨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딘이 전부 그의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만 이번 일은 딘 혼자서 해결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인 사건이라니, 심지어 여러번이다. 수준을 보아하니 전문 킬러의 짓임이 분명한데도 용의자가 엘리트 가문의 자제라면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샨도 사격 솜씨만큼은 실력이 좋다고 사교계에 자자했으니 말이다. 샨은 자신이 갇힌 감옥을 둘러보았다. 좁지만 다른 감옥과는 다르게 푹신한 침대와 TV, 그리고 따로 떨어진 화장실까지 겸비되어 있는 걸 보면 호텔인지 감옥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TV라도 틀까 싶어 리모콘을 드는 순간 딘에게서 면회 요청이 들어왔다며 간수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가기 싫었지만 면회를 받아주지 않으면 아예 감옥 앞에서 면회를 하게 될 것이다. 테이블에 수갑이 고정된 채로 딘과 마주앉았다. 

"감옥은 좀 편하더냐."

"아주 호화롭던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가고 싶지 않던걸?"

딘의 미간이 보기좋게 찌푸려졌다. 샨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금세 따분하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네가 산 향수의 판매자를 잡아와 진술 준비를 시켜놨다. 그리고 네 죄를 뒤집어 쓸 새 용의자도 준비해놨어. 너는 그냥 네가 하지 않았다고 사실대로만 말하면 돼. 그러면 미어가에서 전부 덮어줄 수 있어, 동생아."

"흐음."

"나는 네가 그 사람들을 죽였을거라고 믿지 않아. 네가 죽였다면 처리가 이렇게 완전하진 않겠지. 어쩌면 그 중 한명 정도는 네가 죽였을지도 모르겠다만……. 너도 알다싶이 나는 그런걸 신경쓰지 않아. 미어가에 먹칠하지마, 샨. 그게 가장 중요해."

"이봐, 형. 불쌍한 우리 형……. 형은 그냥 어른들이 무서운 거잖아. 아, 형도 어른이지? 그럼 그 노친네들이라고 말하지 뭐."

"샨!"

"내 말이 틀려?"

딘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으나 숨을 길게 내뱉으며 가까스로 진정했다. 여기서는 딘이 샨을 손찌검하진 못하리라. 아무리 면회실에서 사람을 물렸다고 해도 보는 눈은 있으니까. 그건 미어가의 체면과도 직결된 문제다. 딘은 한참 대답을 못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샨을 냉랭히 내려다보았다. 

"시키는대로 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을테니까."

딘은 샨이 뭐라 하기도 전에 면회실을 빠져나갔다. 샨은 테이블에 고정된 수갑을 팽팽히 당기며 손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잔뜩 어이없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딘은 항상 제멋대로였다. 자신의 의사따위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거지같은 미어가만 잘 되어간다면 그걸 가장 좋은 결과라고 믿는 멍청이니까.  간수가 딘이 나간 문으로 들어와 샨을 다시 감옥으로 안내했다. 다음날 재판에서도 샨은 절대 딘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관되게 자신이 했다는 진술을 했고 딘은 관자놀이를 붙잡으며 재판장을 나갔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뒷목잡고 쓰러졌었나? 기억이 안나네. 그러거나 말거나 샨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총신으로 머리를 후려쳐진 남자가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를 들쳐맨 브랜든은 쓰지 않는 창고로 끌고 가 옷을 바꾸어 입었다. 아무리 브랜든이라고 해도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건 아닌데다가 샨이 구속되어있는 곳은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으니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위장을 끝낸 브랜든은 간수 모자를 꾹 눌러쓰고는 거울 앞에 섰다. 쓰러진 남자와 별 다를 바 없는 체격과 외관으로 꼼꼼하게 살피지 않는 한 외부인이라고 알아차리기에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그라도 말이다. 총신은 허리춤 뒤에 숨기고 창고를 나섰다. 

청부살인 일을 시작한 이래로 교도소에 들어온 적은 손에 꼽았다. 그때도 의뢰를 위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위험부담이 컸던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보수금이 컸기에 감행한 일이었다면 지금 브랜든은 단순히 그를 만나고 싶었다. 브랜든은 샨이 자신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금방 누명이 벗겨지리라 믿고 있었다. 샨의 뒷배는 꽤 큰 가문이었고 그의 페로몬이 복숭아향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금방 잠잠해질 줄 알았던 혐의는 그가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이라며 진술해버리는 바람에 불이 붙었다. 브랜든은 샨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판결이 날 때까지 단 한번도. 브랜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목숨이 달린 일에는 연인마저 내버리는 것들이 사람이라는 족속이 아니던가. 심지어 자신마저도, 그 사랑을 너무 쉽게 보지 않았던가. 샨을 감시하는 간수였기에 잠입은 꽤 수월한 편이었다. 이대로 복도를 걸어가 지하로 내려가면 그가 있는 감옥이 나올 터다. 갈 때마다 마주치는 간수들에게 경례를 간단히 한 브랜든은 입구 앞에서 듬직한 사내 앞에 가로막혔다. 

"뭐야? 퇴근하지 않았나, 매튜?"

약간의 경계와 의구심이 혼재하는 질문에 사내의 가슴팍을 눈치채지 못하게 힐긋였다. 데이비드 윌리엄. 변장한 사내와 어느정도 친분이 있는 사내였다. 브랜든은 모자를 꾹 눌러 쓰며 목소리를 변조했다. 

"이봐, 데브. 이제 곧 죽을 목숨 아닌가? 아무리 정해졌다고 해도 사형집행일이 가까워지면 초연하던 죄수도 갑자기 울고불고 난리치는 법이지. 시끄러우니 조용히 시키라고 야근하랍신다."

"하하! 그건 그렇지. 그러면 오늘 술은 글렀겠군!"

"빌어먹을, 이 직장 조만간 관두든가 해야지."

"난 자네의 그 말을 7년간 듣고 있다고? 정말 때려치긴 하는 건가?"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면서 데이비드는 브랜든의 몸수색을 설렁설렁했다. 아마 '매튜'라고 불리는 사내에 대한 신뢰였겠지만 브랜든에겐 좋은 기회였다. 숨겨놨던 총신을 들켰다면 큰 소란이 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온 브랜든은 지하로 내려갔다. 이 아래에는 독방만이 존재했다. 샨도 독방에 갇혀있었다. 특히 사형수라면 입구와 가장 먼 독방에 배정되는 법이다. 브랜든은 샨의 독방 앞에서 멈춰섰다. 보안 키카드를 패드에 대자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신원이 뜨고 문이 열린다. 샨에게는 지독하게 봤던 매튜라는 간수가 들어온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는지 브랜든이 들어서는 발 소리를 들어도 입구를 등지고 선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브랜든은 문을 닫고 CCTV가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지 못하게 CCTV 근처에 EMP를 설치했다. 영상은 나오겠지만 소리는 지직거리거나 전해지지 않아 감시하는 이들의 의심을 덜 살 것이다. 보통 간수들과 죄수는 별다른 말을 섞지 않으니. 브랜든은 샨이 머물고 있는 독방을 슥 둘러보았다. 웬만한 호텔 방처럼 꾸며진 독실은 감옥같진 않았다. 식탁에 올려진 식판에는 음식이 그대로였다. 뒤돌아있는 몸이 살짝 야윈걸 보면 그가 음식을 거부한 듯했다. 브랜든이 근처로 다가가 침대를 점검하는 척을 하며 상체를 숙이자 샨이 먼저 말을 걸었다. 

"기다렸어요."

침대 위에서 벽만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브랜든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먼저 말을 건네려고 했던 브랜든이 오히려 말이 막혔다. 변장한 간수와 친분이 있던 데이비드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샨이 그를 먼저 알아봤다. 뭐부터 물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자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양 뒷말을 이었다. 

"좀 늦었네요. 내일이 사형집행일인데, 하마터면 작별인사도 못하고 갈 뻔 했잖아요. 음? 멋진 얼굴 다 가리고 그 못생긴 간수 얼굴로 덮은거예요? 으, 성형수술을 한건 아니죠?"

변함없이 제멋대로 재잘대는 샨의 말에 브랜든은 자신도 모르게 옅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일이 자기의 사형집행일인데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넬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네는 변함이 없구만. 나를 어떻게 알아봤나? 위장에는 깨나 자신이 있는데 말일세."

"신사님이잖아요. 못 알아볼리가 없는걸요."

"자신감이 과하군."

"칭찬 잘 들을게요."

샨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샨은 원망이라든지 두려움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그가 죽기 딱 하루만 남겨둔 사형수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그의 앞에는 누명을 쓰게 된 원인이 떡하니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브랜든은 CCTV쪽에 설치해준 EMP를 바라봤다. 그 위에 타이머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3분. 3분 안에 할 말을 전부 마쳐야했다. 샨도 브랜든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확인했다. 영리한 그는 우리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딱 3분밖에 안된다는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브랜든의 시선이 샨을 향하고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넬 찾아오지 않은건 미어 딘이 자넬 쉽게 꺼내줄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런데 자네는 누명을 부인했지. 멍청한 짓이야. 왜 그랬나? 왜 내 죄를 자네가 뒤집어쓰는가?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텐데도."

"제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면요?"

"…어째서 그랬지?"

"신사님, ……신사님.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이거 하나를 몰라요? 필요없어요. 딘의 그늘도 그 지긋지긋한 가문도 내가 알파이기 때문에 올라온 자리, 화려한 옷, 넓은 집… 전부 다요."

샨은 바닥에 널브러진 쇠사슬을 바라보며 오른발을 쭉 들었다. 그의 발목에 걸려 주르륵 딸려오는 쇠사슬이 카랑카랑한 소리를 냈다. 

"모든게 날 이렇게 옭아매고 끌어내려요. 별반 다를거 없죠. 감옥에 들어오기 전이나 지금이나. 근데, 내가 원한게 딱 한가지 있어요." 

샨의 시선이 다시 브랜든에게로 돌아왔다. 거의 울듯한 얼굴이 브랜든의 눈동자 위로 비쳤다. 

"그게 당신이에요, 신사님."

"……."

"포기하기 싫었고,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렇게 날 찾으러 왔잖아요. 기다렸어요, 많이."

"……샨."

"죽여주세요, 신사님.(Kill me, Darling)" 

샨은 이제 체념한 듯 옅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브랜든이 그의 고백을 들어주지 않을거라는건 알고 있었다. 벌써 다섯번이나 차였지 않았나. 열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고 그렇게 들이댔건만 사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걸 포기한 삶에서 마지막 엔딩만큼은 사랑하는 이에게 죽을 수 있다면 그건 꽤 낭만적이지 않을까. 브랜든이 총을 챙겨왔다는걸 샨은 알고 있었다. 그가 끔찍히 사랑하는 이는 총을 한시도 몸에서 떼놓은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챙겨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이 자신의 목숨을 끊어놓겠지. 철컥거리며 방아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쯤이면 자신의 심장을 그가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앙-! 샨은 발포음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부근을 떨리는 손으로 더듬었다. …이상하게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번쩍 뜬 샨은 놀란 눈으로 브랜든을 바라보았다. 샨의 발치에 늘어져있던 쇠사슬에서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 뿌연 연기가 옅게 올라왔다. 지금 쇠사슬은 쏜건가? 어째서? 소음기를 장착한 총구에서 올라오는 화약을 가볍게 불어 날려보낸 브랜든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죽었네."

"아니……."

"방금 내가 쏘지 않았나."

영영 모르겠다는 눈으로 브랜든을 올려다보던 샨은 그의 총구가 CCTV를 향한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말리기도 전에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CCTV 잔해가 후두둑 떨어지며 경고음이 삐-하며 울리기 시작한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판단하기도 어려운 그의 돌발행동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샨에게 브랜든이 손을 내밀었다. 

"사랑은 받아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네. 아직 내겐 자네가 한참 어리게 느껴지니 말일세. 하지만이 늙은이가 자네를 짙은 그늘 밖으로는 꺼내 줄 수는 있지. 자네의 목숨이 필요없다면 내가 가져가겠네. 나에게 줄텐가? 아니면 그늘 아래서 죽을텐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더 앞으로 손을 뻗어냈다. 고백을 받아준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쇠사슬을 쏜 덕분에 샨은 어디에 묶여있지도 않으니 손을 잡지않고 그냥 브랜든을 지나쳐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브랜든의 말을 듣던 샨은 방울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뭐라할 것도 없이 바로 브랜든의 손을 맞잡았다. 브랜든은 바로 샨을 데리고 감옥을 나선다. 샨은 흐려진 시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뛰고 숨고 다시 뛰었다. 샨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 다시는 미어 샨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우성알파 미어가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껍데기로 누려왔던 모든걸 버려야한다는 걸. 총소리가 나고, 맨발이 아프고, 넘어지는 바람에 살갗이 쓸린다. 가쁜 숨을 고르고 뿌연 시야를 겨우 들면 가까운데서 혈향이 난다. …어딘가 빌어먹게 아프더라니. 샨은 붉게 물든 복부를 내려다봤다…… 식음을 전폐했던 탓인지 떨어진 체력에 끔찍한 두통과 함께 눈꺼풀이 계속 감긴다. 아, 안되는데. 뛰어야하는데. 샨! 정신차리게! 급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웅웅 울렸다.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떻게 된거지? 분명 쫒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주변이 무척 고요했다.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자 벌떡 침상에서 일어났다가 복부에서 찌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몸을 옹송그리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으……"

아프다. 진짜로 엄청… 아팠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아픔도 아팠지만 침상에서 떨어져 부딪힌 곳도 욱신거렸다. 그러고보니 쫒기던 와중에 총을 맞았었지. 이 고통이 선명한걸 보면 적어도 꿈은 아닌것 같았다. 바닥에서 앓는 소리만 내며 기고 있을 즈음 문이 벌컥 열리며 브랜든이 들어와 그를 살폈다. 다시 침상으로 올려 눕히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자네는 일어나자마자… 그래도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네."

"…우리, 혹시 죽었어요? 여기 혹시 천국이거나 그런거 아녜요?"

"이젠 헛소리도 하는군." 

한숨을 제대로 쉰 브랜든이 붕대를 세게 감았다. 샨이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자 꼼꼼하게 마무리하고는 침상을 고정시켜놓은 와이어를 점검했다. 차츰 아픔이 가라앉자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볼 재간이 생겼다. 좁은 방에 창문은 죄다 커튼을 쳐댔다. 그리고 간이 침대로 보이는 이 침상은 단단하게 와이어로 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속 바닥이 움직이는 거 같은데… 이거 배 위인가? 

"어떻게 된 거에요?"

"뭘 말인가?"

"배에 총을 맞은 뒤로 쓰러져서 기억이 끊겼거든요."

가까스로 침상에 걸터앉은 샨 옆으로 브랜든이 마주섰다. 벌써부터 일어나는게 못마땅한 모양이었으나 도로 눕히지는 않았다. 구급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낸 브랜든이 아까 떨어져 살갗이 벗겨진 부분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도망치는 중일세. 자네나 나나 꽤 유명인사가 되지 않았는가."

"아야… 배를 타고요?"

"그렇지."

"배도 있었어요?"

"언젠가는 영국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르잖나."

"철저하네요."

샨의 자잘한 상처를 봐주던 브랜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은 해봤나?"

"뭘요?"

샨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제법 귀여운 밴드를 붙여 마무리를 한 브랜든이 침상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새로운 이름 말일세. 미어 샨은 죽었으니 새로운 이름을 써야지. 그 편이 추격을 따돌리기에는 좋을걸세."

"새로운 이름……. 잘 모르겠는 걸요."

미어 샨은 죽었다. 그 문장이 샨을 생각이 빠지게끔 했다. 물론 샨은 살아있었다. 배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미어 샨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일테니 새로 불릴 이름을 정하라는 것일터다. 샨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브랜든을 힐금 바라봤다. 이름을 지어주면 안되냐는 말을 하면 거절하려나. 그 순간 눈이 마추쳐 괜히 시선을 돌리고 만다. 그러기가 무색하게 브랜든이 그를 불렀다. 

"영국 근해다보니 아직은 자네가 밖으로 나가선 안되지만 밖은 볼 수 있지 않겠나. 이리오게. 오늘은 날이 화창하다네."

말을 끝내고 브랜든은 어둡게 쳐져있던 커튼을 걷었다. 걷는 대로 눈부신 햇빛이 샨의 살갗에 닿는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너른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며 펼쳐져있다. 작은 선실, 창고를 개조한건지 이리저리 널려있는 짐들 사이에 자리한 침상과 의자는 불편했지만 창밖은 한없이 밝았고 옆에는 그가 원하던 사람이 곁에 있었다. 브랜든은 곁으로 다가온 샨이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애써 덮어두고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해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반짝거려 간간이 눈을 찌푸렸지만 샨의 입가에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창밖의 풍경에 눈을 뜨지 못하는 그를 바라본 브랜든이 샨의 시선을 따라 넘실거리는 바다로 향했다. 샨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만지면서 작게 속삭였다. 

"오늘부터가 자네의 두번째 삶이구만. 생일 축하하네, 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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